꿈꾸는 자 잡혀간다 실천과 사람들 3
송경동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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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연극치료를 했습니다. 올해 가장 많이 한 동작을 해보라 해서 팔을 활짝 벌려 흔들었습니다. 올해 가장 많이 한 말을 해보라는데 '고맙습니다'하며 목이 메였습니다. 가장 고마운 사람이 누구냐 묻는데 '감옥에 있습니다' 그말을 미처 못끝내고 울었습니다. "

-김진숙 님의 트윗에서

 

35미터 상공, 자신의 동료가 129일을 버티다 목을 맨 그곳에서 309일간을 서성이며 다리한번 제대로 쭉 펴본 일 없이 지낸 김진숙은 지난해 가장 많이 한 말이 '고맙습니다'였다고 했다. 흔히 밑바닥이라고 불리우는 다양한 노동판을 떠돌며 십대 후반과 이십대 초반을 보낸 그녀는 급기야 스믈여섯의 나이에 해고자가 되었다. 쥐똥이 섞인 보리밥을 도시락으로 내주던 조선소에서 용접 불똥이 튀어 뺨이 얼기고 설켜도, 너덜너덜해진 작업복을 테이프로 기워입었어도, 감전사고로 혈관이 다 터져죽는 동료를 보고도, 미끄러져 바다에 빠져죽는 동료를 보고도, 그것은 개인의 부주의 탓이였지 회사의 안전불감증, 노동자학대가 아니었다고 증언할 수 밖에 없었다는 그녀는 그래도 그나마 아침마다 일하기 위해 출근할 수 있고, 월급을 탈 수 있는 직장이었기에 언제 폭발할지도 모르는 탱크 안에서 다시 용접을 할 수 있게 되기를 투쟁하다 빨갱이로 찍혀 대공분실과 교도소를 들락거리고 수배생활을 하다보니 어느덧 쉰이 넘었다. 2011년 1월 한진중공업이 또다시 정리해고 명단을 발표하기로 한 하루 전 새벽 그녀는 동료 김주익이 목을 맨 바로 그 크레인에 올랐다. 그리고 그 후 309일간, 그녀는 '고맙습니다'란 말을 가장 많이 했다고 했다.

 

다행이다. 참 말 다행이다 싶었다. 쉰이 넘도록 억울함을 벗기 위해 투쟁했던 그녀가, 동료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마치 자신의 탓마냥 괴로워했던 그녀가, 두다리도 편히 뻗을 수 없는 그곳 크레인 위에서 고맙습니다란 말을 많이 할 수 있도록 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참 다행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 자신이 참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참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병원 치료를 받는 중인 그녀는 연극치료중 가장 고마운 사람의 이름을 끝맺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끝내 부르지 못한 이름은 '송경동' 이었다. 송경동 시인은 크레인 위의 김진숙을 만나러가는 '희망버스'를 기획한 자로 구속되어, 1월 17일 10시 20분 첫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잡혀있는 숨은 이유는 희망버스가 쌍용으로 재능으로 콜트-콜텍으로 현대차 비정규직 현장으로 달릴 것을 두려워한 구속이었다.

희망버스를 계속 달리게 하자는 배후로 송경동이 지목되었지만, 사실 희망버스는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시민들의 참여 운동이었다. 누가 강제로 끌어내거나 재촉했던 의무감에 의한 것이 아닌 불합리한 세상을 좀 더 즐겁게, 가볍게, 경쾌하게 바꿔보자는 시민들의 자발적 축제의 장이였다.

 

노동이라거나 운동이라거나에 아는것이 전혀 없고, 시를 즐겨읽는 것도 아니었던 나는 송경동 시인을 김진숙을 통해 알았다. 김진숙이 가슴아파 차마 부르지 못하는 이름이 송경동이라는 것을 알고,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에는 송경동, 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는 대추리에서, 삼성반도체에서, 기륭전자에서, 용산에서 노동자들과 철거민이 마땅히 받아야할 인간다운 권리를 위해 투쟁했다. 그가 꿈꾸었던 것은 누구를 위한, 누구만을 위한 세상이 아닌 모두를 위한 세상인데 그것이 죄인가. 그의 꿈은 김진숙의 꿈이기도 하고, 99%인 우리들의 꿈이기도 하다.

희망버스가 달리지 못한 쌍용차 해고자 복직을 위한 농성장에는 '희망텐트'가 있다. 그곳에서는 쌍용차 노조원 20여명이 농성하고 있으며, 희망텐트는 1월 5일로 30일 째가 되었다고 한다. 새해 소망이 공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그들은 모두에게 잊혀질까봐 가장 두렵다고 했다. 잊지 않아야 한다. 영하 10도가 오르내리는 이 겨울, 텐트를 치고 농성을 해야만 하는 그들의 절망과, 그들의 절망이 우리들의 미래임을 잊지않아야 한다.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과 김진숙의 <소금꽃 나무>와 함께 송경동의 <꿈꾸는 자 잡혀간다>를 나란히 책꽂이에 꽂으며, 참 마음이 아리다. 그의 책 옆에는 또 어떤 책을 꽂게 될까. '가난한 마음들이 이후로 부터는 가난을 이유로 상처받지 않게 되었다'는 내용의 책을 꽂게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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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분노하지 않는가 - 2048, 공존을 위한 21세기 인권운동
존 커크 보이드 지음, 최선영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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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권선언은 1948년 세계2차대전 후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아내 엘리너 루스벨트에 의해 '나치화'를 막기위한 목적을 가지고 UN에서 선포되었다. 그로부터 100년 후인 2048년 까지 좀더 체계적이고,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또한 세계 어느나라의 법정에서도 그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권법전을 만들자는 것이 바로 '2048 프로젝트'이다. 이 책은 2048프로젝트를 널리 알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고민하고, 다양한 제안을 수용하여 더욱더 실체적인 내용을 담은 성문법으로서의 세계인권법을 만들기 위한 그 첫번째 작업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인권은 아프리카 어딘가의 굶어죽어가는 어린아이에게서, 남미 어딘가 시위현장의 시민에게서, 혹은 북한의 강제수용소에서, 또는 종교적 관습으로 여성의 활동이 제한되고 있는 이슬람국가에서 발견되고는 한다. 이처럼 인권이라는 것은 늘 나의 일이 아닌 남의 일로 치부되고 있는 것이다.

시급 4,000원에 하루 12시간의 노동을 견뎌야 하는 식당 아줌마, 안전장치라고는 마스크가 전부인 톱밥 먼지구덩이 속에서 하루 12시간 꼬박 합판을 자르는 이주노동자, 화염구덩이 속에서 '여기 사람이 있다'라고 외쳤던 용산 남일당의 철거민들, 공부하느라 바빠 놀시간이 없다라고 말하는 초등학생, 입은 점퍼의 수준으로 편을 가르는 청소년들, 그리고 친구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방 창에서 뛰어내려야 만했던 한아이.... 그들에게 과연 인권이라는 것이 있었는가, 혹은 있는가.

경쟁에 바쁜 삶 속에서 내가, 혹은 내 아이와 내 가족이 누군가에게 짓밟히고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며, 나 역시 누군가의 숨통을 조이고 있을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인권에 대한 문제는 늘 강건너 불구경이 된다.

 

'인권'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삶 속에서 늘 부딪히는 많은 문제들의 원인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인권실현'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실현방안으로 5가지 자유를 제언하고 있는데, 그것은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결핍으로 부터의 자유, 공포로 부터의 자유, 환경의 자유이다.

언론의 자유란 표현의 자유로 대변되며,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기득권자들은 언론을 장악하여, 민중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것을 막는 것으로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한다. 때문에 언론의 자유는 인권 실현의 기본바탕이 된다. 또한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는 '안전'을 의미하는데, 가난으로 부터, 또는 기회의 불평등으로 부터 모든 죄악이 출발한다는 것을 이해할 때 '결핍'의 속박을 풀어야할 이유는 분명해진다. 나는 언론이 자유롭고, 결핍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종교의 자유와 공포로 부터의 자유는 그저 따라오는 자유라고 생각한다.

또한 환경의 자유는 1948년 세계인권선언문에서 채택된 제언은 아니지만, 저자가 2048 프로젝트를 실현하기 위해 새롭게 제안한 개념으로, 우리의 생존과 지구의 생명을 위한 기본 개념이다. 대대로 우리가 사용하고 누려온 환경을 다음세대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국제적 형평성을 갖은 환경의 자유 또한 꼭 필요하다.

세계 각국은 군비를 축소하고, GNP의 1%를 인권을 위한 기금으로 모으며, 인권 교육을 강화해 인권을 생활 속의 습관처럼 느끼자는 저자의 주장과 제언에 나는 많은 부분 공감하고, 인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제법적 강제력 또한 꼭 필요한 것이라고 동감한다. 다만, 책을 읽으며 거슬렸던 한 부분은 제국주의적 시선으로 바라본 미국인 저자의 환경의 자유에 대한 부수적 설명이었는데,

'빈곤 지역의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환경을 파괴하곤 한다.'(73쪽)라고 한 것에 대해 일시적인 분노를 느꼈다. 빈곤 지역의 사람들은 먹기 살기 위한 최소한의 환경을 파괴하고 있지만, 부국들은 먹고 사는 문제와는 관계없이 단지 '부'를 위해 심각하게 환경을 훼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노가 일시적일 수 있었던 것은 저자가 '환경의 자유'는 인권실현을 위한 다른 4가지 제언들과 함께 모든 국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국제적 규제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며, 미국의 의료서비스와 관료주의, 자본지상주의자들에게도 비판의 끈을 놓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때때로 세세한 눈여김과, 그에따른 사실과 다른 설명은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전체적인 틀의 일을 망치기도 한다. 이때를 놓치지 않은 반대편의 사람들은 틈새를 노려 분열을 일으키고, 내분은 결국 스스로 일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와 다른 의견, 다른 생각들은 얼마든지 공론화 되고 논의되어 합의를 도출해낼 수 있다라고 믿는다. 때문에 '2048 프로젝트'는 인터넷과 SNS를 이용해 다양한 의견을 모으고 있다.

삶 속에서 각자가 느끼는 '인권'에 대해 고민하고, 글로 써보는 작업, 더 나아가 '2048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일은 내가 갖은 촛불을 옆의 사람과 함께 나누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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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 개정판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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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새해가 시작된지도 어느덧 한달하고 열흘이 지났고, 바야흐로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다. 그러나 도시속에서 느끼는 봄의 느낌이란 겨우 쇼윈도우의 마네킹에게서 시작되곤 한다. 실제 느끼는 기온은 아직도 코끝이 빨개지도록 찬데, 쇼윈도우의 그녀들은 하늘한 쉬폰스커트에 발란한 티셔츠를 받쳐입고 온갖 화학물질로 치장된 조화 속에 파묻혀 꽃보다 더 환한 얼굴로 웃고있다. 빨개진 코를 하고 쇼윈도우를 바라보는 나는 그 느낌이 너무도 생경해서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고, 꿈속처럼 아련하게 '벌써 봄이구나.'라고 습관처럼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맴도는 봄의 느낌이란, 살얼음 아래 졸졸 흐르는 시냇물과, 보드랍게 몽우리진 개나리와 목련 속에서 시작되곤 한다. 도시내기인 나는 전생애동안 단 한번도 그렇게 시작되는 봄을 본 일이 없지만, 상상속에서 봄은 항상 그렇게 시작되곤 한다.

인류에게 허락된 지구에서의 시간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녹색평론>의 발행인 김종철 선생님의 강연을 다녀온 이후, 지구멸망은 공상과학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강렬해지는 요즘이다. 덜 입고, 덜 먹고, 덜 쓰는 삶을 강조하며 지구와 함께 인류의 생존을 염려하는 이들의 절규가 이어지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여전히 신의 영역을 넘보며 인간이 해낼 수 없는 일이 없다는 환상을 열심히 전도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에게는 지구의 미래가 밝고 희망차기만 한 것일까, 아니라면 은하계 넘어로 그들만의 다른 행성을 준비해놓기라도 한 것일까. 덜 쓰고 아끼는 삶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절규보다는 대량생산, 대량소비만이 삶의 기쁨이요, 행복이라는 전도가 내아이에게 까지도 먹혀들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이 더더욱 나를 절망스럽게 한다.

 

 

몇주 후로 이사를 앞두고 몇몇 이사업체로 부터 견적을 받았다. 이사업체들은 한결같이 마무리 서비스로 새집증후군을 없애준다는 피톤치드 소독을 제안했는데, 나는 바보스럽게도 피톤치드가 바퀴벌레를 없애주기도 하는지를 물었다. 나의 이런 바보스러운 물음에 대해 '새 아파트에는 바퀴벌레가 없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유인즉, 요즘 아파트는 화학성분을 많이 사용해 짓다보니 바퀴벌레인들 남아나질 못한다는 이야기였는데, 그러한 화학성분을 피톤치드가 없애준다는 설명이었다.

어의없는 내 질문과, 그에 따른 제법 근거있는 답에 순간 나는 얼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바퀴벌레조차 살 수 없는 공간에서 살겠다고 기어이 들어가려하고 있는 우리 식구가 너무도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바퀴벌레는 인류보다도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또 어디선가 화학성분을 이겨낼 수 있도록 자신들의 몸을 진화시키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강한 살충제를 사용할 수록 해충들이 더더욱 진화할 것이라는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의 예언만 보아도 내 상상은 그다지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으며, 한낱 미물이라고 여기는 바퀴벌레와 해충들을 없애기 위해 더욱더 강력한 화학 살충제를 개발하고 있는 인간들도 점차로 화학성분에 맞춰 자신들의 몸을 진화시키게 되는걸까?

 

 

레이첼 카슨의 명저 <침묵의 봄>을 읽었다. 고백컨대, 이 책을 읽기전 레이첼 카슨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머릿이 살충제로 알려진 DDT의 유해성을 만천하에 알리고, DDT의 미국내 제조 금지와 환경보호를 위한 시민운동을 이끌어 낸 인물이다. 레이첼이 살충제의 유해성을 대중에게 알리기 이전의 DDT는 머릿이뿐만 아니라 각종 해충을 박멸해 대량농업을 가능하게 했고, 뿐만아니라 각종 전염병을 예방하는데도 유익한 살충제였다.

산업으로 인한 새로운 부가 등장하고, 과학기술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줄 것이라는 사회적 순종이 강조되던 1950년대와 60년대에, 화학물질들이 지구 생태계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레이첼의 주장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레이첼이 당시 이러한 주장을 펼때, 과학자들과 권력자들 역시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들에게는 눈에보이는 현상이 더 소중했을 것이고, 실체적인 물질적 가치앞에 미래를 걱정하는 주장은 한낱 어린아이의 투정에 불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레이첼은 해충과 각종 병균과의 공존을 주장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다만 레이첼은 살충제와 제초제 대신 천적을 이용할 것과 지식과 자원을 총 동원하여 살충제와 제초제의 성분인 독극물 대신 덜 위험한 농약과 화학약품의 개발 외에도 비화학적 방법을 개발할 것을 주장했다.

그후, 세상은 어떻게 변했는가. 레이첼의 시대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더 빠른 속도로 이루어 놓은 50년 후의 지금 세상은 더 많은 살충제와 더 많은 원자력과, 더 많은 화학성분을 사용하고, 실제로 인간에게 미치는 화학성분에 의한 각종 질병에의 피해 또한 심각해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도, 인류는 여전히 더 많은 과학기술의 진보에 열광하고 있다. 인류가 원하는 것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과 필요치 않을 것을 구분해 내는 생태계에의 완벽한 통제, 완벽한 무균상태인 것일까. 내가 원하는 삶이 무균실에서의 삶이던가.

 

 

50년 전에 쓰인 레이첼의 이 책을 읽으며, 그녀가 밝혀낸 화학 성분이 오늘날에는 다방면에서 어느정도나 적용되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한편으로 나는 어떠한 과학적 증거도 대지 못하면서도 그다지 크게 개선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생활의 필수품이 되어버린 각종 화학물질들이 정부의 허가기준을 준수하고 있을지라도, 허가기준에 맞춘 미량의 화학물질들은 체내에 축적되고, 체내에 축적된 화학물질들이 서로 화합하여 내 인체에 어떠한 작용을 할 것인지 무척이나 공포스러워지는 경험을 했다.

50년이 지났어도, 우리는 여전히 화학성분에 둘러싸여 생활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소박한 삶보다는 소비하는 삶에의 추종은 더욱더 깊어가고 있으며,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라는 생각은 이제는 논란거리 조차도 되지않는 실정이다. 이러한 인간의 오만은 삶을 더더욱 각박하게 하고, 경쟁에서 도태되는 사람들은 낙오자로서 재생할 수 있는 기회조차 차단당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는 각성은 유해한 화학성분으로 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하는 마땅한 권리를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정말이지 레이첼 카슨의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그들이 자신의 삶과 주변을 되돌아보고, 인류의 공존이라는 공공의 선을 이루기 위해 각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것인지, 우리를 대신해 권력을 휘두를 사람을 결정하는 일에 조금더 관심을 갖게 되길 바란다.

겸손하고 소박한 삶을 되찾을때 인류와 지구의 미래가 보장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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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말해주지 않는 그들만의 진실
데버러 L. 로드 지음, 윤재원 옮김 / 알마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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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교육의 근본적 목표는 지식의 발전에 있다. 그러나 대학 교육의 숨겨진 진정한 목표는 더 높은 지위와 더 높은 수입에 있음을 누구나가 다 알고있다. 그러므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다는 것은 미래의 빛나는 영광 따위는 기대할 수 없는 인생의 패배자가 된다라고 생각한다.

대학은 교육의 질을 높이기보다 명성을 드높이기에 급급하다. 때문에 대학은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교육 자원에의 투자보다, 화려하고 호화로우며 가시적인 효과가 있는 전시행정을 통한 건물증축과 시설물 확충에 투자한다.

경쟁중심적 문화로 순위에 대한 집착은 학교와 학생 모두에게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학생과 학부모는 교육의 내용보다는 학점에 더 신경을 쓰고, 그에따라 학교와 전공을 선택한다. 또한 그들은 대학 교육을 지위 상승을 위한 타이틀로 여긴다.

분화되고 전문화된 오늘날, 인문학과 같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교육은 점차 사라지고, 돈을 이해하고, 돈을 숭배하는 공부는 주가가 높다.

교수들은 학문을 연구하며, 제자를 교육하고, 후배를 양성하기보다는 대학 및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 확보를 위한 출판에 집중해야 한다. 또한 출판에 있어 연구의 질이나 독창성이 중요시 되기 보다는 다량의 실적에 중점을 둔다.

교수들의 연구 기금과 학교 시설 확충을 위한 자금의 출처는 많은 부분에서 민간 기업 쪽으로 기울고 있며, 그들은 자금을 투자한 만큼 정확한 보상을 대학에 요구한다. 때문에 무엇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며, 투명해야 할 교육은 기업의 요구에 맞춰져 판매와 투자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대학은 기업을 위해 헌신 할 지적이고 전문적인 노동자 생산 기관이 되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의 젊은이가 대학생이지만, 또한 대다수의 대학생은 어마어마한 학비를 부담하기 위해 빚쟁이가 되고있다. 그들은 학교를 졸업한 후, 학비를 갚기 위한 부채 노동자가 되며, 학비 상환 후에도 그들은 결혼하기 위해, 집을 사기 위해,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 노후를 보장받기 위해 여전히 부채노동자로 남는다.

 

지식인을 양성하고 이성에 대한 역량을 확대시키기 위한 고등 교육으로써 대학교육은, 오늘날 그 본질이 훼손되고 왜곡되어 천박한 모습인 위의 몇가지 가치로 대변된다. 저자는 그 대상을 미국의 대학들로 한정했지만, 위의 설명은 정확히 우리사회 대학의 모습이다. 사회 시스템과 교육 등 많은 부분에서 미국을 추종하고 있는 우리사회는 대학의 모습조차 미국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저자가 짚어주는 미국 대학의 문제점들은 바로 우리 대학의 문제점 들이기도 하다.

대학은 고등 교육을 통한 비판적 사고 능력을 개발해 현대 사회에 필요한 지성적이고 윤리적인 인재를 양성하기 보다는 자본에 복종하고, 순응할 실용적 인간상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학의 문제점이 대학 자체만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자본을 쫓고, 지위를 쫓는 세태만을 탓하기에도 부족하다. 대학이 변해야 하지만, 그보다 먼저 사회가 개혁되어야 하며,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나 소시민인 우리는 자식이 더 나은 지위를 보장 받을수도, 더 높은 수입을 올릴수도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학 진학을 포기할 수 없다.

자, 모두가 대학교육을 받은 지금 우리나라는 정부발표 청년실업률 6.3%, 실제 청년 체감 실업률은 정부 발표치의 4.3배에 달하는 청년실업 대국이 되었다. 이에 대해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 힘들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스러운(dangerous) 일을 피하는 청년에게 문제가 있다라고 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대학은 마음만 먹으면 모두가 진학할 수 있을 만큼 선택의 폭은 넓어졌지만, 그로인해 고등 교육의 진짜 목적은 잃었다. 대학은 더이상 지성의 전당이 아닌 지위를 쫓는 격투장이 된 것이다.

대학은 우리에게 진실을 말 하지 않는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도 우리는 알고 있다. 다만, 낙오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조차도 침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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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복지국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신 자유주의 시대, 복지정책의 딜레마
아스비에른 발 지음, 남인복 옮김 / 부글북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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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나 혹은 보편적 복지에 반감을 가진 우파들은 복지시스템이 사람들을 게으르고 나태하게 해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결과, 성장과 발전은 더이상 이룰수 없게 된다라고 주장한다. 이는 전통적인 경제학에서 말하는 인간 존재는 끊임없이 자기이익만을 추구하고 보상과 처벌에 따라 행동을 달리한다는 '호모 에코노미쿠스' 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즉 인간은 경제적 인센티브나 경쟁에 대한 압력이 없다면 누구도 최선을 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존엄성을 인정받게 되는 보편적 복지시스템은 도덕적 해이로 인해 결국 국가경제 성장에 방해가 된다라는 뜻이다.

소위 우파라고 자칭하는 우리의 보수적 정치인들은 그리스 및 최근 일련의 유럽의 경제난은 보편적 복지시스템에 의한 국가 부도 사태와 같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러한 주장에 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장 고된 노동에 자신을 투자한 결과, 최종적인 이득은 상위 1%에게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오히려 성장과 효율성 제고를 위해 열정을 쏟을 사람은 없을 것이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사회에서 직업이나 일은 밥벌이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기본적인 행복감 조차도 유보해야 한다.

 

북유럽의 복지국가는 자본가들이 사회주의 세력이 늘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노동운동과의 합의를 통해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고, 확대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책은 설명하고 있다. 그 결과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은 보편적 복지 시스템 하에서 전반적 근로조건을 개선시켰고, 빈곤이 약화되었으며, 질병이나 고령이 된 사람, 한부모 가정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경제적 안전을 보장했다. 또 무상 교육과 건강 서비스는 국민의 삶의 질을 높였고, 누구나 사회속에서 보호받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으며, 이러한 혜택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하는 당당한 권리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사람과 사람의 사이는 경쟁이 아닌 연대가 함께 했다.

국가의 역할은 국민을 통제해 국가 스스로의 권위를 높여 권력층의 권한을 넓히기 보다, 전체 국민들의 삶의 질을 보장하기 위한 것에 그 큰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국가의 존속 이유를 그렇게 규정할 때 복지국가는 바로 민주주의의 보루이며, 선진적 사회 시스템임과 동시에 최종족으로 우리가 이루어야 할 고차원적 문명이라고 보여진다.

북유럽의 국가들은 2차세계대전 이후 그러한 선진 시스템을 마련할 수 있었으며, 복지 시스템 속의 북유럽 국민들은 행복감을 맛보았고, 인간으로서의 권위를 존중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공세가 시작되면서, 자본이 국가 경계를 넘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고, 사회적으로 당연한 권리였던 복지기금이 삭감되고, 공공 서비스들이 민영화 되고, 구조조정에 의해 국민의 권력이 체계적으로 약화되었다. 그 결과 북유럽의 국가 경제는 오늘날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복지국가가 약해지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사회적 불평등이 만연하고, 그 격차 또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지고 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경쟁 시스템 속에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노동의 강도는 더더욱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가족들이 필요로 하는 돈을 마련할 수 없는 워킹푸어가 된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빈자는 더더욱 빈자가 되는 사회가 신자유주의가 추종하는 사회의 모습이다.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이 '평등'이라고 볼 때 신자유주의의 이념하에서는 결과적으로 '평등'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주장처럼 빈곤을 퇴치하고 사회적·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며, 모두가 다 살게 되는 복지시스템은 어떻게, 왜 붕괴되고 있는가. 그것은 '권력'의 이동과 관계가 있다. 보편적 복지 사회에서 권력은 국민, 노동자, 인민에게 있었다. 그러나 복지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경쟁과 성장만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권력은 '자본'에 있다. 자본은 인간을 무너뜨리며 스스로 팽창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북반구(유럽과 북미 일본 등 선진국)의 복지국가는 남반구의 여러나라들을 착취함으로써 이룰 수 있었다는 점 또한 고백하고 있다. 서반구의 개발도상국들 중 빠른 시간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내 OECD에 회원국이 된 우리나라 역시 과거 선진국에 의한 착취 대상국이었다. 때문에 우리의 역사 속에서 '복지국가'는 요원한 일이며, 한번도 도달하지 못한 미래이다. 더구나 신자유주의의 선봉에 선 미국을 추종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 복지란 빨갱이들이나 주장하는 잘못된 이념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의료서비스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4천만 내지 5천만이 의료 해택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교육기관을 갖추고 있음에도 그 교육은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를 위한 의료 서비스이고, 누구를 위한 교육인가. 우리나라가 진정 따라야 할 미래가 미국 사회라고 규정되어도 좋은 것일까.

노르웨이의 노동운동가이며, 복지국가운동가인 저자는 북유럽의 복지 시스템의 붕괴에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며 잘못된 복지국가의 해석을 바로잡고자 이 책을 썼지만, 복지의 기본 이념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그조차도 무척이나 부럽게 생각되었다. 우리나라는 무상급식을 주장하고, 찬성하는 이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수준의 '미복지 국가' 혹은 '비복지 국가'이기 때문이다.

 

무상급식에 반감을 갖었던 사람들, 복지라는 글자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복지를 구걸이나 수혜와 같은 의미로 여기는 사람들, 그리고 자칭 타칭 '우파', '꼴보수' 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싶다. 읽어도 비틀린 마음으로는 무슨말인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말이다.

보편적 복지는 인간의 기본권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뤄내야 할 미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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