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에 따른 여러 판결들을 따로 추심해봤다. 이번에도 검찰계 사법부에서도, 오판을 내렸다는 결론을 내린다. 쉬운 말로, 그들은 선을 넘었다고 정의내릴 수 있다. 국가법으로도 고발 조치는 상식이지만, 내부는 썩었으므로. 그래도 정부를 신고해본다. 법조계도 눈치만 봤지. 정작 한 마디도 말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부르주아 역대 정부는 또 실패했다.

 

여러 문헌들이나, 사전들에서도 서술이나 정의에 대해서는 정리해서 서술한다. 그러나 같은 의문을 품어볼 수는 있다. 더욱 개인적으로 명쾌하거나, 확정 서술에 대해서는 충분히 객관적이지도 못한 채로, 또는 깊게 알아보지 않은 채로 적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도 대체로 모든 주어진 사실들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어볼 필요는 있다고 말했다. 그저 그대로 있는 정보만 받아들인다면, 글쓴이로는 계급으로 치중된 오류를 가진 채로 막연하게 또 다시 적을 수 있다. 작은 예시로는 필자는 <레닌은 회상하며>를 읽고, 더 알아보고자, 레닌 생애에 대한 백과사전을 참조해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해당 백화사전은 체계적이지도 못했고, 생략된 부분들도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여러 저작들이나, 자료를 세부적으로 더 조사할 필요를 있다고 봤다. 설령 인공 지능이 발달해서 자료에 대한 정보를 효율적으로 처리한다고 한다고 해서 꼭 정확한 정보를 전달한 건 아니라고 본다. 여러 논쟁들도 있지만 인공 지능은 단지 지식을 넓혀나갈 뿐이다. 그리고 사람이라면 스스로도 찾고자, 아는 정보를 잘 적용해서 내세울 줄 알 때 비로소 정보를 잘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간과하고는 국내 언론 기자들은 주어진 정보로만 추론하는 법만 배웠다. 그러나 맨 먼저 훈련을 받는 의문을 품는 법을 잘 모른다. 왜냐하면 한 의문에서도 생겨난 질문이란 보다 참된 사실을 잘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보도 전체로 보아도, 좋은 기사를 찾기란 더욱 힘들어진다. 왜냐하면 해답을 고르는 추리만 해왔지. 정작 의문을 다룰 수 있는 올바른 추론마저 생략해왔기 때문이다. 바로 같은 의문을 생략해버렸기 때문에. 정부와 사법부의 사례에서도 보이듯, 오판을 내리고는 말았다. 순서 상으로도 정의 내리지도 못했으므로. 많은 논쟁마저 불러왔다. 여러 정부에 대해서는 정작 풀지도 못하는 문제를 엉키도록 해놨기 때문에 따로 할 말마저 없어진다. 부르주아 권력으로는 법이라는 기득권에 대한 울타리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또 지겹도록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식한 정치인들은 어수선하게만 법망을 꾸리는 동안에도, 남 뒤처리를 하느라. 똥을 치우는 노동 사무관들에게도, 국내로는 같은 본보기는 하나 더 있다. 바로 그토록 피하고, 부정하고 싶어하던 군부 독재 시절 때다. 한국 정치인들에게 바치는 납세라는 품위 유지비마저 아까울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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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지금까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공산주의는 단지 이상적인 이념은 아니었다. 한 사상은 잘 다듬어지고 거듭 숙고한 결과로부터 생겨난 결과이기도 하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에 대한 아주 깊은 고민을 가졌다. <프랑스 내전>을 읽어본다면, 엥겔스 서문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공상에서 과학으로>도 특히 엥겔스는 공산주의가 자유 공화주의와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서술하기도 했다. 


매우 기초적인 문제이기도 한데, 그러나 오늘날 보수주의라고 불리는, 공화주의란, 진보적인 자유주의와도 매우 다르다. 보수주의에 대한 뿌리는 프랑스에서 잘 알려진 당파 논쟁에서부터 시작된다. 로비에스피에르와 자코뱅을 보면 잘 알 수 있지만, 테오르미도르 반동으로 잘 알려진 국민 의회로부터 매수된 선거를 치른 뒤로, 당시로는 귀족이던 부르주아 정치는 막을 내렸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에서 과연 오늘날에도 배울 점은 없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로비에스피에르는 여러 혁명가들에게도 귀감을 준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로는 프랑스 인민들에게도 도덕에 대한 평가를 선두적으로 지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화주의를 그저 내세우기만 하거나, 매우 기회주의적인 경향들 조차도, 그러한 공화주의 시각에 대한 논쟁을 프랑스 혁명이야말로, 매우 민주적이었다는 오해를 삼기도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새로운 공화주의를 비판하고, 공산주의를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반대를 이야기하는 새로운 주장들마저도, 부르주아 정치의 한 형태라는 공화 정치에 대한 민주주의를 말해왔지, 정작 프랑스에서도 공산주의에 대한 토론과 논쟁을 당파 논쟁과 분파로부터 제거하고는 말았다. 따라서 현대 프랑스 공산당마저도, 19세기부터는 매우 반동적인 행태를 부려왔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내전. 


따라서 오늘날에도 우리는 레닌에게 또 배울 수밖에는 없다. 아니 확실하다. 우리는 빈약한 사상과, 논고만 드러내고 마는 처음부터 일찍 멘셰비키주의에도 가담한 트로츠키주의나 소비에트를 반동기로 이끈 스탈린주의로부터도 아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레닌은 죽은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여전히 우리로는 마르크스와 같이 깊이 배워야 할 유효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직 프랑스 혁명에 대한 깊은 숙고와, 같이 일어난 내전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부터도, 그리고 여러 공산당들에 대한 공화주의 혼돈에 대한 경향과 과오로부터도, 단지 호소 시위나 연대 행진에만 그치고마는 매우 '일반적인' 투쟁 형태를 보아도, 오늘날은 레닌에 대한 지침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해야만 하는 이유와, 혁명 전투를 벌일 수 있는 근거에 대해서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명확한 한계와, 또 현대에서도 드러난 반동 정부들에 대한 '현실'에서도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혁명 시기, 사회민주주의당 두 가지 전술>에서도, 명쾌하게 구분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란 국가로도, 일터에서도 어떠한 점에서 달랐는지를, 더욱 확실한 방향과 목적을 잘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사실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공산주의란 단지 이상이 아니라, 실현할 수 있는 현실이라는 걸, 겉으로 드러나기만 하는 현상이 아니라, 입증해야만 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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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즐겁고, 보람 있는 일.


힘겨운 입시 제도를 끝내고, 졸업을 앞둔 사람들로는 늘 축하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는 싶다. 청소년이라는 울타리를 끝마쳤다. 그리고 사회로 힘겹게 들어온 셈이다. 보람을 잘 느끼지 못했다면, 억지로 좋아하는 일만 해왔을 수도 있다. 어른도 때로는 아이보다 더 어릴 때도 있기 때문에, 이른바 철든 어른을 만나기란 하늘에 별따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좋은 사람을 곁에 둔다는 건, 그리고 자신에게도 성장하는 데 더욱 도움을 준 사람을 만난다는 건 뜻 밖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러한 사람들이 없다는 건 매우 독립을 준비하는 사람들로는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대체로는 자신에게 즐거운 일이라는 동기보다는 의무감, 책임감이라는 반복되고, 따분한 동기를 자발적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가정 형편이나 생계라는 문제마저 관련된다면, 자신은 무엇을 잘 할 수 있거나, 또는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고민해볼 시간마저 부족해진다. 일에서 늦은 건 없음에도, 사회는 세월을 생각하다가, 사람들을 쉽게 해고하고는 만다. 그리고 해고된 사람들 가운데로는, 정작 해고하지 말았어야만 하는 사람들도 섞여있었다. 부당 해고라고 불리는 직장 생활에서는 그러한 경험을 겪어봤다면, 앞날에 대한 불안이나 막막함은 묻어 나온다. 그리고 정작 해고를 한 당사자는 자신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거나, 인식하지는 못한다. 직장에서 신뢰를 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착각이나, 각종 질투, 오만이라는 감정들에 빠져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누적된 습관, 도덕적인 의무마저 우리를 얼마나 옥죄던가. 


사회 생활에 대해서 우리 공산당에서 해줄 수 있는 말은 없다. 그리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늘 여러분들, 모두 체제 속에서도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고, 저마다 삶을 만들어가고자 애쓴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단지 돈 때문이라는 이유이거나, 그저 좋아하기 때문도 아니고. 일이란 참으로 많기도 하고, 누구나 그리고 저마다 잘 할 수 있는 일은 분명 한 가지라도 있다.  


골고루 가난한 삶.


마르크스도 청년 시절, <직업 선택>에 대한 깊은 고민을 가졌다. 스스로 삶을 만들고자, 그리고 더욱 매진했다. <자본론>만큼이나, 직장을 잃거나 맞는 취업 및 일자리가 없어서 실업하고, 해고된 사람들을 보노라면, 겉으로도 보인 직장이라고 해서 꼭 안정적이지도 않고, 가정을 이룬다고 해서 꼭 행복하다는 보장은 없는 듯 하다. 우리는 각자 선택을 존중하기도 하지만,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일과 함께 보람을 찾고, 쟁취하는 사람들이다. 사익을 내세우고는 엄격한 조건만 따지던 다른 정당들과는 달리 우리 공산당은 늘 이와 같은 사람들을 지지해왔고, 가난에 대한 깊은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더욱 아낌없이 지원해주고는 싶다. 그러나 힘도 뭣도 없는 우리들로는 참 힘든 일이다. 심지어 꾸준한 동지들도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부디 개인적인 자유로부터 혼자만의 생각에만 꿍하게 갇혀 있던 오래된 지난 날에서, 해방된 자유로부터 고된 부담과 시름을 덜어내고자 노력하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이기 때문이다.   


이번 정부도 지난 해부터 되돌아보자. 검찰 수사로부터 매진한 나머지. 

정작 실행하고 옮긴 정책들이 얼마나 있던가. 미안하지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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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에서도 이론이란 단지 저작으로만 머물고 만다면, 죽은 학문과 학술로만 내세울 뿐이다. 따라서 현재에도, 지배 과학으로부터 부르주아지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어떻게 '관념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지를 고발한다. 그리고 실천이란 법칙을 적용하고, 구현해내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혁명가들은 혁명을 과학으로 연구하는 이유란, 바로 운동가들에게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명이다. 우리는 늘 학자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배운다.   


진화론.


지배적인 생각에서 진화론이라는 발전 법칙은 신유물론으로 환원하거나, 물리주의로 고수하는 시각들로는 진화가 곧 진보를 꼭 보여주지는 않는다. 진화론이란 생물에 대한 역사적인 발전이나, 변천사를 의도적으로 집단주의로 개량화하거나, 우생학적인 발달로부터 일정 부분 기여해왔다. 그러나 신다윈주의로는 파시스트 부상에 대해서는 설명할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파시스트 이론들도, 사회 진화론을 일부분 수용했기 때문이고, 우월주의에 대한 자유를 더욱 보장하고자, 생물체에 대한 경험적인 현상마저, 인간에게 대입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기계적인 발전 법칙으로만, 수용된 진화론에 대한 시각으로는, 계급적인 우월주의에 대한 시각마저 판치기에 이르렀다. 


천문학. 


아인슈타인에게도, 보이는 상대성 이론이라는 경험적인 현상 법칙이란, 형이상학적인 우주에 대한 만물 창조에 대한 기원을 풀어주는 듯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변증법을 간과한 자연 현상에 대한 일반적인 추론으로부터 해석된 물리주의를 그대로 계승했을 뿐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론이란, 창백한 푸른 점이 아니라, 회색에 불과할 뿐이다. 엥겔스는 <자연 변증법>에서도 먼저 증명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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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일각에서는 입시 제도에 대한 비판은 많다. 그리고 의무 교육으로 해당하는 초중고를 꼭 나와야만 시험을 치를 수 있고, 대학을 나오려면 시험을 쳐야만 한다는 전제가 늘 붙는다. 검정 고시를 제외한 오래된 편견, 야간 자율 학습이라는 학생들에게 강요하던 남아 있는 시험들도, 매우 낡은  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려 들었다. 성적에서 멀리 벗어났거나, 진로를 찾지 못한 학생들을 두고는 방황한다고 판단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표할 줄 몰라서, 태도가 불순하다는 단 하나로, 교육은 훈육으로 제어해왔다. 그리고 사실을 감추고, 은폐하는 교육을 배웠으므로, 체제에 대한 비판을 제시하지도 못한 채로 교육 운동은 까막눈을 고치는 운동으로만, 고작 계몽으로만 늘 끝나고는 만다.   


사교육 시장에서도, 자본가들은 선생을 겸해서 학생들에게 자본만이 옳다는 생각을 가르치고, 학생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조장하는 발언들도 자주 가시화됐다. 교육 제도란 늘 정권의 하수인이었고, 소수 선생들만 늘 발언을 했고, 또 요구했다. 대학교에 들어가도, 차기 교수로 임용되고자, 연구 경쟁, 연구 비리, 성폭행 등 학교는 더 이상 배우는 곳이 아니었고,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곳도 아니다. 교수들은 교재를 가지고, 학생들에게 배움을 나누고자 하지만, 그러한 교재들도, 모두 자본주의라는 제도로부터 낡은 수업들과 취업에 대한 상담과 의사를 묻고자, 단지 '형식적인' 수업이었으므로, 아무리 토론이라는 '선진적인' 수업 방식이라고 하더라도, 학생들은 대학교를 4년제 도서관으로 나오고, 졸업을 위한 이수 과정으로도, 과도한 외국어, 쓸모 없는 논문들에 대한 자격을 부여하고는, 체제로부터 기여할 수 있는 '인재'들을 한데 모아, '융합'해서 뒤섞는다. 


국가는 의무 교육을 행하지만, 이면에는 자본가들로부터 답습한 착취라는 차별을 배우고, 계급을 보지도 못하고, 오직 안전한 사회에 대한 경제적인 울타리만 존재한다고 보거나, 아무도 혁명에 대한 실천을 말하지도 않고, 마르크스를 무용하다고만 말한 까닭은 무엇이던가. 바로 자본주의 아래로부터 수행된 교육 때문이다. 그리고 즐거운 보람이나 하나 없는, 노동이라는 대가로부터 생존만이 남은 취직이라는 '의무 교육'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난한 프롤레타리아트마저, '형식적인' 시험 대상으로만 다룬다.    


군대. 


군부심이란, 군대를 다녀오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차별이다. 그리고 심화된 계급으로 차별하는 법을 배운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은폐된다. 사실도, 진실도, 진리마저도, 전역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오랫동안 군생활을 복무했다는 이유라는 건, 단지 애국심만을 위해 국가로부터 봉사한다는 낡은 '봉건적인' 계급이란 말도, 군대에서는 여러 폭행과 협박을 당하고, 총과 칼로, 제국주의로부터 국가에 종사한다. 여러 경찰들도 학살과 시위를 진압하고자 입막음하고, 시위자를 향해서는 적이라고 부른다. 정치적인 자본가들은 말한다. 군대가 있어 튼튼하다고. 그러나 제국 간 전쟁에서도 죽으면 남의 새끼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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