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은 창백한 손으로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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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쪼그려 앉아서 시체를 내려다봤다. 삽으로 찍은 뒷머리가 파여 희끗한 뼈가 드러나 있다.'

시작이 강렬했다. 영상을 제대로 아는 작가답게 프롤로그의 살인 사건 현장이 마치 영화 필름처럼 펼쳐지듯 상세하게 묘사된다. 무슨 이유로, 어떤 상황 속에서 살인이 저질러진 것인지? 물음표로 프롤로그를 강렬하게 시작한 《낙원은 창백한 손으로》 책을 펼치자마자 독자들의 심장을 쫄깃쫄깃하게 조여 온다.



강력반 여전사 정연우! 새해 첫날부터 만취한 상태로 선배 한상훈 경감의 부케까지 받고 귀가한다. 그녀는 다음날 이른 아침 경찰청 황총경이 전하는 살인 사건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이 사건을 위해 파견 근무를 시작하라는 지시와 함께 껄끄럽게 여기던 후배 김상혁이 그녀의 부사수가 되었다는 소식도 듣게 된다. 사건인즉슨 전날 발생한 강원도 선양 에덴 병원 원장의 살인 사건 수사와 범인 체포가 그 목적이었다. 황 총경은 무엇보다 그녀의 단짝이었던 김상혁을 부사수로 삼은 이유는 조속한 사건 해결을 원한 것일지도 모른다. 새해 첫날부터 강력 살인 사건 전담을 비롯, 잠시 경제팀에 있다가 다시 강력반으로 넘어온 김상혁의 긴장감은 더해지고, 그와의 불편한 사이를 에둘러 극복하려는 선배 정연우의 티키타카 하는 미묘한 심리전도 소설의 재미, 긴장감을 더한다.



사건 해결을 위해 등장하는 또 하나의 인물 SJ 로펌의 변호사 차도진. 그는 새해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사무실에 출근한다. 그리고 자신을 응원하는 동료 박사무관의 딸이 전하는 도시락과 함께 낯선 퀵 기사가 전달했다는 의문의 편지를 받아든다. 그 편지 안에는 전날 발생한 에덴 종합병원 살인 사건의 용의자 변호를 맡으라는 협박조의 편지였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15년 전 자신의 고향을 떠난 차도진. 그에게 15년 전 그곳 선양과 작별할 수밖에 없었던 중대하고도 미묘한 사건이 분명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엔 엄격했던 그의 아버지 차요한 원장과 에덴 병원. 도진의 친구 민재, 서현, 윤석, 이한이 하나로 얽혀 있었다. 모르고 지나쳐야 할 것을 알 수밖에 없었기에 그 문제에 대해 더 민감했던 아이들이 15년 전 차도진과 그의 친구들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의 인물들이 교차되듯 연결되며 하나의 퍼즐을 조금씩 풀어 가는 소설의 형식으로 긴장감은 고조된다



선양으로 넘어 간 연우와 상혁은 살해 현장을 탐문하며 사건 경위에 대해 선양 경찰서 강력 팀장 심재훈의 브리핑을 받는다. 또한 살해 경위에 따른 의문점을 발견하게 된다. 연명 치료 거부 시한이 머지않은 피해자의 살인. 곧 죽을 수 있는 인물을 굳이 살해해야 할 깊은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 연우는 단순한 살인 사건 이상의 무언가를 추측하게 되는 것이다. 이어지는 최초 목격자 유 간호사, 그녀와 함께 자리를 지켰다는 김 실장의 진술까지 이어지지만 같은 말을 반복할 뿐 진전이 없었던 건 마찬가지. 우연히 발견된 피 묻은 에덴 종합병원 30주년 볼펜마저 확실한 단서가 될지 의문으로만 더해가는 연우와 상혁의 수사는 계속된다. 형사들은 자신이 추리 한대로 진행되길 확신하며 그 안의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다는 경찰 선배 황 총경의 말이 연우의 머리 사이로 스쳐가는 것도 이 시간이 심상치 않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지......



15년 전 강원도 선양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변호사 차도진도 협박범의 편지 한 통으로 인해 또다시 선양으로 향한다. 그에게도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가 남았던 상황이었는지 금의환향이라 해도 마다할 고향 선양 길은 궁금증과 걱정 가득한 가시밭길처럼 느껴졌다. 왜 갑작스럽게 고향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용의자의 변호를 해야 하는지, 차도진 또한 감추고 싶던 비밀이 있었는지, 그가 숨기고 있었던 과거 15년의 간극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점점 더 충격적으로 드러난다. 숨 가쁘게 넘어가는 페이지 속에 독자들에겐 더 많은 생각거리와 의문을 던지며 마치 소설 속 범죄를 수사하는 연우로 빙의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도진의 15년 전 알 수 없는 의문은 그가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았던 그의 친구 5인방 서현, 민재, 이한, 윤석과의 과거 속 여행으로 다시 도진을 소환한다. 거대한 폭풍 전야의 문턱에서 그들이 감추고 있던 에덴 종합병원의 실체, 현재 발생한 원장의 죽음이 어떤 연관성을 띠고 있는지 그 깊고 넓게 꼬인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과정은 계속된다. 긴박감, 추리, 의문, 희열, 짜릿함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낙원은 창백한 손으로》 그저 영화 한 편을 오롯이 감상하는 듯하다.



이렇게 15년 후 차도진은 선양으로 내려와 용의자이자 간호사인 유민희의 변호를 시작하려는 순간, 자신의 아버지인 에덴 병원 차원장이 그 피해자임을 알게 됨과 동시에 충격에 빠지고 만다. 유민희의 심문 현장에서 급히 자리를 피한 차도진은 그 이후 잠시 종적을 감추고, 그를 만나려던 형사 정연우와 김상혁 은 차 원장의 빈소에까지 찾아가기에 이른다. 그곳에서 선양 살인 사건으로 인해 이틀 일찍 부임한 곽철호 서장을 만나게 된다. 연우를 통해 차도진이란 이름을 듣자 얼굴빛이 변한 곽 서장. 이에 연우는 곽 서장에 대한 의구심이 더해간다. 빈소에도 나타나지 않은 차도진을 찾기 위해 눈 내리는 영하 20도의 날씨에 탐문을 시작하는 정연우 경위와 김상혁 경사.

혹시 모를 돌발 상황이 펼쳐질까 걱정하는 상혁은 6개월 전 무모한 함정 수사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랐을 선배 연우를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한다.



이후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쫓고 쫓기는 긴장감 속에 15년 전후를 넘나드는 이야기는 전개되며 시간이 흐를수록 진실이 한꺼풀씩 벗겨지는 단초가 제공된다. 황 총경이 연우를 상혁과 선양에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 이 소설의 진범이 시한부 인생의 차요한 원장을 직접 살해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사건 해결을 위한 독자들의 노력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끊임없이 제기될 것이다. 또한 무수한 추리를 펼쳐가며 마치 주인공 연우처럼 그 범인을 체포하는 희열에 사로잡힐지도 모를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엔딩처럼 범죄는 종결되고, 또 다른 시작이 새롭게 펼쳐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생도 그렇듯 범죄는 돌고 돌며, 또 다른 악인을 탄생시킨다. 이를 또 해결하기 위해 정의는 살아나고, 우리 인생도 하루하루의 수수께끼,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또 숨을 쉬는 건 아닐지...... 그럼에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절대 악의적 갈등, 공포, 복수가 반복되는 일의 발생 빈도는 줄어들어야 한다. 진실 된 정의, 무모한 복수가 가져다줄 불행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책을 읽으며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한다.

낙원은 창백한 손으로.......박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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