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에 한 번은 체 게바라처럼 - '인문학 특강''생존경제학' 최진기의 리얼 인생 특강
최진기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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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솔직히 고백하건데,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체 게바라' 때문이다. 체 게바라를 이야기하는 책일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 출판사 서평을 읽었음에도  체 게바라의 생을 이야기 하는 책일 것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랬기에 책을 덥썩 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 저자 최진기의 약력과 목차를 살펴보고 나는 기염을 토할 수 밖에 없었다. 이건 뭐 성공한 삶을 위해 이래라, 저래라 일일히 친절하게 알려주는 자기계발서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 생각과 한참이나 다른 책이라는 것에 묘한 배신감까지 들었는데, 그것은 '체를 팔아서 책을 팔자'는 일종의 상술에 놀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해서, 이미 오래전에 읽었던 장코로미에의 <체 게바라 평전>을 다시 꺼내들었다. 평전을 정독한 후, 적당한 상술로 적당히 책을 팔아먹겠다고 작정한 저자에게 비난의 서평이라도 한 줄 남겨야 속이 시원해질 듯 해서였다. 그런데 왠일인지 <체 게바라 평전>을 읽는 속도가 무척이나 더뎌지면서, 처음 읽었을 때의 그 감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꼬인 마음으로 읽는 책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체 게바라 평전>을 제치고, 바로 <일생에 한 번은 체 게바라처럼>을 집어들었다. 이 정도의 자기계발서를 비난할 목적이라면 굳이 평전을 정독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체는 누구보다 인간을 사랑했고, 자유를 사랑했던 사람임으로 그를 이용해 현실적인 성공을 꾀하라는 충고를 담은 책이라면 평전에 대한 정독조차도 필요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우선 나는 저자의 직업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사회탐구 영역 점유율 1위의 스타 강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스타 강사, 그렇다면 그는 입시를 위한 사교육 시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뜻이렸다. 거기에 주부를 상대로 경제를 명쾌하고 속시원하게 알려주고 있다고 했다. 그건 그가 '재테크의 달인'이라는 뜻일 것이라고 알아들었다. 또 그는 인터넷 방송에 경제 강의 동영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했다. 나는 결국 최진기 라는 스타 강사는 사람들의 불안을 미끼로 자신의 배를 불리는 뻔뻔한 베짱이 일뿐이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최근에 그는 딱딱하지 않고 재미있는 인문학 강의로 팟캐스트 교육 분야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고 했다. 경제와 인문정신이 함께 할 때 거기에 바로 살 맛나는 세상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경제인들의 인문학 공부를 믿지 않는 사람이다. 그들이 하는 인문학이란 어디가서 딱 폼 날 만큼, 인문학이 대학을 떠나 고생하는 현장이 바로 그곳이라는 평소의 지론 때문이다. 

더구나 자기계발서는 절대 읽지않는다는 저자가 쓴 자기계발서라니 이 얼마나 웃기는 상황이냔 말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날선 비판의 시각이 아닌, 비난의 시각으로 읽기 시작한 책은 체 게바라의 좌우명 '불가능한 꿈을 지닌 리얼리스트가 되자'를 부제로 단 1부의 세번째 꼭지, '매스게임의 카드 한 장과 대기업의 인생'에서 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어, 최진기라는 사람, 내가 생각한 스타 강사가 아니네.'

 

요즘 청춘들에게도 체 게바라가 먹히는지는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러나 최진기의 <일생에 한 번은 체 게바라처럼>을 읽고 난 후라면, 혁명가 체 게바라에 대해 궁금해할 청춘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의사라는 멋진 타이틀을 쥐고 있었으면서도, 오로지 사람과 자유만을 사랑해 혁명가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

저자 최진기는 말한다. 이변이 없는 한 무한경쟁 사회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편안함만을 추구하며 나만은 예외라고 생각하는 삶이 계속되는 한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승자의 보상에 대해 환호하는 사회가 아니라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존재하는 사회가 정상인 사회라고. '부자 되세요'라는 말을 부끄럼도 없이 마구 내뱉는 사회가 아닌, '꿈을 이루세요' 라는 덕담을 나누는 아름다운 사회는 개개인의 혁명을 통해 완성될 것이라고 말이다.

엄숙함을 거부하고, 가장 많은 것을 박탈당한 사람들 편에서 짧은 일생을 마감한 체 게바라의 삶을 통해 이시대 우리나라의 청춘들의 고민을 풀어나간 이 책에 관심을 갖을 만한 이들이라면 틀림없이 일생에 한 번은 체 게바라처럼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지않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혁명하기 위한 시도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책을 읽은 소감을 마무리 한다.

많은 사회구성원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사는데 어려움이 없는 사회, 그것이 바로 복지사회의 본질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강하게 동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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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주니어 클래식 11
강신준 지음 / 사계절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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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눈앞에둔 1999년 세계 최고의 공영 방송이라 일컫어지는 영국의 BBC 방송에서 청취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지난 천 년 동안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칼 마르크스가 1위로 선정되었다. 그 이유는 그의 저서 <자본>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읽힌 책으로 <주역>, <성경>과 함께 <자본>이 꼽힌다. 그만큼 마르크스의 <자본>은 인류에게 매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책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자본>을 읽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오랫동안 금서였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나는 무시무시하게 방대한 양 때문에도 지금껏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르크스 평전인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에서 이사야 벌린은  <자본론>을 한 줄도 읽지 않았거나, 오역해서 해석한 <자본론>을 맹목적으로 숭배하거나 증오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일갈했다. 나 역시 <자본>을 읽지 않은채로, 자본주의에 대해 회의하게 될 때면 막연하게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생각하는 맹목적인 숭배자로서 청소년용으로 발간된 이 책에 기쁜마음으로 달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강신준 교수는 머리말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에는 과학적인 진리가 있다라고 예찬했는데, 이제 막 책을 읽기 시작했던 나로서는 이 책이 지나친 '자본론 찬미가'가 아닐까하는 의심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의심은 프롤로그와 자본의 탄생 과정을 읽고, 생산과 소비가 일치했던 자본주의 이전 사회를 지나 생산과 소비 사이에 교환이라는 행위가 끼어든 자본주의 사회를 읽을 즈음에는 마르크스의 <자본>이 왜 진리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강신준 교수는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를 통해 <자본>을 아주 쉽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 책의 원대상인 청소년들이 읽기에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라 여겨진다. 뿐만아니라 재미까지 있어 초딩 6학년인 우리 아이에게 꼭 읽히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다.

 

지나친 부는 타인의 몫을 빼앗는데서 발생되고, 자본과 빈곤은 대물림되며, 자본은 자본만을 무한 증식시킨다는 이미 알고있던 내용을 차근히 정리하는 것 외에 새롭게 알게 된 것이라면, 복지의 천국 북유럽은 마르크스의 <자본>을 근거로 시작되었고, 유지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자본>이 해금된 이후로도 많이 읽히지 않는 이유는 책의 난해함이나 방대함 외에 보이지 않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지은이 강신준 교수의 청소년을 위한 <자본>은 꼭 필요한 책이라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다.

강신준 교수는 머리말에서 이 책을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그 자신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개인적 회한을 토로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이 책을 청소년 용으로 발간한 것인데, 일찍부터 청소년들에게 <자본>의 비밀을 귀뜸해 맹목적으로 타인의 욕망을 추종하며 살아가는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을 멈추려는 시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뿐만아니라 지금껏 <자본론>을 읽지 않은채로 숭배하거나 증오하는 기성세대에게도 꼭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소개했던 어떤 신문기자는 조금더 복잡해지더라도 어른용 <자본>을 새롭게 묶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피력하기도 했다. 나 역시 그 생각에 크게 공감하지만, 이 책만으로도 감히 <자본>에 도전할 용기를 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자본>을 번역해 소개했다는 강신준 교수의 <자본>시리즈를 온라인 서점을 통해 몇번을 살펴보며, 침을 꼴깍 삼키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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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 - 생태주의 작가 최성각의 독서잡설
최성각 지음 / 동녘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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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기간 이 책을 읽고 싶어했다. 어떻게 알게 된 책인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지만, 언젠간 읽어야지 하고 바라봐 온 시간이 1년? 2년?... 읽고싶은 책들을 쌓아두고 사는 나에게는 1~2년의 기간은 사실 그리 오랜기간이 아니기도 하다. 그리고 이 책이 발매된 것이 2010년 8월이니, 읽고싶어하며 바라봐 온 시간은 실제 2년에는 많이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내 기억이 이 책을 오랫동안 읽고싶어 했다는 오류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만큼 이 책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을 즐기기도 했다는 뜻일게다.

 

표지 사진이 참 좋다. 꾸미지 않은 일상인듯, 홱 돌아보는 강아지의 몸짓이 좋고, 바지와 슬리퍼 사이의 울뚝 불거진 동맥인지 정맥인지가 보기좋고, 무엇보다 나무에 기대앉아 책을 읽는 그 모습이 너무 좋다. 사진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책을 읽은 후에 감상도 그와 같다라고 생각한다. 책을 쓰는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쓰던 자신의 생각을 담아 책을 쓸 것이고, 책을 읽는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읽던 자신의 생각을 담아 읽을 것이다. 그러므로 책이란, 나를 쓰듯 나를 읽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른바 전문 서평꾼들이 썼다는 서평은 잘 읽지 않는 편이다. 그들의 지적이고 전문적인 서평을 따라 읽다보면 본서를 읽는 것보다 더 피곤해질 때가 있다. 책을 읽는 다는 행위는 '나'를 읽는 것이므로 전문적인 용어를 써가며 지적인 놀음을 일삼는 전문 서평꾼의 서평은 따로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에서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책을 추천하는 책은 즐겨읽는 편이다. 물론 전문 서평꾼이 쓴 책은 제외하고.

 

부제에서 말 하듯, 이 책은 '잡설'이다. 서평이 아니라 생태주의자 최성각이라는 사람이 쓴 책에 대한 자신의 생각, 즉 책을 읽고 떠오르는 '잡설'들을 묶은 것이다.편안해뵈는 표지와 함께 '잡설'이라는 바로 그 점이 이 책을 그토록 오랫동안 그리워하게 한 것이다. 바라봄이 길었다면 그에 따른 실망도 컸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어쩌면 정설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은 바라본 만큼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난독·잡독을 추구하는 지은이의 취향에서 그렇고, 전문적이지 않다는 면에서 그렇고, 주관적이라는 면에서 그렇다. 다만, 생태주의자 답게 3부의 '우리에겐 바로잡을 시간 밖에 없다'라는 중제아래 묶인 책들에 관해선 읽을수록 지루해지곤 했다. 물론 내가 읽은 책보다 읽지않은 책이 훨씬 더 많긴 하지만 환경에 관한 책은 늘 피곤함을 동반하곤 한다.  읽을수록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것이 없다는 자괴감과 함께 더이상은 희망도 없다라는 무력감으로 환경책 읽기가 마무리되곤 하기 때문이다. 자괴감과 무력감 뒤에 숨은 게으름과 나태를 나 자신은 알고있기 때문에 겪는 피곤함이라는 것도 사실은 너무 잘 알고있다. 그렇기때문에 더더욱 생태주의자인 지은이의 독서잡설이 소중하다.

 

책을 읽으며 몇 권의 책을 더 구입했다.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은 벌써 읽어버렸고, <만년>과 체와 피터 드러커에 관한 책, 디 브라운의 <나를 운디드 니에 묻어주오>와 같은 책이다. 이성숙의 <여성, 섹슈얼리티, 국가>도 읽고싶은 책 목록에 끼워둔다. 그 외에도 읽고싶은 책들이 있지만 몇몇권은 이미 절판되어버린 책이라 아쉬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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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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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어느날 고궁을 나서며-를 처음 읽고 느꼈던 전율을 기억한다. 감성을 노래한 예쁜 시는 아니었지만, 시를 읽기 시작하자마자 내게로 착 감겨들며 가슴을 욱조이던 느낌을 기억한다. 압도적인 권력 앞에서는 비굴하게도 작아지는 내 모습을 숱하게 경멸해 보았으므로 시의 도입부분을 읽자마자 나는 한순간에 매혹되고 만 것이다. 단지 그 느낌만으로도 김수영이 누구인지 알고싶어졌고, 해서 그의 시집과 산문집을 거금을 투자해 구입했지만, 오랜 시간동안 책꽂이만 장식한 채로 김수영은 여전히 내게 오리무중의 그렇지만 언젠가는 꼭 알아야할 강렬한 사내로 남아 있었다.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날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로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김수영이 불의의 사고로 한창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한때 그것이 모종의 계략에 의한 사고가 아니었을까 추측 아닌 추측을 했던 적이 있다.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두번째 단락을 읽고 그러한 생각을 했던 것인데, 잘 모르는 내가 읽기에도 그 시대의 권력이 보기에는 충분히 불온하게 보였으리라는 생각에서 였다. 내가 김수영에 빠져든 것은 바로 그점이었다. 시 한편으로 김수영의 불온성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인데, 안타깝게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여기까지 였다. 이어지는 단락의 시어들은 김수영의 개인적 체험에 바탕을 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그랬던가 시가 어려운 이유는 시인 자신이 느끼고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시를 쓰기 때문에 읽는 이로서는 난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김수영을 위하여>에서 강신주는 어느날 고궁을 나서며-를 특별히 소개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나머지 단락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반항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지는 시인의 아픔을 공감하게 되었다. 그리고나자, 단번에 전폭적으로 푹 빠져들고 말았던 어느날 고궁을 나서며-가 새롭게 이해되기 시작했는데, 그저 단순한 이해를 넘어 가슴에 갈고리가 하나 들어 내장 벽을 벅벅 긁어대는 듯한 아픔으로 느끼게 되었다. 절정 위에 서 있지 못하고 조금쯤 비켜 서 있노라고 고백하며 가슴을 치던 시인의 설움을 천분의 일쯤은 이해하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나는 비껴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공통의 중심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돌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완벽하게 홀로 돌지도 못하면서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서 나는 아니라고, 나는 권력에 맹종하는 너희들과는 다르다고, 나는 나만의 스타일대로 내 신념대로 단독적인 삶을 살고있노라고 자신있게 외칠 수 없었던 시인의 처절함이 이제야 말로 제대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김수영이 느꼈던 서러움은 고스란히 생활인으로서의 설움이었는데, 그것은 내가 느끼는 설움과 같은 종류의 설움이었고, 나는 다만 그날그날을 안일하게 보내길 소망하고 있을뿐이다. 홀로 선다는 것은 그대로 고통이며, 두려움이다. <김수영을 위하여>를 다 읽고난 지금도 나는 여전이 두렵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으로 쾌락과 권력과 안락을 살 수 있음을 나는 잘 알고있다. 돈을 얻기 위해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복종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잘 알고있으면서도 그에 순종할 수 만은 없다고 자꾸만 삐죽대며 올라오는 숨은 내 자신이 두렵고, 타인과 나를 끊이없이 구별하고자 하는 나의 대책 없음이 두려우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하면'이라는 중간사를 밥먹듯이 허용하는 나의 무의식이 두렵다. 이대로 가끔씩만 '나는 순응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외치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을 것만 같아 두렵다. 그저 내가 작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음이 못내 서러웁다.

그러나, 내가 김수영일 수는 없는 일이다. 강신주가 김수영이 아니듯, 나 역시 김수영을 흉내내는것도, 강신주를 모방하는 것도 옳은 방식의 삶은 아니다. 다만 김수영을 읽고 강신주를 읽으며 나만의 단독적인 스타일을 만드는 것, 포즈를 버리고 사상을 취하는 것, 그것이 강신주가 말하는 김수영 식 자유다.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소리를 내며 때로는 아름답게 공명하는 사회는 영원히 불가능한 이상속에서나 존재하는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한번도 인간사에서 그러한 사회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때문에 앞으로도 그러한 이상사회는 불가능하리라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는 것이다. 무리지어 구별하는 방법을 저버리지 않는 인간세상에서는 '이념'이나 '주의'가 사라진 온전히 '개인'만을 존중하는 그런 세상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저 김수영이라는 살아있는 역사는 궤도를 이탈한 별 정도로 이해되고 남겨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

 

김수영 평전을 읽는 것보다도 더 김수영에 대해 잘 이해하게 된 이 책을 읽고나서, 김중식의 <황금빛 모서리>라는 시집에 실린 궤도를 이탈한 별-이 떠올랐다. 김수영, 그는 어쩔 수 없는 궤도를 이탈한 별이다. 순종이나 맹종이라는 궤도를 이탈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돌기를 원했던 자유주의자 김수영을 내 가슴 속에 별 하나로 간직하며, 강신주가 쓴 김수영 이야기 감상을 마무리한다.

 

사족하나-강신주는 열 번에 걸친 김수영에 대한 강의를 녹취하고, 정리하여 사랑스러운 책으로 만든 편집자 김서연의 수고를 잊지 않고, 표지에 편집자의 이름을 적었다. 편집자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인문사회 출판시장 부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 강신주의 주장이다. 편집자 김서연은 편집자의 말에 '네가 옳다'라고 '네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고 처음으로 말해 준 사람이 강신주 라고 했다.

여전히 선 자리에서 궤도를 이탈한 자가 되길 꿈꾸는 나에게, <김수영을 위하여>는 영원히 내 가슴에 담고 싶은 자유인 김수영 외에도, 자신만의 소리를 내며 아름답게 공명하는 두 사람을 알게 한 소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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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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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시간, 돈이 만능은 아니라는 규율 교사의 훈계와 같은 제목의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었다. 사실은 그다지 흥미를 끄는 책은 아니었다. 굳이 읽지않아도 제목만으로도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뿐더러, 이전에 읽었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는 무엇인가>와 <왜 도덕인가> 만으로도 이 책이 어떨것인지는 충분히 가늠이 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자, 우리는 이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과 돈으로 사서는 안되는 것들을 충분히 알고 있다. 양심, 도덕, 관습 등 도덕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누구나 천박한 경제논리와는 구분하기를 원하고 구분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경제논리는 생활 깊숙히 스며들어 무엇이 경제적 가치와 구분되는 도덕적 가치인지 조차도 모호해진 채로 생활하고 있다. 

샌델의 비유대로 이를테면 출퇴근 시간의 유료도로(돈을 내면 빨리 달리수 있는 차선)라던가, 또는 전담의사제를 통한 신속한 진료, 무료음악회나 공청회의 암표거래 등을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라고 볼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살펴볼 때, 과연 그런가 하는 딜레마에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자본주의란 것이 그런 것 아니던가. 돈을 낸다면 빠르고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받는 다는 논리가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근본 뼈대가 아니던가.

샌델에게 묻고 싶다. 시간이 곧바로 황금과 연결된대서만은 아니겠지만, 각종 강연 외에도 숨돌릴 틈 없이 바쁠 샌델 교수의 경우, 전담 의사제도를 이용하지 않은채로 진료표를 뽑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몇시간 혹은 몇 날을 투자해 진료순서를 기다리고 있는가, 강연을 위해 혹은 이번처럼 새로운 책 홍보를 위해 우리나라와 같은 먼 나라를 여행할 때 '맞춤 특권'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이미 VIP로서 본인이 따로 원하지 않아도 다각도의 특별 서비스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말이다.

 

마약에 중독되거나 에이즈에 감염된 산모에게 돈을 주고 불임수술을 받게 한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일인가. 그렇다면 마약에 중독되거나 에이즈에 감염된 태아를 출산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일인가. 그것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을 아이에게 강요하는 결과가 되는 것은 아닌가. 어느 누구도 자신이 출생이전부터 잘못되는 것을 받아들일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무엇이 도덕인지 샌델에게 묻고싶은 것이다. 샌델이 그토록 주장하는 공공의 선이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결국 나는 이전에 읽었던 두 책, <정의란 무엇인가>와 <왜 도덕인가>에서 주장했던 우리가 도달하고 이루어야 할 '공공의 선'의 의미마저, 이 책을 읽으므로서 혼란스러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해서 이 모든 저작의 시발점이 된 샌델이 29세에 썼다는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우리나라에서는 그저 <정의의 한계>라는 제목으로 지난 3월에 멜론에서 출간되었다)를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샌델의 주장은 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하는데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샌델은 모든것이 시장주의로 환원될 때의 문제점으로 두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는 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의 불공정에 관한 문제이고, 또 하나는 근본적인 가치의 부재를 들고있다. 첫번째 불공정에 관해서는 이미 우리가 수용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가 이미 다소의 불공정을 내포하고 있기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생각한다. 문제라면 누구도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사민주의를 선택해 태어날 수 없다는 것, 혹은 태어난 후라도 선별해 선택하기 힘들뿐더러 갈수록 전세계의 '자본주의화'에 있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기본가치에 관한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것은 무엇이나 거래대상이 되는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같이 치러야 할 대가에 관한 것라고 샌델은 말한다. 그러한 대가에 관한 것이라면, 전자의 '불공정'의 문제보다는 더 유의미하다 라고 본다. 이미 시장만능주의 사회 곳곳에서 비인간적으로 여겨지는 크고작은 일은 일상처럼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문제라면 샌델의 의견에 적극 동조하지만, 그렇다고 샌델이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 철학자는 아니라는 것에 나는 또한번 실망한다. 다만 문제를 잔뜩 물어놓고 자신은 쓰윽 빠지는 제스처를 샌델은 이번 책에서도 역시 고수하고 있다. 나로서는 바로 그점이 짜증난다. 서점에서 <정의의 한계>를 뒤적여 보지만 그다지 썩 끌리지는 않는 것이, 한동안은 샌델을 잊고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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