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천천히 안녕
나카지마 교코 지음, 이수미 옮김 / 엔케이컨텐츠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요코는 남편의 칠순 생신에 맞춰 전 가족 동원령-세 자매-을 내린다. 요코의 남편 쇼헤이는 3년 전부터 기억을 망각하는 인지 증상, 알츠하이머형 인지증 상태를 겪기 시작했다. 방향 감각을 상실한다거나 정해진 목적지에 대한 기억들마저 서서히 잊게 되는 것이다. 단지 이러한 증상을 3년에서 5년 정도로 지연 시켜줄 의사의 약 처방이 전부였던 상황. 요코는 이런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며 세월의 무게보다 더한 엄중함을 느낄 뿐이다. 이렇게 쇼헤이 칠순을 맞아 어떤 결단이 내려질지, 자리에 모인 나나, 마리, 후미 세 자매의 눈과 귀는 초긴장 상태이다.

‘혹시 재산 상속이라도 있는 걸까?‘​

자매들은 미리 준비한 휴대폰을 부모님께 선물한다. GPS(전 지구적 위치 측정 시스템)가 탑재되어 쇼헤이가 길을 잃어도 언제 어디서든-지하는 예외-그를 찾을 수 있는 장치이다. 해결책은 있겠으나 늘 문제가 생겨난다. 마지막 시 창작 모임에 참석했던 쇼헤이는 길을 잃어 고라쿠엔 놀이공원에까지 발길이 닫는다. 거기서 어린 자매를 만나게 되는데 보호자 없이 회전목마를 탈 수 없었던 자매에겐 희망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흔쾌히 허락해 회전목마에 몸을 실은 할아버지와 손자뻘의 자매의 모습이 어두운 밤 조명과 함께 비친다. 저녁 무렵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은 없지 않았을까? 마음은 더욱 짠해진다

칠순 이후 쇼헤이와 요코, 후미는 미국에 거주하는 마리의 초청으로 아버지와 마지막이 될지 모를 여행을 떠난다. 쇼헤이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해변가를 달리는 차 안에서 그곳마저 자신이 어린 시절 자랐던 ‘시즈오카‘로 착각한다. 어린 시절 엄하게만 느껴졌던 마리의 아들 준과 그의 동생 다카시는 할아버지의 이러한 모습이 그저 낯설다. 마리의 남편 신은 장인, 장모가 와 계신 중간에 직원들과의 홈 파티 문제로 아내와 작은 언쟁을 벌인다. 결국 홈 파티는 진행되지만 신의 옛 연인이라 할 수 있는 ‘미치코‘라는 여인의 SNS 연락에 신은 당황한다. 그녀는 신의 회사 동료와 알고 지내던 사이로 파티에 꼭 참여하길 희망했고, 마침내 참석에 대한 허락을 받아낸다. 미치코 이 파티 자리에서 신의 장인, 장모가 25년 전 자신이 딱 한 번 본 신의 부모님인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알츠하이머형 인지증 상태를 겪고 있는 쇼레이는 익숙하게 자신이 가르친 제자를 만난 것처럼 미치코와 대화를 이어간다. 부인 요코는 미치코와 사위 신의 관계에 대해 걱정스러운 태도를 보이지만 이내 함구하고 만다. 바삐 흘러가는 시간들, 자신의 딸 마리가 사는 샌프란시스코 여행은 이렇게 바쁘면서도 천천히 마무리된다. 아직도 쇼헤이는 옛 기억과 현재의 상황을 오락가락하며 점점 깊어 가는 병에 속수무책이다.

그 이후 손자의 이름도, 시간이 흐르면 또 망각하게 되어 되묻는 쇼헤이. 그의 가장 절친이었던 나카무라의 죽음 앞에서도 엉뚱한 질문과 답변으로 지난 시절 자신의 동료들을 의아하게 만든다. 나카무라의 조사문 낭독을 부탁했던 동료들도 결국에는 ˝나카무라가 죽은 것조차 알지 못하는 친구에게 조사문 낭독은 무리다.˝라는 말을 남기며 걱정과 함께 씁쓸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 현실의 인식마저 흐릿해지는 쇼헤이에게 알츠하이머형 인지 상태는 과거의 기억만을 더욱 또렷하게 할 뿐이다. 일본은 그 이후 1,000년 만의 대규모 지진과 쓰나미로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발생하고 만다.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첫째 딸 마리는 요코에게 전화를 해 지진으로 인한 피해 상황 등을 확인한다. 다행히 지진의 피해가 없었으나 쇼헤이의 인지증 검사를 위해 반 년 전 예약해둔 대학 외래 진료가 하루 앞으로 다가온 날이다. ‘가야 한다‘와 ‘가지 말아야 한다‘라는 딸과 엄마의 언쟁 속에 엄마는 딸의 신신당부를 듣고 마스크와 몸을 덮을 수 있는 옷 등을 입고 쇼헤이의 병원 진료에 동행한다. 다행스럽게 신약이 발명되었지만 마침 그 공장이 후쿠시마 지역에 있어 당분간 약이 출시되긴 어렵다는 약사의 말을 듣고 요코는 망연자실할 뿐이다.  상황은 알츠하이머형 인지 증상처럼 무엇이 정답이고 허상인지 모른 채 정처 없는 시간만 흘러갈 뿐이다.

쇼헤이의 의미 없는 말은 점점 늘어나고 대화라는 소통은 어긋나기만 한다. 인지 저하 상태의 상황을 정확하고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는 장면들이 생생하게 그려질수록 마음 한구석의 짠한 감정이 가시지 않는다. 미국에서 마리가 보내 준 신약을 처음 받아들고 기뻐하는 요코는 약의 효능을 확인하기 위해 가장 정이 없던 막내딸 후미에게 전화를 해 아빠와 통화하길 권한다. 알 수 없는 단어의 조합이므로 연결되는 쇼헤이의 말이었지만, 딸 후미는 오랜 시간 통화를 이어간다. 아버지의 의미 없고 두서없는 말에 맞장구쳐주는 후미, 그저 냉정하고 당돌하기만 한 막내딸의 캐릭터에서 묻어나는 애잔한 감정이 상상하는 장면이다. 마침 후미는 또다시 사귄 중학 동창생과의 실연으로 괴로워하던 시기를 겪고 있었다. 그나마 의미 없는 대화였지만 그런 아버지와의 전화 통화가 작은 힘이 된 것일까? 반면 아버지 쇼헤이의 인지 증상은 안타까울 정도로 천천히 가족이라는 기억마저 지워가고 있다.

불운의 연속일지 쇼헤이를 돌보던 그의 부인 요코마저 망막박리(망막이 안구 내 벽으로부터 떨어져 들뜨게 되는 병적 상태)로 긴급수술과 입원을 하게 된다. 며칠간의 고통스러운 상황이지만 어디로 튈지 모를 막내 후미와 나나는 아버지 쇼헤이를 돌보며,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쇼헤이가 머물 요양 시설을 돌아본다. 아버지는 점점 더 기력을 잃어 가시며 집으로 돌아온 아내 요코는 그저 남편이 예전의 기억 그대로 남아 있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알츠하이머형 인지증에서 레비소체 단계로 더 악화돼가는 쇼헤이. 조금씩, 아주 천천히 가족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상황이 더욱 애절하고 간절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자매들은 아버지의 옛 시절 교장 훈시를 재현하며 과거를 떠올려본다.

‘롱 굿바이‘ ​

첫째 딸 마리의 막내 다카시가 며칠간 학교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카시 담임에게 듣게 되고, 다카시는 학교 교장 선생님께로 불려 간다. 무슨 이야기든 해보라는 다정한 교장 선생님 앞에서 다카시는 인지 장애로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야기를 한다. 교장 선생은 그저 그 이야기에 공감해 준다. 또한 언제든 무슨 일이 생기면 친구의 집이 아닌 자신의 집무실로 오라고 조언한다. 이러한 선생님의 모습이 사실 세 자매가 잊고 있던 아버지의 다정스러운 과거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다카시 또한 몇 번 보지 못한 할아버지의 솔직한 감정을 교장 선생님께 이야기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 한 사람의 기억 저장 창고마저 비워져만 간다. 가족이란 이름을 잊어가는 본인도 그렇지만 아버지라는 존재가 사라져가는 걸 겪어야 하는 딸과 남편을 잃어가는 부인의 심정도 찢어질 듯하다. 가족이란 끈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가정의 10년이 절절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함께 느끼고 공감할 때 더욱 사랑하고,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교훈, 알츠하이머로 아버지를 잃어가는 가족의 이야기 [조금씩, 천천히 안녕] 꼭 한번 읽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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