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자들 걷는사람 소설집 4
임성용 지음 / 걷는사람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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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게 무엇이든

'근수는 다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부스럭거리는 낙엽 냄새가 열어지고 공기가 무거워졌다. 계절이 겨울로 가고 있다. 계속 걸어 큰길에 도착했다.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원장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음성 메모로 넘어가기를 기다렸다가 버튼 음울 3초간 눌러 녹음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 부스를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 안은 찌든 담배 냄새를 눌러 놓은 싸구려 항수 냄새가 가득했다. 거기에 북소리와 함성이 섞인 소리가 요란하다. 내비게이션 화면에는 아랍에미리트와의 축구 평가전이 한창이다. 기사가 볼륨을 낮추며 말했다.

누군가의 부탁으로 혈전을 치르고 귀가하듯 말끔한 정리 후 자리를 떠나는 근수. 그는 사건 현장 뒤처리 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일상의 쳇바퀴로 돌아가고, 택시에 몸을 실은 후 쓰레기 같은 라디오 중계방송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과거를 소환한다. 그것은 1988년 보통 사람이란 허울을 쓰고 대한민국을 대표했던 이가 등장한 가을 <서울 올림픽> 무렵이다.

근수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어머니 지실 댁과 단둘이 남고 만다. 남편을 잃은 젊은 과부와 아들 내외는 이제 약자일 수밖에 없다. 근수는 그럴수록 더욱 강해졌다. 작은 곤충부터, 뱀, 노루에 이르기까지 살생의 폭은 높아가고 짙어졌다. 어미만을 둔 야생의 들짐승 새끼처럼 거칠어짐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음은 무시한 채 근수의 몸까지 커 가고 있었다.

모자의 집을 서슴없이 찾아와 치근덕 거리는 삼청교육대 동기이자 동창 종도와 만수라는 놈이 있었다. 근수는 어린 마음에 울분을 토해내지만 아직 그들에겐 힘이 부치는 십 대였다. 조금씩 자신을 강화해가는 이유도 주변의 불필요한 간섭과 장애가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아닐까? 이후 마을엔 흉흉한 사건이 일어나고 그 진실은 과연 누구의 손에 의한 것인지 그 사실이 밝혀진 것인지에 대한 이유는 독자들만이 알 수 있다. <그게 무엇이든> 이유와 결과는 존재한다. 근수에게도 그리고 이러한 부도덕한 일을 벌인 장본인에게도......

2. 지하 생활자

연극의 한 장면처럼 묘사된 <지하 생활자>는 알게 모르게 살아가는 우리 시대 어두운 단면을 보여준다. 생계를 위해 '극단'을 나와 아파트 기계실 지하 3층에서 근무하는 남자 기혁과 그를 짜증스럽게 일 시키는 관리소장. 거의 전담이 돼버린 2005호 노부부 내외는 이미 연극의 <리어 왕>, <한여름 밤의 꿈>을 적절히 묘사하는 것처럼 작가는 이야기를 풀어간다. 샤워를 하려는 의도인지, 치매가 심어지는 상태인지 2005호의 노인은 연기를 피운 채 스프링클러의 물을 받아 목욕을 한다. 각 방의 스프링클러 잠금장치에 이어 이마저 잠금장치를 해야 할지에 고민하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마저 닫아버리게 되는데...... 이러한 혹시가 단초가 되어 이야기의 흐름을 어디로 튈지 모르게 한다. 현재의 이야기 중심에 과거 극단에서 생활하던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가 가미되 다소 지루하고 무거울 수 있을 소설의 흐름에 감초(?) 역할을 한다. 아마 지하 연습실에서 연습했던 '극단' 출신의 주인공 기혁이지만 지하 3층에서의 생활은 왠지 모르게 더 처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23층으로 오르내리며 자잘한 것까지 책임져야 했던 상황은 그 이상의 고통스러움이 아니었을지 주인공의 입장에 감정이입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3. 공원 조 씨

조 씨는 공원에서 책을 판다. 그러던 중 우연히 50대 장 씨가 그에게 나타난다. 내기 장기를 두며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지만 공원 조 씨에겐 감춰진 비밀이 있다. 어느 날 불쑥 '알파'라는 제로 행성의 외계인이라 불리는 인물이 나타난다. 공원 조 씨도 그와 같이 외계 행성에서 파견 된 동료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이후 조 씨의 동료인 '알파'는 조 씨의 성미를 건드리며 계획에 따른 결과물을 내야 한다는 압박을 던져준 채 사라진다.

어느 날 이후 장 씨는 공원 조 씨를 불러 자신의 과거사 이야기를 펼치며 왜 자신이 조 씨에게 장기를 두며 접근했는지에 대한 진실을 말한다. 장 씨 또한 제로 행성에서 파견된 비밀 연구원 동료일지, '알파'에서 장 씨로 변신한 인간일지 모를 일이다. 장 씨가 궁금했던 건 삼십 년 전 남부럽지 않게 살아오던 때에 '알파'라 불리는 작은 키의 사내가 자신에게 팔았던 책이 조 씨의 그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제약 회사 연구원으로 가족과 단란한 생활을 해왔던 장 씨는 '알파'라 불리는 외판원이 전한 책을 구입 후 사랑하던 아내와 딸마저 잃게 된 후 홀아비 생활을 이어오게 된 것이다. 그냥 책이 원인이 되어 사라진 것으로 오인하는 장 씨에게 또 다른 아픔이 존재했다. 인간을 설계하러 지구에 온 '알파'와 조 씨. 실은 조 씨의 실제 이름은 '오메가'임이 밝혀진다.

그들이 완성한 지구는 점점 그들의 지향점과는 다르게 인간의 파멸과 억압,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며 평화 대신 서로 간의 불신과 전쟁이라는 어두운 미래를 불러일으킬 것인가? '알파'가 '오메가'인 조 씨에게 시간이 머지않았음을 알리는 그 마지막 의미 또한 궁금증을 더하게 한다. 그리고 장 씨의 딸과 아내는 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 사라졌다는 공원 4호 매점 여주인 밀양댁의 말이 의미 깊게 다가온다. 조 씨와 장 씨, 그들은 과연 다른 듯 같을 수밖에 없는 하나의 존재인 것인지...... 한 사람의 아픔은 수많은 인격체를 형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불안감 가득한 현실을 우린 지금 살아가고 있다.

4. 기록자들

주인공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근근이 버티며 20대를 보냈다. 방랑 생활을 전전하며 원양 어선 어부, 산장지기 일을 해오던 아버지는 산에서 실족사한다. 어머니는 그 다운 죽음이라 말하며 맡고 있던 가게를 처분하고 돈을 절반 나누어 아들인 주인공에 주고 아파트까지 맡게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기록한 노트 한 권의 유품을 건네주고 젊은 시절 못한 세계 여행을 떠난다. 어느 날 주인공은 한가하다 못해 지루한 틈을 타 아버지가 남기고 간 기록지 노트에 빠져든다. 70, 78, 79 그저 숫자들로 명명되는 이들의 전 세계 각지 인물들의 이야기가 그득한 기록물이었다. 아버지는 그가 모르던 세계에 살던 사람일까? 의구심이 들만한 내용들이 글에 드러났다. 아버지는 세계를 돌며 그곳에 있던 산들을 정복한다.

그리고 그는 96을 지중해란 바에서 만나 책을 팔기 위해 인류의 위기를 조장하는 '알파' , 즉 자신을 조물주라고 말하는 외계 행성인과 한 남자의 이야길 전한다. 이러한 이야기들 속에 남자는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고 통장의 잔고마저 줄어든다. 그의 선택은 아파트 시설관리 직원으로의 취직이었고 밤 시간을 그곳 아파트 지하 3층 파이프라인에서 보내며 일상을 소비한다. 세월은 흐르고 어머니의 여행 소식마저 뜸해질 즈음 그의 어머니가 행방불명됨을 깨닫게 된다. 그녀의 손에서 전해진 아버지의 기록지. 이제 남은 건 외톨이 남자와 커피 얼룩 가득한 노트 한 권이다. 모든 기록은 남아 있지만 유일한 존재는 남자 한 명이다. 그는 96에서 이어 97, 98이 될지 모를 또 다른 기록물을 이어가려고 컴퓨터를 켜고 99의 기록을 시작한다. 앞에서 언급된 단편 소설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처럼 약간은 난해하지만 작가의 손에서 기록된 창작물, 그 기록들이 앞에서 전개된 <지하 생활자>, <공원 조 씨>와 같은 연장 선상에서 이어지는 연작 소설의 느낌을 전한다.

5. 원주민 초록

건조한 내용 같으나 판타지가 가미된 듯한 전개의 젊은 청년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현재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청년. 초등학교 시절 집을 떠나버린 아버지로 인해 큰집, 작은 집이라는 의미를 이해하며 자랐으며 어머니인 김 여사와 함께 생활한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초등학교 시절부터 매달 50만 원의 용돈을 보내는 무심한 우리 시대 예전 아버지들의 모습이다. 청년의 엄마 김 여사는 재봉틀로 생계를 이어가며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이 되자 쪽방에서 열아홉 평 아파트로 아들과 함께 이사한다. 이후 십 대 청소년이 된 아들은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건강 이상과 병수발로 인해 집과 병원을 오간다.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지만 어머니의 병 앞에 모든 것이 의미 없다. 결국 혼자가 된 아들은 어머니의 죽음과 병원비와 학자금 대출 등으로 아파트를 처분하고 대학 건물 한구석 먼지방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무가치한 삶을 이어간다. 이때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대한민국 원주민>이란 만화책을 읽으며 실제인 듯 상상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어머니 김 여사가 아파트 베란다에 텃밭을 꾸미듯 청년은 학교 주변 어딘가에 7개의 텃밭을 확보하고, 그곳에서 대한민국 원주민을 만나 소통한다. 하얀 수건을 머리에 쓴 원주민의 낯섦과 어색함,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다. 원주민의 하얀 두건은 마치 어머니가 재봉틀로 만든 글자가 새겨진 모양의 수건과 너무나 흡사했던 것이다. 어머니의 추억과 현실에서 방황하는 청년의 모습이 지금 이 엄혹한 시대를 갈팡질팡 살아가는 2030 세대의 단면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청년은 다짐한다. 매달 50만 원씩 들어오던 아버지의 천금같던 돈을 포기하고 스스로가 갈 길을 정하겠다고...... 잠시 같은 생활을 반복하던 무료함을 던져버리기 위해 컴퓨터의 전원을 키고 이력서를 쓰기 시작한다. 원주민 초록을 만나며 자기 나름의 소중한 가치를 깨달은 것일까? 녹록지 않은 인생에 자신을 위한 새로운 도전에 용기를 내는 주인공의 또 다른 이야기들도 흥미롭게 상상되는 작품이다.

6. 맹순이 바당

맹순이의 바다를 의미한다. 맹순을 중심으로 제주 4.3사건의 하루, 그리고 그 이후 끝분에서 맹순으로 살아가는 해녀의 여정을 담고 있다. 빨갱이란 말이 금기시될 정도로 엄혹했다고 밖에 없던 1940년대 후반. 끝분이었던 맹순이도 빨갱이로 오인받아 죽음의 사선을 넘나든다. 그와 정사를 나누던 몽돌은 수많은 주검 중 하나로 발견되고 끝분은 해녀 할망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해 끝분이 아닌 이제 말도 어눌하고 어리숙한 맹순이가 되어 살아간다. 그때 태어난 아이가 선녀였다. 남편 몽돌이 남기고 간 생명체일지 그 누구의 딸 이상도 아닌 아이는 소리 없이 성장해 엄마인 맹순의 보탬이 된다. 미제 할매의 소시지를 훔친 덕수에게 능청스럽게 다가가 소시지를 뺐어 먹는 대담함. 제주 4.3사건 이후 낯선 동네, 일본인이 파놓고 간 지코촌이란 곳에서 숨죽이며 살아간 맹순이와 대조적 삶을 살아가려는 딸의 모습이 상상된다. 조금씩 수면 위로 올라와 대중의 관심을 받았던 제주 4.3 사건. 구체적인 내용의 실체는 알 수 없지만 대략적으로 그날의 분위기와 공포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숨죽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당시, 조금씩 깨어나는 진실 앞에 울분이 치밀어 오르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소설로 만나볼 수 있는 기회이다. 빨갱이라는 거짓된 오명을 감추고 씻어내기 위해 맹순은 오늘도 맹순이 바당(바다)에서 물질을 하고 있을 것 같다.

7. 아내가 죽었다.

아내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왔다. 갑작스런 죽음이 낯설기도 했다. 이미 이혼한 사이였지만 그는 장례식장에서 상주 역할을 하고 있을 딸을 만나러 간다. 딸은 아버지를 만나기 싫어했다. 죽은 엄마의 당부가 있었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아빠와 국밥을 함께 먹으라는 것.

아내와 남자는 우연히 미술 전시장에서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로 만나 하룻밤을 보낸다. 이 만남으로 새 생명을 갖게 되고 결혼 생활을 이어진다.

커플 중심엔 위에서 딸이 아빠에게 언급한 '국밥'이란 매개체가 있다. 이혼 당일과 결혼 기간에도 커플은 종종 국밥을 먹으며 서로를 위한 위로 아닌 위로를 나눴다.

'골병든 데는 내장이 좋아'

남자가 국밥을 먹으며 머릿속에서 되뇌며 뱉어낸 영화 속 대사이다.

작가는 아내의 죽음을 시작으로 그들의 심리 상태, 남겨진 딸의 마음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평론가였던 남자와 화가였던 아내와의 만남과 죽음 사이에 남자의 가족, 아내의 딸이 존재한다. 어쩌면 그것도 이혼의 원인, 장애물이었을 수도 있다.

딸의 탄생으로 그들은 결혼했지만 확실한 준비가 덜 된 상황 속에서 풍기는 부부간의 그늘이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작품에 묻어난다. 모든 상황이 그녀의 죽음을 암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힘을 빼고 왠지 덤덤히 써 내려간 글이 긴 여운을 전하듯 이 작품 또한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

여성을 향한 페미니즘과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상반 돠 모습을 통해 변화해가는 사회적 현실을 투영하고자 했던 작가의 노력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다수 담겨 있다. 또한 가족의 해체, 폭력성으로 인해 분열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상황을 작가 특유의 건조하면서도 깊이 있고 사실적 문체로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더불어 우리 인간이 지닌 구조적인 모순을 되돌아보고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편리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의해 오히려 부당하고 추하게 변해가는 사회. 서로를 죽고 죽일 수밖에 없는 소설의 상황이 허구적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문제의식이 강해 보이나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소리 없이 천천히 독자들의 뇌리에 스칠 문장들이 단순히 기억이 아닌 기록물로 깊이감 있게 내재될 작품을 읽는 묘미를 《기록자들》에서 만나볼 수 있다. 평등이라는 기준과 힘의 논리가 아니라 모두가 정당하고 자연스럽게 누릴 사실적 정황에 대해 생각해 보며 음미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리딩투데이 신간살롱 지원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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