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을 말해줘
이경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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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물을 뒤집어쓴 부모에게서 태어난 뱀 사육사 그녀는 보육원에서 영유아기를 비롯해 청소년기를 보낸다. 그를 나아 준 부모는 그 사이 세상과 이별을 하고 그녀는 홀로 남겨지게 된다. 그 이후 허물을 물려받은 그녀는 동물원 뱀 사육사로 취직되어 사육되고 있는 뱀을 돌보게 된다. 하지만 동물원 일대의 산사태로 인해 모든 동물들이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라진 뱀을 찾기 위해 나선 허물을 뒤집어쓴 사육사의 운명도 풍전등화처럼 변화하게 되고 허물을 벗어던지기 위해 방역센터에 입소하게 된다.

허물을 가진 사람들은 왜 어떠한 연유로 방역센터의 임상 실험 대상자로 선별된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들에게만 몸 전체에 허물이 가득 찰 정도로 스스로를 방치하고, 자유로움의 상태로 놔두게 되었는지 의문점도 들었다. 소설을 읽다 보면 과정과 실마리가 저절로 풀리겠지만 이러한 궁금증을 끌어 오르게 하는 것도 소설이란 장르의 힘이자 작가의 역량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죄악의 씨앗이라고 생각하면 뱀이 먼저 떠오르는 창세기 구약 성서의 선악과 사건처럼 인간과 뱀의 연관성은 수천 년이 흐른 지금에도 끊이지 않게 구전되는 매듭처럼 펼쳐진다. 허물을 벗어던지면 용이 된다는 신화와 그에 이르지 못하면 이무기로 남아 떠도는 뱀의 운명이 마치, 하루, 이틀을 쳇바퀴 돌 듯 살아가며 성공이란 승천을 바라는 인간의 모습과 대비된다. 그 중심에 ‘롱롱’이라는 뱀을 비롯해 다양한 캐릭터의 인물들의 허물벗기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크다고 다 롱롱이 아니야. 자고로, 용골돌기가 사람 주먹만 한 게 불쑥 튀어나와 있어야 한다고. 용골돌기, 몰라?”

슬슬 신비에 싸여 있던 뱀 ‘롱롱’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인가? 유일하게 어마어마하게 큰 뱀, ‘롱롱’일지 모르는 뱀을 보았다는 유일한 목격자인 젊은 청년 ‘후리’의 이야기를 반박하는 뾰족 수염이란 인물의 말이다. 남들은 다들 방역센터 임상 체험자로서의 탈출을 꿈꾸지만 후리는 오히려 이곳의 생활에 만족하며 버틸 만큼 버티려는 젊은 세대이다. 과연 그가 본 것인 무아지경의 세상 속 구원자 ‘롱롱’일까? 이제 그의 문을 풀어가 위해 의기투합하여 ‘롱롱’이란 구세주를 찾아 자신들의 남은 허물을 벗어던지려 한다. 이를 방해하는 방역센터 직원들의 방해 장벽이 존재하지만 말이다. 누구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허물이 있다. 그것이 외적이던 내적이던 벗겨 버리고 싶은 치부일 수 있고 간직하고 싶은 아픈 상처일 수 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느냐의 차이이겠지만 소설을 통해 독자로서 지닌 인생의 허물이 무엇이고, 이를 극복 가능할지도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다. 그들의 약속과 계획은 시작되고, 실행에 옮겨질 가능성이 있는지 두근거림도 밀려온다.

낡은 궁에서 펼쳐지는 뱀 ‘롱롱’과 사육사 그녀, 후리의 사투는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사육사인 그녀의 노력으로 ‘롱롱’은 제압되고, 김과 후리는 방역센터에서 알게 된 남자 ‘척’의 헬스장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들의 손에 잡혀 온 ‘롱롱’이 허물을 벗어던짐과 동시에 인간의 몸을 뒤덮은 허물마저도 벗겨 낼 기회를 줄지 기대가 된다. 물론 이것이 의미 없는 결과로 이어질지라도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우리 인간들은 온갖 기복 신앙에 맹신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이 생명을 담보로 하는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일 것이다.

“신화와 전설은 그런 겁니다. 인간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의 역사 중 일부는 간혹 신화로 점철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 진실을 찾기 위해 역사학자들의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어떠한 것이 옳고 그른지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차일 수 있다. 과거엔 신화로 날조되고 조작된 것들의 역사가 많았으나 시대가 민주화되고 자율성을 강조하며 열린 분위기의 구조로 바뀌어 감에 따라 좀 더 사실적이고 명확한 역사의 증거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생각의 확장이 이루지고 있긴 하다. 이러한 중심에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뱀이 정말 인간의 구세주가 될 것인지 현실적인 문제와 실현 불가능한 신화적 존재의 가치성이 대립되고,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필요한 사람은 그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이다. 최근 기사를 통해 본 내용이지만 암 환자의 일부가 애완견의 구충제를 먹고 암세포 확장의 진행도가 낮아졌다는 효과(?)를 보았다는 내용의 보도로 인해, 이를 받아들여 실행하는 사람들 생겨났다.는 사례처럼 믿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 극한의 상황에선 인간에게 믿고만 싶어지는 일이 되는 황당한 경우도 발생한다.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첨단의 시대를 살고 있다지만 이러한 딜레마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뱀을 좇는 자들과 뱀을 쫓는 방역센터 직원들 중 누가 정의(定義)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정의(定意) 내릴 수 없는 상황이 연속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혹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계층이 뱀이란 상징성 가득한 동물을 통해 자신의 기득권과 희망을 갈구하듯 경쟁하는 이야기를 판타지적 요소를 가미해 흥미진진하게 풀어 놓은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결국 그들은 소원은 허물 벗겨진 인간, 자신의 목표를 완수하고자 하는 기득권자일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제4차 산업 혁명의 시기를 살아가며 정보화 사회, 데이터에 맹신하는 것처럼, 과거엔 이러한 토테미즘 혹은 샤머니즘의 사상을 더욱 갈구하고 인류의 소원을 희망해 왔다는 점에선 수단만 다르지 목적은 하나가 아닐까?라는 추측도 해본다. 물론 책에서도 언급하지만 허물을 가진 자들의 ‘프로틴’이란 생존 수단의 도구와 제약회사라는 거대한 이익 조직의 음모가 담겨 있다. 결국 수익을 위해 또 다른 개체를 줄여 나가려는 인류의 암적 존재들이 어느 시대에나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예상을 하게 한다. ‘롱롱’과 ‘프로틴’이 어우러지는 퍼포먼스와도 같은 무대 위에서도 펼쳐지는 반전의 내용들에 빠져보길 바란다.

‘소원을 말해줘’는 인간이 꿈꾸는 소원은 다양하고 가지각색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말 필요로 하는 소원을 헌신짝처럼 던져 버리고 불필요한 순간적 이득과 사적 가치에 매료되어 삶을 낭비하는 현실의 작태에 반성이란 씨앗을 심어주는 작품이다. 그 반성의 씨앗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명확한 시야를 확보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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