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의 방 - 2019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진유라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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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식 변화, 건강의 이상은 한순간에 닥쳐 올 수 있다. 매사에 깔끔하고 바지런하며 온순했던 무해. 그녀는 남편과의 사별 이후 급속도로 내면의 상처가 폭풍우 몰아치듯 퍼져 의사로부터 초로기 치매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오십 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다가온 치매라는 병명은 그녀의 딸 모래에게도 큰 도전이며, 예전과 같지 않은 엄마에 대한 안타까움과 근심이 동시에 밀려오는 기폭제가 된다.

‘병은 이렇게 인간이 반박할 수 없게끔 인간의 육체를 빌려 증명하듯이 나타났다.‘​

질병의 발생이란 특정 지어 나타나는 것이 아닌 어느 순간 문득, 시련 섞인 아픔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온다. 이를 치료하기 위한 방법은 있다지만 시간의 흐름에 의해 노쇠해가는 인간 육체 본연의 모습까지 완벽히 재생해 낼 수는 없다. 그렇게 인간은 육체에서 정신까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멸해간다.

무해는 탈북자였다. 그리고 육 개월간의 국정원 조사를 통해 간첩이라는 의심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그 당시 그녀는 무수히 넘쳐나는 조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지금, 하나 남은 딸 모래를 위해 기억의 소실이 빠르게 밀어 닥치기 전 자신의 기록을 글로 남기고자 한다. 자신의 역사일 수 있지만 딸을 위해 던지는 마지막 선물이자, 유산이기도 했다.

‘농마국수‘, 음식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는 추억의 이음새와도 같다. 무해는 그간 모래에게 비밀로 했던 출생지에 대한 내용을 털어놓기 위해 ‘농마국수‘에 대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다. 북한에서 인연을 맺었던 친구들, 용범이와 그의 누이 명희의 결혼식에 얽힌 사연들을 담아내며 ‘농마국수‘ 이야기도 기억 속에서 상기시킨다. 그리고 친구인 용범 가족의 몰락. 공산권에서 가장 금기시했던 부의 창출 욕구. 밀수 사업으로 인해 용범을 비롯해 그의 가족은 당의 주요 감시 대상이 되고, 어느새 무해의 시선에 용범 또한 멀어져 간다. 이처럼 북에서의 기억을 지우고 살던 무해는 딸에게 전해 줄 ‘농마국수‘의 레시피를 위해 잊고 싶었던 지난 기억을 한 줄씩 적어내려가며 모래와의 단출하지만 잊지 못할 ‘농마국수‘ 만찬을 나누게 된다.  그리고 그간 숨겨 둔 출생지의 비밀, 탈북인에 대한 사실을 딸 모래에게 나직하게 고백하고 만다. ‘농마국수‘는 무해의 기억이란 끈을 과거에 현재로 이어지는 매개체의 일부이며 딸에게 자신의 감춰진 진실을 알리는 전달자와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뿌리에 대한 중요성, 기억의 끈을 기록으로나마 남기고 싶은 무해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북조선 시절 음식의 기억에 이어, 사별한 남편 강은석과의 첫 만남에 이르기까지 1인칭 시점이 아닌 제3자의 시점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어쩌면 이야기의 진전을 이어가는 화자는 과거를 회상하는 그녀 혹은 기록을 살펴 가며 이야기를 정리하는 그녀의 딸 모래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조금씩 드러나는 그녀의 과거에 대한 회상 기록이 깊이감 있게 전달된다. 그만큼 오랫동안 각인되고 지속될 수밖에 없는 현실, 우리 민족의 이야기, 탈북자의 생사고락이 담긴 작품이기 때문이다.

‘무해의 방‘은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 젊은 시절 당시 교원으로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그녀. 하지만 북조선의 경제 기근으로 교원의 지위가 떨어짐을 실감하게 된다. 먹고살기에 급급한 국가적 현실로 인해, 미래의 혁명 인재를 길러내는 산실이란 보기 좋은 떡이었던 학교는 허울로만 남았을 뿐, 인색한 투자 부분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로써 자신들의 기근을 암묵적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기아와 배고픔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이들까지 생겨난다. 금전적 이익이래봤자 북과 중국 접경지대에서 벌어지는 밀수 행위가 범법임에도 행해지고 있었으며, 그 이익은 비싼 값에 불량품까지 수입하게 되는 북한의 상황에 의해, 고스란히 중국 측의 더 큰 이익으로 돌아가는 안타까운 상황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 아프고 무력했던 기억은 무해의 기록으로 남겨질 뿐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처절함과 암울했던 북조선의 경제 상황을 글로 느끼며 드는 건 그저 ‘멍‘해질 수밖에 없는 정신을 추스르는 것이 전부일뿐이다.

‘인간은 지금 당장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살기 위해 그 모든 것을 유예 시켰다.​

압록강 물줄기를 경계로 북조선과 중국이 접경하고 있는 지역은 피와 땀, 울분, 살기까지 서려있는 공간이다. 삶과 죽음의 희망과 공포, 생존을 위한 불법 행위 등이 서슴없이 벌어지는 범죄의 온상이기도 하다. 또한 3%밖에 되지 않는 남조선으로 귀환, 자유를 꿈꾸며 빈곤하지만 의지를 불태워 마지막 동아줄을 잡으려는 북조선 민중들의 생사가 담긴 빛을 고대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불행과 어머니의 행방불명까지 겪은 무해의 어둡기만 했던 미래는, 북조선의 공산체제를 따르고 순응했던 정서에서 주변 지인들의 변화무쌍한 행위들에 의해 심적으로 조금씩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녀는 그간 공산주의 국가에 충성했던 나가 아닌, 자유와 삶의 존속을 위해 생의 유예를 선언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믿고 따르려 했던 동향 김 씨의 사기행각이었음에 분노하고 만다. 한국으로 떠나야 할지, 중국인의 아내로 남은 삶을 유지해야 할지에 대한 삶의 정당한 유예. 이것이 무해의 또 다른 숙제로 남게 된 탈북 탈출기의 기록이다.

결국 하반신 불구의 중국인과 첫 혼인, 그리고 눈에 밟힐 수밖에 없던 첫아이 페이와의 이별과 현재의 딸 모래와의 만남에 이르기까지, 무해는 슬프고 암울했던 기억을 행복으로 바꿔가기 위한 종착 지점에서도 삐거덕하고 만다. 한 여인의 삶이었지만, 우리가 공감하고 함께 고민해야 할 우리 민족의 이야기로도 확장 가능하다. 남편 은석의 만남에서 죽음, 이어서 찾아오는 초로기 치매 환자 무해의 가슴 아픈 기록의 마무리는 이 책을 끝까지 탐독한 독자라면 충분히 이해 가능하고 동감할 만한 심정으로 가득하다. 내가 아니지만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함께 아파하고 기억하는 마음, 무해의 방 기록은 개인사가 아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대사의 단편으로까지 확장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보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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