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을 회상하며>.


"1906524, <물결>은 폐간됐다. 그러나 이틀 뒤로, 1906526, <전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발행했다. <전진>1906, 615일까지 있었다. 1906, 622, 볼셰비키 새로운 기관지 신문, <메아리>를 출판할 수 있었다. <메아리>1906, 77일까지 있었다.


예시: 당 기관지, <메아리> 1호.


주제: 마르크스주의와 미학. 


자유 기고. 단 적절한 논리를 충실하게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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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과학적인 실험이 아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완수한 뒤로 가정한다면, 몇 가지를 적용해볼 수 있는데,

이를테면, 문화에서도 해당한다. 우선 익숙한 자본주의 체제 속 사회에서도 

누리던 자본 문화들은 폐기하고 모두 일정한 혁명으로 도달한다. 

그리고 지배적이기만 하던 부가적인 양식들은 폐기하거나, 

맨 나중으로는 완숙한 무산 공산주의로 정점을 누릴 수 있겠다.  

각 운동이나 투쟁 내용들도, 공산주의 속으로 잘 구분해서 다룰 수도 있다.   

완수한 프롤레타리아트들은 보다 신중하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자본가들을 위해서만 일하던 노동가들도 척박하기만 하고, 턱없이도 부족하기만 하던 

여러 시설을 위해 직접 계획하거나, 제작하거나, 개선할 수 있다.    


방송국. 


작은 혁명 방송국이라도 있었으면 한다. 

전에는 거의 매번 라디오랑 대화했었다. 

현 사회로는 어느 라디오를 청취해봐도, 방송이라는 매체를 시청해도,  

자극적이고, 눈 아픈 영상이 책보다 유익한 적이 있던가.   

자본주의를 선전하고, 제국주의를 선동하는 매체는 끄고, 

프롤레타리아트로는 혁명으로 집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우습겠지만, 내용들도 주로 공산주의 혁명사로 옮겨진다. 


도서관. 


공산주의를 주로 다루는 도서관이다. 

대부분은 혁명 서적으로 비치한다. 

마르크스를 중심으로 모아 놓은 곳이다. 

번역하고, 정리해서, 책으로도 잘 묶어 모아 분류마저 잘 된 곳이다.  

그리고 지루하지 않도록 공원을 조성하고, 편하게 연구할 수 있는 자료실도 잘 꾸민다.  

빌릴 때도 밀리지 않도록 충분한 서적들은 여러 권 있다. 

또한 검열마저 생각하던 우리말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있다. 


보급소.


완수한 혁명에 대한 본보기로는 역시 경제 문제이다. 식사 중요하다. 그러나 식량은 선택에서도 더 중요하다. 이전까지 자본주의 경제로는 식량 생산이나 보급들은 유통에서도 부패하거나, 노동 과정에서도 부실한 식사마저 참 많다. 개발과 계발에만 몰두한 탓에 말만 앞섰지, 정작 농촌 지역에 대한 관심은 더욱 부재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 문제로는 필요하다면 따로 공동 운영 식당을 정하거나, 시장 경제가 아니기 때문에, 보다 자율적이기 때문에 계획하고 생산물에 대한 분배로는 신중하게 다루고, 계산한다.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도, 능력만큼 일하기 때문에, 폭 넓은 생산물을 분배 받거나, 직접 생산할 수 있다. 그래서 가격 경쟁 따위가 아니라, 직접 생산물에 대해서는 소외를 받는 착취 노동이 아닌, 보람을 얻는 일이다.      

    

두 영화를 추천한다. 


1. 라울 펙, <청년 마르크스>.


2. 스티븐 소더버그, <체 게바라>. 


두 영화로는 모두 자본주의 상업 영화로 제작하고, 수입했기 때문에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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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설이지만, 언어란 지배 수단으로는 매우 효과적이다. 국내에서도 문자에 대한 연구는 많아도, 

정작 계급을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고 지적한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우리말 연구는 많아졌다. 

바깥에서는 외래어가 아닌 우리말 쓰자는 움직임들도 더 세졌다. 그러면서 세종 한글이나 창제했다고 기원이나 떠들고는 초기 집현전, 근대 말모이 같은 여러 언어 운동들은 정작 빼버린다. 언어로도 선구적인 사람을 강조하지, 모여서 조직한 집단을 잘 기리지는 않는다. 


주로 한자어로 풀이해보자면, 한자어나 영문 표기를 쓰지 말자고 내세워도, 표기를 대체할 언어는 부족하다. 그러나 쉽게 만들어 볼 수도 있다. 자주 드는 예시로는 페미니즘이 있다. 여성주의로 바꾸기만 한다면 끝날 언어일까. 다음으로는 우리말로 새롭게 바꿔야만 하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者), 곧 놈이라는 말은 주로 사내에게 쓰이는 말이기도 하고, 여성주의자라고 한다면, 뜻을 퇴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도 같다. 성전환이라는 표기가 그대로 있음에도, 용어를 잘 쓰지는 않는다. 주로 외래 언어를 더 많이 쓰는 형국인지라, 주로 용어들이 생겨난 원인을 두고 딸을 위한, 딸에 대한 말이기 때문이라는 배짱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리고 언어를 영문과 한문으로만 고치고는 난해한 언어만 골라 쓰는 아주 '괴랄한' 철학자들도 있다. 번역에 대한 언어를 계급 수단으로 특히 지배계급도 쓸 수 있다고 못 보거나, 그저 손 맞잡는 연대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추종하는 일부 여성주의 운동가들도 타협주의와 지배계급적인 시각도 밝혀지겠지만, 더욱 심각하게 드러난 까닭이다. 비슷한 예시로는 공산주의 운동을 공산주의'자' 운동으로 표기하는 경우다. 


쓰는 말에서도, 우리말을 강조하는 다른 글들을 읽어봐도 말바꿈들은 나름대로 참신하긴 하다. 그러나 모든 교과목으로는 학습이 아닌 단지 시험을 위한 용도로만 제작했고, 어려운 말들을 풀어내지도 못한다. 도대체 시험을 수단으로 사교육 시장은 넓어지는데, 정작 혁명에 대한 흥미는 잃어가는 모순은 어디에서 기인하던가. 바로 언어를 만들어봐도, 지배계급들은 언어를 자본화된 생산 수단으로 이용하고는 꾀를 부리고, 사람들에게 쉽게 타협하기만 하고, 혀만 나불거리는 언어를 홍보하거나 팔도록 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라는 말 대신에 일꾼이라는 말도 있음에도 잘 쓰지는 않는다. 아직은 우리말로 바꾸는 번역들이나 움직임은 매우 어색하거나 적다. 그리고 국어가 바로 우리말이라고 예찬하는 국문학자, 문학가들은 한자어만 골라 쓴 행태를 부려왔음에도, 정작 글에 대해서는 거리낌마저 없다. 심지어 외래어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대중들은 얼마나 더할까. 


우리말에 대한 대표적인 예시로는 노동자를 들고 싶다. 세상에는 남성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여성 노동자들도 있다. 그러나 모두 일꾼으로 나온다면 좋겠지만, 현실이란 또 다른 싸워내야 할 일이다. 그래서 노동자도 노동자지만, 노동계급, 노동가로 주로 표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저 주어진 일을 하는 노동자들보다는, 더욱 무산 독재를 요구하고, 계급으로 싸워낼 줄 아는 노동가들도 더욱 많아져야만 한다. 


두서 없겠지만, 노동자든, 노동가든, 노동계급이든, 일꾼이든, 

부질 없는 노력이더라도, 자본가들만 판 치는 국내를 보노라면, 

그들에게도 맞서 참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건, 

프롤레타리아트, 무산계급이라는 많은 이름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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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끊은지는 참 오래됐다. 그래도 틈나면 읽고자 했던 아쉬움이 묻어, 

쓰지도 못한다면, 읽지도 못했다. 단지 수상을 했다는 축하가 아니라, 

어쩌면 전하지도 못하는 먼 미래로 보낸 글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라면, 아무도 전하지 못한 그런 글이라면 더욱 말이다. 

비좁고도, 도무지도 답답한, 조그만 땅에서.

이름 모를 사람들이나 쓴 글을 읽으면서, 어쩌면, 옥중에서도 쓰여진 글일 수도 있는 

작은 집에서 연설을 쓴다. 그러나 집이란 감옥이 아니다. 


축하라는 미명 아래로도, 싸우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작가에 대한 정신은 신비로운 미신만은 아니기를. 

그렇다고 마술도 아닌, 현실에 대한 이야기이기를 바래온 건 보탬이던가. 

상관없다. 


매우 젊고도, 일면식도 없이, 등단하겠다는 한 어린 애를 죽였다. 

바로 글로 말이다. 문학이란 참 쉽다. 

쓰기만 하면 바라는 대로 풀 수 있다.  

빈 터에서 가만히 앉아 

있지도 않는 청중들을 생각하노라면,


참 우스운 꼴이다. 

그리고 전쟁이란 너무나 쉬운 일이다. 

말하는 사람들은 적고,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벌써 죽었다. 

매일마다 지는 삶이란 바로 그런, 지겹도록 꾸준한 극복도 아니고,

너무나 사랑스럽고 사소하기 때문도 아니다. 

버티지도 아니하고, 짖기만 하던 개 같은 삶도 아니다. 

패 버릴 구원 노래도 아니라, 그렇다고 빈틈 없이 꼭 파고들지도 않는다. 


그런 말들이라면, 차라리 불 끄고 암실 속에서 적어나가는 글이란, 쓰기란 더 쉽다.  

그리고 시끄러운 책을 덮는다.  


공산주의 만세.  



<2023. 0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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