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과학적인 실험이 아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완수한 뒤로 가정한다면, 몇 가지를 적용해볼 수 있는데,

이를테면, 문화에서도 해당한다. 우선 익숙한 자본주의 체제 속 사회에서도 

누리던 자본 문화들은 폐기하고 모두 일정한 혁명으로 도달한다. 

그리고 지배적이기만 하던 부가적인 양식들은 폐기하거나, 

맨 나중으로는 완숙한 무산 공산주의로 정점을 누릴 수 있겠다.  

각 운동이나 투쟁 내용들도, 공산주의 속으로 잘 구분해서 다룰 수도 있다.   

완수한 프롤레타리아트들은 보다 신중하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자본가들을 위해서만 일하던 노동가들도 척박하기만 하고, 턱없이도 부족하기만 하던 

여러 시설을 위해 직접 계획하거나, 제작하거나, 개선할 수 있다.    


방송국. 


작은 혁명 방송국이라도 있었으면 한다. 

전에는 거의 매번 라디오랑 대화했었다. 

현 사회로는 어느 라디오를 청취해봐도, 방송이라는 매체를 시청해도,  

자극적이고, 눈 아픈 영상이 책보다 유익한 적이 있던가.   

자본주의를 선전하고, 제국주의를 선동하는 매체는 끄고, 

프롤레타리아트로는 혁명으로 집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우습겠지만, 내용들도 주로 공산주의 혁명사로 옮겨진다. 


도서관. 


공산주의를 주로 다루는 도서관이다. 

대부분은 혁명 서적으로 비치한다. 

마르크스를 중심으로 모아 놓은 곳이다. 

번역하고, 정리해서, 책으로도 잘 묶어 모아 분류마저 잘 된 곳이다.  

그리고 지루하지 않도록 공원을 조성하고, 편하게 연구할 수 있는 자료실도 잘 꾸민다.  

빌릴 때도 밀리지 않도록 충분한 서적들은 여러 권 있다. 

또한 검열마저 생각하던 우리말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있다. 


보급소.


완수한 혁명에 대한 본보기로는 역시 경제 문제이다. 식사 중요하다. 그러나 식량은 선택에서도 더 중요하다. 이전까지 자본주의 경제로는 식량 생산이나 보급들은 유통에서도 부패하거나, 노동 과정에서도 부실한 식사마저 참 많다. 개발과 계발에만 몰두한 탓에 말만 앞섰지, 정작 농촌 지역에 대한 관심은 더욱 부재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 문제로는 필요하다면 따로 공동 운영 식당을 정하거나, 시장 경제가 아니기 때문에, 보다 자율적이기 때문에 계획하고 생산물에 대한 분배로는 신중하게 다루고, 계산한다.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도, 능력만큼 일하기 때문에, 폭 넓은 생산물을 분배 받거나, 직접 생산할 수 있다. 그래서 가격 경쟁 따위가 아니라, 직접 생산물에 대해서는 소외를 받는 착취 노동이 아닌, 보람을 얻는 일이다.      

    

두 영화를 추천한다. 


1. 라울 펙, <청년 마르크스>.


2. 스티븐 소더버그, <체 게바라>. 


두 영화로는 모두 자본주의 상업 영화로 제작하고, 수입했기 때문에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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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인혁, <한국 사상논쟁사>를 정리하다가. 

문득 깨달은 점이 생겨서 쉽게 먼저 공유해본다. 


현재를 규정하는 21세기에 있어서, 아직 민중주의에 대한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지 않을지에 대한 의문이 생겨버렸다. 

자본주의 국가든, 공산권 국가든, 


'반동적인' 스탈린 사후로도, 전 세계는 민중주의라는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곧바로, 소비에트 혁명마저 처음으로 되돌아간 셈인데, 


레닌은 유일하게도, 러시아 인민민주주의를 추구한 나로드니키에 대해서도 

중도적인 경제주의일 뿐이라고, 날 선 비판을 가한 이유가 과연 여기에 있다. 

얼마나 현대인들이 과거보다 더 무지한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일 수 있겠다.

인민민주주의에서 발전한 정치, 경제적 형태로 진화한 민중주의로는 서민주의가 있다.  

그러나 계급투쟁을 소시민과 함께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다는 점에서, 틀렸다.

그리고 '발전'하거나 '진화'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 더 나아갈 수 없었다고 본다. 

인민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는, 레닌도 정말로 많이, 수 없이 지적했었다. 

그러나 후기 혁명을 보더라도 현대 혁명가들은 지침들을 모두 무시해버렸다.

그래서 자본주의로 초기화해버렸다. 


강조하지만. 어쩌면 오직 무산 노동계급만이 실현할 수 있고, 

또한 혁명을 추구하는 참된 지식인이라면, 

그러한 인민민주주의(민중주의)에 대한 시각들도 버릴 수 있어야만 한다고 본다. 

현대에서도, 그리고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제국주의라는 지배 아래에서도, 

다른 진단과는 달리, 아직도 충분히 여러 혁명은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참고로, 레닌과 트로츠키에게 결정적인 부분은 

어쩌면 철학에서부터 서로 다른 시각이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트로츠키를 일부 칸트주의에 대한 목적론으로 러시아 혁명을 바라본 시각에 대해서, 

레닌은 1900년대 초기로는 트로츠키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혁명가들보다 더 혁명 철학을 강조했었다.  

트로츠키는 비교적, 덜 떨어졌거나, 충실하지 못해서 수준이 낮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겠다. 

그러나 상황은 어려울지 몰라도, 혁명에 대한 전망에서 트로츠키는 매우 밝았다.   


오늘날 혁명가들은 매우 철저하고, 올바르게 무산 노동계급과 함께 혁명을 지도하고, 

다시 사회주의 혁명을 건설해야만 하겠다. 그리고 공산주의 단계까지 곧장 나아갈 수 있다고 

그렇다면 먼저 반드시 일어난다고 믿어야만 할지도 모르겠다. 


다음 단계로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단계마저 구분하지 못한다면, 

당시로는 시급하게 일어난 '폭력' 혁명마저 초기화된다.  


그리고, 아무리 현상으로 일어난 문제에 대해 

누군가는 '자본주의', '제국주의'라고만 규정하고, 

본질 없이, 아무런 이유 없이 강조한다면, 

혁명에 대한 태도로는 더욱 의문만 품을 수 있겠다.  

바로 갈고 닦는 기질 없는 품성론만 남을 뿐이다.  


힘든 탓일까. 이를테면 파시스트와 같은 악랄한 미래주의자들마저,  

혁명이란 '종교적인' 내세에서만 완수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보고 싶어하는 내세란 없다. 단지 현세로는 다음 혁명을 완수하도록 도울 뿐이다.

환상이라는 꿈을 짓밟아 미안하다.    


어서 더욱 깨어나, 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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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라고 불린 빨치산(파르티잔) 역사를 다뤄보겠다. 

바로 붉은 깃발을 세운 <게릴라전>이다.    


- 클라우제비츠, <전쟁론>. 


- 체 게바라, <유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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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땅 주인이란 누구인가! 


국내로는 아주 오래된 고질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토지 문제다.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나오는 부동산 대책이라 불리는 정책이 바로, 매입과 판매라는 분배에서토지 문제로 해당하는 대표적인 문제인데, 주로 토지 문제를 사적 소유로 다루기 보다는, 

개인에 대한 사익(친일), 환경이나 개발로 치부하는 경향주의도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는 특히 마르크스주의 독자들이라면, 그러한 고질적인 토지 문제란, 모든 정부가 해결하지도 못했다고 하는, 바로 경제주의자들은 지주와 농민들로 단순하게는 결부해버렸기 때문이다. 지방으로 가다보면, 현상은 매우 뚜렷해진다. 이를테면 농민층에서도 생겨나는 오래된 빈부격차라든가, 늙어버린 조합주의라는 행태로부터 부패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로, 토지 문제를 수도권 문제로 여기거나, 더군다나 집중된 탓에 분산하거나, 수도를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들은 철 지나도록 나왔지만, 

주위 인프라만 다뤘었지, 정작 토지 문제를 지적하지는 못했었다. 


왜냐하면, 


1. 바로 소유권이라는 일부로 사유 재산권이라는 법적인 제도마저 

지배계급들을 위한 일부로, 보호하거나, 받고 있기 때문이다. 계약을 해서,

농사를 짓는 임농들도, 아무리 생산력 비중을 둔 농민층들이 줄어들었다고 하더라도, 

토지 문제만 바라보거나, 개발 정책에 대한 반발로만 머문다면, 

정작 토지 문제에서 실질적인 사유재산 문제를 못 볼 수 있다. 


2. 진보적인 자유주의에서도 특히나 신자유주의라는 관점에서는, 토지 문제를 두고, 

착취가 발생하거나, 심지어는 기업 간 경쟁으로부터 약탈, 그리고 개발을 위한 소급화 계약

으로 보기를 거부했다. 따라서 그들은 매우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올바른 토지 문제를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정부 정책에서도 실패하고 말았다.  


모든 토지 문제란, 사유 재산이라는 문제와 불가결하다.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하는 한 도시든, 지방이든, 누적된 개발 정책에 대한 비리, 시공사와 마찰, 토지 임대 간의 분쟁 등, 그리고 도시에서 일어날 수 있는 대부분 모든 문제들은 모두 자본가들과 토지를 많이 가진 지배자들에게 이롭다. 그리고 합법화된 유산을 포함한 상속세는 감당할 수 있을만큼 그들에게도 분배한다. 따라서 그러한 문제를 사유 재산과 떼어졌다고 본다면, 경제 문제를 실용적으로만 접근했기 때문이다.     


한 예시로, 초기 볼셰비키 소비에트는 달랐다. 왜냐하면, 수 많은 빈 토지들에 대해서도 국유화를 정해서, 단지 소수 개인들에게 소유함이 아니라, 식량 생산을 조달하고자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토지 비옥도까지 계산할 정도로 일정하게 배분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누구든 더욱 효율적으로 농업 생산, 목축도 제공할 수 있었다. 이를 두고, 현대인들은 말 안되는 생각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사유지 이권 다툼은 분배 문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배계급관을 가지거나, 속한 개인에게 자유로운 민주주의란, 과연 어리석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국내에서도, 경제적으로 토지 분배가 왜 잘못됐는지와 생산과 유통이라는 분배 과정에서도 

매우 불합리하고, 착취도를 조사해서 따로 보고하도록 하겠다. 

또한 그러한 잘못을 먼저 따지는게 바로 대책(대안)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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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위당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잘 모를 수도 있겠다.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정당 조직이란 단지 권력 기구이면서도 정치적 참가권을 보장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홍보는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강화하도록 하는 방편이었을 뿐이다. 이를테면 현수막이나 전단지 투표 때나, 평소에도 합법화됐다는 정당 홍보들이란, 정작 기만적이고, 노골적이고, 때로는 은밀하기까지 하다. 정당에 대한 무관심과 투표에 대한 재촉으로부터, 부르주아를 공고히 하려는 '차이'를 부각하고자 했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노동에 대한 법률적 개혁이나, 말 뿐인 혁명을 추구하는 소수 정당들도 늘었지만 잘 통합되지 않는 이유란 무엇일까. 현대로 들어설수록 더 퇴보하지만 당시 러시아와도 비견된 사회민주당이라는 이름은 국내에서는 같은 정당 이름으로도 등장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신자유주의를 옹호하고, 과거 질서를 고스란히 베낀 정책들로 민주당과 다름 없는 부르주아 정당으로 드러내고는 말았다. 이런 방향들은, 정치에서도 노동계급들을 분열하도록 만들고, 심지어는 소수 정치인이나 활동가들로부터 뒤쫓도록 만드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리고 매체도 발전했다. 따라서 지배계급을 위한 암묵적인 검열도 늘어났다. 


그러나 특히 과거 소련에서는 레닌이나,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2세기나 앞선 19세기에도, 부르주아 정당과 프롤레타리아 당이 수행할 수 있는 임무나 과제를 잘 구분하고, 나누어서 제시했었다. 그리고 부르주아 정당에 대한 한계를 명확하게 말했다. 바로 선전과 선동에 대한 다름이다. 꽤 잘 알려진 독일 초기 스파르타쿠스 당에서도 당에 대한 목적으로 수단 삼아 지배 권력을 공고히 하거나, 노동 계급을 기만하려는 목적은 결코 아니었다. 바로 전위당이라는, 노동계급들에 대한 혁명을 선전, 선동을 목적으로 이뤄진 조직이자,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당이 실질적으로 수행하는 건, 물론 정치적인 의사를 고려한 결정들도 있었겠지만, 주로 분파에 대한 분담, 혁명에 대한 역사적인 성과를 바탕으로 현실에서도 그저 장난감 같은 공상이 아니라, 이뤄낼 수 있는 여러 사안들을 소개하거나, 문제들을 알릴 수 있는 교육적인 매체이자 소식지였기 때문이다. 매체마저 발전하기 이전인지라, 정작 조직 안에 있는 사람들도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당들은 언제나 정치적 교육에서도 먼저 앞장섰다. 그리고 언제든 문제시되거나 필요하다면 해체할 수 있었고, 또는 매우 큰 이유로는 사익을 목적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 역사일 뿐이니, 정치도 느슨한데, 당이 도대체 왜 필요하겠냐고 반문하거나, 옛날 일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그리고 혁명가들이 임무를 수행하고, 활동할 수 있는 '당'이라는 존재란 그저 지배계급들을 위한 소식통, 소유권을 얻기 위한 단지 조직체가 아니라, 혁명에 대한 교육, 프롤레타리아트, 노동계급들에 대한 기관 역할로도 더욱 있어왔다. 지금은 공산권마저 무너지고, 공산당마저 부패한 상태다. 미안하지만. 적어도 그래서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은 볼셰비키들보다도 당에 있어서는, 전위당에 대한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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