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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이 사는 골목 ㅣ 푸른도서관 84
김현화 지음 / 푸른책들 / 2021년 1월
평점 :
배화동 골목길엔 기린이 산다. 아프리카 푸른 초원 혹은 동물원에나 있어야 할 기린 말이다. 마을엔 또 남부러울 것 없는 선웅이란 중2 학생이 살고 있으며, 그 앞엔 거의 쓰러져 갈 듯한 집에 사는 코시안 은형 가족이 살고 있다.
선웅이는 2층 집 자신의 방에서 동급생 은형이 누나의 집을 종종 내려다보곤 한다. 은형이의 엄마 태국인 진따나는 선웅이의 집 가사도우미 일을 하며 어려운 생계를 꾸려 나간다. 한글이 어눌해 일 년 뒤 학교에 입학한 은형이는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말이 느리다는 이유로 동급생들에게 놀림도 당한다. 하지만 선웅이만은 그런 누나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동화 작가가 꿈인 착한 아이이다. 선웅이에게도 콤플렉스가 있다. 158센티의 키에 104kg 몸무게. 청소년 소아 비만으로 인해 조금 걷다 보면 숨이 차기 일 수이다. 친구들이나 주변의 따가운 시선도 그의 마음을 더욱 조여온다. 그냥 하나의 사람으로 지켜봐 주면 좋음에도 사람 사는 곳은 말이 많기 마련이다.
선웅이 또한 은형이와 마찬가지로 학교 학우들의 교내 폭력에 위협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이때 다행히 말없이 다가와 그들을 도와주고 사라지는 기수라는 친구가 있지만 선웅이는 그 친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아니라 그런 도움이 더 의아하게 여겨졌다. 어떻게 보면 기우는 선웅이가 쓰려는 동화 속 백마 탄 영웅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들을 위협하는 이는 학교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은형의 한국인 아버지이다. 선웅의 집 가사도우미로 생계를 이어가는 은형모 진따나의 급여를 술값이나 놀음 값으로 탕진하며 폭력까지 행사한다. 여러 번 동네 주민 혹은 선웅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지만 그때뿐이다. 선웅이는 그런 은형의 가족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분홍 달팽이 이야기를 은형에게 들려주며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을 약속한다.
'슬픔도 지나면 향기가 난다.'
분홍 달팽이가 은형이와 선웅의 표상일 수 있는 것처럼 어쩌면 선웅이 상상과 꿈에서 만나는 사바나 기린은 은형이일 수 있다. 수많은 육식 동물을 피해 살 길을 찾아 도피하는 초원의 방랑자. 그 무리 틈에 기린 은형이, 이를 보호하는 선웅이 함께하며 현실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방법을 찾아 떠나는 여행과 같다.
어렵게 살아가는 배화동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들을 위해 봉사하며 그들을 돕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강할 것 같지만 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살아가는 선웅이와 은형이 같은 약자를 돕는 기수도 있다. 기수의 할아버지 이복규님도 슬픈 과거를 뒤로하고 매주 목요일 배롱나무 부근을 쓰는 봉사를 하며 일상을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후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으며 생의 마지막 사진, 초상화를 남기려 하지만 지뢰 사고로 얼굴의 형태를 잃어버린 그에게 비수 같은 말들만이 쏟아진다. 그럼에도 묵묵히 아무 일 없었던 듯 기수 할아버지 이복규님은 봉사를 이어간다. 사고는 결국 샘물공원 장학금 지원식에서 터지고 만다. 선웅의 별말 없이 던진 한마디가 은형이의 마음에 상처를 낸 것인지 이후 은형과 선웅은 잠시 멀어지는 사이가 된다. 대신 기수와 은형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소리 지르지 않고 얌전했던 사바나의 기린 선웅이는 그들의 모습에 질투 어린 울부짖음을 터트리지만 꽃밥 집 사건으로 그간의 오해를 풀게 되며 그들의 우정은 돈독해진다. 또한 기수가 왜 선웅과 은형이를 보이지 않게 돕고 있는지, 그 진실을 선웅이에게 고백하고 서로 간의 진심을 확인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우정이 짙어질수록 슬픔도 밀려옵니다. 기수 할아버지의 죽음. 하지만 그가 가는 길은 외롭지 않습니다. 꽃밥 집에서 식사를 나눴던 노숙인들의 배웅과 꿈속에서 만난 젊은 시절의 이복규 할아버지 초상화를 들고 찾아오는 화가 황인백. 기수와 그의 친구들까지 함께 하기에 할아버지는 분명 하늘의 별이 되셨음을 예견한다. 선웅이에게 기수와 은형이란 존재는 어떠했을까? 상상 속 기린의 모습으로 은형이를 돕는 선웅이, 아니면 기린이란 상상 속의 동물을 생각하며 동화 작가를 꿈꾸는 선웅의 마음이자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일 수 있다. 청소년들에게 비호감을 갖고 있는 편견 어린 어른들에겐 그렇지 않음을 깨닫게 해주며 아직 이런 순수성을 지닌 청소년들이 남아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전해주는 소설이다.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부모 세대 또한 이 책을 읽고 청소년의 눈높이에서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며 소통하는 시간을 만들어 봤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기린이 사는 골목》은 저자의 눈에서 본 선웅이의 동화 같은 이야기이다.
*출판사 지원을 받아 개인적인 의견을 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