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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몇 가지 개설하고 싶은 문제로는 토지 문제를 들 수 있다. 

본지로는 <토지와 사유 재산>에서도 비슷한 내용이라면 이미 다뤘다.  

임대업, 대부업은 쌍방으로 발전해왔다. 부동산이 들어선 이후로는, 

토지의 공동 분배에 대한 문제를 꺼내기란 쉽지 않았고, 역대 정권들에서도 

토지 개혁이나, 아니면 산업체들의 생산 가동을 증가시키기 위한 명분으로부터, 

재산에 따른 토지가 수익 분배의 차원으로도 확장됐다는 사실도 있다. 


사실 토지 문제에 관해서라면 농민들도 부농, 중농, 소농에 따른 재산 소득에 따른 계층 분포도로도 파악할 수 있지만, 유독 농민들도 '보편적인' 시각 아래에서 토지 제도의 수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민중 운동과는 별개로, 혹은 경제주의로부터 상정한 일부 농민들의 토지 수혜를 상정하자고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토지 신탁에 따른 조언이라면, 토지 제도로부터 공공 분배가 아닌, 사익성에만 몰두하고자 수 많은 소자본가들도 여러 방면에서, 그리고 국가들로부터 인정을 받거나 자신들의 크나큰 입지와 기반을 마련하고자 토지 제도로부터 수익 창출이 가능해졌고, 종합부동산의 정책들에서도 알 수 있는 사례들과, 건설업과 시공사, 그리고 소유자 측의 관계에서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역대 정권 모두 토지 제도의 문제를 '절대로' 해결하지는 못했다. 

심지어는 '집값 폭등'을 단독 가구원들을 대상으로 현상 분포로만 파악하기도 했다. 

토지 면적이 매우 좁은 국내로 보아도, 이와 같은 현상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국가가 토지 소유로부터 임의적으로 모의 가격의 변동으로도 막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주택 거래가 일상적인 해외에서도 '모가지 대출'이라는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자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토지 신탁마저 

불법적으로 거래되거나, 또는 토지가 소유 재산에 속한다는 바로 그 사실을 잊다. 

법적으로도 세를 내는 노동 계급들이 자신의 일정한 거주지를 가지기란 쉽지도 않다.    

바로 역사적인 착취의 모습이란 일제의 수탈로부터도, 그리고 그 내부자들로부터도 계속해서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계급 투쟁에서 적대적 모순이란 바로 경제적 시공간에서도 응축된 역사적인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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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제: 재벌가란 현대 부르주아지이며 자산가이다. 


소전제: 부르주아지들은 축적 자본을 여러 문화로도 섭렵하고, 또한 집적한다. 


요구하는 주요한 응답. 


그렇다면 왜 생산 문화는 부르주아지들의 지배 사상으로도 수용되는가.


문제에 관한 세부 문의. 


- 제국주의 아래에서도 일어나는 일반적인 현상들은 어떻게 자본주의로부터 희석된 문화일까.   


- 정도로 보자면 부르주아지 문화는 규모 면에서 어떠하며, 무방비하게 노출된 상태인가. 또 얼마나 자본주의 가동에도 암암리에 기여하는가. 


- 생산되는 미학적 평론과 소비가 어째서 부르주아지들의 재산 축적 수단이자, 오랜 방식이 되어왔나. 심지어는 왜 사적 소유의 일부로 기능하는가. 자본의 회전에서 이와 같은 반복된 생산물들은 

어째서 오랫동안 순환하여 반복된 항성을 가지는가.    


- 초과가치(잉여가치)와 지배·문화 축적 방식에 관한 상관 관계. 


- 다음과 같은 질문을 인민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이를 문제 시 여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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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어째서 제국주의 국가인가.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대한 논의를 내팽겨친 뒤로, 21세기 후로는 경제학자들의 응답은 길어졌다. 

왜냐하면 모두들 입문서와 경영서를 쓰기에 바빠졌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의 논쟁이란 아주 형편 없는 자유 시민 논쟁으로 축소됐고, 더 이상 지면마저 아까운 그러한 비판적 논의를 철회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1960-1980년대 사이라는 일종의 공백을, 그들은 국가독점자본주의가 부르주아 독재로 미화되고 있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고 있는 듯 보인다. 그것은 우리 남한 사회가 더군다나 미국의 정책들에 대한 눈치와 우호적인 옹호를 펼쳤던 까닭이기도 했다. 그것은 또 다른 윤리적 독재자가 경제 발전에 대한 우상이 됐다는 식으로, 귀족 노조로 우롱하거나, 프롤레타리아트마저 폄훼하기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아주 가관일 정도다). 맑스를 배우려는 연구자들이 과연 얼마나 됐던가! 


한국 자본주의는 가동을 멈춘 것이나 다름 없다. 은밀하게 이뤄진 부르주아 독재자의 기념관과 동상을 설립하기에 급급했고, 산업 발전이 다름 아닌 수입과 원조로 이뤄진 독자적인 건설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포장된 도로가 깔리고, 밀림을 모두 태웠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다 치우지도 못할 쑥대밭으로 바꿔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누구의 말대로 인권의 복귀, 자연의 회귀 따위를 발언하고 싶지도 않다. 

그들은 문명의 원천이 차단되는 그 순간부터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경제 개발의 결과란, 바로 재벌 부르주아들의 사회로 편입됐다는 것을 뜻했으며, 

수정주의자와 경제주의자들 간의 논쟁이 마르크스주의를 걸고 시작됐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세대들 모두는 본격적인 투쟁을 감행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의 무의미한 논쟁이 낳은 결과란, 다름 아닌 남한 사회의 지속이기 때문이다.  

 

원치 않든, 국가독점자본주의는 가속화되고 있다고 묻는다면, 우리는 국독자, 식독자론에 대한 과거 논쟁이 주는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이었고, 또한 무익했는지를 따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논의는, 도대체 동네 서점가에서 유행할 법한 입문서와 같은 경제원론이나, 방법론적인 접근의 생산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데이터와 통계마저 부족한 실정이다. 한물간 출판은 길어야 3년이지만, 철 지난 혁명의 과업도 평생이므로 국내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출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것은 레닌이 플레하노프와 카우츠키의 한계를 아주 적나라하고도, 

분명하게 꼬집었던 존경과도 같다.  


추천 도서. 


<이른바 시장 문제에 관하여> 

<인민의 벗들은 누구인가>

<먼 곳에서 보낸 편지들> 

<맑시즘의 희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질문. 


그렇다면 정치·경제 엘리트 독자들은 많으면서, 왜 맑스와 엥겔스의 독자들은 줄어든 것일까.

전혀 위협적인 요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파시스트와 자유 진영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마는 것인가. 정작 공산권에 대한 우려가, 공산주의로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그만큼 맹목적이고 경도됐음을 반증하고는 만다.  


둘째로는 매우 쉬우면서도 단순한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다. 

정작 공산권 국가에서는 왜 아직도 군대를 요구할까.

따라서 미치지 않는 이상으로는 투쟁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실제로도 제국주의 국가는 남는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다.





'군비철폐는 사회주의의 이상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전쟁이 없을 것이다. 그 결과로 군비철폐가 실현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사회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없이 실현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자는 그 누구든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독재는 직접적으로 폭력에 기초한 국가권력이다. 그리고 20세기에는 폭력 문명 시대 일반에서 그렇듯이 주먹도, 곤봉도 아닌, 군대를 의미한다. 군비철폐'를 강령에 넣는 것은 '우리는 무기 사용에 반대한다'고 전면 공표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폭력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여기에는 일말의 마르크스주의도 없다. 



무기 사용과 무기 획득을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는 피억압 계급은 노예처럼 취급받아 마땅하다. 우리가 부르주아 평화주의나 기회주의자가 되어버린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계급투쟁과 지배계급 권력을 타도하는 것 말고는 어떤 탈출구도 없고 또한 있을 수도 없는 계급 사회에 살고 있음을 망각할 수 없다. 노예제나 농노제에 기초한 것이든 지금처럼 임금노동에 기초한 것이든 모든 계급 사회에서 억압 계급은 항상 무장을 하고 있다. 오늘날의 상비군뿐만 아니라 민병도 예를 들어 스위스의 민병 같은 가장 민주주의적인 부르주아 공화국의 민병조차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적으로 하여 무장할 것이다. 이것은 깊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을 만큼 초보적인 진실이다. 모든 자본주의 나라에서 예외 없이 파업 노동자들을 상대로 군대(공화제적·민주주의적 민병을 포함하여)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적으로 하여 무장하고 있다는 점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실 중 하나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앞에 두고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가 '군비철폐' '요구'를 내걸라고 촉구받다니! 이것은 계급투쟁 관점을 완전히 방기하는 것, 모든 혁명 사상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부르주아지를 쳐부수고 수탈하고 무장해제시키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장, 이것이 우리의 슬로건이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혁명적 계급이 가질 수 있는 단 하나의 전술이다. 자본주의적 군국주의의 객관적 발전 자체로부터 논리적으로 뒤따르는 전술이자, 그러한 발전이 지시하는 전술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를 무장해제시킨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세계사적 사명을 배반하지 않고 모든 무기(군비)를 고철더미 속에 버리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틀림없이 그렇게 할 것이지만, 그것은 오직 그런 조건이 달성되었을 때뿐이며 그 전에는 결코 아니다.' 


레닌, <'군비철폐' 슬로건에 대하여>, 1916.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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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에서 민주당의 상황을 보자면, 적절한 비판보다는 수 많은 비난 공세가 더 많다. 오히려 러시아의 상황에서 사회혁명당의 케렌스키와 입헌민주당이 많이 생각난다. 흥미롭지만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가진 영향력에 비해서생각보다 부담 요소가 더 많이 작용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물론 케렌스키를 잘 아는 연구자들도 간혹 있을 것이다아직도 정치권에서는 민주당 인사를 두고는 좌파 인사라고 부른다그러나 사회타협주의이라는 한계를 잘 보여준 인물이 무려 20세기 러시아에서도 민주당의 인사들도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기를 바란다. 중도주의에 대한 명확한 한계란, 바로 사적 유물론의 진가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질과 양, 개념의 객관적 통일이었다는 점을 보다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역사적 투쟁을 감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래 전 시민 혁명적 지침들에 대한 낡은 시대 정신이란, 계급 모순에 따른 창고 속의 보관된 소부르주아적 태도라는 점에서도 우리는 깊이 우려하는 바이다. 


수 많은 비난 공세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 전, 차리주의 아래에서 봉건적 러시아는 케렌스키와 입헌민주당의 사회타협주의가 가진 한계를 잘 읽어보는 것도 시사하는 바는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일설들도 많았으므로, 제아무리 '좌파'라는 공세를 퍼붓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는, 굳이 비교를 들자면 도대체 어떤 점에서 한국의 민주당은 좌파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크나큰 의문점만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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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노년의 인구 수가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부양 인구 수는 줄어들고 있다는 말이다. 총 인구 수를 고려한다면, 여성과 돌봄 연구로만 한정한 매우 미시적인 분석에만 열중한 결과는 아닐지 의문이 드는 통계이다. 노인 인구 대비 출생률로 파악한다면,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는 1990년대부터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한 세대가 끝나는 만큼 서막이라 믿었던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끝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의료에서도 민영화를 추진했고, 병원 수는 늘어났지만, 정작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의사는 턱 없이 부족하다고 한다. 그렇게 입시 제도로부터 정당한 시험이라 여겼던 의대 시험들도, 문턱 높은 전공의 의사와 간호사는 환자를 제대로 돌볼 여건마저 있었는지는 자문 해보게 된다. 


한 의사는 환자 수는 늘어나지만, 감당할 의사가 부족하다고 하소연한다. 그러나 의료 보험이라는 혜택을 받으면서도 환자는 늘 대기한다. 더욱 급한 의사들은 더 쉬운 전공을 택하고자 마음을 돌리고, 힘든 전공을 기피한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이후로도, 긴급 병원들에서는 의료법을 지키지도 않고, 불법 시술만 더 늘어나고 있다. 언젠가부터 건강이란 피부와 미용에만 해당하는 일이었고, 건강이란 신체 운동에만 해당하는 지키지도 못할 처방을 내려준다. 


있는 사람들은 걱정 하나 없는 국민들이 납부할 세금만큼이나 부담해야 할 건강보험료도 올랐다. 남들은 기나긴 토론을 해오는 국민 연금 제도를 보더라도, 앞으로는 연금 고갈을 먼저 우려하는 한국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먼저 재벌 자본가들의 배를 불러서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을 초과 생산으로 쥐어 짜내고, 노동 임금을 착취하면서 고작 심심풀이에 불과한 자신들의 연금을 땅콩으로 늘려왔는지를 고려해보지도 않았다. 전공의들이 의사가 될 때도 같은 고민을 할까. 같은 연유로 한 대학에서는 교수가 강사들을 부려먹는다고 한다. 그리고 반도체 노동자가 숨졌음에도, 기업들은 모두 노동 시간을 줄일 노력은 하나도 없고, 더 정치적으로 근무 제도에만 기댄다. 모두 자본주의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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