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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 2020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선정도서
황경란 지음 / 산지니 / 2020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삶의 반대
황경란의 소설집 『사람들』 중 <킹덤>
(이 책을 다 읽지 않고 단편들을 읽어가며 리뷰를 쓸 예정이다. 일종의 읽기 과정의 리뷰.)
첫문장: 타마타브 항구의 밤이 어둠의 빛을 잃었다.
마지막 문장: 리켈은 양손을 모아 입에 대고 할아버지를 향해, 아버지를 향해, 자신의 소원을 외쳤다.
황경란의 소설집 『사람들』 의 작품들을 읽으려면 맨 앞에 있는 <사람들>을 자꾸 봐야 한다. <사람들>에서 잘나가는 작가가 썼다는 『삶의 반대』, “가난보다 추할까”를 보여 주는 작품이 <킹덤>이다. “그게요 선배” 하며 부장에게 “가난은 추하지 않아요. 가난보다 추한 건요, 세상에서 가장 추한 건, 그건….” 하며 륜이 말 줄임표를 남겼다. 난 그 지점에 물음표를 넣어었다. 륜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와 '나의 답은?' 없었기 때문이다. <킹덤>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황경란 작가 특유의 절제된 묘사와 은유, 글의 구조, 문장과 단어에 소름이 돋았다.
<킹덤>의 장소적 배경은 타마타브, 말라가시어로 토아마시나 "소금기 있는" "소금 같은"뜻을 가진 도시이다.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섬 마다가스카르의 두 번째 큰 도시로 동부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바오밥나무가 상징인 마라가스카르는 프랑스에서 1960년 독립하였고, 군권력의 통치가 있었다. 1970년대 민주화 투쟁들이 있었고, 1990년대 민주화를 받아들여 2000년대 이후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다. 1990년대 IMF 관리를 받은 적이 있다. 한국은 2007년 광업진흥공사가 암바토비에 니켈광 합작 투자에 진출했다. 마다가스카르 밀레니엄 빌리지 프로젝트 지원 사업등을 했다. <킹덤>은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한다. 작가는 이런 배경설명 없이 시작한다. 이런 점은 독자로 하여금 <사람들>을 이해하게 하는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킹덤>은 열다섯 리켈이라는 소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여덟 살 아이 때 만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한국인 쌩파(프-synpa 호감을 주는 상냥한)와 그들이 7년 동안 지어가는 킹덤이 마을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기억하는 리켈의 선택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흑인의 얼굴이 너무 까매서 그들이 감정을 읽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그들에게 시위로 자신들의 뜻을 전달한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시대의 문제를 가지고 정부와 싸웠다. 그들은 단지 어부로 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정부도, 기업도, 마을 사람들도.
‘킹덤’은 제련소의 머리이며 팔, 다리 같은 철골 구조물을 가지고 있다. 마을의 전기를 몽땅 끌어다 쓰며, 220킬로미터의 관이 암바토비 광산과 연결되어 있다. 컨테이너박스는 리켈이 보기에 킹덤의 먹이다. 쌩파의 말대로 광산의 니켈이 컨테이너에 실리는 순간 타마타브는 이곳의 킹덤이 아닌 저들의 킹덤이 되었다. 숲은 사라지고, 낮에는 고기 잡고 밤에는 깊은 잠에 빠져는 삶을 더 이상 살지 못하며, 누구의 엄마, 누구의 언니는 매음굴로 간다. 그리고 새로 산 아버지의 배는 정박시킬 부두가 없다.
리켈은 할아버지가 왜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있었는지, 아버지는 왜 컨테이너 부두에 가서 시체로 돌아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어부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어부의 삶과 상관없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여덟 살이 아닌 열다섯의 리켈은 알 것 같았다. 매음굴 앞에 정차된 화물차에서 경유를 빼내고 이제는 제 키 높이가 된 컨테이너 위로 올라간다.
사회서적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를 단편으로 만나니 완전 다른 느낌이었다. 사회 서적에서는 머리로만 만났다면 황경란의 <킹덤>에서는 가슴으로 만난다. 그리고 머리로 다시 생각하게 된다. 마다가스카르를 찾아보고 우리나라 광물공사가 한 일도 살피게 된다. 그리고 리켈을, 생파를 기억한다.
쌩파가 리켈에게 준 책 『삶의 반대』, 정말 삶의 반대는 무엇인가? 시인 유계영은 “삶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살 수 없음입니다” 이라고 말한다. 리켈은 삶의 반대가 죽음인가?를 스스로 물으며 죽은 아버지를 다시 떠올린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침묵하지 않았듯이 리켈도 자신의 소리를 내기로 결정한다.
가난이 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가난의 풍요를 모른 체 풍요의 가난을 짓밟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추한 가난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들의 상냥한 권력으로. 삶의 반대를 깨달은 리켈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이런 권력을 향해 행동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향해 자신의 소원을 외친다. 지금 작가는 그 소원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3대에 이어져 내려오는 그 소원을 나는 이제야 제대로 듣는다. 나비의 날개짓 같은 이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지길 나도 소원한다.
‘땅 속의 물과 뿌리가 영원하기를’ 그들의 킹덤이 이루어지기를.원한다.
‘땅 속의 물과 뿌리가 영원하기를’ 그들의 킹덤이 이루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