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 마찬가지로 가끔 너와 같이 산책을 하거나, 햄버거를 먹는 생각을 하곤 한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거나, 창 밖에 내리는 비를 보면서 잠도 들고 싶었다.

눈이 오면 눈싸움을 하고, 더운 날에는 빙수를 만들어 먹어보고 싶었다.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다가 우습지만 호텔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면서 한가하게 웃고 싶었다.

 

가끔 멀리 차를 타고 가거나, 스쿠터를 몰아보는 생각도 했다.

라면을 먹을 때도, 설거지를 하면서도 그릇을 치우면서 다른 사람이 해준 맛도 아니고

미안하지만 너가 차려준 맛있는 밥을 생각해보곤 했다.

 

여행을 가볼 때면, 존경하는 사람의 생가에 들려 같이 어울리는 꽃 하나 올려주고 싶었다.

체스나 바둑을 두거나, 같이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보면서 뭔가를 만들고 싶을 때도,

놀이공원에서 유치한 장난이나 치면서, 롤러코스터를 탈 때도.

실은 그게 재밌는 줄 몰랐다.

 

날이 좋으면 한가하게 싫증도 내보다가도,

머리 아픈 책을 읽고 주구장창 논쟁하다가도,

아프면 아픈대로 괴로워하다, 각자의 방에서 한바탕 뒹굴고 싶었다.

 

아무런 비용을 생각하지 않고, 또 다른 누군가의 희생도 생각하지 않는 너와의 만남을 생각했다. 우습겠지만, 이게 내가 생각한 사랑의 모습이다. 별 일 없다.

비록 그런 세상은 없더라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전에 힐퍼딩과 부하린은 관세 부과가 시사하는 바를 앞서 제시한 적이 있어서 공유한다.  



금융자본은 자본의 통합을 의미한다. 산업자본·상업자본·은행자본의 이제까지 분리됐던 영역들이 이제는 대금융단의 공동지도로 놓이게 된다. 금융단에는 산업과 은행의 실세들이 긴밀한 인적 결합으로 통합됐다. 결합의 근거는 대규모 독점적 결합으로부터 개별자본가들 사이에서 자유 경쟁을 제거한 것에 있다. 더불어 국가권력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관계도 변화한다.

 

부르주아적 국가관은 중상주의 정책에 대한 반대 투쟁, 그리고 중앙집권적이며 특혜제공적인

국가권력에 대한 반대 투쟁 속에서부터 생겼다. 국가관은 한편으로는 대규모 무역회사·식민지회사의 특권과 독점, 다른 한편으로는 폐쇄적인 동업조합의 특권과 독점에 대항해서, 초기의 자본주의적 메뉴팩처와 공장 제도의 이익을 대표한다. 그런데 국가의 간섭에 대한 반대 투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먼저 국가의 경제 입법이 불필요하고 유해하다는 것을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시 말해, 경제체제 그 자체를 규제하는 법칙이 국가 입법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해야만 했다.

 

이리하여 부르주아의 정책은 경제학에 근거를 두게 되고, 중상주의에 대한 투쟁은 경제적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되며, 이것은 다시 국가의 보호·감독에 반대해 개인적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으로까지 확대됐다. 이러한 견해가 어떻게 자유주의라는 세계관으로 개화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기서 상세히 논의할 수는 없지만, 이것만큼은 지적해두고 싶다. , 경제적 자유를 위한 투쟁이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이 생기기 이전에 승리한 곳인 영국에서는 자유주의는 이러한 세계관을 포괄하고 있지 않다. 프랑스의 자유주의가 촉발했던 모든 도덕관과 종교관의 혁명적 타파는 영국에서는 대중적 의식 속에 뿌리내리지 못했지만, 반대로 경제적 자유주의는 대륙보다 영국에서 강하게 관철됐다.

 

그렇지만 영국에서조차 자유방임의 승리는 완전하지 못했다. 은행제도는 자유방임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은행업 자유의 이론은 잉글랜드 은행 총재들의 현실적 요구 앞에 굴복했다. 맨체스터 학파의 자유무역 이론이 대외 정책의 실제에도 영향을 미친 것은 더욱 적으며, 대외 정책은 19세기에 와서도, 17세기나, 18세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영국 세계 무역의 집행력이었다. 대륙에서는 자유주의 운동은 영업과 직업의 자유를 성취하는 것에 한정되어 국내 정책의 원칙에만 머물렀으며, 대외무역정책은 매우 당연하게도 계속해서 보호주의적이었다. 영국의 자유무역 정책은 결국 자본주의의 선도적 발전과 여기에서 유래하는 영국 산업의 기술·경제적 우월성에 의거하고 있었다. 이러한 선도성은 결코 자연적인 원인에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적인 것들도 중대한 역할을 했다. 예컨대 근대적 수송 체계가 발달하기까지는 수상 수송과 철광석·석탄의 장소적 인접성에 의한 운임 절약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 자본주의적 발전은 자본축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영국의 보다 급속한 자본축적은 주로 해상지배와 식민지지배를 둘러싸고 스페인·네덜란드·프랑스와의 세력 투쟁의 결과 때문이었으며, 또한 소규모 농민에 대한 대토지 소유자의 승리에 뒤따른 급속한 프롤레타리아화 때문이었다.



힐퍼딩 - <금융자본론>, 

무역정책의 전환 P. 434-436.

 

 

집적이란 자본이 자신이 생산한 초과가치를 자본화해 자기 증식하는 것이며, 집중은 다양한 개별 자본이 하나의 자본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자본의 집적과 집중은 다양한 발전 단계를 거친다. 우리는 이 단계들을 살펴봐야만 한다. 여기서 우리는 두 과정, 즉 집적과 집중이 언제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에 유의해야만 한다. 자본의 집적이 거대해지면 대기업의 소기업 흡수가 가속화된다. 반대로, 집중은 개별 자본의 축적을 강화하고, 따라서 집적 과정을 가속한다. 집적 과정의 초기 형태는 개별 기업의 자본집적이다. 이 형태는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 동안 지배적이었다. 이때 사회적 자본의 축적이란 경쟁자로서 서로 대립하는 개별 기업 간의 자본축적으로 나타났다. 주식회사가 발전함에 따라 수 많은 개별 기업가의 자본을 이용할 수 있게 됐고, 기업의 개인 소유 원칙이 근본에서 무너졌다. 이것은 거대한 독점적 기업가 연합의 전체 조건을 만들어 냈다. 이때 자본의 집적은 또 다른 형태, 즉 트러스트의 집적이라는 형태를 취했다. 자본축적은 이제 개별 생산자의 자본이 아닌 기업가 연합의 자본을 증대시키는 수단이 됐다. 축적이 엄청난 속도로 이뤄졌다. 자본가 소집단의 필요를 훨씬 뛰어넘는 거대한 규모의 초과가치가 자본으로 전화돼 운동의 새로운 순환으로 투하된다. 그러나 발전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개별 생산 부문은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돼, 대규모로 조직된 하나의 집단을 이룬 금융자본이 나라 전체를 강력하게 틀어쥔다. 국민경제는 금융 집단과 국가가 형성한 하나의 거대하게 결합된 트러스트로 전화된다. 우리는 이 조직을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라고 부른다. 물론,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를 정확한 의미의 트러스트 구조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후자는 훨씬 더 중앙집중적이고, 훨씬 더 무질서한 조직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는, 특히 자본주의의 이전 단계와 비교하면 이미 어느 정도 높은 수준에서 일종의 트러스트와 같은 조직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로 간주할 수 있는 상태로 이르렀다. 따라서 우리는 훨씬 더 큰 사회경제적 분야인 세계경제를 구성하는 부분으로서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의 자본집적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것이다.

 

 

부하린, <세계경제와 제국주의>, 

세계적 규모로 벌어지는 자본의 집적·집중 과정의 재생산, P. 158-159.






19세기 자료지만, 부하린의 <세계경제와 제국주의>, 세계 경제의 성장에서 참조했다. 



힐퍼딩, <금융자본론>, 슈보너 박사, <통계로 본 이자율과 공황>(1907), 이자율. 



레닌, <제국주의, 자본주의 최고 단계>, 열강 간의 세계 분할. 



마르크스, <뉴욕 데일리, 1859. 9. 23.>, 제조품과 무역.



미국에서 이번 트럼프 행정부가 처음부터 내건 최대 관건이자, 실수가 있다면 아마 관세가 아닐까. 전 세계에게 부과하는 관세란 그가 종전 협상을 이끌어 전쟁을 끝내고 싶다는 의사가 아니라, 자신들의 보호 관세로부터 수출입에 대한 무역 조치에서 세금을 더 부과하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을 설명하고자, 여러 학자들은 어려운 말을 더 쓰고 앉아 있다. 자그마치 미국에서 가스 자원을 모을 수 있는 덴마크 그린란드에 대한 영토 소유권을 내세우는 바도 같은 이유이다. 이를테면 트럼프 행정부는 타국적을 지닌 난민을 범죄자로 자주 여긴다. 오히려 트럼프는 미국에게 남은 빚을 전 세계에게 갚으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패권을 가졌다는 국가에서 내세운 관세 조치가 트럼프 행보에서도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기업가에게도 손을 뻗은 그가 지지도를 올리고자, 포퓰리즘이라는 대중 전선에게 더욱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관세 부과 조치가 과거에는 전례 없던 사례였을까.    


생전에 마르크스는 <뉴욕 데일리>에서 원고료를 얻고자 기사를 쓰기도 했었다. <이코노미스트>의 견해에 대한 반박과 비판이 주를 이뤘다. 물론 1850년대에 쓰여진 오래된 기사이지만, 시사하는 바도 분명 있다고 볼 수 있는 이유란 무엇일까. 바로 대영제국과 남북 전쟁이 벌어진 미국 관계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대영제국은 동인도 회사 뿐만이 아니라 러시아, 중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에서도 여러 분쟁을 일으켰다. 마르크스는 주로 무역에서 벌어지거나, 국가 간에 일어날 수 있는 거래 문제를 심도 깊게 다뤘다. 한 예로 중국 상해에서는 대영제국 간 차 무역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었는데, 차 수요가 너무 많아서 상해에서는 조치를 취하고자 관세를 부과했는데 오히려 적자만 기록하고는 지불할 수 있는 수수료도 턱 없이 부족했었다.


그런 상품 품목에 대한 관세 부과는 한 상품에 대한 폭발적인 증가가 있을 때, 특히 수요를 줄이고자 내리는 경제 정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 부과를 수출입에 대한 상품 수요에 따른 차선이 아니라, 오히려 무역 거래에 대한 기회로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런 방식이 미국에서도 먹힐지는 함부로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경제 현상으로 택한 관세 부과란 오히려 현재 사정으로 쉽지는 않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스트리아.

 

19411125.

 

슐루르프 운동 구성원이던 오스트리아 젊은이 3명은 히틀러유겐트 게시판을 파손한 혐의로 게슈타포에게 체포됐다. 슐루르프는 나치즘과 군사주의, 인종주의, 노동 윤리 등을 거부하는 오스트리아 노동 계급 젊은이를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그들은 머리를 기르고, 재즈와 스윙 음악을 들었다. 남성들은 각진 더블재킷을 입고, 여성들, 일명 슐루르프 고양이들은 무릎까지 오는 색색 원피스를 입었다. 나치는 슐루르프 위협을 박멸하는 운동을 벌였고, 많은 슐루르프들이 거리에서 히틀러유겐트와 맞서 싸웠다. 연합군이 승리한 뒤 새로 세워진 민주 정부도 노동 규율과 권위를 거부하는 젊은 노동자들을 슐루르프라고 비난했다.

 

우크라이나.

 

1943, 113.

 

우크라이나, 반 나치 레지스탕스 투사, 울랴나 마트비이우나 흐로모바는 독일군에게 처형 당했다. 사흘 전 체포된 흐로모바는 동지 이름을 대라던 나치에게 잔인한 고문을 견뎌냈다. 나치 요원들은 호로모바를 구타했으며, 금속 채찍으로도 때렸고, 뜨겁게 달군 다리미로 지지고는, 피부를 벗기고, 신체를 훼손하고, 머리카락을 전부 잡아 뜯고는, 상처에는 소금을 문질렀지만, 동지들을 배신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흐로모바는 시를 암송하면서, 동료 수감자들 사기를 높여줬다.

 

 

1943, 618.

 

우크라이나, 18, 반나치 투사 마리아 키슬랴크는 동료, 표도르 두네코, 바실리 부그리멘코와 함께 처형당했다. 마리아는 나치 장교 2명을 유횩해서, 숲으로 끌고 갔고, 그곳에 있던 동료들은 살해했다. 처음 게슈타포에서 체포됐을 때, 마리아는 자백하지 않았고, 곧 풀려났다.

그러나 뒤로는 게슈타포는 민간인 100명을 일제히 검거하고는 살인범은 나오지 않는다면,

전부 죽이겠다고 을러대자, 동료들과 함께 자백했고, 마리아는 자신을 조직 지도자라고 주장했다.

 


유고슬라비아.

   

1941, 622.

 

나치, 유고슬라비아, 절멸에 대응해서는 최초 파르티잔 부대, 시사크인민해방파르티잔분견대(SPLPD)를 창설했다. 대원 79명은 대부분, 크로아티아계였다. 나다 디미치같은 세르비아계 여성도 있었다. 크로아티아는 622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반파시즘 투쟁 날로 기념한다.

 

 

이탈리아.

   

1918년 12월 16.

 

이탈리아 타란토에 주둔하던 영국령 서인도 제도 연대 소속 흑인 병사들이 끔찍한 인종차별에 맞서 폭동을 일으켜 상관들을 공격했다폭동은 비록 무력 진압 당했지만여기에 참가한 많은 병사는 후에 카리브해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서도 식민 지배에 반대하는 노동자 소요에 가세했다.


1921년 7월 21.

 

이탈리아 사르자나 반파시스트들이 시내에 모인 파시스트 600명과 맞서 싸웠다파시스트들은 3일 전 공격을 벌인 혐의로 체포된 파시스트 분대의 석방을 요구하고자 모였다관리들과 파시스트들 사이에서 교섭이 진행 중인 가운데 몇몇 파시스트가 총을 쏴 군인 한 명이 사망하고 경찰 한 명이 부상을 입었다군대가 응사했고뒤이어 지역 주민들이 도망치는 파시스트들을 추적했다반파시스트 단체인 아르디티델포폴로에 속한 이들이 다수였던 주민들은 파시스트들을 주변 농촌까지 추적하며 18명을 죽이고 30명에게 부상을 입혔다이탈리아에서 점점 더 몸집과 폭력성을 키워가던 파시스트 운동이 처음으로 대규모 반격에 부딪힌 사건이었다.


1922년 7월 31.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파시즘에 맞서 무기한 총파업을 선언했다하지만 민족주의 노동조합들은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고중간계급과 자본가들은 파업을 분쇄하려는 파시스트들을 지지했다이틀 뒤파시스트들의 우월한 군사조직이 이탈리아 대부분 지역에서 파업을 깨뜨렸고이탈리아의 도시 바리와 파르마의 노동자들은 8월 7일까지 파업을 이어갔다.


1926, 4월 7.

 

이탈리아로마에서는 49아일랜드 귀족평화 운동가였던 바이올렛 깁슨은 파시스트 독재자베니토 무솔리니를 암살하고자 시도했다깁슨은 천()로 감싼 권총무솔리니차창을 깨뜨릴 돌덩이 하나로 무장한 상태였다무솔리니 머리를 향해 총을 쏘는 순간무솔리는 움직여서 총알은 양쪽 콧구멍을 스친 채로 지나갔다깁슨은 다시 총을 쏘려고 했지만 거의 죽기 직전까지 무자비한 몰매를 맞은 끝에 경찰에게 체포됐다.

 

깁슨은 의사들에게 정신 이상을 호소하고는 석방을 위해 애썼다대화를 하거나편지 속에서는 명료하고이성적이었다자녀는 없었기 때문에 심리적 문제도 있다고 해석했다이전에 자살 시도를 했고파시스트 동료 재소자를 폭력적으로 대하기도 했다그래서 정신이상자로 간주하도록 만들었다결국 깁슨은 영국으로 추방했고정신 병원에서 여생을 보냈다사망했을 때는 정작 장례식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1939년 10월 4.

 

이탈리아인 이민자 무정부주의자 아르투르 보르톨로티루제로 벤베누티에르네스토 가바비토리오 발로피는 캐나다의 전쟁법에 따라 체포됐다보르톨로티는 방아쇠 없는 권총을 소지한 혐의였고나머지 3명은 반파시스트적인 전복적인 문헌을 소지한 혐의였다이들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탈리아로 추방하겠다는 위협도 받았는데사실상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다행히도 무정부주의자 엠마 골드만이 이들을 돕고자 팔을 걷어붙이면서부터 지원 위원회를 조직해서 석방 압력을 가하고는 볍률 번호를 위한 기금을 모았다골드만은 노동자 변호로 유명한 변호사와도 접촉해서 모두를 석방시켰다보르톨로티는 2-3주가 걸리긴 했지만 그 또한 석방됐다골드만은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지면서 자신에게 책임이 있따고 주장했다골드만은 3개월 2주 뒤 보석으로 석방됐고, 1940년 2월 13일 추방형을 선고 받았다같은 해 5월 골드만은 사망했고추방형은 이전에 취소됐다.

 

1943, 3월 5.

 

금요일 오전 10파시스트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자리한 자동차 공장 피아트 미라피오리에서 소수 노동자들은 일손을 놓으면서 파업을 시작했다주말 동안 파업 호소는 도시 노동계급 지구들로 확산했으며월요일에 이르러서는 철도 노동자를 비롯한 공장 노동자들도 행동으로 가세했다일부 노동자들은 규정에도 맞춰 작업을 했다작업 규정을 엄격하게 따르자 생산 속도는 현저하게 느려졌다일주일 만에 노동자 10만 명은 전쟁 보너스 지급이라는 전반적인 요구 외에도 많은 요구를 내걸고는 파업에 들어갔다당국은 노동자 850명을 체포했지만 파업을 깨뜨릴 수는 없었고노동자들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분쟁 뒤로 파시즘에 맞선 저항도 고조했으며시위로는 같은 해 무장 레지스탕스 인기럴 얻는 데 이바지했다.


1944, 3월 23.

 

로마라셀라 거리에서는 이탈리아 파르티잔 레지스탕스 역사상 나치 점령군에게 가한 매우 대규모 공격도 벌어졌다공산주의를 이끄는 파르티잔 애국행동그룹(GAP) 구성원 10여 명은

레지스탕스와 싸우는 임무를 띤 독일인 150명으로 이뤄진 나치 친위대(SS) 중대를 기습했다.

 

파르티잔들은 사제 폭탄을 터트린 뒤로 박격포수류탄총으로 집중 사격을 더하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레지스탕스 부대는 사상자는 전혀 없었지만친위대는 30여 명은 사망하고, 100여 명은 부상을 입었다.

 

격분한 나치스는 책임자를 잡지도 못하자 이튿날 355명을 학살했다일부는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체포된 사람들이었지만대부분은 아무 관계도 없던 민간인들이었다.

 

1945, 3월 13.

 

이탈리아노동계급 자매로는 베라 아르두이노리베라 아르두이노아버지손님 1이웃 몇 명과 함께 파시스트들에게 처형당했다지역 공장 노동자들은 장례식에는 대표단을 보냈고식도 진행하는 동안 작업을 중단했다한 소녀는 공장 지붕 위에다 붉은 깃발을 걸었고어느 전기공은 파시스트들에 대한 지원 요청을 막고자 전선줄을 잘라버렸다자매는 반파시즘

여성 레지스탕스 단체인 Gddd에서 활동했다.


1945, 4월 28.

 

이탈리아파시스트독재자베니토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북부 매체그라 마을 줄리노에서 반파시즘 파르티잔들에게 처형당했다.

 

1943공포 통치에서 물러난 뒤로부터무솔리니는 나치 군대에게 잡혔다가 탈출해서는 독일로부터 점령한 이탈리아 북부에다 괴뢰 정부를 이끌었다.

 

파르티잔연합군으로부터 이탈리아많은 지역들도 해방하자무솔리니는 독일 군복을 입고는 스위스로 탈출을 시도하는 가운데레지스탕스 대원 한 명은 무솔리니를 발견하고는대갈 장군 잡았다라고 외쳤다.

 

무솔리니로는 다수 고위 파시스트들정부(情婦)와도 같이 코모 호수근처에서 처형당했다뒤로 밀라노로 보내진 시신들은 다음 날아침이른 시간에로레토 광장에다 버러졌다곧이어 누군가는 어느 주유소 구조물에다 시신들을 매달았다지난해밀라노에서는 나치 독일 비밀 경찰게슈타포는 바로 같은 로레토 광장에서 이탈리아 파르티잔 15명을 공개 처형한 바 있었고무솔리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로레토 광장에서 흘린 피에 대한 대가를 톡톡하게 치르겠다고.


1949, 5월 17.

 

이탈리아몰리넬라레지스탕스 출신벽동공장 노동자 마리아 마르고티는 카라비니에 리국내 준군사 경찰에게 살해됐다전날 마르고티는 농업 노동자들이 세운 감시선에서 파업 파괴자들을 막고자 다른 여성들과 함께 서 있었다경찰은 유난히도 폭력적으로 공격했다따라서 5월 17경찰 폭력에도 항의하는 시위는 벌어졌다카라비니에리는 군중을 향해 기관총을 발포했고마르고티는 사망했다당시나이로는 서른넷이었다마르고티 죽음에 대한 대중 분노는 들끓었고전후 국가반노동 계급 정책에 대한 반대저항도 한껏 고조했다.


1969년 9월 23.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파업 중인 피렐리 노동자들이 트럭에 실린 타이어에 불을 지르자 경영진이 직장 폐쇄를 단행했다노동자들의 행동은 그리스에서 타이어를 수입한 경영진을 향한 항의였다직장 폐쇄는 곧 철회됐지만 피렐리 경영진은 투사 한 명을 해고하려 했다이에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파업과 시위를 일으켰고 해고는 철회됐다.


1969년 12월 12.

 

노동자와 학생들이 몇 달째 파업을 이어가던 중 밀라노 중심부에 있는 한 은행에서 폭탄이 터져서 16명이 사망하고, 68명이 부상을 입었다삭너은 처음에는 원외 좌파 소행으로 돌려져서는 수 많은 사람이 체포됐고무정부주의자 철도 노동자 주세페 피넬리는 경찰에게 살해됐고무정부주의 철도 노동자 주세페 피넬리는 경찰에게 살해되기도 했따나중에 가서야 국가와 연합한 극우파 소행으로 밝혀졌는데훗날 긴장 전략이라고 알려진 전복 세력 단손의 일환이었다. 2001년에 이르러서야 파시스트 3명은 범인으로 투옥됐다.

 


1971, 6월 1.

 

이탈리아밀라노수십 가구 노숙자들은 티발디 거리빈집들을 검거했다지역 공장 노동자,

건설 노동자실업자들 지지를 받은 사람들은, 2차례에 걸친 경찰 퇴거 시도에도 저항했고,

지방 정부는 140 가구에게 주거를 마련해줬다.

 


1977, 2월 17.

 

이탈리아노동총연맹(CGIL) 사무총장공산당원이던루차노 라마는 로마 라사피엔차 대학교를 점거하던 학생들과 합리적인 대화를 하겠다며학교를 찾았다. 200명도 넘는 어깨들을 경호팀으로 대동했다동행한 공장 노동자들은 파시스트들과 싸우러 가는 줄 알았지만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다수자리를 떴다라마는 발언하기로 한 구역에서는 이미 메트로폴리탄인디언들그러니까 1976-1977이탈리아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극좌파 시위운동가들아메리카 인디언 분장을 하고 상징적인 도시 게릴라 운동대학 및 공장 점거 운동 등을 벌였던 사람들이 다른 연단을 설치해놓은 걸 발견했다라마허수아비 인형거대한 발렌타인 하트 조형물그리고 말장난으로 이름을 비튼 구호로는, Nessuno L’Ama(하찮은 라마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아라는 뜻이었다), 학생들과 깡패들 사이에서도 물리적 충돌은 벌어지면서부터

라마경호팀 스피커는 박살 났으며캠퍼스에서도 쫓겨났다같은 사건으로도 유명해지면서이탈리아에서는 의회 외부 좌파는 한층 강해졌다메트로폴리탄 인디언들은 유머조롱을 계급투쟁 무기로 활용한 이탈리아 급진파 단체였다.


1977, 3월 11.

 

이탈리아볼로냐에서는 원외 극좌파 모임투쟁은 계속된다(로라콘티누아)에서 활동가던 24프란체스코루소를 경찰은 총으로 살해했다사망으로 이틀간 극심한 폭동도 벌어졌으며내무부 장관은 대학가를 비롯한 전투적 행동으로 집중된 도시 구역들에다 장갑차를 보냈다.


1980년 8월 2.

 

이탈리아 볼로냐 기차역 시한포탄이 터져 85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네오파시스트들의 테러로 발생한 이 사고는 유럽 역사상 최악의 테러로이탈리아 역사에서 긴장 전략 시기라 일컬어지는 때에 자행됐다국가 안보 작전 중에 극우파나 보안기관은 테러행위를 벌이고 이를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돌렸다.

 


1982, 123.

 

포뮬러원 그랑프리 드라이버 가운데 2명을 제외한 전원은 새로운 슈퍼라이센스라는 규정에 항의하고자 파업에 들어갔으며, 스스로 방에 갇힌 뒤 바리케이드로 봉쇄했다. 새로운 라이센스 규정은 드라이버들을 3년 게약으로 묶고는, 관할 단체인 국제자동차연맹(FIA)를 비판할 수 없도록 했다. 드라이버가 연맹을 비판한다면 평생 출전을 금지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파업에 참여한 드라이버들은 벌금을 부과받았지만, 새로운 라이센스 규정은 철회됐다.

   


크로아티아.

 

1921, 32.

 

크로아티아 도시 라빈에서는 약 2000명인 다국적 광부 집단은 봉기를 일으켰다. 전날 이탈리아, 파시스트는 노동조합 투사 가운데 1명을 공격하자 반란에도 나섰다. 며칠 뒤 광부들은

공화국을 선포했다. 공화국은 4월까지 지속됐지만, 군인 수천 명은 달려와서 반란을 진압했다.

 

   

포르투갈.

 

1974, 425.

 

포르투갈, 파시스트 독재 정부는 군사 쿠데타로 무너지고는 뒤이어 노동계급 봉기도 일어났다. 도시 노동자들은 공장을 장악하고는 농장 노동자들은 농장을 접수하면서부터 훗날 카네이션 혁명이라고도 불린 사태는 일어났다. 총성은 거의 울리지는 않았고, 사람들은 군인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줬다.

 

정권은 인기를 잃은 핵심 요인으로는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에서 벌어진 독립 운동을 상대로부터 장기간에 걸쳐 식민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혁명 뒤로는 식민지들뿐만 아니라, 카보베르데, 상투페프린시페도 금세 독립을 이뤘다.

 

20101124.

 

포르투갈 대부분 지역에서는 20여 년 만에 벌어진 총파업으로 멈춰 섰다. 총파업은 긴축 정책에 반대해서 일어났다. 교통, 제조업, 공공 서비스는 특히 타격을 입었다. 집권 사회당이 제안한 긴축 정책에서는 공공 부문 임금 동결과 함께 폭 넓은 민영화가 포함됐다.

 

 

폴란드.

 

1939년 9월 1.

 

폴란드 그단스크 우체국에서 일하는 노동자 56명이 무기를 들고 우체국을 접수하러 온 나치를 물리치려 하면서 유럽에서 2차대전 최초 전투가 벌어졌다노동자들은 경찰과 나치 진위대나치 돌격대 지원병과 현지 친나치 독일인들의 지원을 받은 독일 군대 첫 2차례 공격을 물리쳤다. 15시간 동안 전투가 이어진 끝에 살아남은 직원들은 불이 난 건물을 빠져나가고자 항복했다노동자들은 군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장 강도로 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됐다전사한 노동자들과 나중에 처형당한 이들은 사후에 강도 혐의를 벗고 명예를 회복했다. 1979년 그단스크에는 이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1943년 7월 20.

 

폴란드의 소비보르 절멸수용소에서 삼림작업반 소속 유대인 2명이 우크라이나인 간수를 습격한 뒤 다른 대원들에게 탈옥할 것을 설득했다폴란드 유대인 20명과 네덜란드 유대인 20명으로 구성된 삼림작업반은 나무를 베고 그루터기를 파내서 화장에 필요한 땔감을 모으는 일을 담당하는 곳이었다슐로모 포드흘레브니크와 요제프 코프는 포드흘레브니ㅡ가 신발 안에 숨겨두었던 칼을 휘두르면서 탈옥을 시작했다그렇게 폴란드인 수감자 몇 명 포드흘레브니크코프진델 호니그만하임 코렌펠드아브람 방아론 리히트는 탈출에 성공했다코프와 리히트는 탈출 이후 각각 다른 사건으로 폴란드의 반유대주의자들에게 살해당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전쟁에서 살아남았다이러한 탈옥사건 이후 수용소 살림작업반에는 폴란드어를 할 줄 모르고 그 지방의 지리에 익숙하지 않는 네덜란드 유대인들만이 배정됐다.

 

1970년 12월 17.

 

폴란드 그디니아에서 항만 노동자들이 물가 상승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자 정부는 이를 진압하고자 군인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렸다군대는 폭동을 막고자 사망자 수십 명을 어두운 밤을 틈타 묻어버렸다하지만 탄압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고파업과 공장 점거폭동은 전국을 휩쓸면서 정부는 결국 즉각 물러나야만 했다.


1976, 624.

 

폴란드, 정부는 주요한 식료품 가격을 대폭 인상한다고 발표하자, 전국 곳곳에서는 파업, 대중적인 항의 시위, 폭동도 벌어졌다. 라돔에서는 시위대는 공산당 본부에다 불 지르고는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경찰과 충돌했다. 경찰관 75명은 부상 입었다.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물가 인상안을 철회했다.

   


프랑스.

   

1789105.

 

파리의 여성 수천 명이 고물가와 빵 부족에 분노하면서 시에 있는 무기고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베르사유 궁전을 포위했다. 프랑스 혁명의 개시를 알리는 일제 공격이었다.


 

1791년 9월 3.

 

혁명 이후 프랑스가 새로운 형법을 완성했다사적인 공간에서 이뤄지는 남성 동성애를 금지하는 규정을 삭제함으로써 서유럽 최초로 동성애를 비범죄화했다.


1871·1911, 3월 18.

 

노동계급은 사회주의를 건설하고자 봉기한 사상최초 시도로는 파리코뮌도 수립했다파리 노동자들은 반란을 일으킨 국민방위대와도 합세해서 도시를 장악했다노동자평의회를 바탕으로 사회를 재조직했다코뮌나르(Communard)들은 1871, 5월 말까지 버텼지만도시를 탈환한 군대는 유혈 보복으로 3만 명노동자를 학살했다.

 

1911, 3월 8파리코뮌, 40주년 기념일에는 여성 권리와 참정권 필요성을 널리 알리고자 첫 번째로유럽에서 세계 여성 날 대회도 열렸다날짜는 3월 8일로 바꿨다.


1871, 4월 6.

 

파리 코뮌 당시국민 방위대, 137대대에서 반란을 가세한 군인들은 11구 시청 앞에서 단두대를 장악하고는 산산조각 내고 불태웠다주변에 운집한 구경꾼들도 박수 갈채를 보냈다얼마 전 정부로는 이동도 더 편리하고더 빠른 신형 단두대를 만들었다. 11코뮌 위원회는 군주 지배에 굴종하도록 하는 도구를 압수해서는 구를 정화하고새로 누리는 자유를 신성하게 만들고자 영원히’ 파괴하기로 의결했다일부 좌파는 단두대를 찬미하기도 했었다단두대는 대체로 급진주의힘 없는 사람들을 겨냥한 무기로 사용했다단두대는 프랑스 혁명 가운데 귀족을 처형하는 데 사용했다고 널리 기억하지만새로운 혁명 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좌파 인사들에게 단두대를 사용했기 때문이다독일 나치 정부 또한 단두대에 대한 주요한 옹호자였다. 1만 6000명을 처형했다조피한스 숄 남매를 비롯한 수 많은 레지스탕스 활동가들도 희생양이었다카리브해 지역에서는 프랑스 식민지들과 동독프랑스 등 많은 장소에서도 단두대를 사용했다프랑스에서는 1977살인 유죄 파견을 받은 튀니지인 농업 노동자는 단두대로 참수한 마지막 사례다.


1871년 12월 16.

 

프랑스 노동자와 병사들은 3개월 간 파리를 장악하고 통치한 파리 코뮌을 진압한 뒤 교상이자 혁명가인 루이즈 미셸은 재판을 받았다미셸은 정부를 전복하고자 하고사람들에게 무장을 독려하고무기를 소지·사용하는 등 여러 혐의로 기소됐다뉴칼레도니아섬으로 유배형을 받은 미셸은 감옥 선철창에 갇혀 4개월을 보냈다국민적인 영웅이 된 미셸은 1880년 마침내 사면됐다한 남성은 미셸을 암살학고자 했을 때미셸은 법정에서 가해자를 옹호하면서 저 사람은 사악한 사회 때문에 그릇된 길로 빠진 것이라고 내세웠다.

 

1883, 39.

 

파리에서 대규모 실업자 시위는 벌어졌으나, 경찰로부터 해산했다. 파리 코뮌 일원이었던 루이스 미셸로 이끈 군중들은 검은 깃발을 휘날리면서 빵집을 약탈했고 경찰과도 충돌했다.

미셸, 공동 조직자로는 생디칼리스트, 에밀 푸제는 뒤로 각각 6, 8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프랑스 노동운동에서 영향력 있는 조류였던 생디칼리즘은 혁명적 노동조합주의 이론과 실천으로부터 노동자들은 당장 개선하고자 조직하고, 싸우고, 총파업을 일으키면서부터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 이익에 맞게 사회를 재조직하고자 한 흐림이다.

 

 

1906, 310.

 

프랑스, 쿠리에르 대참사로 나타났다. 20세기 최악 광산사고로는 석탄 분진 폭발로부터

노동자 1060명은 사망했다. 뒤로부터 44000명 광부는 끔찍한 노동조건에 항의하며 55일 간 파업을 벌였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서 파업을 짓밟았다.


1910년 11월 4.

 

프랑스의 몇몇 포도 재배업자들이 세금 납부를 중단하기로 결의했다이듬해 벌어지는 샴페인 폭동의 전주곡이었다포도 재배업자들은 샴페인 생산 업체들이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값싼 포도를 수입해 샴페인을 만들어 포도 가격을 떨어뜨리는 데 분노했다재배업자들은 정부에 상파뉴 지역에서 나는 포도를 주재료로 샴페인을 만들도록 하는 법률을 제정하라고 요구했다몇 달 뒤인 1월 17부글부글 끓던 불만은 다메리 마을의 재배업자들이 화물열차에 실린 수입 포도를 가로채 마른강에 던져버리면서 폭력 사태로 폭발했다재배업자들은 곧이어 사기를 친다고 여겨지는 한 생산업체의 창고를 습격해서 시청에다 붉은 깃발을 내걸었다. <인터내셔널가>가 울려 퍼직기도 한 시위는 전면적인 항쟁으로 확대됐다정부는 4000명의 병력을 보내 지역을 9개월 간 점령하는 식으로 대응했지만다른 한편으로 시위대가 요구하는 법을 시행하기도 했다.

 

1936, 5월 28.

 

노동자, 3만 2000명은 파리르노 자동차 공장을 점거했다곧이어 10만 명노동자는 도시 곳곳에서 주요한 중공업 공장을 모조리 점거했다뒤로는 한 달 간공장에서는 노동 조합 없는 소규모 작업장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 곳곳에서 파업 물결은 일면서 노동자, 200만 명,

1만 2000건 파업점거에도 참가했다고용주들정부는 소요를 끝내고자, 7%-15% 임금 인상주다 40시간 노동유급 휴가단체 교섭권 등에도 동의해야만 했다.


1936년 8월 8.

 

프랑스 정부는 혁명 에스파냐와 국경을 폐쇄했다따라서 파시스트들과 싸우려고 자원한 사람들은 피레네 산맥을 도보로 덤어야만 했다다른 한편 민족주의자(국민파)들은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의 군대 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 파시스트 지원병을 이송하는 데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지의 노동계급 수 만 명은 파시즘에 맞서는 에스파냐 노동자와 농민들의 투쟁에 함께하고자 달려왔고많은 이가 국제여단에 합류했다.

  

1940년 10월 29.

 

프랑스에서 이란 무슬림 외교관 압돌 호세인 사르다리는 비시 관리들에게 편지를 보내 중앙 아시아 출신 유대인(주구티)는 엄밀하게 따지자면 나치 인종법상 유대인이 아니라고 설득했다. 1943년 나치는 사르다리의 주장을 받아들여 주구티를 유대인에서 제외했다사르다리는 상관들의 동의를 받지 않은 채로 유대인들에게 이란 여권을 발급하며 2000여 명이 비시 정권에서 탈출하기를 도왔다.


1942, 327.

 

나치 독일에 협력한 프랑스 비시 정부는 이발소 법령을 공포해서, 이발사들은 자른 머리카락을 모아 기부하기를 강제했다. 머리카락은 전쟁 물자로 쓰일 끌신(슬리퍼), 털실옷(스웨터)를 만드는 데 필요했다. 반발한 재즈 애호가(Zazous)들은 머리를 길렀다. 말쑥한 정장을 입고는

주로 흑인 음악가도 연주하는 재즈, 스윙을 듣는 사람들로, 거리에서는 파시스트들과도 싸웠다. 경찰은 일제 단속을 벌였고, 비시 파시스트 청년 단체들은 추적해서는 머리를 잘랐다.


1944, 5월 26.

 

비시프랑스마르세유에서는 총파업도 벌어졌다금속 노동자공무원운송 노동자는 전날 조선소 노동자들로 시작한 파업에도 합류하면서부터 시청 앞에서 빵을 달라고 요구하고는 시위를 벌였다파업은 노동자, 1만 5000명은 게슈타포에서 체포될 때까지지속했는데강력한 탄압은 오래가지도 못했다마르세유는 곧 해방했기 때문이다.



1944년 8월 25.

 

프랑스 라마들렌에서 에스파냐 레지스탕스 투사 32명과 프랑스 투사 8명이 대규모 독일군 대열과 맞붙었다독일군은 트럭 60탱크 6자주포 2대에 1300명 규모였다레지스탕스 유격대는 도로와 철교를 폭파한 뒤 기관총으로 무장한 채 인근 언덕에 진지를 구축했다전투는 오후 3시부터 이튿날 정오까지 치열하게 이어졌다유격대는 3명이 부상을 입은 반면독일군은 8명이 전사하고 거의 200명이 부상 당했으며나머지는 항복했다굴욕적인 패배 이후 나치 사령관은 포로로 잡히기 전 자살했다같은 날 자유프랑스군이 파리를 해방하고독일 점령군이 항복했다그러나 파리를 수북한 자유프랑스군 부대는 흑인 병사들 자유프랑스군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제외된 상태였다미국과 영국 사령관들이 흑인 부대를 배제하는 조건으로만 프랑스인들이 직접 파리를 해방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다흑인 병사들은 또한 해방을 축하하는 과정에서도 배제됐다가령전투 중 총상을 입은 레지스탕스 영웅 조르주 뒥송은 총으로 위협을 받으며 축하 행사에서 쫓겨났다.


1947년 10월 10.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세네갈베냉코트디부아르기니 전역에서 아프리카 흑인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파업은 이듬해 3월 19일까지 계속됐고노동자들은 고용주로부터 많은 양보를 얻어낸 끝에 작업으로 복귀했다쟁의 기간 가운데 노동 계급 여성들은 가정을 재정적으로 지탱하는 한편으로 파업 노래를 만들고는 파업 파괴자들을 조롱하는 식으로 공동 연대에 이바지했다.


1949년 12월 8.

 

인도차이나에서 식민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여러 항구에서 지역으로 가는 모든 화물 운송을 막기로 하는 합의가 프랑스에서 열린 항만 노동자 회의에서 이뤄졌다프랑스는 1946년 이래 베트남 반식민운동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전쟁이 캄보디아와 라오스 프랑스 보호령까지 확대된 상태였다지중해 연안에 있는 마르세유세트니스포르드북포르생루이포르방드르툴롱 등 항구가 모두 봉쇄됐다전달에 항만 노동자들이 인도차이나로 향하는 선박 몽벨리아르호와 카프투란호의 선적을 거부한 행동에 이어 취해진 조치였다.

 

1961년 10월 17.

 

파리에서 오후 8시 30분부터 오전 5시 30분까지 알제리인 무슬림 노동자 프랑스인 무슬림‘, ‘알제리의 프랑스인 무슬림‘ 등에게 통금이 내러진 뒤 알제리인 시위대 수십 명이 경찰에게 살해됐다프랑스로부터 독립하고자 싸우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이 소집한 시위에 3만 명에서 4만 명이 참여해 행진을 벌이던 중이었다많은 국적과 종교 시위 참가자 1만 1000명이 체포됐고, 200여 명이 맞아 죽은 뒤경찰에게 주머니를 털린 채로 센강으로 던져졌다.

당시 경찰청장은 과거에 유명한 나치 부역자였다프랑스 언론은 학살을 거의 다루지는 않았고정부는 1998년에 이르러서야 사건을 인정하면서도살해된 희생자 수가 40명 뿐이라고 내세웠다.

 

 

1968, 5월 13.

 

프랑스, 68년 5반란 가운데 최대 1000만 명에 이르는 노동가들은 총파업을 개시했고,

학생들은 격렬한 폭동을 벌인 데 이어서 수십만 명은 파리 거리로도 쏟아졌다.

 

1968, 5월 22.

 

68, 5월 봉기 가운데 파리 축구 선수들은 프랑스축구협회 본부를 점거하고는 축구로부터 폭리를 취하는 사람들을 즉각 해고하고는 이윤 없는 축구를 만들라고 요구했다선수들은 단결하기만 하면 축구에 대한 영원한 본질기쁨 스포츠모든 노동자들도 함께 만들어가는 내일,

세계적인 스포츠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선언했다.



1975, 6월 2.

 

프랑스리옹성노동자 100명은 생니지성당을 점거한 채로 성 판매에 대한 유죄 판결을 철회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버텼다일주일 만에 쫓겨났지만얼마 지나지 않아판례 될 만한 판결도 나오고는 징역형을 취소했다.



1985년 7월 10.

 

프랑스 정보부가 아오테아로아/뉴질랜드의 오클랜드항에서 그린피스 선박 레인보워리어호를 폭발해 사진가 페르난두 페레이라가 사망했다선박은 프랑스가 벌이는 핵실험에 항의하고자 출항하는 길이었다프랑스는 책임을 부인했지만뉴질랜드 경찰은 프랑스 요원 2명을 체포해 살인죄로 기소했다과실치사죄로 10년 징역형이 내려졌으나 프랑스 정부는 불과 2년 만에 이들을 풀어줬다.


1995년 11월 24.

 

프랑스 노동자들이 복지·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대규모 총파업에 들어갔다알랭 쥐페 총리 우파 정부는 유럽 연합 마스트리흐트 조약에서 정해진 한도에 맞춰 예산 적자를 3%ㄹ로 줄이고자 조치에 나서자 10월에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매우 논쟁적인 조치로는 공공 부문 연금을 삭감하고최소 정년을 60세로 늘리는 것이었다일부 조직에서는 50세나, 55세에도정년 퇴직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거대한 파업 물결이 교통공공설비광산은행보험사우체국을 강타하는 한편국가 전역에서 경찰과 충돌이 벌어졌다. 12월에 이르러 정부는 연금 삭감안을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2004년 11월 8.

 

뉴칼레도니아의 니켈 제련소 노동자들이 앞선 파업으로 동료 2명이 해고된 데 항의하고자 파업에 들어갔다. 22일 간 파업이 계속된 끝에 해고 노동자들이 복직됐다파업으로 회사는 4000만 달러의 비용을 치렀다.

 

2009, 331.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자리한 캐터필러 공장, 노동자, 40여 명은 정리해고당한 노동자들에 대한 퇴직금 인상을 요구하고는 간부 사무실을 습격했다. 4명을 인질로 잡았다. 700명도 넘는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를 당하는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었다. 행동은 성공했다. 회사는 전체 퇴직금으로 약 213000만 원(150만 유로)를 증액했다. 노동자 한 명당 평균 약 14400만 원(8만 유로)를 지급했다.



핀란드.

 

1918, 127.

 

핀란드 노동자들은 헬싱키에 이어 며칠 간 주요 도시를 다수 장악하면서부터 혁명은 발발했다. 핀란드 인민 공화국은 여성참정권, 노동자 생산 통제권, 하루 최대 8시간 노동, 낡은 방식으로 토지분배 폐지, 가내 하인, 농장 머슴들에 대한 해방 등 수 많은 중대한 개혁을 도입했다. 그러나 1차대전에서 동맹국들과 충돌을 끝내고자 러시아 볼셰비키 정부는 1918, 3,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따라 핀란드를 다른 영토들과도 나란히 독일에 남겨줬다. 다음 달에 반혁명 백군은 혁명을 피로 물들이면서부터 노동자, 사회주의자, 수천 명을 죽이고는 수만 명을 포로수용소에도 집어넣었다.

 

헝가리.


1905년 12월 13.

 

헝가리 급진적인 농장 노동자 산도르 치즈머디어와 동료 몇 명은 농업노동조합(URW)를 결성했다조합은 빠르게 성장해서 2년도 되지 않아 625개 지부에다 7만 5000명의 조합원을 두었다이렇게 힘을 키운 일용직 노동자와 농장 하인들은 파업에 들어갔다정부는 4000명을 체포하고파업자들에게 막대한 벌금을 부과했으며결국은 노동조합을 불법화하는 식으로 파업을 진압하고자 했다.

 

1918, 519.

 

1차세계대전 가운데 헝가리, 페치에 있던 우이비데크, 6보병연대는 반란을 일으켰다.

참호로 가기를 거부했다. 병사들은 전화선을 끊고는 시 건물, 병영을 공격했다. 기차역을 점거했다. 충성파 군대에게 포위당한 병사들은 3일 동안, 저항하다가 항복했다. 항복한 병사들은 10명에 1명 꼴로 무작위로 총살당했다. 반란에 가담한 고위 장교는 전원 총살당했고, 부사관들을 투옥했다.

 

19561023.

 

헝가리에서 전국적인 항쟁이 일어나 수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 평의회와 민병대를 조직하고는 자본주의로 이행이 아닌 노동 계급이 직접 통제하는 사회주의를 요구했다. 영국 공산당원이자 당 기관지, <데일리워커> 소속 기자였던 피터 브라이어는 첫 번째 속보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11년 간 공산당 지도자들이 끊임 없이 저지른 오류와 국가보안경찰의 잔인한 탄압, 널리 퍼진 관료주의와 허술한 관리, 서투른 실수, 자의적인 방법과 거짓말 때문에 결국 나라 전체가 붕괴했다. 항쟁은 파시스트와 반동분자들이 조직한 반혁명이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로 치장한 경찰 독재 소련 군사력으로 떠받치는 경찰 독재에 맞선 전체 인민이 들고 일어난 봉기이며, 기층 공산당원들이 참여한 봉기다. 이런 끔찍한 사태를 생기게 한 책임은 오로지 지난 11년 간 헝가리 공산당을 이끈 이들에게 있다고 주저 없이 말하고 싶다. 그들은 유럽 인민 민주주의의 독보적인 본보기가 될 수 있었던 나라를 사회주의의 소름 끼치는 희화화로 바꿔놨다. 그들이 기르고 훈련시킨 비밀 경찰은 감히 불의에 맞서 목소리를 높인 모든 비공산주의자만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도 고문했다. 공포로 점철된 지난 며칠 동안 자신들이 보호해야만 하는 인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돌린 것은 바로 비밀 경찰이었다.

 

프라이어의 기사는 게재되지 않았고, 항쟁은 이내 소련 탱크들로부터 진압됐다. 헝가리인 2만 명과 소련인 3500여 명이 사망했다.

   

1956124.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노동자 통제로 운영되는 참된 사회주의 사회를 요구하는 전반적인 노동 계급 봉기 일환으로 여성 3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정확히 한 달 전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를 2차 공격하면서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는 행동이었다. 2차 공격으로 반란은 사실상 종식된 상태였다. 시위에 참가한 여성 한 명은 소련군 총에 부상을 입었고, 다른 한 명은 동료 시위자들 덕분에 연행을 모면했다. 행진에 참가하려 한 남성들은 시위 여성들에게 쫓겨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951, 423.

 

버지니아주, 프린스에드워드 카운티에서는 16, 흑인 학생이던 바버라 존스는 동료 학생들을 이끌고는 학교에서 인종 차별, 열악한 환경에다 항의하는 파업에도 나섰다. 같은 학교는 대법원도 검토한 사례 연구 대상 가운데 한 곳이었고, 대법원은 인종 분리로부터 위헌이라고도 선언했다. 그러나 지역 학교 위원회는 인종 분리를 폐지하는 대신, 모든 학교를 폐쇄했고, 현지 백인 아이들도 다니던 사립 학교들은 1986년까지도 인종 분리를 폐지하지도 않았다.

 

1953, 613.

 

영국군, 부대는 마우마우 반란 용의자들을 쫓아내고자, 케냐 추카 지역에도 파견하면서부터,

추카 학살로 이어진 사태를 시작했다. 뒤로는 5일간 무장하지도 않은, 케냐 민간인 20명을 살해했다. 일부로는, 구타, 고문을 당하고는 사지마저 절단된 상태였다. 영국군은 희생자, 6명 손을 자라서 자루에다 담고는 막사로 가져갔다. 살인죄로 기소된 영국 군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1959, 33.

 

영국, 케냐인 강제수용소 사령관은 수감자 88명을 몽둥이로 가혹하게 때리면서 홀라 학살은 벌어졌다. 11명은 사망했으며, 77명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식민 지배에 항거하는 마우마우 봉기를 짓밟고자 영국 정부는 민간인 약 40만 명을 강제수용소에다 집어넣고는 추가로 100만 명을 군대로부터 감독하는 마을들에 몰아넣었다. 따라서 감옥이었다.

 

1959129.

 

영국 정부가 영제국 시절 식민지에서 저지른 범죄에 관한 공식 기록을 파기하는 계획인 레거시 작전의 일환으로 비밀 제안서를 회람했다. 제안서는 문서철의 소각을 지시했는데, 이후 정부는 문서들을 무거운 상자에다 넣어서 해안에 최대한 멀리 떨어진 바다로 가져가 수심이 아주 깊고, 조류가 없는 물 속에다 가라앉혀야만 한다고 명령했다. 레거시 작전은 성공적으로 수행됐고, 영국의 끔찍한 식민 지배 유산은 자국 안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961, 117.

 

1960,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콩고에서는 최초로 민주 선걸로 선출된 총리 파트리스 루뭄바는 미국, 벨기에로부터 지원한 쿠데타는 벌이진 뒤로부터 살해됐다. 처음에는 CIA는 사회주의로부터 독립 지도자를 암살하고자 했지만, 쿠데타 세력으로는 루뭄바, 동료 2명을 체포한 뒤로부터 잔인하게 구타, 고문한 다음 총으로 쏴 죽였다. 벨기에 군대는 3명 주검을 파내서 조각낸 뒤로 황산에 넣어 녹이고는, 나머지를 고운 가루로 만들어 뿌려버렸다.

 

1962729.

 

영국의 파시스트 오스왈드 모슬 리가 맨체스터 시내에서 행진을 하려 하자 반파시스트들이

그를 습격해 때려눕혔다. 경찰관 250명이 모슬리를 구해 호위하려 했지만, 토마토와 계란, 동전과 돌멩이 세롈를 막아주지는 못했다. 행진 이후 연설에 나선 모슬리의 목소리는 반파시스트 5000명의 함성에 묻혔다. 결국 경찰이 7분만에 집회를 중단시켰다. 한동안 지역 주민들과 파시스트들 사이에서 충돌이 잇따랐고 경찰은 47명을 체포했다.

 

196292.

 

영국 국민당이 이스트런던 돌스턴에서 집회를 시도하 인근인 리들리 거리에서 오스왈드 모슬리와 파시스트 블랙셔츠단이 집회를 열려고 했다. 민족사회주의운동이 트라팔가광장에서 반유대주의 집회를 여는 데 대응해 19627월 출범한 황색별운동 소속 반파시스트들은 모슬리가애용하는 장소에서 집회를 하지 못하게 하고자 연속 집회를 진행했다. 모슬리는 결국 베스널그린에 있는 빅토리아파크광장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돌멩이와 계란, 과일 세례가 쏟아져 도망쳐야 했고 집회는 무산됐다. 항의 시위대는 모슬리 자동차 창문에 주먹세례를 퍼부었다. 모슬리 집회가 불과 몇 주 사이 네 번째로 군중으로부터 무산된 사건이었다.

 

1963, 430.

 

영국, 잉글랜드, 브리스틀에서는 카리브 출신, 이주 노동자 한 무리는 버스 승무원에서 흑인, 아시아계 노동자를 배제하는 데 항의하고자, 버스 불매 운동을 개시했다. 유색인 배제 조치로는 백인 노동 조합원들로부터 유색인 노동자를 고용한다면 똑같이 파업을 벌이겠다고 위협한 끝에, 운송일반노동조합(TGWU), 국유 기업 브리스톨옴니버스(BOC)에서 시행했다. 몇 달 간, 불매 운동, 대규모 시위도 벌어진 뒤로, 버스 노동자들은 8월에 열린, 대규모 회의로부터 배제 조치를 끝내기로 의결했다. 같은 해, 9, 첫 번째, 유색인 버스 차장을 채용했다. 2년 뒤로는 공공 장소에서도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인종 관계법(RRA)도 제정했다.

 

19641015.

  

영국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한 뒤 노동장 지도자 해럴드 윌슨이 총리에 올랐다. 그가 집권 중 한 일 가운데 하나는 오만에 영국군을 보내 민중 항쟁으로 위기에 빠진 술탄 사이드 빈 타이무르의 중세적인 꼭두각시 통치를 보호한 것이었다. 오만은 세계에서 노예제가 합법인 유일한 나라였고, 병원과 학교가 각각 1, 3개에 불과했다. 유아 사망률은 30%가 넘고, 라디오, 자전거, 축구, 선글라스, 바지가 모두 불법이었다. 영국은 오래 전부터 사이드의 통치를 떠받쳐줬는데, 노동당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민간인을 학살하고, 우물에 독을 타고, 마을에 불을 지르고, 반란자를 고문하고, 가축을 총으로 죽이는 양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1965, 130.

 

전 영국 총리, 위스턴 처칠, 장례식은 거행됐다. 관을 실은 바지선이 지나갈 때, 런던 곳곳 부두에 있던 크레인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훗날 연출된 장면이었다. 처칠을 좋아하지 않아서, 크레인 숙이기를 거부한 부두 노동자들은 추가로 비용을 받고 크레인을 조종했다. 처칠은 국민적 영웅으로 소개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노동계급 사람들에게는 혐오 대상이었다. 1945, 선거에서 패배도 마찬가지다. 극렬한 인종주의를 따르던 처칠은 민간인에 대한 독가스 사용을 지지했으며, 파업 노동자들에게는 군대로 보냈으며, 최대 400만 명 벵골인들도 기근을 강요당해서 사망하도록 방조했기 때문이다.

 

1965118.

 

영국 노동당 총리 해럴드 윌슨이 식민지인 영국령 인도양 지역(BIOT) 수립을 승인했다. 차고스 군도의 종족 청소를 개시하는 첫 번째 행동이었다. 이후 몇 년 간 차고스 주민 전체가 집에서 강제 퇴거되어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다. 외무부의 한 관리는 외교관 데니스 그린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우리는 이 문제를 강경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이번 조치의 목적은 암초 몇 개를 우리 수중에 계속 두는 것입니다. 갈매기들 말고는 어떤 토착 집단도 없어야 합니다.” 그린힐이 맞장구를 쳤다. “새들하고 같이 타잔이나 프라이데이들도 보내버리죠.” 주민들은 옷가방 하나만 챙긴 채 세이셸로 강제 이주를 당했고, 가축은 전부 살처분됐다. 종족청소의 목적은 영국 정부가 가장 큰 섬인 차고스를 연 간 1달러만 받고 미군 기지로 임대하기 위함이었다.

 

1968, 67.

  

잉글랜드, 대거넘에서 자리한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와 동일 임금을 요구하고, 파업에도 들어갔다. 3주 뒤,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임금, 92%를 받는 대가로 조업에 복귀했따. 파업은 1970, 평등 임금 법을 제정한 핵심적인 계기였지만, 포드는 명목상 동일 임금에 도달한 건, 1984, 또 다시 파업은 벌어진 뒤였다.

 

1969, 319.

 

영국 외교관 1명은 총부리에 위협을 받으며 앵궐라섬에서 쫓겨난 뒤로, 영국 군대와 경찰들은 섬을 침공했다. 영국 식민 정부는 앵귈라섬, 네비스섬을 세인트키츠에 있는 정부, 총리 로버트 브래드쇼에 대한 권한 아래 뒀다. 브래드쇼는 앵귈라에 대한 혐오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면서, 섬을 사막으로 만들어버릴 작정이라고도 말했다.

 

1960, 브래드쇼는 앵귈라섬을 위축하게 하고자 전화 수리공을 보내 전화 체계(시스템)을 차단하고는 전기 설치도 방해했다. 앵귈라는 1967, 세인트키츠네비스앵귈라 연방에서 탈퇴하고는 세인트키츠 경찰을 무장해제시킨 뒤 돌려보냈다.

 

영국 정부는 외교관이던 윌리엄 휘틀록을 보내 해결하려고 했지만, 앵귈라 사람들은 거만했던 휘틀록을 내쫓았다. 휘틀록은 기자들에게 깡패, 마피아 부류는 섬을 장악했고, 섬사람들은 블랙파워 군복을 입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예복(모닝코트)에다 흰 장갑만 꼈을 뿐이었다.

 

섬 사람들은 영국 비행기 착륙을 막고자 수 많은 염소를 대공(對空)하고자 풀어놨다. 노동당 정부는 런던 경찰로부터 해상으로 낙하산 부대원, 200명을 보내어 범죄자 무리, 흑인 급진주의와 대결하기를 예상했지만 마주한 건 염소들뿐이었다. 사건마저 큰 웃음거리 되자, 영국은 세인트키츠에서 앵귈라는 독립하기를 허용했다. 엥귈라는 영국에서는 해외 영토이자, 영국령이다.

 

197089.

 

영국 블랙팬서 당원들을 포함한 150명의 사람들이 통힐에 있는 캐리비언 레스트로아 맹그로브에 대한 경찰의 단속 중단을 요구하며 경찰서까지 행진을 벌였다. 작가 다커스 하우를 비롯한 9명이 체포되어 폭동을 선동한 음모 혐의로 기소됐으나 모두 무죄로 풀려났다. 뒤로 내무부 문서에서 밝혀진대로, 단속은 영국에서 세를 키워가는 블랙파워 운동을 파괴하려는 음모의 일환이었다.

 

1970108.

 

영국 보수당의 법무상 피터 롤린슨의 자택에서 불과 몇 주 사이 두 번째 폭탄이 벌어졌다. 도시 유격 단체 성난여단이 설치한 폭탄은 노동 운동과 아일랜드 시민권 운동에 대해 정부가 점차 억압적인 전술을 사용하는 데 대한 항의 표시였다. 성난여단이 구사하는 폭탄 공격이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인명살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고안된 폭탄이었다. 성난여단은 공식 성명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용병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재산을 공격한다.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로버트 카, 롤린슨, 존 월드론은 모두 주검이 됐을 것이다.

대중을 공격하는 건 파시스트들과 정부 앞잡이들뿐이다.

우리는 반격을 시작했고, 폭탄을 손에 쥔 조직된 노동 계급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1971, 423.

 

천 명에 육박하는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들은 무공 훈장을 정부에다 반납했다.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들은 무공 훈장들을 시체 운반용 자루에다 담아 반납하고자 했으나, 당국은 의사당 주변에다 울타리를 세웠기 때문에, 울타리 위로 훈장을 던졌다. 일부 참전 군인들은 훈장을 던지기 전에 전투 가운데서 사망한 전우들, 미국인, 베트남인 모두에게 훈장을 바치며, 말을 외쳤다. 시위에도 참가한 피터 브래니건은 훈장을 던진 의사당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기서는 미군에서 전투 가운데 부상을 입은 군인들에게만 수여한다는 퍼플하트 훈장을 받았고, 후레자식들하고도 싸워서 받을 수 있는 훈장도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19711128.

 

전투적 유대인 반파시스트들이 모인 62 모임 구성원들이 잉글랜드 브라이턴 로열파빌리언호텔에 모인 극우파 북부동맹 모임을 무산시켰다. 모임에서는 국민 전선 구성원들뿐만 아니라, 독일 나치 친위대 장교 출신들도 참석했다. 파시스트 몇 명이 병원으로 실려 갔고, 반파시스트들은 연막탄을 터뜨리고는 유유히 탈출했다.

 

1972111.

 

잉글랜드 러프버러에 자리한 맨스필등양말공장에서 일하는 인도계 노동자들이 백인 노동자만 할 수 있는 승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과 함께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10월에 남녀 노동자들이 처음 파업에 들어갔을 때 전국양말·니트웨어노동조합(NUHKW)은 지원을 거부했다. 결국 파업 노동자들이 조합 사무실을 점거하고 나서야 파업을 지원하고 나섰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여전히 백인 조합원들에 대한 파업 명령을 거부했다. 백인 노동자들은 어쨌든 인도계에 대한 차별에서 이득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이 지역의 아시아계 섬유 노동자들은 동맹 파업을 벌였다. 노동자들이 사측 양보를 얻어내면서 쟁의는 12월에 끝났다.

 

조사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는 노동조합이 인종차별 관행에 공모하고 있음을 자세하게 밝히면서 노동조합이 이러한 차별을 그만두지 않으면 흑인과 아시아계 노동자들이 독자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하게 될 거라고 경고했다.

 

1973, 116.

 

서식스 대학교 학생들은 정부 학자금 지원, 삭감 계획에도 맞서 기숙사, 월세 납부 거부 운동에도 나섰다. 영국 각지 학생들도 움직임에 가세했으며, 2월 말에 이르러서는 44개 대학은 월세 납부 거부 운동에도 참가했다.

 

1973, 321.

 

런던, 소수 정신질환자, 지지자들도 모여 정신질환자연합(MPU)를 창설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도 정신의학은 노동계급을 통제하는 한 형식이고, 노동자들도 자신들에 대한 이익을 내세우고자 조직하는 같은 방식으로, 정신질환자도 조직을 이뤄야만 한다고 내세웠다.

 

1974, 36.

 

영국 석탄 광부들은 35% 임금인상안을 받아들이면서 예정했던 4주간 파업을 철회했다.

이미 보수당 정권을 무너뜨린 거대한 승리 가운데 하나였다.

 

1974, 43.

 

런던, 브릭스턴, 경찰들은 브록웰 공원에 모인 군중을 공격한 뒤로 흑인 청소년 3명을 수감했다. 대부분 흑인들은 여러 학교에서 학생 1000명을 수감된 흑인 청소년들을 지지하는 파업에도 들어갔다. 학생들은 집회를 조직했고 지방법원, 경찰서에서도 털스틸중고등학교는 학교 학생 100명도 시위 대열로도 합류했다. 그리고 브록웰 공원까지 행진했다.

 

1974, 51.

 

잉글랜드, 레스터, 임페리얼 타자기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 수백 명은 3개월 파업에 돌입했다. 대부분은 동아프리카, 아시아계 여성 노동가들이었다. 파업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영국 안에서 아시아계 노동계급 저항을 활성화한 핵심 계기였다.

 

1975928.

 

토요일 저녁, 흑인 해방 활동가 3명이 체인점 스파게티하우스의 런던 나이츠브리지 지점에 총기를 들고 들이닥쳤다. 이들은 일주일치 매상을 강탈하고자 했다. 강도는 실패했고 이내 경찰이 도착했다. 흑인해방군을 자처한 이들은 직원을 인질로 삼고 안전하게 영국을 떠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경찰 수백 명이 포위한 가운데 5일 동안 이어진 인질극 끝에 모두 항복했다.

 

1976, 417.

 

영국, 극우 정당, 국민 전선은 잉글랜드, 북부, 브래드퍼드, 아시아계 지역에서도 행진을 조직했다. 지역 정치인들은 도심에서도 대항 집회를 열었지만, 아시아계 젊은이 수백 명들도 떨어져 나와 경시줄 혹은 경찰줄(폴리스라인), 곳곳에서는 싸움을 벌이고는 인종주의들을 공격했다. 다수 젊은이들은 브래드퍼드아시아청년운동(BAYM) 소속이었다. 단체로는 인종주의 반대 운동(캠페인)을 벌이는 남아시아계 조직으로, 거리에서는 파시스트들과 싸우고, 노동 투쟁, 식민 지배 반대 투쟁도 지지했고, 이민자 가정을 지지하는 운동(캠페인)도 버렸다.

 

1976, 64.

 

런던, 사우솔에 자리한 도미니언 극장 아펭서, 18, 시크교도 학생, 구르딥 싱 차가르는 인종주의 칼에 찔려 사망했다. 어느 행인은 경찰관에게 누가 죽었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그냥 아시아인이에요. 차가르 사망으로 지역 폭동도 일어났고, 지역 아시아계, 흑인 젊은이들은 사우솔청년운동(SYM)을 결성해서는 거리에서 인종주의와도 맞서 싸웠다.

 

1976820.

 

사진 인화소에서 일하던 데브시 부디아가 작업 속도가 느리다는 이유로 해고되자 동료 3명이 그를 지지하며 일손을 놓으면서 노스웨스트런던에서 그러닉 파업을 시작했다. 3일 뒤, 동아프리카계 아시아 여성 노동자들이 주축을 이루어 시작한 피케팅은 2년 가까이 이어졌다. 파업은 결과적으로 패배했지만, 영국 노동운동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노동자들이 벌인 놀라운 투쟁과 영국 각지에서 일어난 연대 물결은 백인 중심 노동조합 조직들이 아시아계와 이주 노동자들을 경쟁자가 아닌 동료 노동자로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1977716.

 

잉글랜드 노샘프턴종합병원에서 가정주부 리타 워드가 누워 있기 시위를 시작했다. 담석 때문에 고통에 시달리던 리타는 수술을 받고자 16개월을 기다렸지만 또 다시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개인병원에서는 500파운드를 내면 바로 다음 날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리타는 병원 노동자들지지 속에서 병상을 차지하고 치료를 해줄 때까지 일어나지 않겠다고 버텼다. 병원 경영진은 결국 굴복했고 며칠 뒤 수술이 이뤄졌다. 수술로 인해 지여된 수술은 한 건도 없었다.

 

1977813.

 

훗날 루이셤 전투라고 불리게 되는 사건에서 영국 사우스런던 주민들과 반파시스트들이 파시스트 집회를 저지하고자 경찰과 극우 정당 국민전선 성원들을 상대로 장시간 싸움을 벌였다.

 

19771112.

 

영국 리즈, 요크, 브리스틀, 맨체스터, 뉴캐슬, 브라이튼, 런던에서 제1밤을 되찾자행진이 벌어졌다. 지난 430일 서독 각지 도시에서 성추행에 항의하는 밤을 되찾자행진이 여성들만 참여한 가운데 일사불란하게 열렸다는 소식에 고무한 리즈혁명적여성주의모임(LRFG)이 주최한 행사였다. 언론으로부터 요크셔의 살인마라는 이름이 붙은 연쇄살인범 피터 서트클리프는 1975년부터 1980년까지 리즈를 비롯한 요크셔 전역에서 여성 13명을 성폭행하고 살해했다. 따라서 요크셔에서는 밤을 되찾자가 특히 의미심장한 행사였다. 요크셔의 여성들은 경찰이 살인 사건에 늑장 대응을 하고 언론은 제대로 보도조차 하지 않는 데 분노했다. 살해 당한 피해자는 주로 성노동자였다. 젊은 여학생이 살해됐을 때에야 언론과 경찰은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듯했다. 경찰은 당시 공식적으로 여성들에게 밤에 외출을 삼가라고 조언함으로부터 사실상 통금을 내렸다. 밤에 외출할 수밖에 없는 야간조 여성 노동자나 성노동자에게는 무용한 소리였다.

 

1978716.

 

런던 최대의 벵골인 지역에 위치한, 브릭레인 거리와 베스널그린 거리가 만나는 모퉁이에서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책자가 판매되는 것을 막고자 대규모 반인종주의 연좌시위가 벌어졌다.

 

1978717.

 

해크니·타워햄리츠 방어위원회가 인종주의자들의 공격에 맞서 하루 동안 파업을 벌이면서 런던의 타워햄리츠 자치구를 마비 상태에 빠뜨렸다. 아시아계 영국인이 대다수였던 로버트 몬테피오리 학교의 학생 400명도 파업에 동참해 학교 안팎에서 벌어지는 인종주의적 폭력에 항의했다.

 

1980, 42.

 

잉글랜드, 브리스틀, 경찰들은 혼혈 흑인이 소유한 카페를 단속하자, 흑인 주민 수백 명은 경찰에도 맞서 싸웠다. 항쟁에서는 브리스틀 백인 주민 수백 명도 가세했다.

 

1980, 623.

 

버밍엄, 롱브리지에 있던 브리티시레일랜드 자동차 공장에서는 도장공 100명은 파업에도 돌입했다. 노동자들은 매일 2차례 갖는 홍차 휴식 시간을 축소하고는 노동자 간 휴식 시간에 시차를 두겠다고 발표한 데 항의하는 행동이었다. 파업은 확대되고, 공장 생산은 완전하게 멈춰선 결과, 미니, 알레그로 모델, 생산 차질 인해 회사는 최소한 약 290억 원(1000만 파운드) 손실을 입었다고 추산했다. 10일 뒤, 노동 조합은 브리티시레일랜드 휴식 시간을 변경해야만 하는 실질적인 근거가 있는지를 파악하고자, 검토한 대가로부터, 경영난에 빠진 회사 자구책 가운데, 휴식 시간과 관련된 조항을 받아들이는 데 동의했다.

 

1981, 25.

 

스코틀랜드, 그리녹에 있는 리(Lee) 청바지 공장에서 문을 닫고는 다른 곳으로 생산을 이전할 예정이라는 소식도 전해지자, 여성으로부터 주축을 이룬 노동자, 240명은 작업장을 점거했다.

노동자들은 문 마다, 의자로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피시앤칩스, 아이언브루, 240인분을 사고자,

노동자 2명은 지붕 위로 올라가 배수관을 타고 내려왔다. 7개월 간 점거는 이어졌으며, 경영진도 결국 굴복해서 공장 인수에 동의했다. 공장을 점거하던 노동자 140명은 일자리를 확보했다.

 

198173.

 

남아시아계 인구가 많은 런던 사우솔 지역에서 폭동이 발발했다. 술집 햄브로 태번에서 공연을 보던 인종주의자 스킨헤드족들이 아시아계 사람들을 공격하면서부터 시작했다. 스킨헤드들은 아시아계 여성 한 명을 폭행하고, 아시아 식료품점 창문을 깼고, 아시아인들이 사는 주택을 공격하려고 찾아다녔다. 경찰이 제대로 대응하지도 않자 아시아계 공동체가 자위를 위해 인종주의자들과 맞서 싸웠다. 결국 파시스트들뿐만 아니라 경찰과도 맞서 싸워야만 했다. 동틀 무렵 술집은 전소됐고, 경찰관 60명 정도가 부상을 입었고, 33명의 사람들은 체포됐다.


1981821.

  

스코틀랜드 그리녹에 있는 리 청바지 공장에서 일하는, 대부분이 여성인 140명 노동자들이 공장 폐쇄를 막고 일자리를 지키고자 7개월 동안 벌인 점거를 끝내고 작업에 복귀했다.

 

1982, 426.

 

영국, 리즈 형사 법원에서는 브래드퍼드 12, 재판을 시작했다. 12인들은 파시스트들에도 맞서고, 공동체를 지키고자 대비를 했다는 이유로, 음모죄 혐의로 체포된 흑인 청년 연합(UBYL) 활동가들이었다. 재판은 9주 간 이어졌고, 피고인 측에서는 경찰은 인종주의 공격으로부터 아시아계, 아프리카계, 카리브인을 보호하지도 못한 탓에, 공동체들은 자위권을 행사해야만 했다. 기념비적인 판결에서는 12, 모두 무죄 방면했다.

 

19831025.

 

잉글랜드 헤이스코티지병원 노동자들이 다음 주로 예정된 폐업에 항의하며 병원을 점거했다. 노동자들은 정부가 굴복할 때까지 스스로 병원을 운영했다. 병원은 1990년대까지 운영되다가 사설 요양원으로 바뀌었다.

 

19831026.

 

잉글랜드에 자리한 노스우드앤드피너코티지 병원 노동자들이 폐업 계획에 항의하고자 병원을 점거했다. 노동자들은 점거 이튿날이던 1027일부터 직접 병원을 운영했고, 결국 싸움에서 승리했다. 병원은 이후 25년 간 계속 운영됐다.

 

19831211.

 

영국 그린햄 군사 기지에서 크루즈 미사일이 반입되고 3주 뒤, 여성 5만 명이 기지를 에워싸고, 항의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군대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거울을 들었다. 시위가 마무리 될 무렵 여성들은 기지 주변 펜스를 잡아 뜯었고, 경찰은 수백 명을 체포했다.

 

19831224.

 

1972년과 1974년 광부 파업을 지지한 배우들로 구성된 팝 그룹 플라잉피켓츠가 야주(Yazoo) <온리 유>를 아카펠라 버전으로 리메이크해 영국 크리스마스 넘버원 싱글에 올랐다. 플라잉피켓츠는 전국 각지를 돌면서 노동자들의 피켓 시위에 연대한 파업 노동자들의 모임이었다.

 

같은 전술은 1974년 보수당 정부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다. 전투적 사회주의자들인 프라잉피켓츠는 이후 1984년 광부 파업 시기에 드랙스 발전소에서 피케팅을 하면서부터 레코드 레이블과 갈등을 겪었고, 일부 음반 가게는 이들의 음반 판매를 거부하기도 했다.

 

1984, 35.

 

영국 보수당 전부는 탄광 폐쇄 계획을 발표한 데 대응해서 코턴우드 탄광 광부들은 파업을 개시하면서부터 광부 대파업을 시작했다. 다른 탄광에서도 분쟁으로 파업했지만, 폐쇄에 항의하고자 같은 파업은 요크셔 주 전역으로 확산했으며 4일 뒤, 전국광산노동조합(NUM)은 전국적 파업을 호소했다. 전국 각지 대다수 광부들도 호소에도 호응했다.

 

광부 부인들도 주축을 이룬 여성 파업 지지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부터 1년 가까이 파업을 벌이도록 도왔다. 마거릿 대처 총리와 보수당 정부는 노동자 조직 힘을 분쇄하고자, 대규모 민영화, 자유시장 개혁을 밀어붙이고자 마음 먹었다. 정부는 앞서 1972, 1974, 광부 파업에서도 패배하면서부터 배운 교훈을 깊이 새겼다. 석탄을 넉넉하게 비축하던 장기간 파업에 대응했으며, 추운 겨울에 비하면 석탄 수요도 저은 봄에 탄광 폐쇄 계획을 발표하고자 일부러 파업을 도발했다. 영국에서 매우 조직력도 강하고, 전투적인 노동자 집단이던 광부는 패배해서 노동자, 고용주 사이에서 힘 균형은 달라진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1984811.

 

광부 대파업 기간 중 무려 25000명의 여성이 광산 폐쇄에 반대하며 런던을 행진했다.


광부 부인들을 비롯한 여성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 광산폐쇄에 반대하는여성들(WAPC)은 장기간 파업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41210.

 

광부들을지지하는레즈비언게이모임(LGSM)이 런던 캠던의 일렉트릭볼룸 공연장에서 자선 공연을 열었다. 팝 밴드 브론스키 비트를 내세운 공연은 대규모 광산 폐쇄에 맞서 몇 달째 파업을 벌이던 광부들을 지원하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공연으로 사우스웨일스 파업 노동자들을 위한 기금은 5000파운드가 넘게 모였다. LGSM은 지난해 열린 런던 프라이드 시위 뒤로 만들어진 단체로, 정부는 사실상 파업 광부들이 굶주림에 지쳐 작업에 복귀하도록 만들려고 기를 쓰는 가운데 광부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LGSM은 영국 노동 운동과 성해방 운동을 하나로 묶고는 노동 운동은 성해방 권리를 지지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5106.

 

경찰이 런던 브릭스톤에서 도러시 체리 그로스에게 총을 쐈고, 불과 며칠 뒤 이번에는 아무런 죄 없는 아프키라 카리브계 여성인 신시아 재럿의 집을 수색했다. 가택 수색 중에 신시아 재럿이 심장 마비로 사망하자, 브로드워터팜 지구 주민들이 경찰의 폭력에 항의하며 들고일어나 토트넘이 불길로 휩싸였다. 경찰은 몇몇 남성과 소년에게 소요 와중에 경찰관 한 명을 살해한 혐의를 씌우고자 했고, 세 명이 몇 년이나 수감됐다가 항소심을 거쳐 풀려났다.

 

19851128.

 

쉘오일컴퍼니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내부 문서가 돌았다.

 

지난 100년 동안 지구 온난화가 진행됐다. 0.5도 온도가 상승한 것은 이산화탄소가 증가한 결과이고, 향후 40년 간 1-2도가 더 올라갈 것이다. 온도 상승은 지난 1000년 간 일어난 어떤 변화보다도 더 크다. 지난 100년 간 지구 평균 해수면은 15cm 정도 상승했다. 2025년에 이르면 정확하지는 않아도 20-120cm 더 상승할 것이다.

 

문서는 1988년 쉘이 온실 효과에 관한 폭 넓게 작성한 극비 내부 보고서 일부였다. 쉘이 최소한 1981년부터 기후 변화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 쉘은 기후 변화가 인간 때문이라는 것, 화석 연료 연소가 주요한 원인이고, 이대로 간다면 재앙과도 같은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쉘은 수십 년 동안 연구 결과를 은폐하면서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 가짜 공공 연구를 후원했고, 이산화탄소 배출을 제한하려는 정부 모든 시도에 저항했다.

 

198822.

 

레즈비언, 4명은 5월에 발효된 동성애 혐오적 내용에 대한 28조 법안 도입에 대한 논의에서 항의하고자, 영국 상원 옥상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왔다. 1988, 지방정부법 28조는 학교를 포함한 지방 당국에서도 이른바 가족관계로 동성애를 수용하거나, 가르치지 못하도록 금지한 내용이었다. 2017년 또 다른 레즈비언 4명은 1988, 행동을 기념하는 파란색 명판을 붙이고자 국회의사당으로 기어올랐다.

 

1988, 23.

 

영국 각지 간호사, 2500명은 물가 상승률은 5퍼센트에 육박하는 와중에 3퍼센트에 불과한 임금 인상에는 반대하며 파업에도 들어갔다. 자동차 제조업체였던 복스홀 노동자들과 일부 광부들도 연대 파업을 벌였다. 언론 공세에도 불구하고, 다수 사람들은 파업을 지지했으며, 노동자들은 결국 일정한 양보를 얻어냈다.

 

198875.

 

영국 이스트런던에 있는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공장에서 일하는 여성과 소녀 1400명이 공장의 끔찍한 노동조건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한 노동자와 연대하고자 파업에 나섰다. 경영진은 신속하게 해고 노동자를 복직시키겠다고 제안했지만, 노동자들은 부당한 임금공제 중단 등 경연진이 다른 많은 양보 조치를 취할 때까지 작업 복귀를 거부했다.

 

1991, 614.

 

50만 명에 이르는 스위스, 여성들은 전국적인 여성 파업에도 참가해서, 1981, 614,


연방 헌법에 통합된 성평등 법률 시행을 요구했다. 주요 관심사로는 지속된 남녀 임금 격차였다. 여성들은 2011년 같은 날에도, 다시 파업을 벌였고, 2019년에도, 다시 파업에도 나서면서부터, 돌봄 노동을 제대로 인정하고, 보수를 인정하고, 성추행을 종식하고, 임금 불평등에 대해서도 행동으로 나서기를 촉구했다.

 

스위스 여성들은 평균적으로는 남성들보다 20% 정도 임금을 적게 받는다. 임금 격차에서 40%는 직종 차이 같은 요인들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1993, 422.

 

영국, 10대였던 흑인 스티븐 로런스는 엘단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가운데 인종주의들에게 공격 당해서는 사망했다. 런던 광역시 경찰은 살인자를 찾고자 충분한 자원을 투입하는 대신, 정의를 외치는 로렌스 가족 운동(캠페인)에 침투해서는 가족을 꾀하고는 신뢰를 해치고자 방법을 모색했다.


운동으로는 몇 년 간 지속하자, 정부는 할 수 없이, 경찰로부터 제도적인 인종주의를 인정했고, 2012, 살인자 2명을 기소했다.

 

199977.

 

노동자 100명이 지난 3주간 일한 급여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건설 노동자 300명이 센트럴런던의 한 건설현장에서 피케팅을 벌이며 현장을 폐쇄했다. 파업을 계기로 영국 노동자들은 동유럽과 서유럽 각국에서 온 동료 노동자들과 연대했고, 체불된 임금 또한 거의 전부 받아냈다.

 

2005810.

  

런던에서 게이트고메 분쟁이 시작됐다. 아시아계 여성 노동자가 대부분인 게이트고메는 브리티시항공으로부터 기내식 생산 외주를 받았다. 게이트고메는 임금을 삭감했고, 노동조건도 더 나빠졌다. 노동조건을 더 악화시킬 계획으로 회사는 임시 파견 노동자 수백 명을 채용해 정규직 업무를 맡겼다. 정규직 자리에서 일하는 파견 노동자들을 본 기존의 노동자들은 눈 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논의하고 항의하고자 구내 식당에 모였다. 게이트고메는 700여 명을 해고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브리티시항공의 수하물 처리 노동자들은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이례적인 연대 활동으로 살쾡이 동맹파업으로 들어가 48시간 동안 시트로 공항을 완전히 폐쇄했다. 하지만 상급 노동조합인 운송일반노동조합은 조합원들에게 작업 복귀를 지시했다. 해고된 노동자들은 피켓라인을 설치했지만, 운송일반노조 간부들이 경영진과 합의에 도달했다. 애당초 노동자들이 반대한 것보다도 악화된 노동조건으로 일부 노동자를 복직시킨다는 내용이었다. 많은 노동자가 이듬해 4월까지 계속 싸웠지만 노동조합은 이들 조합원의 행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고, 노동자들은 결국 패배했다.

 

200791.

 

영국 식민 당국이 현재 파키스탄 지역에 주둔한 인도 병사들에게 1930년대부터 화학무기를 실험해왔다는 사실이 <가디언>을 통해 폭로됐다. 영국 정부 산하 군사연구 단지인 포턴다운에서 온 과학자들이 진행한 실험에서 다수 병사들이 화상을 입었다. 겨자가스가 백인보다 남아시사인 피부에 더 큰 손상을 입히는지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었다.

 

201184.

 

6명의 자녀를 둔 29세 흑인 마크 더건이 런던 수도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사건이 벌어진 당시 경찰의 직권남용을 수사한 독립 기구 경찰민원처리위원회(IPCC)는 더건이 경찰관에게 먼저 총을 쏘았고, 총알이 무전기에 맞아 경찰이 목숨을 건졌다고 주장했다. 이는 후에 거짓으로 밝혀졌다. 더건은 총을 쏘지 않았고, 해당 경찰관은 동료의 총에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찰민원처리위원회가 더건의 사망을 조사하는 책임을 맡았다. 경찰이 사람을 살해했다는 사실에 잉글랜드 전역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운동에 앞서 영국에서 일어나는 항의 시위였다.

 

2017, 68.

 

7일 간 파업, 2차례 점거를 포함해서, 10개월 동안 지속한 운동 끝에, 런던정경대학교(LSE) 미화원들은 외주 노동자 최초로 대학에서 다시 직접 고용 성과를 얻어냈다. 모든 유색인 이민자, 노동자들은 하나된세계목소리(UVW)라는 풀뿌리 노동조합으로부터 조직화했다. 노동조합은 런던 곳곳에서도, 지속적인 파업을 벌이고는 비슷한 처지, 하청 노동자들과 함께 많은 승리를 쟁취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영국.



1381, 614.

 

잉글랜드, 농민 반란도 벌어졌다. 와트 타일러는 반란군 5만 명-10만 명에서 런던브리지, 런던 타워를 점령했다. 반란군은 대법관이던 서드베리 대주교 사이먼, 재무상 로버트 헤일스를 살해했다.

 

반란은 지난 5, 15세 이상 모든 사람들에게 인두세를 부과하고, 노동자, 빈민에 대한 경제적 고통을 가중한 데 항의하고자 일어났다. 사람들은 세금 징수인, 무자비한 행동에도 격분했다. 세금 징수인들은 연령을 확인하고자, 사람들 음모 길이를 쟀는데, 여성 경우 국가로부터 승인한 성폭력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반란은 금세 봉건 사회 급진적인 변혁을 요구하는 심대하고 복잡한 사회 운동으로 발전했고

런던타워 점령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615, 와트 타일러는 국왕 리처드 2세와 교섭 자리에서 살해당했다. 리처드는 취약한 입지를 깨닫고는 반란자들에게 인두세 폐지는 물론, 강제 노동, 농노제 폐지를 비롯한 많은 요구안들을 실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인두세만 폐지했을 뿐이었다. 반란자들은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고, 더 이상 위협은 되지도 않자, 리처드는 다른 약속을 전부 깨뜨리고는 1500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권력자 약속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잔인하지만 중요한 교훈을 준 사건이다.

 

1531, 616.

 

잉글랜드, 헨리 8세는 전년도에 제정한 부랑자법을 개정했다. 부랑자법은 노동계급을 만들어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법이다. 울타리(인클로저), 때문에 공유지에서 쫓겨났으나,

 

임금 노동에도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부랑자로 지정했다. 처음 부랑자로 잡히면, 채찍질을 당했다. 두 번째로 잡히면, 채찍을 맞고는 한쪽 귀 반은 잘렸다. 세 번째로 잡히면 처형했다.

 

잉글랜드를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도입한 법률으로부터, 노동력 말고는 팔 게 무엇도 없는 노동계급도 처음 만들어졌다. 인구 절대 다수는 이렇게, 몸뚱어리만 남는 상황에서, 뒤로는 식민 지배로부터 지구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자본주의, 임금 노동은 흔히 생각하듯,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상태가 아닌, 국가는 대대적인 폭력을 동원해서,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든 체제였다.

 

1649, 41.

 

농부이자, 작가, 제라드 윈스탠리, 30-40명 남녀는 잉글랜드 서리, 세인트조지 언덕을 터전 삼아 집단으로 땅을 일궜다. 몇 달간 많은 현지인들도 합류하면서 디거스(Diggers)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윈스탠리는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는 소책자를 쓰직 시작한 개신교인이었다. 천주교 교회는 전통적으로 하느님은 하늘 위 천국에 산다고 믿었다. 윈스탠리는 하느님은 우리 안에 있는 영()이라고 주장했다. 1646, 1, 펴낸 소책자에서 태초에 하느님은 세상을 만드셨다. 태초에는 인류 한 집단은 다른 한 집단을 다스려야 한다는 말은 없었으나, 이기적인 상상 때문에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통치한다고 정했다. 디거스 정치학은 원형적 공산주의 무정부주의로 직접 행동, 공동 소유, 위계 철폐 등을 내세웠다.


1797, 426.

 

 

잉글랜드, 플리머스, 왕립 해군 선박 15척 수병들은 2주 전, 포츠머스 인근 스핏헤드에서 시작된 반란에도 가세하면서부터 임금 인상,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했다. 수병들은 대표단을 선출해서는 다른 반란자들과 함께 교섭에도 참가하도록 보냈다. 힘을 합친 수병들은 요구안 대부분을 수용하도록 얻어냈다.


17971227.

 

영국 왕립 해군 마리 앙투아네트호 수병들이 장교를 살해하고 카리브해 프랑스 항구로 배를 몰고 갔다. 열악한 노동 조건과 수병들 사이에서 고조된 노동 계급 의식으로 영국 함대에서는 잇따라 일어난 폭동의 일부였다.


1812818.

 

잉글랜드 리즈와 셰필드에서 여성이 주축을 이루어 이끄는 식량 폭동이 일어났다. 리즈의 한 지역신문에서는 곡물과 밀을 탈취하고 판매상들을 공격하는 여성과 소년들을 러드 부인의 작위를 받은인물들이라고 묘사했다. 셰필드의 밀가루 거래업자들은 밀가루 가격을 1스톤 당 3실링으로 낮출 수밖에는 없었다.

 

1819816.

 

6만 명에서 8만 명의 노동계급 군중이 맨체스터 세인프피터광장에 모여 투표권을 요구하자 기병대가 군중을 향해 돌격하면서 피털루 학살이 일어났다. 이 학살로 15명이 사망하고 최대 700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특히 흰색 옷을 입은 여성 시위자들이 표적이 됐다. 학살 직후 시인 퍼시 비시 셸리는 걸작으로 손꼽히는 시 <무질서의 가면극>을 발표했다. 이 시는 무기를 들라는 가슴 떠리는 호소로 끝을 맺는다.

 

잠에서 깬 사자처럼 일어서라

저들이 도저히 격파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를 모아

잠든 사이 맺힌 이슬방울 털어내듯

너희 몸에 묶인 족쇄를 떨쳐내라

너희는 다수고, 저들은 소수이니.

 

1830828.

 

잉글랜드 켄트 성난 노동자들이 탈곡기를 파괴했다. 스윙 항쟁 시작이었다. 농업 노동자들은 스윙 대장이라는 이름으로 고용주들에게 요구 서한을 보내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폭도가 농장을 습격해 불을 지르고 기계를 깨부술 것이라고 협박했다.


18301129.

  

임금 인상과 일자리 증대를 위해 싸우는 스윙 대장 농장 노동자들이 영국 도싯 스투어프로보스트 마을에서 농장주와 경찰관을 공격했다. 그들 중 일부로는 체포되어 샤프츠베리로 이송됐찌만, 지역 스윙 동조자들이 죄수들을 풀어줬따. 밤이 지나기 전에 다른 다섯 마을에서 추가로 폭동이 일어났다. 스윙 대장은 노동자들이 고용주에게 요구 서한을 보낼 때 사용한 가공 반란 지도자 이름이었다.

 

1831, 531.

 

런던, 배심원단은 경찰관을 칼로 찔러 살해한 피고인에 대해 정당 방위라고 평결했다.

검시관은 배심원들을 방에 가두다시피 하고 생각을 바꾸도록 설득했으나 허사였다.

해당 사건은 구성한 수도 경찰들이 전국노동계급연합에서 벌인 시위를 폭력 진압하자,

자위에 나선 노동자들은 경찰관 3명을 칼로 찔러 1명이 사망한 사건이었다.

 

당시, 런던 사람들, 인식에서 경찰들은 부자들 재산을 보호하고, 노동계급을 비참한 빈곤 상태로 억누르고자 만들어진 폭력배였고, 따라서 사람들은 경찰을 혐오했다. 경찰관들은 거리에서도 조롱받는 일은 다반사였고, 사람들은 경찰을 산 바닷가재라는 붉은 군복을 입은 군인들을 가리키므로, 별명도 붙였다. 파란 악마, 수도 경찰들을 창설한 로버트 필이라는 이름을 따서, 필로 거느린 지랄 맞은 깡패들이라는 별명도 불렀다. 경찰은 습격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해서 초창기 신입 경찰 몇몇은 칼에 찔리고는 눈마저 멀기도 했다. 한 경찰관은 제압당한 채로 짓밟히기도 했다.

 

1831, 531.

 

영국, 웨일스, 소액 채권 재판소 집행관들은 루이스 루이스, 사냥꾼 루이스 집에다 들이닥쳐 물건을 압루하고자 하면서부터 머서티드빌 봉기도 일어났다. 루이스는 이웃들 도움으로 가까스로 집행관들을 막았다. 다음 날, 제철 노동자 시위대로는 집행관들 집을 약탈해서 물건들을 원래 소유자들에게 돌려주기 시작했다. 곳곳으로 확산한 항쟁으로는 6월 중순까지 이어졌다.

 

18351127.

 

마부 제임스 프랫과 노동자 존 스미스는 성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런던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두 사람은 영국에서 동성애 때문에 공식적으로 처형된 마지막 남성들이었다.

 

184588.

 

영국 의회가 공유지를 빼앗고 인클로저 감독관을 임명하는 인클로저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라 인클로저 감독관은 의회에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고도 더 많은 토지에 울타리를 칠 수 있었다.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영국 정부는 5000여 개의 인클로저 법안을 통과시켜서 이전까지 공중이 사용권을 갖고 있던 공유지 680만 에이커에다 울타리를 쳤다. 조금이라도 저항이 벌어지면 대개 군대를 동원해서 진압했다. 인클로저는 자본주의 발전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밖에는 다른 생존 수단이 없는 땅 없는 사람들 곧 노동 계급을 양산했기 때문이다.

 

1874, 214.

 

런던에서 발행된 주간지,<페니일러스트레이티드>에 실린 그림은 1873-1874년에 이르는 비하른 기근을 묘사한다. 지역을 덮친 가뭄으로는 식량 공급이 위태로워지자 새로 임명된 영국 벵골 총독, 리처드 템플은 대규모 구호작업을 조직하면서, 버마(비얀마)에서 수십만 톨 싸을 수입해서는 300만 개 구호품 꾸러미를 만들었다. (각 꾸러미는 1인용 하루치였다.) 신속한 행동 덕분에 기근으로 죽는 사람은 거의 전혀 없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지출 규모가 지나치게 크다며 템플 조치를 강하게 질책했다. 그리고는 1876, 인도 남부, 서남부에서 또 한번 기근이 덮쳤을 때, 템플은 구호작업을 대폭 축소한 한편 수십만 톤에 대한 식량을, 잉글랜드로 수출했으며, 인도인 약 550만 명은 아사했다.

 

1888, 418.

 

런던, 오늘날 우간다, 케냐 지역을 영국 식민지로도 운영하고자, 영제극동아프리카회사도 설립했다. 영국은 모든 식민지에서 그러하듯이, 여기서도 영국인들은 동성애를 불법화하고는 동성애 혐오 가치관을 전파했다. 2017, 우간다, 케냐를 비롯한 동성애를 범죄시하는 국가들 가운데 절반은 과거 영제국 일부였다.

 

1889827.

 

부두 노동자들의 파업이 진행 중인 가운데 런던 이스트엔드의 유대인 재단사들도 총파업을 시작했다. 대부분이 러시아 출신 유대인 이민자인 노동자 8000명은 파업위원회를 선출하고 파업을 벌이면서 하루 최대 12시간 노동을 요구했따. 부두 노동조합 지도자는 유대인 노동자들에 반감을 품었지만, 아일랜드 가톨릭교도가 압도적 다수인 부두 노동자들은 파업 기금을 모으며 재단사들이 10월까지 버티도록 지원했다. 결국 고용주들이 굴복했다.

 

1908830.

 

앨라배마주 버밍엄에서 폭력적인 진압 작전이 이어진 끝에 노동조합 지도부가 흑인과 백인 석탄 광부들의 파업을 철회했다. 주지사가 파업 광부들의 천막촌 철거에 군대를 동원한 지 4일 만의 일이었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계속하려고 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무장한 깡패들이 파업 광부들을 위협하면서 한 흑인 광부를 린치하는 한편, 언론은 흑백 인종이 섞인 노동자들에 관한 히스테릭한 기사를 내보냈다. <버밍엄에이지헤럴드>한 검둥이가 점잖은 백인 여자들과 순진무구한 어린 소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인 연사를 끌어안았다며 노동조합 집회를 비난했다. 파업의 실패는 남부 광산 노동자들과 노동계급의 인종적 단합에 타격을 줬다.

 

19091113.

 

브리스틀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가 테리사 가넷 내무부 장관 윈스턴 처칠을 말채찍으로 때리며 소리쳤다. “모욕 당한 잉글랜드 여성들의 이름으로 채찍질을 받아라!” 가넷은 폭행 혐의로 체포됐지만, 법정에 나가고 싶지 않았던 처칠은 그를 고발하지 않았다. 따라서 가넷은 치안방해죄1개월 징역형을 살았다. 교도소에서 가넷은 다른 참정권 운동가들과 함께 단식 투쟁을 벌였고, 교도관들은 강제로 음식을 먹였다. 가넷은 항의하고자 감방에 불을 질러 징벌방으로 옮겨졌다.

 

19101216.

 

영국 런던 이스트엔드에서 하운즈디치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금은방 절도에 실패한 라트비아 출신 혁명가 무리는 경찰관 3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다. 수사관들은 주빌리 스트리트에 있는 무정부주의 클럽에 주목했고, 이로 인해 이탈리아 출신 무정부주의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부당하게 연루됐다. 사건은 경찰과 군인 수백 명이 급진주의자들과 격전을 치른 저 유명한 시드니스트리트 포위전의 서곡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검거망을 피한 라트비아 출신 혁명가 도장공 피터는 이스트엔드 노동 계급 반영웅이었다.

 

191195.

 

웨일스 래넬리의 학생들이 교감에게 체벌을 받은 소년에게 동조하는 뜻으로 파업을 벌이면서

영국 전역에서 학생 파업 물결이 일었다. 한 학교를 시작으로 최소한 62개 크고 작은 도시로

확산되어 전국적으로 일어난 파업에서 학생들은 수업시간 단축과 체벌 종식을 요구했다. 학생들의 파업은 여름에 벌어진 노동 쟁의를 이어받은 행동이었다.

  

1911913.

 

잉글랜드 헐에 있는 세인트메리로마가톨릭 학교 학생 12명이 체벌과 과도한 학업량에 항의하는 파업에 학생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이들은 인근에 자리한 여러 학교로 행진하면서 학생 수 백 명을 끌어들여 햄버강으로 수영을 하러 갔다.

 

1912, 29.

 

영국, 도싯주 브리지포트에 있는 건드리(Gundry), 그물, 밧줄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 한 무리는 임금, 노동 조건을 문제 삼으면서 노동조합 승인을 받지 않은 비공식 파업, 살쾡이 파업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여성참정권을 주장하는 노래를 부르고는 파업기금을 모금하면서도, 도시를 행진했다. 지역 하원의원에 대한 중재를 거부했으며, 일주일 뒤로 런던 노동조합 관리는 합류해서 분쟁을 해결한 다음에야 작업에 복귀했다.

 

1912, 424.

 

RMS, 올림픽호, 타이타닉호 자매 선박으로, 이튿날 출항 예정이었다. 탄 보일러공 284명은 출항 직전에 설치된 접이식 구명보트는 항해 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항의하면서부터 파업으로들어갔다. 그러자 경영진들은 사우샘프턴, 리버풀에서 파업 대체 인력을 데려왔다. 다음 날, 파업 노동자 대표단은 접이식 보트 시험을 참관했고, 결함 있는 한 척만 교체하면 항해에 나서겠다고 동의했다.

 

경영진들은 비조합원, 대체 인력을 계속해서 일하게 하고자 했지만, 승무원들은 거부했고, 선원 54명은 항의 뜻으로, 배에서 내리면서부터 출항을 취소했다. 사람들을 모두 체포했고, 반란 혐의로도 재판을 받았지만, 유죄 판결을 받았어도, 한 명도 처벌받지는 않았고, 경영진들은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대중 지지를 우려해서, 복귀를 허용하도록 했다. 여객선은 반란을 일으킨 승무원들과 함께 515, 항해를 시작했다.

 

1913114.

 

여성 권리와 노동 계급 해방을 위해 싸우는 이스트런던여성참정권연맹(ELFS)이 런던 빅토리아 공원에서 처음으로 준군사조직 집회를 열고 총기 훈련을 실시했다. 다음 날 연맹은 경찰 탄압에 저항하고자 지역 민병대인 민중군대를 공식 창설했다. 좌파 공산주의자이자, 유명한 여성 참정권 운동가 에멀라인 팽크허스트의 딸인 실비아 팽크허스트는 이스트런던여성참정권연맹과 민중 군대의 핵심 조직자였다.


1914, 59.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여성참정권론가들은 집회를 단속하는 경찰들에 맞서 싸웠다. 강당을 급습한 경찰들은 마구잡이로 날아오는 화분, 탁자, 의자를 마주해야만 했고, 주짓수 훈련을 받은 참가자, 경호원들은 몽둥이, 지휘봉, 막대기, 나무 판자, 공포탄을 장전한 권총으로 무장한 채로 경찰을 물리쳤다. 경찰들은 연사들을 체포하고자 했었지만, 무대에 내건 꽃 장식 속에 감춰진 철조망 때문에 신속하게 접근하지는 못했다.

 

1914, 611.

  

여성참정권론자들, 1090, 지어졌고, 세계적으로는 유명한 교회,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폭탄을 터뜨렸다. 우파 성향 일간지, <데일리텔레그래프>는 악랄하다고 묘사했다. 진보 성향 논평가들은 영국 여성참정권운동은 폭력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흔히 무시한다.

 

1914710.

 

27세의 여성참정권론자 로다 플레밍이 스코틀랜드의 도시 퍼스에서 왕과 왕비가 탄 리무진에 뛰어들어 유리창을 깨뜨릴고 두들겼다. 언론은 이 행동을 여성참정권운동 역사상 가장 대담한 행동이라고 묘사했다.

  

19151117.

 

영국 글래스고 가정 주부와 노동자 수천 명이 집세 납부 거부자 2만 명을 지지하며 주 법원 앞으로 행진했다. 투쟁은 영국 전역에서 임대로 통제를 도입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투쟁을 지켜본 노동 운동가, 윌리 갤리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른 아침부터 여성들이 주 법원이 자리한 시내까지 행진을 벌였다. 하지만 그들이 행진하던 바로 그 순간에도 강력한 증원군이 공장과 일터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멀리 서쪽 댈뮤어, 동쪽 파크헤드, 남쪽 캐스카트, 북쪽 하이드파크에서 거친 무명천 작업복 차림으로 프롤레타리아트 군대는 시내로 쳐들어왔다.

 

1916, 413.

 

글래스고, 시의회는 결사 자유를 제한하는 조례를 도입했다. 제정된 조례로는 1922, 노동계급, 급진주의들로부터 글래스고그린 공원 집회를 막는 근거로도 발효하자, 표현 자유를 위한 투쟁을 돌입했다. 뒤로 10년 간 항의 시위를 조직하고는 조례에도 도전하는 집회를 열었고, 발언자를 체포해서는 수감한 한편, 최대 10만 명에 이르는 군중들은 경찰과도 싸우고는 폭동을 벌이고, 상점을 약탈했다. 덕분에 조례를 철회했다.

 

1919, 34.

 

웨일스에 자리한 킨멜파크에서 귀국과 동원 해제를 기다리던 영국 육군 소속 캐나다인 병사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비위생적, 과밀한 환경에서 병영에 묶여 있던 병사, 15000명은 한 달이 넘도록 절반뿐인 배급, 지급되지도 않는 봉급에만 시달렸다. 병사들 울분으로 병영 사령관 릴은 저녁 외출을 나갔을 때 폭발했다. 병사들은 병영 물자, 부사관 식당을 약탈하고는 불 질렀다. 소총 몇 정 손에 넣었고, 손잡이에다 면도칼을 붙이면서 무기를 빠르게 만들었다. 장교, 충성스러운 병사들은 무장을 갖췄고, 폭동을 진압하면서 20명을 체포했다. 장교들은 총 쐈고, 오전 430분에 이르러 병영을 다시 장악했다. 같은 사건으로 폭동자 3, 경비병 2명은 사망했으며 78명을 체포했다. 25명은 반란죄를 선고 받고는 최대 10년 징역형을 받았다. 군 당국은 병사들 동원 해제를 대규모로 빠르게 진행했다.

 

1916, 512.

 

아일랜드, 사회주의, 노동 조합 활동가, 독립 운동가, 제임스 코널리는 더블린, 킬마임햄 감옥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비롯한 15명 수감자로는 영국 식민 지배에도 맞서 부활절 봉기를 이끈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싸움 가운데 입은 부상으로는 총살형 집행대 앞에 설 수 없었던 코널리는 의자에 묶인 채로 총 맞았다.

 

1920, 510.

 

잉글랜드, 런던, 이스트인디아 부두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SS 졸리조지호에서 러시아 혁명에 맞서 싸우는 데 사용할 탄약이 실려 있음을 알자, 작업을 중단했다. 노동자들은 무기를 내릴 때까지 하역 작업을 거부했고, 석탄 운반부들도 선박 엔진에다 쓸 석탄을 싣기를 거부했다.

 

노동자들은 승리했다. 515, 탄약은 다시 부두에도 내려졌다. 전 여성참정권 활동가, 좌파 공산주의, 실비아 팽크허스트는 불매 운동에서 핵심 역할을 했고, 타워햄리츠구, 포플러 출신 워커 여사라고만 알려진 또 다른 사람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01019.

  

실비아 팽크허스트가 체포되어 국토방위법 42조를 근거로 기소됐다. <워커스드레드노트>, 1016일자에 기사 2개를 편집, 게재해서 해군의 폭동을 선동하려 했다는 혐의였다. <수병들의 불만>이라는 기사는 스프링힐이라는 젊은 해군 수병이 쓴 편지를 바탕으로 가명을 쓴 기사였고, <황화와 부두 노동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인종주의를 다룬 기사는 클로드 맥케이가 리온 로페스라는 가명으로 쓴 글이었다. <황화와 부두 노동자들>은 부두 노동자들에게 러시아의 반공 세력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선박에다 짐 싣는 일을 하지 말라고 촉구했는데, 510SS졸리조지호에서 벌어진 작업 거부 행동이 성공하고 불과 몇 달 뒤에 나온 기사였다.

 

1924, 216.

 

20만 명에 육박한 영국, 부두 노동자들은 파업에도 돌입했다. 당시 영국은 사상 처음으로 노동당 집권 가운데, 램지 맥도날드 총리는 파업 노동자들에게 법을 최대한 강제하면서부터, 1920년 비상 대권까지 발동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끈질기게 버텼으며, 일주일 뒤로 투표로부터 하루 2실링, 임금 인상안을 받아들였다.

 

1925, 530.

 

영국, 지휘하던 상하이 경찰들은 일본인, 소유 면직 공장에서 벌어진 파업을 지지하는 노동자, 학생, 12명을 학살했다. 노동계급은 대규모 파업으로 대응했다. 몇 주 만에 상하이, 광저우, 홍콩은 완전하게 마비했고, 노동자들은 홍콩 대부분을 점령했다. 파업은 이듬해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분쇄했다.

 

1926, 53.

 

오후 1159, 200만 명에 가까운 영국 노동자는 임금 삭감에도 직면했다. 직장 폐쇄로 쫓겨난 광부들을 지지하고자 연장을 내려놓고는 총파업을 시작했다. 일주일 넘게 끈질긴 행동을 지속했지만, 전국 노동 조합 연맹체로는 노동조합회의(TUC)로는 어떤 양보도 얻어내지 못한 채로 굴복하고 말았다.

 

19261126.

 

영국에서 벌어진 전국적인 탄광 파업이 패배로 끝나면서 광부 대표들이 남은 파업자들에게 작업에 복귀하라고 조언했다. 임금 삭감과 노동 시간 증가, 임금 교섭에서 노동 조합 배제 등에 항의하며 51일부터 시작된 파업이었다. 전국 노동조합 연맹체인 노동조합회의는 처음에 광부들을 지지하는 총파업을 소집했는데, 총파업이 성공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지레 겁을 먹고는 아무 양보도 얻어내지 못한 채 파업을 철회했다. 결국 광부들만 남아서 싸움을 이어갔다. 10월에 이르러 굶주림과 생활고 때문에 상당 수 파업 광부가 작업에 복귀했다.

 

1934, 115.

 

영국 대중적인 타블로이드 신문, <데일리 메일>은 오스왈드 모슬리, 파시스트 운동을 지지하고는, <블랙셔츠단 만세!>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기사를 쓴 로더미어 자작(子爵) 가문은 지금도 <데일리 메일>을 소유한다. 신문은 줄곧 영국에서 매우 우파적인 타블로이드 신문이고, 반 파시스트를 비롯한 가짜 뉴스를 양산한다.

 

193497.

 

반파시스트들이 주말로 예정된 오스왈드 모슬리와 영국파시스트연맹(BUF)이 여는 집회에 맞서는 시위를 광고하는 현수막을 BBC 방송국 본관에 내걸었다. BBC는 모슬리를 초청해 나치에 동조하는 견해를 홍보하고 시위를 선전한 바 있었지만, 다른 언론들과 마찬가지로 반파시스트들에게 발언 기회를 주거나 반대 시위를 언급하기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이날 런던에 모인 10만 명이 넘는 인파는 파시스트들과 경찰 호위대를 압도하면서 그들을 하이드파크에서 몰아냈다.

  

1936104.

 

오스왈드 모슬리의 영국파시스트연맹이 이스트런던의 유대인 지구를 관통하는 행진을 계획하면서부터 케이블스트리트 전투는 벌어졌다. 10만 명이 넘는 지역 주민과 노동자들이 그자들은 절대로 통과하지 못한다고 결의하면서 파시스트 대열과도 맞섰고, 블랙셔츠단과 그들을 보호하는 경찰에 대항함으로부터 결국 행진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1944123.

 

영국이 훈련과 장비를 제공한 그리스 경찰이 나치 부역자들과 함께 아테네 반나치 시위대에게 발포해 28명이 사망했다. 당시 미군과 영국군은 지켜보기만 했다. 앞서 영국군은 군중을 해산하고자 시위대 위로 예광탄을 쐈으나 허사였다. 이런 공격은 반나치 파르티잔을 약화하기 위함이었다. 영국 윈스턴 처칠 총리는 지난 3년 간 영국 편에서 싸운 그리스 파르티잔 안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크다고 판단했다.

 

1945731.

 

영국에서 새로 당선된 노동당 정부가 징집 병력 600명을 런던의 서리 부두로 보내 생산 지연 선술로 임금 인상을 위해 싸우는 부두 노동자들을 진압하려 했다. <텔레그래프>의 한 기자는 생산 지연 전술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노동자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의도적으로 느릿느릿 작업을 했다. 그들의 행동이 계획적이라는 증거가 있었다. 크레인을 운전하고 부둣가에서 배로 물품들을 나르기는 했지만, 노동자들은 모든 일을 마지못해 하는 것처럼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이유는 금새 알 수 있었다. 작업자들이 크레인에 연결된 로프로 설탕 포대를 배에 싣고 있을 때, 어디선가 왜 평소처럼 12포대씩 걸지 않고 4포대씩 거느냐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1945109.

 

영국 노동당 정부가 에스파냐 내전과 반나치 전쟁에서 싸운 레지스탕스 투사 226명에 대한 투옥을 옹호하면서부터 그들에 대해 적국의 준군사조직 구성원들이라고 설명했다. 프랑스에서 억류됐다가 탈출해 레지스탕스에 가세한 이들이었다. 독일에게 포로로 잡힌 그들은 해방되자마자 일제히 검거되어 잉글랜드 랭커셔의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한 명이던 아구스틴 솔레르는 수용소에서 자살했고, 에우스타히오 부스토스 등은 박해를 받아 정신이상자가 됐다. 구금자들이 단색 투쟁을 벌이고 대중적인 시위가 벌어지자 랭커셔주 촐리에 있는 수용소로 이송됐는데, 그곳에서는 적어도 공화파라는 신분을 증명할 수 있었다. 이듬해 1월 수용자들은 그곳에서 파업을 벌였고, 같은 해에 풀려나거나 국외 추방됐다.

 

1950, 64.

  

잉글랜드, 런던에서, 열린 임시 총회에서 전투적 반파시스트 유대인 재향군인, 남녀로 구성된 단체 43모임, 표결로부터 해산을 결정했다. 43모임은 2차대전 당시, 나치에도 맞서 영국군에서 싸운 유대인들은 4년 전, 결성한 단체로, 강제 수용소 참상을 직접 목격했고, 영국에 귀국한 뒤로는 거리 파시스트들은 공공연하게 조직화 시도를 하기도 했다. 43모임, 구성원들은 필요한 모든 수단들을 동원해서, 파시즘, 인종주의, 반유대주의와 싸우자고 결의했다.

 

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 제리 플램버그, 미용사 수습생 비달 사순, 장교 출신 게이 해리 비드니, 파시스트 단체에도 진입한 도리스 케이, 열렬한 거리 투사로 손꼽히는 줄리 슬로건, 같은 여성들은 43모임 구성원이었다. 보통 전국 각지, 여러 도시에서도 파시스트들 경찰 호위대를 돌파한 뒤로부터, 파시스트 귀족 오스왈드 모슬리, 추종자들을 괴롭히는 식으로 파시스트 집회를 방해하고는 해산했다. 모슬리는 도망치듯 해외로 떠났고, 파시스트 세력도 작아지자마자,

 

43모임도 해산을 결정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르러 모슬리는 재기를 시도했을 때, 모임 베테랑 선수들은 다시 운동에도 뛰어들었다.

 

1950, 623.

 

런던, 스미스필드, 육류시장에서 일하던 배달 노동자들은 살쾡이 파업에도 들어갔다

노동당 정부는 7월까지 지속된 파업을 비난하고는, 깨뜨리고자 군대를 파업 대체 인력으로 동원했다. 전쟁 뒤 노동당 정부는 노동계급에 대항하고자 군대를 동원한 많은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