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 어째서 제국주의 국가인가.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대한 논의를 내팽겨친 뒤로, 21세기 후로는 경제학자들의 응답은 길어졌다.
왜냐하면 모두들 입문서와 경영서를 쓰기에 바빠졌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의 논쟁이란 아주 형편 없는 자유 시민 논쟁으로 축소됐고, 더 이상 지면마저 아까운 그러한 비판적 논의를 철회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1960-1980년대 사이라는 일종의 공백을, 그들은 국가독점자본주의가 부르주아 독재로 미화되고 있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고 있는 듯 보인다. 그것은 우리 남한 사회가 더군다나 미국의 정책들에 대한 눈치와 우호적인 옹호를 펼쳤던 까닭이기도 했다. 그것은 또 다른 윤리적 독재자가 경제 발전에 대한 우상이 됐다는 식으로, 귀족 노조로 우롱하거나, 프롤레타리아트마저 폄훼하기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아주 가관일 정도다). 맑스를 배우려는 연구자들이 과연 얼마나 됐던가!
한국 자본주의는 가동을 멈춘 것이나 다름 없다. 은밀하게 이뤄진 부르주아 독재자의 기념관과 동상을 설립하기에 급급했고, 산업 발전이 다름 아닌 수입과 원조로 이뤄진 독자적인 건설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포장된 도로가 깔리고, 밀림을 모두 태웠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다 치우지도 못할 쑥대밭으로 바꿔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누구의 말대로 인권의 복귀, 자연의 회귀 따위를 발언하고 싶지도 않다.
그들은 문명의 원천이 차단되는 그 순간부터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경제 개발의 결과란, 바로 재벌 부르주아들의 사회로 편입됐다는 것을 뜻했으며,
수정주의자와 경제주의자들 간의 논쟁이 마르크스주의를 걸고 시작됐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세대들 모두는 본격적인 투쟁을 감행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의 무의미한 논쟁이 낳은 결과란, 다름 아닌 남한 사회의 지속이기 때문이다.
원치 않든, 국가독점자본주의는 가속화되고 있다고 묻는다면, 우리는 국독자, 식독자론에 대한 과거 논쟁이 주는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이었고, 또한 무익했는지를 따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논의는, 도대체 동네 서점가에서 유행할 법한 입문서와 같은 경제원론이나, 방법론적인 접근의 생산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데이터와 통계마저 부족한 실정이다. 한물간 출판은 길어야 3년이지만, 철 지난 혁명의 과업도 평생이므로 국내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출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것은 레닌이 플레하노프와 카우츠키의 한계를 아주 적나라하고도,
분명하게 꼬집었던 존경과도 같다.
추천 도서.
<이른바 시장 문제에 관하여>
<인민의 벗들은 누구인가>
<먼 곳에서 보낸 편지들>
<맑시즘의 희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질문.
그렇다면 정치·경제 엘리트 독자들은 많으면서, 왜 맑스와 엥겔스의 독자들은 줄어든 것일까.
전혀 위협적인 요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파시스트와 자유 진영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마는 것인가. 정작 공산권에 대한 우려가, 공산주의로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그만큼 맹목적이고 경도됐음을 반증하고는 만다.
둘째로는 매우 쉬우면서도 단순한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다.
정작 공산권 국가에서는 왜 아직도 군대를 요구할까.
따라서 미치지 않는 이상으로는 투쟁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실제로도 제국주의 국가는 남는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다.
'군비철폐는 사회주의의 이상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전쟁이 없을 것이다. 그 결과로 군비철폐가 실현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사회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없이 실현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자는 그 누구든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독재는 직접적으로 폭력에 기초한 국가권력이다. 그리고 20세기에는 폭력 문명 시대 일반에서 그렇듯이 주먹도, 곤봉도 아닌, 군대를 의미한다. 군비철폐'를 강령에 넣는 것은 '우리는 무기 사용에 반대한다'고 전면 공표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폭력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여기에는 일말의 마르크스주의도 없다.
‥
무기 사용과 무기 획득을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는 피억압 계급은 노예처럼 취급받아 마땅하다. 우리가 부르주아 평화주의나 기회주의자가 되어버린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계급투쟁과 지배계급 권력을 타도하는 것 말고는 어떤 탈출구도 없고 또한 있을 수도 없는 계급 사회에 살고 있음을 망각할 수 없다. 노예제나 농노제에 기초한 것이든 지금처럼 임금노동에 기초한 것이든 모든 계급 사회에서 억압 계급은 항상 무장을 하고 있다. 오늘날의 상비군뿐만 아니라 민병도 예를 들어 스위스의 민병 같은 가장 민주주의적인 부르주아 공화국의 민병조차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적으로 하여 무장할 것이다. 이것은 깊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을 만큼 초보적인 진실이다. 모든 자본주의 나라에서 예외 없이 파업 노동자들을 상대로 군대(공화제적·민주주의적 민병을 포함하여)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적으로 하여 무장하고 있다는 점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실 중 하나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앞에 두고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가 '군비철폐' '요구'를 내걸라고 촉구받다니! 이것은 계급투쟁 관점을 완전히 방기하는 것, 모든 혁명 사상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부르주아지를 쳐부수고 수탈하고 무장해제시키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장, 이것이 우리의 슬로건이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혁명적 계급이 가질 수 있는 단 하나의 전술이다. 자본주의적 군국주의의 객관적 발전 자체로부터 논리적으로 뒤따르는 전술이자, 그러한 발전이 지시하는 전술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를 무장해제시킨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세계사적 사명을 배반하지 않고 모든 무기(군비)를 고철더미 속에 버리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틀림없이 그렇게 할 것이지만, 그것은 오직 그런 조건이 달성되었을 때뿐이며 그 전에는 결코 아니다.'
레닌, <'군비철폐' 슬로건에 대하여>, 1916. 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