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그리스.
1936년, 5월 9일.
그리스, 테살로니키에서 경찰 탄압에도 맞서 노동자 시위대는 총파업을 벌였다. 경찰, 군대는 노동자 시위대를 공격해서 12명은 사망했다. 사망한 노동자들 장례식에는 20만여 명은 운집한 대규모 시위를 했고, 며칠 뒤로 전국 항의 파업도 잇따랐다.
불과 3개월 뒤로, 그리스 총리, 이오아니스 메탁사스 장군은 무질서를 종식하고자, 독재를 실시하겠다고 선언했지만, 하루 최대 8시간 노동, 연금, 복지 수당 같은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해야만 했다.
1944년 8월 31일.
그리스 나치 부역세력인 보안대대 소속 군인들이 통역사이자 반나치 레지스탕스 활동가인 마리아 디마디를 처형했다. 디마디는 독일 수비대 본부에서 스파이로 활동하면서 레지스탕스에 정보를 전달하고 있었다.
1944년 10월 30일.
좌파 세력이던 그리스인민해방군(GPLA)은 테살로니키를 나치 점령으로부터 해방했다. 일부 부대가 지닌 새벽 발전소와 식품 공장을 폭파하려던 나치 시도를 저지한 한편, 다른 부대들은 후퇴하는 독일군을 공격했다. 오후 2시 무렵 해방이 마무리됐고, 파르티잔들은 거리 행진을 시작했다. 뒤로 주민들이 모여 자치 정부 대표자를 뽑았다. 도시는 이듬해 2월까지 지역 공동체가 다스렸지만, 뒤로 우파 그리스 정부에게 통치권이 넘어갔다. 점령 과정에서 테살로니키 전체 인구 10% 및 유대인 인구 96%, 산업 90%는 사라졌다.
1973년 11월 14일.
그리스의 아테네공과대학교 학생들이 군사 독재에 항의하고자 파업을 벌였다. 학생들은 대학 안에서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라디오 방송국을 만들어 도시로 방송을 송출하면서부터 국민들에게 함께 싸우자고 호소했다. 11월 17일 이른 아침, 군 탱크 한 대는 학생들을 쫓아내고자 학교 문을 부수고 진입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봉기 규모를 더욱 키우기만 했다.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최소한 24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도 11월 17일은 그리스 교육 제도상 국경일로 준수되며, 이날 봉기는 1974년 그리스가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했다.
2008년 12월 8일.
경찰이 15세 소년 알렉시스 그리고로풀로스를 살해한 지 이틀 뒤, 그리스 전역에서 시위는 고조되며 전면적인 항쟁으로 치달았다. 항쟁이 폭 넓게 확산되면서 곳곳에서 싸움이 벌어지자 결국 소년을 죽인 경찰관들이 수감됐다. 한 시사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정부주의자들 스스로도 사회의 수 많은 부문에서 폭력이 고조되는 걸 보고 놀랐다. 불안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전까지 매우 적극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깜짝 놀라서 사회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들은 사회가 자신들을 훌쩍 넘어섰다고 느꼈다.
2009년, 3월 22일.
그리스, 재소자이자 활동가, 카테리나 굴리오니는 3월 18일 사망했다. 뒤로는 교도소 폭동도 시작했다. 테베, 여성 교도소 수감자들은 감방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는 불을 지르고, 기물을 파손하는 동안 교도소 바깥에 모인 시위대는 전투경찰과 충돌했다. 아테네에서도 수감자 200명은 연대 시위를 벌였다.
굴리오니는 장애인 수감자를 위한 시설 부족, 많은 수감자는 도중에 사망한다고 알려진 교도소 이송 과정, 비공식적인 강간이라고 규정한 생식기 검사 등에도 항의하고자 운동을 벌인 유명한 재소자이자 활동가였다. 동료 수감자들은 굴리오니에게 언론에도 추모 성명을 보냈다.
네덜란드.
1795년 8월 17일.
네덜란드 식민지인 퀴라소섬 흑인 노예 약 40명이 들고일어나 노예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주인’에게 이제 더는 당신의 노예가 아니라고 통고하고는 농장을 떠나 다른 노예들을
해방하면서 무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반란은 주동자들이 잡혀 살해되기 전까지 한 달 넘게 지속됐다. 이러한 반란은 노예들이 새로운 권리를 획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41년, 2월 25일.
네덜란드에서는 나치 점령 당국, 유대인 탄압 조치에 반대하는 총파업도 벌어졌다. 공산주의를 따르던 사람들로부터 조직한 파업으로, 이튿날 핵심 활동가들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면서 대부분 진압됐다.
1943년, 3월 27일.
게이, 반파시스트, 레지스탕스, 빌럼 아론되스로 이끈 집단은 암스테르담, 공공 기록청에다 폭탄을 터뜨렸다. 네덜란드 유대인을 위한 가짜 신분증을 만들었다. 신분증에 대한 진위를 확인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기록을 파괴하고자 했다. 실제로 공격으로부터 문서철 수천 개를 파손했다. 아론되스를 비롯한 구성원들을 일주일 만에 체포했다. 구성원 가운데 한 명으로는 프리다 벨린판터는 레즈비언, 음악가로 가까스로 체포는 피했다. 그러나 아론되스를 비롯한 12명은 같은 해 7월, 총살 당했다. 아론되스는 처형 직전 마지막으로 동성애는 겁쟁이가 아니라고 널리 알려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1969년, 5월 30일.
카리브해에서 자리한 섬이자, 네덜란드 제국 일부였던, 퀴라소에서 노동자 봉기는 일어나,
며칠 뒤 정부를 무너뜨렸다. 저임금, 흑인 차별에도 맞선 대규 파업, 폭 넓은 폭동도 벌어졌다. 항쟁은 퀴라소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1986년, 3월 29일.
네덜란드, 작은 도시 케디험에서 반파시스트들은 파시스트 정당이던 중도당(CP), 중도민주당(CD)로부터 비공개 통합대회를 열 예정이라는 소문을 접했다. 시위대는 대회가 열리는 호텔에다 연막탄을 하나 던졌는데, 공교롭게도 장막(커튼)에 불마저 붙었다. 불과 몇 분 만에 건물은 화염에도 휩싸이자 안에 있던 파시스트들은 폭동 현장인 바깥으로 도망쳤다. 예정된 통합 대회는 불발로 끝났다.
노르웨이.
1941년, 5월 21일.
노르웨이, 나치들에 대한 점령을 반대하는 배우들 파업도 시작했다. 나치들은 방송을 접수한 뒤로, 연기에 마음이 내키지 않던 많은 배우들에게 만약 정치적 이유로 배우는 한 명이라도 해고한다면 파업을 벌이기로 비밀 서약을 한 상태였다. 토레 세겔케, 릴레모르 폰 하노, 예르다 링, 엘리사베트 고르딩 등 배우 6명은 라디오 방송을 하라는 나치 당국 명령을 거부했다.
5월 21일, 오슬로, 경찰 본부로 소환해서 심문을 받은 6명은 전부 취업 허가를 취소했다.
같은 날 저녁,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이고는 수도 모든 극장에서는 문을 닫았고, 다음 날 베르겐, 트론헤임으로 파업을 확산했다. 게슈타포는 배우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배우들은 압도적인 찬성률이 나온 투표를 거쳐서 파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5월 24일, 독일 당국은 노동자들에게 최후 통첩을 보냈고, 노동 조합 대표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탄압과 사형 위협에도 불구하고, 파업은 5주 동안이나 지속했다. 쟁의 직후로부터 나치들은 극장을 완전하게 장악하기로 결정했다. 파시스트 오락에는 관심 없었던 일반 대중들은 극장을 아예 불매(보이콧)해버렸다.
1941년 9월 8일.
나치 점령 당국에 저항하는 노르웨이 우유 파업이 벌어졌다. 월요일에 출근한 노동자들은 이미 줄어든 우유 배급이 완전히 끊겼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조선소와 제강소 노동자들이 아침 식사 뒤로 자발적으로 파업에 돌입했고, 이후 이틀 간 50여 개 작업장으로 파업이 확산되며 2만 명에서 2만 5000명의 노동자가 일손을 놨다. 나치는 계엄령을 선포해 노동 조합 지도자 두 명을 처형하고는 다른 이들을 투옥하면서 대응했다.
덴마크.
2010년, 4월 7일.
덴마크, 코펜하겐, 칼스버그, 맥주 공장 노동자 800명은 근무 가운데 맥주를 마시지 못하도록 하는 새로운 경영 방침에 항의하고자 파업에도 돌입했다. 회사 트럭 운전사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전주에는 이미 공장 측 작업 현장에서 노동자들은 하루 종일 무료로 꺼내 마실 수 있었던 맥주 냉장고를 철거하면서부터 이제부터는 점심 시간에만 구내 식당에서 맥주를 마실 수 있다고 공지했다. 파업은 5일 간 지속했지만 실패했다. 다음 달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자 다시 파업을 벌였다.
독일.
1867년 7월 25일.
독일 공산주의자 칼 마르크스는 《자본》 독일어 초판 서문을 썼다. 《자본》은 지금까지 쓰인 책 가운데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가장 결정적이고 통찰력 있는 비판으로 남았다. 처음 세 장은 속도가 더딜 테지만, 언젠가 됐든 꼭 읽어보기를 바란다.
1914년 12월 25일.
1차 대전 중 서부 전선에서 대치 중이던 10만 명의 병력은 비공식적으로 휴전을 하면서부터 서로 싸우기를 거부했다. 독일 병사들은 <고요한 밤>을 비롯한 크리스마스 캐럴을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부르기 시작했다. 영국 병사들도 다같이 노래를 불렀다. 이윽고 양쪽 군대는 천천히 참호에서 걸어 나와 무인 지대에서 만났고, 서로 선물을 교환하고 어떤 곳에서는 축구를 하기도 했다.
1918년 10월 29일.
독일 해군 수병들이 한밤 중에 북해에서 영국군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거부했다. 다섯 차례나 명령이 내려지고, 항명한 병사 1000 명이 체포됐지만 수병들은 꾸준하게 거부했다. 이후 며칠 동안 반란은 확산되어 제국 함대가 마비되고, 혁명과 1차 대전 종식으로 이어졌다. 반란 사태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에서는 같은 결과는 보통 생략된다.
1918년 11월 9일.
혁명이 독일 전역을 휩쓸고 황제가 퇴위하는 가운데 독일 노동자들이 1차 대전을 끝내고자 싸웠다. 반전 총파업으로 마비된 베를린 거리로 반란 수병과 병사, 노동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독일 사회민주당 부의장 필립 슈나이더만은 감옥에서 나온 혁명적인 사회주의자 칼 리프크네히트는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슈나이더만은 허를 찔리기 전에 당 지도자 리프크네히트 뜻을 거역하면서부터 의회 발코니로 나가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같은 날 저녁 사회민주당 지도부를 불신하는 베를린 대공장 노동자 수십 명이 의회를 점거했다. 이들은 이튿날 혁명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공장 평의회와 연대별 군인 평의회 선거를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1919년, 1월 15일.
로자 룩셈브르크, 칼 리프크네히트는 사회민주당 지시를 받고 움직이던, 우파 준군사조직 의용단 군단으로부터 베를린에서 살해됐다. 룩셈부르크, 리프크네히트는 1918년-1919년 걸쳐 일어난 독일 혁명에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0년, 3월 17일.
1918년, 독일혁명 뒤로부터 이뤄진 변활를 되돌리고자, 우익 세력들은 카프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독일, 역사로는 최대 규모였던 1200만 노동자 총파업으로 나라 전체는 마비됐다. 쿠데타를 돕고자 베를린으로 날아간 히틀러는 비행장에서 파업 노동자들과도 맞닥뜨리자 정체를 감춰야만 했다.
1920년, 4월 2일.
독일, 루르 지역 노동자들은 3월 봉기를 일으키자 군대는 공격에도 착수했다. 사회민주당 정부는 정부를 전복하고자 불과 며칠 전에 벌어진 카프, 쿠데타를 지지하고는 직접 참여한 원형적 파시스트 세력을 부대 안에 있다고 알면서도 다루기 힘든 노동자들을 진압하고자 부대를 보냈다. 최소 1000명에 이르는 봉기 참가자를 학살하고 나서야 싸움을 끝났다.
1931년 10월 18일.
독일 브라운슈바이크의 노동자들이 나치에 반대하는 것을 보여주고자 파업에 들어갔다. 1931년 후반기에만 25차례 정치적인 파업이 벌어지며 총 3만 명의 노동자는 파시즘에 항의했고, 이듬해에는 수가 훨씬 더 많아졌다. 하지만 파업들은 대부분 중소 기업에서 단기간 조업 중단에 그쳤던 까닭에 국가에게 타격을 줄 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다.
1933년, 5월 6일.
나치스는 베를린, 성과학연구소를 단속했다. 마그누스 히르슈펠트는 연구소를 운영했다.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권리, 성평등을 지지하는 선구적인 단체였다. 히르슈펠트는 성전환주의(트랜스섹슈얼리즘)이라는 용어를 만든 인물이었다. 연구소는 최소 한 명, 성전환 노동자를 고용했다. 최초로 현대적인 성확정수술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단속하고는 연구소에다 방대한 장서를 거리에다 불태우는 동안에 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연설했다. 나치들은 모든 성소수자들에 대한 박해를 가속화했다.
1935년, 4월 4일.
독일, 반나치 활동가, 도라 파비안, 마틸데 부름은 런던에서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독살된 상태였다. 살던 아파트는 이미 2차례나 도둑도 든 적 있었고, 두 사람은 협박 편지를 받기도 했다. 많은 사학자는 두 사람은 살해됐을 수 있다고 여겼지만 조사 결과로는 동반 자살로 발표했다. 매우 희박한 사인이었다. 당시, 대체로 히틀러 유화론자, 지지자들이 자리를 차리했던 영국 정부, 언론은 빠르게 사건을 덮으려고 애썼다.
1943년, 2월 27일.
독일인들은 유대인 국외 추방에 반대해서는 유일하게 벌인 대규모 시위로는 로젠슈트라세 시위도 있었다. 로젠슈트라세에 있는 구금 시설 앞에서 벌어진 시위는 3월까지 이어졌다. 베를린 곳곳에서 야만적으로 체포된 유대인 남성들에 대한 비유대인 부인, 친척들을 조사하고자 벌인 시위였다. 여성들은 이혼을 거부하고는 유대인 가족을 지키고자, 목숨까지 바칠 의지를 보이자, 나치 당국은 일시적으로 물러섰다. 대다수 유럽 유대인들과는 달리, 로젠슈트라세에서 구금된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에서 목숨을 건졌다.
1943년, 4월 19일.
유대인들은 트레블링카 절멸 수용소로 이송하고자 하는 나치, 시도에도 맞서 반격을 가하면서부터 바르샤바 게토 봉기를 시작했다. 비록 패배로 끝났다. 홀로코스트 시기 파시스트들에 맞서 유대인들도 벌인 최대 규모 무장 반란이었다.
1977년, 4월 30일.
서독 전역에서는 크고 작은 도시 곳곳에서, 성추행에 항의하고자, 여성들은 모이고는 밤 되찾기 행진(Take Back the Night)을 벌였다.
1944년, 6월 9일.
독일, 베를린, 사회주의, 반파시스트 레지스탕스 구성원이던, 요한나 키르히너는 나치로부터
참수했다. 히틀러는 집권했을 때, 키르히너는 지하로 잠적했고, 나중에는 프랑스로 옮겨갔다.
1942년, 나치에도 부역한 비시 정권에도 체포되어, 게슈타포로 인도됐다. 재판 결과는 10년 중노동형이었다.
나중에 다시 재판을 받아, 마르크스주의 대역 선전을 한 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처형 당일 자녀들에게 편지를 썼다. 나를 위해 울지 마라. 너희들은 살 더 나은 미래도 있다고 믿으니까.
같은 날, 프랑스, 튈, 나치 군대는 레지스탕스 마키, 2차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독일에 맞서 싸운 무장 게릴라는 나치 군인들을 기습해서는 40명을 죽인 데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 99명을 가로등 기둥, 발코니에다 목 매달아 죽였다. 체포한 다른 사람들은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
전부 합쳐 213명은 사망했다.
이튿날, 독일 군대는 인근에 있던 소도시, 오라두르쉬르글란 전체를 파괴하면서부터, 여성, 어린이, 갓난아기 등 642명은 사망했다. 생존자는 총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수풀에다 몸을 숨겨서는 목숨을 건졌고, 다음 날 구조된 마르그리트 루팡슈를 포함해서는 남성 6명, 여성 1명뿐이었다.
1944년 8월 2일.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에서 롬인과 신티인 약 4000명이 가스실로 끌려가는 데 저항했다. 나치 친위대가 롬인수용소에 몰려갔지만, 수감자들은 막대기와 쇠지레로 무장하고 실내에 발리케이드를 친 채 나치에 맞서 죽기 살기로 싸웠다. 목숨을 건진 어느 비롬인 수감자는 당시 상황에 대해, 모두가 싸웠지만 특히 “젊고 튼튼한 데다가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던 여성들이 가장 치열하게 싸웠다”라고 말했다. 예상대로 수감자들의 저항은 진압됐고 이들은 끝내 가스실에서 살해당했다. 이 저항은 그해 5월 16일에 처음 시작된다고 보고됐고 이에 따라 매년 5월 16일은 롬인 저항의 날로 정해졌다.
1944년 10월 7일.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무장 항쟁이 일어났다. 수용소에 있던 레지스탕스 구성원들은 존더코만도가 같은 날 살해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몰래 빼낸 화약과 정어리 통조림으로 만든 수류탄 등 수제 무기와 칼로 반격에 나섰다. 레지스탕스들은 4호 화장장을 불태우고 나치 친위대원 3명을 살해했고 많은 나치 친위대원에게 부상을 입혔다.
1945년, 1월 6일.
1944년, 10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수감자 반란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여성 4명은 교수형 당했다. 알라 게르트네르는 강제 노동을 하던 탄약공장에서 탄약을 훔치다가 지하 레지스탕스 성원이던 로자 로보타에게 전달했다. 로보타에게 화약을 받은 소련 유대인 수감자들은 폭탄을 제조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에스투시아 바이츠블룸, 레기나 사피르슈타인도 역시나 처형 당했다. 다른 여성 수감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형이 집행된 로보타는 교수대에서 힘과 용기를 잃지 말라고 호소했다.
1945년, 4월 9일.
단독으로 히틀러 암살을 시도한 공장 노동자, 민속 음악가, 게오르크 엘저는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됐다. 몇 년 전 무기 공장에 이이서 채석장에서도 일하던 엘저는 폭발물을 조금씩 훔쳐 모은 뒤로, 1939년, 히틀러는 1923년, 나치 쿠데타를 기념하고자 매년, 11월 8일, 9일로 방문하는 뮌헨 한 술집에서 폭발물을 설치했다. 유감스럽게도 히틀러는 일찍 자리를 뜨고는, 폭탄은 몇 분 차이로 늦게 터져서, 나치 고위 간부 6명, 웨이트리스 1명은 사망했다. 엘저는 나중에 체포됐고, 고문도 당했다. 단독 행동을 내세우면서, 이미 사망한 공산주의 1명을 제외하고는 어떤 이름도 대지 않았다.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 엘저는 수용소 해방 불과 며칠 전, 나치 친위대 지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 지시에 따라 살해됐다.
2007년 9월 19일.
자전거 공장 폐쇄에 반대하면서 공장을 점거 중이던 독일 노르트하우젠 노동자들이 노동자 통제 아래 생산을 재개하며 ‘파업 자전거’를 만들었다.
러시아.
1917년·1918년 3월 8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가정주부, 여성 노동자 수천 명은 시위를 자제하라는 노동조합 지위자들 호소를 무시한 채로 고물가, 굶주림에 항의하면서 거리로 쏟아졌다. 당시 러시아에서 사용하던 구력으로는 1917년, 2월 23일 벌어진 2월 혁명을 촉발한 행동이었다. 이튿날 20만 명 노동자는 시위 대열에 합류하면서부터 차르와 전쟁에도 맞서 파업을 벌이는 구호를 외쳤다. 다른 군부대들도 노동자 대열에 가세했으며, 3월 15일, 차르 니콜라이 2세는 퇴위했다.
1918년 3월 8일, 오스트리아 여성들은 처음으로 같은 날을 세계 여성 날로 기념하면서부터
수천 명은 제1차대전에도 항의하면서 거리로 몰려나왔다. 세계 여성 날은 뉴욕 여성 노동자 파업 기념일인 1857년 3월 8일, 1908년 같은 날짜에서 벌어진 파업에서 기인한다는 인식도 널리 퍼졌지만 정확한 정보는 아니다.
1917년, 3월 15일.
2월 혁명은 러시아를 휩쓰는 가운데 차르 니콜라이 2세는 퇴위했다. 이미 억압적이고, 잔인한 통치로 지지를 잃었던 니콜라이는 러시아 1차대전에도 휘말리면서 만인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전쟁으로부터 러시아 제국에서는 300만 명도 넘는 사망자는 발생했고 농촌 노동력 부족으로
식량 공급에도 큰 차질은 생겼다. 따라서 굶주림과 아사는 널리 퍼졌다.
1917년 11월 7일.
세계사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 손꼽히는 러시아 10월 혁명이 시작됐다. 사회혁명당 지도자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구성한 정부가 재앙과도 같은 1차 대전 참전을 계속하자, 볼셰비키, 무정부주의, 사회혁명당 좌파가 정부를 전복했다. 그들은 페트로그라드의 핵심 시설을 장악한 뒤로 마지막으로 겨울 궁전으로 쳐들어갔다. 당시 사용되던 러시아 구력으로 10월에 일어났기 때문에 10월 혁명이라고 부른다.
1919년 9월 26일.
러시아 혁명 가운데 무정부주의 세력이던 우크라이나혁명반역군(RIAU), 다른 이름으로는 사령관 네스토르 마흐노의 이름을 따 일명 마흐노파라 불리기도 하는 이들이 몇 달에 걸친 후퇴를 끝내고 추적자들과 맞섰다. 안톤 데니킨 장군이 이끈 반혁명 백군에 맞서 싸웠다. 마흐노파는 데니킨 군대를 기습해 격퇴하며 데니킨의 모스크바 진군을 끝냈다.
1932년, 4월 10일.
여성은 주축을 이룬 공장 노동자, 수천 명은 소련 테이코보에서 식량배급 감축에 항의하는 파업에도 합류했다. 30%-50%, 줄어든 식량배급에 굶주렸던 노동자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반면 공산당 관리자, 비밀 경찰 간부들은 식량을 충분하게 받았다. 여성들은 동료들에게도 파업에 가세하기를 호소하고는 기계를 망가뜨렸고, 파업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노동자들은 시내 곳곳에서 모인 다음, 시내 광장으로 집결하고는 연설했다. 파업을 비난하는 한 공산당원을 연단에서 끌어내리기도 했다. 이튿날 아침, 공창에도 출근한 노동자는 130명뿐이었다. 비밀 경찰들은 많은 사람들을 체포했고, 4월 17일, 파업을 분쇄했다. 여성은 1명도 기소하지는 않았고, 파업에 참여했던 남성 몇 명은 유형이나 노동수용소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33년 12월 17일.
1917년 혁명 직후인 1922년에 소련에서 비범죄화된 남성 간 성행위는 다시 불법화됐다. 당국은 동성애는 서구 부르주아와 독일 파시스트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내세웠고, 소비에트 공식 기관지 <프라우다>는 다음과 같은 구호로 끝나는 기사를 내보냈다. “동성애를 파괴하라, 그러면 파시즘은 사라질 것이니”, 1934년 초, 소련 주요 도시에서는 게이 남성들은 대대적으로 검거되어 강제노동수용소(쿨락)로 보내지기 시작했다. 같은 법에 따라 투옥된 이들 중 한 사람인 발레리 클리모프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눈 앞에서 게이가 살해된 것만 10차례 정도 된다. 한 사람은 스베르들롭스크 교도소에서 맞아 죽었다. 우리 감방에서는 100명 정도가 있었는데, 서너 명은 매일같이 그를 강간하고, 침대 밑으로 던져버렸다. 잔혹한 악몽이었다. 한 번은 같은 감방에 있던 10명은 그를 강간하고는 머리를 짓밟았다.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내 머리는 저부 허옇게 셌다. 같은 식으로 사람들은 제정신을 잃었다. 많은 사람들은 출소 뒤에도 회복되지는 못했다.
여성 동성애는 금지되지는 않았고, 전형적으로 남성적인 일부 레즈비언은 군대에서 치켜세워지기도 했지만, 많은 레즈비언은 여전히 박해를 받았다. 학교나 직장에서 쫓겨나고는, 괴롭힘을 당하고, 아이 양육권을 빼앗겠다고 위협을 받고, 정신 병원에 갇혔다.
1936년, 6월 27일.
소련은 임신 중단을 합법화하고는 여성에게 여러 가지 재생산 권리를 부여했던, 1920년, 볼셰비키, <여성 건강 보호에 대한 포고령>을 뒤집었다. 새로운 법은 산모 생명은 위태롭거나,
심각한 유전 질환을 가진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체 임신 중단을 금지했다. 새로운 법에 따르면, 임신 중단을 행하는 의사, 임신 중단을 받은 여성 모두 범죄자였다. 공산당은 임신 중단을 합법화한 이전 결정은 옳다고 주장했고, 여성은 사회 동등한 구성원으로는 사회주의 아래서만 금지법을 비롯한 여러 수단으로부터 임신 중단에도 맞선 싸움을 진지하게 조직하는 게 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기근도 잇다른 뒤 정부는 인구 증가를 가속화하는 데 열심이었다. 당은 가족에 대한 중요성을 더욱 강조했었다. 임신 중단 금지로는 스탈린 사망한 1953년, 뒤로도 꾸준하게 유지했다.
1937년 8월 12일.
소련 토볼스크 교도소에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144명이 집단 처형됐다. 이듬해 말까지 이 교도소에서 2500명이 총살 당했다. 1930년대 말 숙청 재판 기간 중 벌어진 학살이었다. 숙청 재판으로 많은 정부 비판자나 잠재적 비판자가 처형되거나 투옥됐다. 희생자 가운데로는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참가한 볼셰비키도 다수 있었다.
룩셈부르크.
1942년 8월 31일.
룩셈부르크를 점령한 나치 정권이 젊은이들을 독일군에 징집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살쾡이 총파업이 발발했다. 철강 노동자들과 초등학교 고사들이 파업에 나섰고, 우편 노동자들은 고의로 작업 속도를 늦추다가 다음 날 파업에 돌입했따. 우편 노동자들은 처형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독일 노동조합에서 보낸 작업 복귀 전보 배달을 거부했다. 결국 일주일쯤 뒤 나치 테러로 파업이 분쇄됐다. 노동자 수백 명이 체포되어 일부는 강제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처형당했다. 학생도 수백 명이 체포되어 재교육수용소로 보내졌다. 파업은 무너졌지만 징집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어 전체 징집병의 약 40% 탈영하거나 지하로 숨었다.
벨기에.
1885년, 2월 5일.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는 콩고자유국을 식민지로 선포했다. 유럽 식민주의 역사에서 매우 소름 끼치는 사태도 벌어졌다. 식민 정부는 현지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하고는, 벨기에로 실어갈 고무를 비롯한 천연 자원 추출을 강요했다. 생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등, 사소한 잘못, 때문에도 800만 명-1000만 명, 아프리카인들은 살해됐으며, 훨씬 많은 손발을 잘랐다.
1904년, 벨기에 자본으로 설립된 고무 회사 소속 민병대는 은살라라는 콩고인 딸, 손발을 자르고는 잡아먹었다.
1960년 12월 20일.
벨기에 전역 지자체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약하하는 새로운 법에 맞서 공식 파업에 나섰다. 다른 노동 조합들은 대응 방안을 논의하는 가운데 유례 없는 살쾡이 파업이 전국을 휩쓸었다. 같은 결과로 일어난 총파업은 1월 21일까지 계속됐다.
불가리아.
1918년 9월 22일.
1차 대전 중 불가리아 군대의 대규모 폭동과 봉기가 일어났다. 도브로폴레에서 탈영한 병사들은 자체적으로 군대를 만들어 장교를 선출하고 기존의 지도자들을 향해 총구를 돌렸다. 병사들의 반란은 12월에야 진압됐고 이후 1만 명이 투옥됐다.
1953년, 5월 3일.
불가리아, 블로프디프에 있던 이반 카라조프는 담배 저장소에서 일하던 야간조 여성 노동자들을 임시직화에 항의하고자 경비원을 몰아내고는 보호물을 쳤다. 국유화 뒤로부터 담배 산업 상황은 악화했고, 대다수 여성들은 노동자들에게 정규직을 잃고 계절별로 단기 계약직을 제안받았다. 비수기에는 복지수당도, 숙소마저 제공하지 않는 조건들이었다. 소련 지도자, 스탈린도 사망한 뒤, 노동자들은 항의할 기회를 얻었다.
5월 4일, 아침 민병대는 도착하자, 인근에 있던 저장소 2곳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파업에도 들어가면서부터 민병대와도 맞섰고, 다른 담배 노동자들도 파업 대열에 합류했다. 공산당 당국으로는 민병대에게 발포를 명령해서, 노동자 몇 명을 사망하도록 하고, 수십 명은 다치고, 수백 명을 체포했다. 많은 사람들은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고, 파업은 끝났다.
스웨덴.
1905년, 6월 20일.
스웨덴 국왕 오스카르 2세는 얼마 전, 독립한 노르웨이에 대한 침공 계획을 공개적·공식적으로 철회했다. 전쟁을 위해, 군대를 동원할 경우로, 전국적인 총파업을 벌이겠다는 노동조합들 위협에도 서둘러 계획을 철회했다.
1931년, 5월 14일.
스웨덴, 오달렌, 황산염 공장 노동자들은 파업 가운데 벌인 평화 시위에서 군대는 중기관총을 발포해서 시위자 4명, 행인 1명은 사망하고는 다수 부상을 입었다.
1979년 8월 29일.
스웨덴에서 수년 동안 이어진 캠페인이 결실을 거두지 못하자 성해방 활동가 30-40명이 직접 행동에 나섰다. 국민보건위원회를 점거한 이들은 동성애를 정신 질환으로 분류하는 데 항의했다. 국민보건위원회 이사회는 시위대 주장에 동의하며 10월에 이르러 해당 규정을 삭제했다.
2019년, 3월 19일.
세계, 곳곳에서 140만 명에 이르는 청소년들은 정부로부터 기후변화를 막고자 행동에 나서도록 촉구하는 학교 파업예 참가했다. 스웨덴, 15세 소녀, 그레타 툰베리는 자폐증을 앓았으며, 지난해 8월 혼자서 학교 파업을 벌인 뒤로, 128개국, 2000개, 크고 작은 도시 학생들도 교시를 박차고 거리로 나왔다.
툰베리는 2주 동안 학교에 가는 대신, 스웨덴 의사당 앞에 서서 시위를 벌이고는 전단지(리플릿)를 나눠줬다. 성인인 여러분들은 제 미래에는 똥을 누고 있어서지 지금 시위 중입니다.
뒤로, 국제적인 학생 파업도 벌어졌다.
스위스.
1916년, 2월 6일.
스위스, 취리히에서는 카바레 볼테르라는 나이트 클럽을 개업했다. 1차 대전으로부터 생겨난 자본주의 학살극에 반감을 품은 급진적 예술가들이 결성한 아나키스트, 다다 예술운동에서는 정신적 고향이었다.
1918년 9월 30일.
스위스에서 생활비 상승을 둘러싸고 소요가 커지는 가운데 취리히 은행 직원들이 사상 최초로 파업에 들어갔다. 이후 은행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를 지지하는 지역 총파업이 벌어지며 파업을 완전한 성공으로 이끌었다.
1918년 11월 11일.
스위스 전역에서 남녀 25만 명이 총파업에 들어갔다. 당시 다른 나라들에서 벌어진 혁명적인 행동과 비교하면 총파업이 내건 요구는 비교적 온건했다. 비례대표제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총선거 즉각 실, 여성 참정권 도입, 전국민 노동 의무, 주당 48시간 노동, 군대의 민주적 개혁, 충분한 식량 공급, 노인과 장애인을 위한 국민 연금, 수출과 수입의 국가 독점, 부유층의 국가채무 부담 등이었다. 다음 날, 파업 진압으로 병력 9만 5000명이 투입됐고, 11월 13일 정부는 최후 통첩을 발표했다. 이튿날 파업 지도자들은 상황이 더 이상 악화되는 걸 막고자 총파업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파업이 끝난 뒤, 그렌첸에서 군인들이 민간인 3명을 살해했다. 파업 직후 열린 군사 재판은 주로 철도 노동자인 127명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여성은 1971년까지 투표권을 얻지는 못했다.
스페인.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가 에스파냐 팔로스에서 인도를 향해 출항했다. 그곳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재앙을 안겨준 항해였다. 대중적 신화 중에는 콜럼버스가 미국을 발견하고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하지만 그는 오늘날의 미국 본토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으며,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이미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알려졌다. 콜럼버스는 지구가 아래쪽이 더 불룩한 서양배 모양이라고 믿었다. 그는 오늘날 바하마로 알려진 섬에 상륙했는데 그곳에 있던 원주민 타이노족은 그와 선원들을 환영했다. 타이노족은 마을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 모든 재산을 공유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곧바로 원주민들을 감옥에 가두고 살해하면서 황금을 찾는 노예로 삼기 시작했다. 타이노족은 맞서 싸웠지만 월등한 무기와 갑옷을 갖춘 에스파냐인들을 물리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많은 이가 더 나쁜 운명을 피하고자 아이들을 죽이고 자살하기 시작했다. 불과 2년 만에 아이티 인근에 사는 원주민 25만 명의 절반이 사망했다. 식민지 정착인들이 점점 더 늘어나면서 카리브해와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원주민에 대한 집단 학살이 계속됐다.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원주민 공동체는 오늘날 지역 곳곳에서 저항을 이어갔다.
1913년 7월 30일.
여성과 아동이 대다수인 바르셀로나의 섬유 노동자 2만 명이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항의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여성 파업자들은 파업파괴자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그들이 배신자라는 표시를 했다. 파업은 9월 15일까지 계속됐고, 주지사는 결국 주 60시간제를 도입했다.
1936년, 5월 20일.
무지, 자본, 남성에게 여성이라는 삼중으로 노에화된 현실을 끝장내고자 목표를 둔 에스파냐, 한 단체는 단체 이름으로는 펴내는 무정부주의 여성주의 잡지였던, 자유 여성을 뜻하는, <무헤레스리브레스> 첫 호를 발간했다. 단체는 같은 해 말, 일어난 에스파냐 혁명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36년 7월 17일.
에스파냐 정부가 공화주의 정부로 새롭게 구성되자 우파 장군들이 전쟁을 선포하며 모로코에서 군사 봉기가 개시됐다. 이에 대응해 바르셀로나에서는 전국노동자총연맹(CNT) 조합원들이 항구에 정박해 있던 선박 2척의 짐칸에서 소총 200정을 빼내 노동조합 활동가들에게 나눠줬다. 이틀 뒤, 에스파냐 각지의 노동자들은 무기를 들고 이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사회혁명을 개시했다. 이어진 내전에서 노동계급은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파시즘의 지원을 받는 에스파냐 자본가들에 맞서 싸웠다. 혁명파 지역에서는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노동자, 농민들이
작업장과 토지를 접수하고 집단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은 강화국을 포기하고 에스파냐에 대한 봉쇄를 시행했다. 그 결과 반파시트들에게 가는 원조와 무기 공급이 중단됐다. 한편 이탈리아와 독일은 봉쇄를 무시했으며, 미국 석유 대기업 텍사코(Texaco)는 대금 지불을 요구하지도 않은 채 민족주의자(국민파)들에게 석유를 비롯한 물자를 제공하며 공화국에 대한 물자 공급은 중단했다. 세계 곳곳에서 노동계급이 주축을 이룬 수천 명이 민족주의자와 싸우는 에스파냐 노동자와 농민들을 돕고자 달려왔지만, 3년 가까이 치열한 혈전이 이어진 끝에 결국은 월등한 무기와 장비를 갖춘 민족주의자들이 승리를 거뒀다.
1936년 8월 19일.
게이이자 사회주의자 시인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군사 당국의 명령에 따라 감방에서 끌려 나와 처형됐다. 한 달 전 시작된 에스파냐 내전에서 그가 어느 쪽에 동조하는지는 분명했다. “나는 언제나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이들과 그 없는 것이나마 평화롭게 즐길 수 없는 이들 편에 설 것이다.” 시인의 유해는 지금까지도 찾지 못했다.
1937년, 6월 17일.
에스파냐, 내전 당시, 남편과 함께 에스파냐로 달라겨사 민족주의들에 맞서 싸운 오스트리아 반파시스트, 카티아 란다우는 소련 비밀경찰이던, NKVD로부터 체포됐다. 비밀경찰들은 외국 첩자, 반혁명주의라는 자백에 서명하게 만들고자 잔인하게 고문했다. 옥중에 있던 카티아는
남편은 실종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단식투쟁에도 들어갔고, 다른 여성 500명도 연대 단식을 벌였다. 외국 노동자 단체 대표들은 교도소를 방문했을 때, 여성들은 대중적인 사회주의 찬가였던,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맞이햇다. 에스파냐 공산당(PCE)에 따르면, 모두 파시스트 첩자들이었다.
남편은 에스파냐 공산당에게 살해됐지만, 카티아는 내저에서 살아남아 멕시코로 이주했다.
최소한 90대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937년 7월 11일.
에스파냐 내전에서 파시스트들과 싸우고자 달려간 일본계 미국인 요리사 잭시라이가 전투 중 사망했다. 미국 에이브러햄 링컨 여단 자원병이었던 시라이는 굶주리는 부대를 위해 자원해서 물자를 가지러 갔다가 총에 맞았다. 그의 시신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자원병인 올리버 로 옆에 묻혔다.
1938년 11월 26일.
에스파냐 내전 난민인 바스크인 소년들로 이뤄진 축구팀이 웨일스 폰티프리드에서 친선 경기를 가졌다. 웨일스는 노동자·농민과 프란시스코 프랑코 민족주의 세력 사이에 벌어진 내전에서 도망친 많은 노동 계급 자녀들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경기 입장권 수익은 난민 자녀들을 지원하는 기금으로 쓰였다.
1939년, 1월 5일.
라투아니아계 유대인 반파시스트이자 에스파냐 내전에서도 싸운 사무엘 카플란은 공산당 당국으로부터 바르셀로나 몬주익 감옥으로 이송됐다. 1938, 2월, 기소도 되지 않은 채로 구금된 상태였다. 프랑코 장군으로부터 민족주의. 파시스트 세력으로부터 일으킨 쿠데타 시도에 대항하고 공화국 세력을 돕고자 활동했다. 정치 활동에서, 소련, 나치 독일로부터 다하우 강제수용소에도 수감됐다가도 탈출했다. 반파시스트 수감자 몇 명과 단식 투쟁도 벌였다. 1월 21일, 민족주의 세력은 바르셀로나를 접수한 뒤로부터 소식을 모르다가, 아들로부터 연락을 바다아서, 사무엘 카플란은 다시 한 번 탈출에도 성공해서, 남은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1951년, 3월 12일.
교통비 인상에 항의하는 캠페인은 성공한 뒤로, 노동자 30만 명은 바르셀로나, 인근 도시들에서 프랑코 독재를 항의하는 총파업에 참여했다. 경찰과 민간 경비대 수천 명을 동원하는 와중에도 파업 노동자들은 2주 동안 버텼다. 소요는 확산할 수 있기에, 으레 겁먹은 에스파냐 정부로는 연행자 전부를 대부분 석방하고, 파업을 벌인 노동자들에게도 임금을 전액 지급했다.
1955년 9월 26일.
에스파냐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바르셀로나를 방문하자 지하 저항 활동가 프란세스크 사바테 요파르트는 택시를 이용해서 주변을 크게 돌았다. 택시가 달리는 동안 그는 뒷좌석에 둔 옷가방에서 준비해온 박격포를 꺼내 지붕창으로 내밀고는 반정부 전단을 살포했다. 요파르트는 걱정하는 운전사를 안심하게 하며 이렇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정부에서 나온 사람인데, 홍보 자료를 배포하는 중입니다.” 그는 운전사에게 후한 수고비를 주고는 내렸다.
1960년, 1월 5일.
반 파시스트 게릴라, 프란세스크 사바테 요파르트, 엘 키코는 카탈루냐에서 경찰에게 암살 당했다. 에스파냐 내전에서, 국민파 민족주의자들과 맞서다 2차 세계대전 가운데, 프랑스, 에스파냐 지하 레지스탕스와도 합류해서, 장기 복무한 가장 유명한 전사였으나, 결국 살해됐다.
1977년, 1월 24일.
마드리드에서는 좌파 변호사 9명은 파시스트들에게 총격을 받았다. 아토차 학살이다. 파시스트들은 공산주의, 운송 파업 조직자를 찾고자 노동자위원회(CCOO)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기관총을 들고 난입했다. 조직자를 찾지 못한 파시스트들은 변호사 1명에게 총을 쏘고는, 8명을 벽에 일렬로 세우고는 역시 총을 쏴서, 5명을 죽이고는 나머지에게도 중상을 입혔다. 부상자, 가운데로는 임산부 1명도 있었다. 같은 날 도시, 다른 곳에서는 21세 대학생 마리아 루스 나헤라 홀리안은 시위 도중 경찰에게 살해됐다. 전날 정치점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에서 좌파 벽돌공 아르투스 루이스는 파시스트들에게 살해당한 데 항의하는 시위였다. 경찰은 루이스를 공격한 자들은 도망치게 놔두고는 대신 루이스 동료 시위자들을 공격했다.
슬로바키아.
2004년, 2월 11일.
슬로바키아, 도시 레보차에서는 실직 노동자, 80명은 슈퍼마켓을 약탈하면서, 집시란 말은 비하적인 뜻으로도 사용했으며, 동유럽 유랑민 집단을 롬인(Roma people), 서유럽인들은 신티인이라고 하는데, 앞장서서 전투적인 항의 시위 물결은 시작됐다. 폭 넓은 복지 삭감에도 맞섰다. 시위는 실업자 전체로부터 생활 조건 개선을 확보하면서 끝났다.
2004년, 2월 23일.
슬로바키아, 트레비쇼우에서는 경찰, 실직 노동자들도 대규모로 충돌했다. 주로 롬인들이었던, 실직 노동자들은 복지 삭감에도 항의했다. 경찰은 최루탄, 물대포로부터, 시위대 400명을 공격했다. 이튿날, 시위대는 모여서 사는 주택가를 급습한 경찰은 불법 수색을 벌였으며, 경찰봉, 가축 몰이용 전기봉으로부터 임신부, 장애인을 비롯한 주민들을 무참하도록 찔러댔다. 그러나 시위는 계속됐으며, 슬로바키아 모든 실업자를 위한 방향으로 복지 정책도 개선됐다.
아이슬란드.
1975년 10월 24일.
아이슬란드 여성 90%가 여남평등을 주장하며 총파업에 들어갔다. 일하는 여성들은 출근하지 않았고, 가정 주부들은 식사 준비와 청소, 아이 돌보기를 거부했다. 오늘날 아이슬란드는 세계에서 성평등 수준이 매우 높은 국가이지만, 여전히 여성이 남성 임금 80%만을 받는다는 점에서 차별은 계속되고 있으며, 반대 투쟁 또한 진행형이다.
아일랜드.
1919년, 4월 14일.
아일랜드, 리머릭에서는 영국, 특별 무장 지대 설치에 항의하는 총파업도 소집했다. 총파업으로부터 탄생한 리머릭 소비에트는 짧게 그쳤지만, 노동자들은 잠시나마 도시를 장악했다.
1920년, 4월 12일.
아일랜드, 노동자들은 더블린에 있던 마운티조이 교도소에서 단식 투쟁을 벌이던 독립파 수감자들을 지지하는 총파업에도 착수했다. 우체국, 대중 교통, 상점, 술집, 공중 화장실은 모두 문을 닫았다. 이틀 뒤로부터, 영국 정부는 굴복하고는 모든 수감자를 석방했다.
1920년, 4월 17일.
더블린, 부두 노동자들은 잉글랜드로 향하는 배에다 식료품을 싣는 작업을 거부했다. 1917년, 뒤로도 영국으로도 대량 식료품을 운송하고는, 버터, 계란, 설탕 같은 많은 주요한 상품들도 바닥나면서부터, 심각해진 더블린, 식료품 부족 사태를 누그러뜨리는 데도 도움 된 행동이었다.
1920년 11월 21일.
아일랜드공화군(IRA) 병사들이 영국군 정보 장교로 의심되는 15명을 암살했다. 영국 식민 경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수천 명의 관중 속에서 게일식 축구 경기가 벌어지는 크로크파크 경기장으로 쳐들어가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선수 1명을 포함한 14명이 사망했다.
1921년 9월 6일.
아일랜드 코크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코크항 운영 위원회가 임금 인상을 거부한 데 항의하고자 위원회 사무실을 점거한 뒤 적기를 내걸고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를 구성했다. 노동자들은 해운 회사들로부터 직접 수수료를 징수할 계획을 세웠다. 노동부 장관의 개입으로 소비에트는 교섭을 거쳐 몇 시간 만에 해체됐다. 하지만 당시 <아이리시타임스>에서 실린 기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일랜드 볼셰비즘 발발은 단명한 만큼이나 대단히 불길한 징조였다. 오늘날 아일랜드 노동자들에게는 질서 정연한 사회의 모든 원칙과 관습에 맞서는 반역 정신이 스며들었다. 최근 몇 달간 이 나라의 무법 상태는 이처럼 불길한 상황이 조성된 데 일부 책임이 있으며, 기꺼이 들으려는 사람들은 러시아 혁명의 소란스러운 교훈을 배운다. 현실적인 공산주의의 첫 번째 실험 코크의 이 사건이나, 브루리에서 일어난 클리브 회사 시설 점거사건 등은 며칠이나 몇 시간 만에 실패로 돌아갔지만 사려 깊은 아일랜드인들은 거기에서 작은 위안을 얻을 것이다. 이 사건들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으로부터 드러난 기질과 열망에 있다.
1922년 9월 17일.
신생 아일랜드자유국에 맞서 벌어진 더블린 우편 노동자 파업에서 매우 심각한 충돌이 발생했다. 군인들은 파업에 참여한 남성 1명과 여성 3명에게 발포했다. 노동자 올리브 플러드가 총에 맞았지만 다행히 총알이 가터벨트를 맞고 튕겨나가 철과상을 입는 데 그쳤다. 한 언론인은같은 날 충돌에 대해 “파업을 계속하려는 여성들의 결심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1945년 7월 21일.
아일랜드여성노동자연합(IWWU) 조합원들이 유급 휴가를 일주일 더 달라고 요구하면서 세탁 파업을 벌여 더블린의 여러 호텔에 타격을 주었다. 파업에서 병원 세탁 노동자들은 제외됐다.
14주 동안 계속된 파업은 결국 여성들의 승리로 끝났다. 이듬해 정부는 모든 노동자에게 2주 유급 휴가를 보장하기로 약속했다.
1979년, 3월 16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최초로 생긴 맥도날드 2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노동조합 인정을 요구하면서부터 파업에 들어갔다. 법원은 피케팅을 금지하고, 맥도날드는 감자튀김을 무룔로 준다면서 대체인력을 끌어들였지만 파업 노동자들은 6개월 버텼고, 24% 인금인상 등 양보를 받아냈다. 그러나 맥도날드는 무효로 만들고자 노동시간을 줄이는 등 계속해서 노동자를 괴롭혔다. 노동자들도 속한 아일랜드운수일반노동조합은 보복에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는 않았다.
1984년 7월 19일.
아일랜드 더블린에 자리한 던스스토어에서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파업이 시작됐다. 상점 노동자이자 아일랜드유통관리노동조합 조합원인 메리 매닝은 남아공 물건을 취급하지 않기로하는 데 투표했고, 이에 따라 고객이 구매하고자 한 남아공산 과일의 계산을 거부했다. 이 일로 정직 처분을 받은 매닝은 동료 11명과 함께 항의하는 파업에 들어갔다. 믿기 어렵게도 파업은 3년 동안 계속되다가 1987년 아일랜드 정부가 남아공산 제품 수입을 금지하면서야 끝이 났다.
1996년 12월 19일.
아일랜드에서 대규모 수도 요금 납부 거부 운동이 벌어진 뒤, 환경부 장관은 1994년 더블린에서 도입된 추가 수도 요금안을 철회하겠다고 발표했다. 지역별 모임으로 뭉친 노동 계급 주민들의 거부 운동으로부터 주민 50% 이상이 납부를 거부한 상태였다. 지역 당국은 주민들을 고소하고는 수도를 끊으면서 납부를 강제하고자 했다. 하지만 거부 운동에 참여한 주민들은 단수에 저항하며 법원과도 싸웠고, 결국 정부는 물러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