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자화상 - 화가의 가슴에서 꺼내온 가장 내밀한 고백
박홍순 지음 / 서해문집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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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감정은 어찌보면 가장 숨기기 힘든 인간의 약점이다.' 라고 생각 된다. 감정이 앞서면 항상 일을 그르친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의 내면을 감정화해 표출해내는 것의 장단점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다양한 결과의 촉매제 역할을 해 준다.

물론 이성적 능력이 뛰어나 감정을 제어하는 능력이 풍부하다면 지나친 감정은 금새 수그러들 수 있으나, 인간이라 어떤 상황이나 관계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담백하게 내놓는 것도 자연스러운 이치가 아닐까도 여겨본다.

이번에 박흥순 작가에 의해 탄생한 작품 '감정의 자화상'은 그러한 면에서 흥미를 더하는
읽고 싶은 작품축에 든다.
감정이라는 주제로 화가와 소설가들의 공통적 정서, 감정의 공감대가 일치하는 작품을 주제화해 일반독자들도 알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구성 된 인문학 서적을 만난 것도 큰 행운이라 여기며 책장을 넘겨 본다.

익히 아는 작가들의 자화상이나 소설의 내용이 나올때면 독자의 입장에서도 감정이라는 상태에 대한 정서를 좀 더 빨리 인식케 될 것이며, 알지 못했던 작가의 작품이나 그림을 감상하며 책을 읽어나가보면 그림과 소설의 공통 된 요소의 감정상태를 파악하기 쉽고, 앎의 지식이 늘어가고 있다는 확신도 갖게 된다.

챕터별 에피소드 중 이해하기 쉽거나 익숙한 작가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책 읽기를 하고자 한다. 그러다보면 좀 더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만날 수 있고, '아! 이 작가가 이러한 상황이었구나.' 라는 사이다같은 청량감을 느끼지 않을까? 생각해 보며 공유하듯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을 것이다.

[ ] 숨겨진 감정을 만나다.

감정은 특성상 충동적이어서 통제를 벗어나 출렁거리기 일쑤다.


실레, 헤세의 분열, 이성과 감성의 차이는 세상의 유혹을 뿌리치거나 동화되거나의 양립적 차이일 수도 있다. 각각의 작가들이 작품의 구상과 주제의식을 통해 이 두가지 감정에 대한 양갈래적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실레는 '이중, 삼중 자화상'을 통한 자신의 내면과 외적 변화의 세계를, 헤세는 그의 작품《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통해 감정에 유혹되는 골드문트의 삶을 이성적 상태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상이한 정체성을 감추지 않고 내세우는 것, 전체를 볼 수 있게하는 눈과 조화 등을 작가는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바탕의 결합이 감정과 이성의 적절한 균형감 있는 항유할 수 있는 키워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렘브란트의 자화상과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에서도 자신의 내면 세계를 감추며 생을 마감하는 공통분모를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그림을 최고라 여겼던 렘브란트는 가사를 탕진하며, 대저택을 구입하고 본인의 수입에 반비례하는 씀씀이를 보이다가 결국 파산하고 만다. 그의 늠름하고 중후했던 자화상에선 느낄 수 없었던 가식적인 그의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희대의 화가들도 보이지 않는 진실과 거짓이 난무함을 깨닫게 된다. 소설 속《고리오 영감》 또한 결혼 후 떠나버린 두 딸을 옹호하는 대신 두 사위를 비난하는 논리를 주변의 반응을 일축한다. 이런게 정당치 못한 비논리적인 모습으로 비춰지는 《고리오 영감》의 자화상인 것이다.

[ ] 새로운 감정을 찾다.

우리 민족이 처한 상황에 대한 고민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 이념적인 고민 등이 담겨있다.


이것이 화가 이쾌백이 당시 일제 시대의 상황을 자화상으로 표현한 내용이자 의식이다. 그는 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이중섭과 함께 공부한 유학파였다. 하지만 일제 시대의 아픔을 몸소 체험하며 자신의 방향성을 그림에 투영시킨다.

문제해결의 중심에 서지는 못하지만 그 아픔과 고통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작가정신, 극는 한국전쟁 당시 거제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제 3국, 남한도 아닌 북한으로 전향해 한국의 회화계에서는 그의 이름을 거론 조차 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책에는 그의 자화상에 관련 된 그림이 단 한장 소개되나 그의 작품 중간, 중간에 그의 모습을 등장시켜 시대를 보는 흐름과 감정의 서슬퍼런 진심을 표현해 주고 있다. 지식인이자 지주의 아들로써 문제 해결의 키 역할이 되지 못하는 한계성을, 그림으로라도 표현하여 민중과 함께 하려했던 것이 아닐까?

이와 동일한 경향으로 책에서 소개하는 강경애 작가의 소설 《인간문제》 지주에 의해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는 '선비'의 아버지, 그리고 지주에 의해 유린당하던 선비는 시골을 떠나 도시로 진출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사모하던 동네청년 첫째와 해후하고, 지식인 청년 '신철'과 함께 노동 운동의 대열에 합류한다. 하지만 신철은 이후 전향하여 평안한 삶을 택하고 '첫째'와 '선비'는 끝없는 노동 투쟁의 현장에 남는다는 이야기이다.

'감정의 자화상'의 작가는 화가 이쾌백과
《인간문제》의 인물 '신철'을 동일한 인물로 비유하고 있다. 이는 바로 그들이 지닌 한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동자로써의 삶을 살던 첫째와 선비는 그것이 그의 한계이며 그것만이 살길이라는 각오가 서려 있지만, 이쾌백과 '신철'은 어느 상황에 맞춰 변신 가능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설 속 '신철'과 '첫째', 선비는 대비되는 인물로 등장하며 이쾌백의 작품 '자화상'은 이 소설 《인간문제》 와 비유되는 것이다.

감정을 드러내거나 숨길 수 밖에 없는 시대 정신 앞에서 그저 나약해질 인간의 운명, 울분의 감정 대신 어쩔 수 없이 이성의 부름에 의해 판단해야하는 것도 인간의 숙명 중 하나인 것임을 인식하게 된다

[ ] 허무_카르히너, 상처로 세상을 보다.

전쟁의 끔찍한 결과에 따른 이면엔 자국에 대한 '애국'과 '영웅주의'라는 무서운 의미부여가 내포해 있다. 카르히너의 자화상과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라는 작품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만들어 낸 죄악 중 하나인 전쟁을 떠올리며 그 폭력적 결과와 희생에 대한 억지스레한 가치부여를 하려한다.

그리고 두 작가는 이러한 전쟁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회화와 글로 표현해 냈던 것이다. 이렇게 전쟁의 참상은 감출 수 없는 사실이며 아픈 역사이다. 자신의 감정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려는 시작부터 그들은 무의식 속에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받아 왔을 것이다. 키르히너의 '군인으로서의 자화상' 당당함과 의지보다는 나약함과 무표정함 등으로 전쟁에 대한 의지 보다는 허무함과 부도덕함 등을 비판, 강조하려는 작가의
감정이 무지불식간에 드러난 작품이다.

또한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의 일부를 보더라도 영웅주의를 탄생을 위해 군당국은 전투중 부상을 당한 '프레드뤽'에게 말도 안되는 의미부여 등으로 반강제적인 '영웅주의'를 심어주려는 정부 주도의 의도와 결론으로 포장되어 가고 있다.

이는 소설이 아니라 현실 사회에 대비해 보아도 다양하고 악덕적인 사례가 있을 수 있는 끔찍하한 예시이기에 생각하기도 싫은 프레임 짜기, 그러한 형태의 씁쓸함으로 다가오는 대목이다.

[ ] 울분_아르테미시아 복수를 승화시키다.

불운한 과거를 가진 공통적인 정서의 두
여인이 등장한다. 한때 아버지의 친구이자
당대 유명회가였던 '타시'에게 겁탈을 당했던 그녀(아르테미시아), 가진자가 득세하고 앞서가는 시대였던 17세기였지만 다행히도 가해자의 동생의 증언으로 '타시'는 유죄가 성립되고 귀향을 떠난다. 하지만 그는 당대 유명한 화가였기에 요즘처럼 권력자의 힘을 얻어 몇년 만에 귀향길에서 돌아오게 된다.
얼마나 쓰디쓴 결과인가. 반면 아버지의 발밑에서 그림을 그리며  화가의 재질을 이어왔던 그녀는 로마를 떠나 결혼을 하지만 남편의 도박과 알콜 중독 등으로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며 남편의 빚갚기에 급급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녀는  그래도 좌절치 않고 자신의 꿈과 희망을
위해 달려간다.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당신은 시저의 용기를 가진 한 여성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그녀는 자신의 고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각오와 자존감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후 각 쌀롱과 귀족들, 왕에 이르기까지 그녀에겐 든든한 후원자들이 등장하고
꾸준한 작품 활동에 매진한다.
이는 그녀의 초창기 자화상에서의 음울함과 울분을 금치 못했던 감정 상태에서 어느 정도 확고한 지위의 자리매김으로 올라섰던 의연한 자태의 자화상에 이르기까지, 감정의 변화의 일대기를 몆 작품 안되는 그녀의 자화상에서 느낄 수 있다.

아르테미시아와는 반대로 인생의 말로를 씁쓸함으로 장식하는 자화상이 비교 되기도 한다.
그녀는 바로 토마스 하디의 소설 《테스》의 소녀 테스이다. 알렉이란 동네 청년에게 강간을 당하고, 이를 부모님께 이야기하자 오히려 딸을 나무라는 어머니, 이어서 목사의 아들이었던 건실한 청년 에인젤과의 결혼 후 불행스러운 삶 등 그녀에게 우여곡절의 연속 된 삶이 펼쳐진다.

종국에는 에인절과 헤어진 후 뒤 마주치게 된
알렉과의 만남은 그녀의 울분을 용서가 아닌 복수로 승화시켜 살인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그녀는 울분을 마음에 간직한 채 살아와 살인으로 맺음하는 안타까운 삶을 사형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자신의 감정 조절은 자신과 주변의 노력도 작게나마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결과는 물론 자신의 결단과 몫임을 전달해 주는 현실과 소설 속 두 인물의 감정의 자화상이었다.

[ ] 상실, 이중섭, 갈증의 나날을 보내다.

' 현재 한국의 예술가들은 어떨까? 과연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미를 외적인 통제 없이 자유롭게 표출하고 있을까? 아무런 사회적 제약없이 자기 검열의 강박관념을 느끼지 않고 창의적인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을까?


내용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며, 이중섭과 이명준이란 인물이 살았던 시대와 현실에 비추어 보아 그다지 큰 변화가 있지 않음을 재확인 시켜주는 마무리 같기도 하다. 이중섭을 보면 그의 생애 자체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픔을 금할 수 없다. 사랑하는 부인 남덕과 자녀와의 이별, 분단의 아픔이 가져온 부모와의 생이별로 외로움과 평생 친구로 생을 마감한 인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 속 자화상에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 이를 드러내고 있다. 반면 그의 대표작 '소' 그림에서는 자화상 속 그의 나약함을 숨긴채 작품을 통해 그의 가족과 해후할 기대감만을 강조하듯 강인하면서 온순한 황소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소설 《광장》의 이명준 또한 남도 아닌 북, 그렇다고 생존이 아닌 죽음을 통해 쓰디 쓴 분단의 현실과 체제적 갈등 자체를 포기하고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한명 더 겹쳐지는 인물이 반 고흐였다. 처절하게 가난하고 인정받지 못했던 화가 반 고흐, 그의 동생 테오만이 그의 열렬한 동반자이자 지지자였으며 그의 아픔 또한 그의 자화상에서 묻어난다. 그래서 그런지 이중섭과 반 고흐는 슬픔과 외로움을 간직한 채 생을 마감한 작가이자 사후 더욱 더 인정받는 애잔함을 만들어낸 드라마와도 같은 예술가였다고 평하고 싶다.

[ ] 공포_누스바움, 두려움에 몸서리치다.

책의 맬미 러셀의 '행복의 정복'이란 작품이 마음에 드는 책의 결론이다. 두려움을 직시하는 것이 진정한 두려움을 위협하는 방법이다. 천만 영화'명량'에서도 이순신(최민식 분)의 대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두려움을 용기로 거두는 것, 그 당당함의 발로가 두려움 앞에 맞서는 것임을 마음에 새기면 더욱 뜻깊은 책읽기가 될 것이다.
누스바움은 자신의 자화상을 통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느낀 감정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자화상 주변의 풍경 또한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잔혹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게끔 끔찍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 상황을 겪지 않더라도 책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한 독자의 입장에서도 가슴 찢어질 듯한 처참한 상황이란 걸 인식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2차 세계대전의 수용소의 참상을 보고하는  르포 형식이라고도 부르고픈 케르테스의 《운명》에도 전쟁을 통한 고통과 뼈져리게 느껴지는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어쩌면 그림의 상징적인 이미지의 감정구현 보다 그가 보고 느끼고 경험한 사실을 글로 묘사한 것이 더 애잔함과 잔혹함이 묻어 나 있을 수도 있다. 이 두 작품을 비교하기보다 동시대의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그 아픔을 후대에는 미치지 않게 하는 일, 작금의 현실에서 우리 민족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큰 내용들로 가득한 그림의 묘사와 인문학적 해설이었다.

[ ] 일탈_고갱, 원시를 품다.

파나마와 타히티 등으로 떠나 서구 유럽의 미술의 발전과는 반 하는 행동, 즉 일탈을 꿈꾸던 고갱. 그의 자화상 작품에 담겨진 예수의 흔적과 다소 퇴폐적인 이미지로 등장하는 원주민 아낙의 모습 등은 유럽 평단 및 피카소에 이르기까지 질타의 연속 된 비판을 받게 된다.

하지만 기존의 화법과 달리 자신만의 화법과 원시 밀림 지대에서의 일탈 속 투영되는 그의 작품은 유럽에서 그려지던 전통과는 거리가 먼 일탈 그 자체였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예수의 형상을 서구 중심적의 모습이 아닌 황인종의 모습으로 그리기도 하고 마리아의 모습 또한 불경스럽게 묘사한 것이다. 하지만 고갱의 일탈은 서구문화 중심이자 바탕이 되는 귀족 중심, 후원자 중심의 작품이 아닌 독창성과 새로움 또 다른 가치를 지닌다.

어찌보면 고갱은 일탈 속에서 품은 자연인의 면모를 자신의 삶 속 동기부여로 삼았던 건 아닐지 추측해 볼 수 있으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이자 작가였던 볼테르의 《랭제뉘》란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 소설에서는 볼테르는 원시공동체인 휴런족 청년 '랭제뉘'를 통해 서구의 근대적 합리성이 인간의 풍부하 삶과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압한다는 점을 부각시키며, 원주민을 통한 자유로운 감정이 자유로운 결정과 행위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공통점은 태초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조주의 입장에서 바라 본다면 좀 더 자유롭고 원시적인 분위기 속에서 좀 더 다채로운 변혁이 보다 큰 아름다움과 가치를 맺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두 인물, 고갱과 볼테르의 작품에서 재현해 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새로운 미적 창조와 독창성이 주가 된 감정의 자화상, 이것도 우리 삶에 있어 받아들이고 공존해야 할 인간이 가진 다양한 군상ㅈ의 얼굴들 중 하나일 것이다.

지금까지 다양한 장르와 화풍 속 작가, 소설의 인물 혹은 작가를 통해 느껴지는 수많은 감정의 변화를 경험해 보았다. 개개인의 독자의 입장에서 이 책을 경험함으로써 각자 인생의 자화상은 무엇이며, 어떠한 감정의 변화를 통해 지금까지 나라는 자아가 변화되어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과 함께, 국내외 유명한 명화가들의 그림을 감상하며 그들의 심리 상태를 체험해 보는 유익한 독서의 시간이 되리라 생각해 보며 글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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