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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지금까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공산주의는 단지 이상적인 이념은 아니었다. 한 사상은 잘 다듬어지고 거듭 숙고한 결과로부터 생겨난 결과이기도 하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에 대한 아주 깊은 고민을 가졌다. <프랑스 내전>을 읽어본다면, 엥겔스 서문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공상에서 과학으로>도 특히 엥겔스는 공산주의가 자유 공화주의와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서술하기도 했다. 


매우 기초적인 문제이기도 한데, 그러나 오늘날 보수주의라고 불리는, 공화주의란, 진보적인 자유주의와도 매우 다르다. 보수주의에 대한 뿌리는 프랑스에서 잘 알려진 당파 논쟁에서부터 시작된다. 로비에스피에르와 자코뱅을 보면 잘 알 수 있지만, 테오르미도르 반동으로 잘 알려진 국민 의회로부터 매수된 선거를 치른 뒤로, 당시로는 귀족이던 부르주아 정치는 막을 내렸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에서 과연 오늘날에도 배울 점은 없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로비에스피에르는 여러 혁명가들에게도 귀감을 준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로는 프랑스 인민들에게도 도덕에 대한 평가를 선두적으로 지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화주의를 그저 내세우기만 하거나, 매우 기회주의적인 경향들 조차도, 그러한 공화주의 시각에 대한 논쟁을 프랑스 혁명이야말로, 매우 민주적이었다는 오해를 삼기도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새로운 공화주의를 비판하고, 공산주의를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반대를 이야기하는 새로운 주장들마저도, 부르주아 정치의 한 형태라는 공화 정치에 대한 민주주의를 말해왔지, 정작 프랑스에서도 공산주의에 대한 토론과 논쟁을 당파 논쟁과 분파로부터 제거하고는 말았다. 따라서 현대 프랑스 공산당마저도, 19세기부터는 매우 반동적인 행태를 부려왔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내전. 


따라서 오늘날에도 우리는 레닌에게 또 배울 수밖에는 없다. 아니 확실하다. 우리는 빈약한 사상과, 논고만 드러내고 마는 처음부터 일찍 멘셰비키주의에도 가담한 트로츠키주의나 소비에트를 반동기로 이끈 스탈린주의로부터도 아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레닌은 죽은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여전히 우리로는 마르크스와 같이 깊이 배워야 할 유효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직 프랑스 혁명에 대한 깊은 숙고와, 같이 일어난 내전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부터도, 그리고 여러 공산당들에 대한 공화주의 혼돈에 대한 경향과 과오로부터도, 단지 호소 시위나 연대 행진에만 그치고마는 매우 '일반적인' 투쟁 형태를 보아도, 오늘날은 레닌에 대한 지침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해야만 하는 이유와, 혁명 전투를 벌일 수 있는 근거에 대해서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명확한 한계와, 또 현대에서도 드러난 반동 정부들에 대한 '현실'에서도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혁명 시기, 사회민주주의당 두 가지 전술>에서도, 명쾌하게 구분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란 국가로도, 일터에서도 어떠한 점에서 달랐는지를, 더욱 확실한 방향과 목적을 잘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사실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공산주의란 단지 이상이 아니라, 실현할 수 있는 현실이라는 걸, 겉으로 드러나기만 하는 현상이 아니라, 입증해야만 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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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에서도 이론이란 단지 저작으로만 머물고 만다면, 죽은 학문과 학술로만 내세울 뿐이다. 따라서 현재에도, 지배 과학으로부터 부르주아지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어떻게 '관념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지를 고발한다. 그리고 실천이란 법칙을 적용하고, 구현해내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혁명가들은 혁명을 과학으로 연구하는 이유란, 바로 운동가들에게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명이다. 우리는 늘 학자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배운다.   


진화론.


지배적인 생각에서 진화론이라는 발전 법칙은 신유물론으로 환원하거나, 물리주의로 고수하는 시각들로는 진화가 곧 진보를 꼭 보여주지는 않는다. 진화론이란 생물에 대한 역사적인 발전이나, 변천사를 의도적으로 집단주의로 개량화하거나, 우생학적인 발달로부터 일정 부분 기여해왔다. 그러나 신다윈주의로는 파시스트 부상에 대해서는 설명할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파시스트 이론들도, 사회 진화론을 일부분 수용했기 때문이고, 우월주의에 대한 자유를 더욱 보장하고자, 생물체에 대한 경험적인 현상마저, 인간에게 대입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기계적인 발전 법칙으로만, 수용된 진화론에 대한 시각으로는, 계급적인 우월주의에 대한 시각마저 판치기에 이르렀다. 


천문학. 


아인슈타인에게도, 보이는 상대성 이론이라는 경험적인 현상 법칙이란, 형이상학적인 우주에 대한 만물 창조에 대한 기원을 풀어주는 듯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변증법을 간과한 자연 현상에 대한 일반적인 추론으로부터 해석된 물리주의를 그대로 계승했을 뿐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론이란, 창백한 푸른 점이 아니라, 회색에 불과할 뿐이다. 엥겔스는 <자연 변증법>에서도 먼저 증명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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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을 기념하는 촛불이 아니라 시체를 불태울 횃불이 더 필요하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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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제라는 경제사. 


백남운, <조선사회경제사>를 한 번쯤 읽어본 독자들이라면, 조선에서도 말기로는 황제가 있었다는 점은 잘 알겠다. 바로 봉건제에 대한 무비판을 수용한 채로부터, 독립 운동이라는 민중 운동으로도, 확장했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출범한 뒤로는 이승만은 곧바로 봉건제를 비판하지도 못했고, 군부 독재로부터 권력을 곧 빼앗기고는, 군부 독재 아래로도, 봉건제를 충실하게 이행해갔다. 그리고 봉건제로부터 남겨진 문화는 곧바로 관료제로 옮겨졌다. 토지 소유에 대한 봉건제 아래로도 소작농들은 임대가 있기 전부터, 농지에 대한 토지를 두고도 줄곧 다퉈왔다. 조선에서는 바로 일정한 토지를 소유한 귀족을 민중들이 비판했다는 점이다. <조선사>로는, 신분제라는 차별로부터, 분노는 쌓였고, 결국 조선사 말기로부터 이르러서는, 일제로부터 터지고는 말았다. 굴욕 외교라고 불리는 여러 사건들을 거치면서부터, 외부 침략을 받았고, <토지> 문제란 공유지가 아닌, 사적인 소유지로 무단으로 만들어버렸다. 


<시국 선언>. 


그러나 조선사를 두고 봉건제로 비판하고자 한다면, 먼저 앞서 말한 해당 저작을 읽어볼 필요는 있겠다. 그리고 <고대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부르주아지들 간 파벌들이, 엥겔스도 지적했던, 사유 재산과도 엮여있기 때문이다. 봉건제를 두자면, 학술가들은 시국 선언을 빌려 줄곧 말하곤 한다. 그러나 당부하고는 싶다. 민주당에게 우리는 관심 없다. 그리고 그들만의 중립적인 태도로는 대책마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적'이라 부른다. 


<어두운 시절>.


역사서를 읽다보면 간혹 국가를 중심으로 강화했고, 정비했다는 서술을 볼 수 있다. 곧 봉건제를 말하고,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탄압했고, 학살을 자행했다는 뜻을 숨긴다. 거의 산 사람을 두고는 아무도 없어서 붙인 교묘한 말이다. 무언가 내용도 없이 그저 비어 있다면 의문을 품을 필요는 있다. 괜히 중세를 두고 암흑기라고 말한 데도 다 이유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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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인혁, <사상 논쟁>이라는 자료를 모두 정리했다. 그러나 사상 투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 투쟁을 간과하기 쉽다. 민주화 운동이란 학생 운동에서 주로 주도했다는 한계를 지녔고,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한계를 보이고는 말았다. 그러한 역사는 현재까지도 이어졌다는 점이다. 사실 운동권 역사로는 북한이 아니라, 매우 드문 중심으로는 ML파들도 있었다. 실제로는 공산주의 운동사는 독립 운동사보다도 매우 오래된 역사를 지닌다. 따라서 비단 학생 운동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공산주의 운동은 제법 많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본 당국의 치밀한 수사와 협조로부터 힘 입어서,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북한으로는 김일성으로부터 파벌 투쟁을 마친 끝에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을 수립하고자 했지만, 정작 인민 공화국이라는 건설에서도 실패하고 말았다. 바로 김일성이 스탈린주의를 매우 잘 수용했기 때문이고, 여운형, 박헌영을 비롯한 여러 공산주의 운동가들마저 저버리고, 민족주의 운동을 그대로 수용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숙청 당한 이들이 벌였고, 6.25를 일으켰다는 북한 전체에 대한 오명으로도, 다시 한 번 말하고, 역사라는 작은 교훈으로도, 내전에 대한 지배 각축전을 끝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한 가지,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로버트 스칼라피노, 이정식,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이다. 매우 거대한 분량으로 정리된 글이지만, 여전히 문맥, 내용으로도 자유 논거를 바탕으로 서술하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이 아닌, 학술적인 부르주아 비판이라는 시각으로만 머문다. 따라서 운동사로는, 일본 경찰과 밀정들에 대한 수사를 중심으로부터 자료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는 한계를 보인다. 왜냐하면 부족한 파벌 문제, 자료에 대한 소각으로부터도, 증거를 찾기란 매우 어려웠고, 또한 극악무도했던, 탄압을 받던 한국 독립 운동가들 가운데로는, 특히 공산주의 운동가들에 대한 이견들은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민족주의 운동으로 부상해왔고, 잘 알려진, 김구 선생과 같은 '분들마저' 부르주아 운동이라는 시각 아래로 갇혔지만, 실제로는 북한에서도 다루지 못했던, 과거 공산주의 운동가들은 전투적인 민족주의 운동가들만큼 더욱 극심한 탄압을 받았고, 힘든 고문을 겪었다고 한다. 자료를 찾을 수 있는 한, 부족한 강령마저 이행할 수 없어,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공산당 건설 요인들을 살펴보고, 민족 운동과 어떠한 점에서도 차이를 보이고, 왜 방향마저 달랐는지를 여기서는 서술한다.      

   

그리고 레닌 사후로부터도, 스탈린 집권 뒤로는 한국 공산당 건설에서는, 운동가들은 어떠한 분열을 겪었고, 심지어는 마오가 부상한 뒤로는 소련 분열에도 일조했는지를 대외국으로부터 낀 상태로 처한, 소련과 국적을 버린 공산당들이라는, 프롤레타리아트로는 아픈 역사를 더욱 들춰내고자 한다. 


우리는 과거로도, 현재로도, 그리고 닿는 한 앞으로도, 단지 역사에 대한 성과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밖으로는 공산주의를 지지하고, 또한 안으로도 여러 투쟁을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를 잘 아는 공산주의 운동가들이라면 더욱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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