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 ㅣ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스테펜 크베넬란 지음, 권세훈 옮김 / 미메시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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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9.5







 뭉크와 관련된 책이라면 어지간하면 찾아보려고 하는데 그런 와중에 이 그래픽 노블을 발견했다. 저자 스테펜 크베넬란은 한 번도 정식으로 만화를 공부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 덕분에 아주 개성적이고 파격적인 그림체의 뭉크 전기를 접할 수 있었다. 마치 쿠엔틴 타란티노가 영화를 정식으로 공부해본 적이 없음에도 거장으로 불리는 것처럼 이 작가도 약간 비슷한 과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아무래도 노르웨이에서 가장 비싼 지폐의 모델로 선정될 정도의 위인인 뭉크인지라 작가가 전기 만화를 그린다는 것에 사명감 내지는 부담감을 느꼈을 법한데 결과물은 여느 뭉크 관련 책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다. 꿀리지 않을 뿐더러 차별화되는 부분도 많이 있었다.

 작가가 거의 7년에 걸쳐 그렸다는 이 뭉크 전기 만화는 표현주의의 대가 뭉크에 뒤지지 않는 독창적인 그림체를 자랑하는데, 흡사 캐리커처를 연상시키는 그림체가 무척 인상적이면서 피로감이 들기도 해 사람에 따라선 취향 꽤나 갈릴 듯했다. 아마 뭉크 그림의 암울한 매력에 반한 사람일수록 그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드러낸 장면이 더 반감이 들 법도 하다. 특히 뭉크가 매춘을 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는 - 시대 배경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하다만... -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었는데 도리어 이런 가감없는 묘사가 있어 책 전체의 내용을 더욱 신뢰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책의 분량은 300페이지도 안 되는데 80이 넘도록 장수한 뭉크의 인생을 전부 그리기 힘들었는지 작가는 뭉크의 특정 에피소드만 골라서 그리는 것에 집중했다. 우리가 뭉크하면 떠올리는 <절규>나 애인과의 소동은 짧게 넘어가고 오히려 베를린 유학 시절의 비슷한 스칸디비아 출신 예술가들과의 교류, 특히 스웨덴의 작가 스트린드베리와의 관계 같은 게 많이 조명됐는데 흔히 여성에 대해 두려움을 넘어 혐오라는 감정을 갖고 있는 뭉크의 정신 세계를 들여다보기에 적합했다고 본다. 작중 뭉크는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대가로서가 아닌 이제 막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신출내기로서 작품 속을 활보하는데 생생한 묘사에 힘입어 상당히 감정적인 괴짜로 다가왔다. 뭉크가 나름 괴짜인 줄은 알았지만 그동안 활자로만 접하다가 그림으로 접하니 아주 신선했다. 그야말로 만화의 장점이 아주 잘 드러난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솔직히 이만한 퀄리티의 작품이라면 뭉크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전생애를 그렸으면 어땠을까 싶지만 작가가 집중하고픈 부분에만 집중한 덕에 이만한 퀄리티가 유지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시간이 전개되는 순서도 약간 뒤죽박죽인 감도 있고 그림체는 좋게 말해 개성적, 나쁘게 말하면 정갈하지 못해 개판 5분 전이라 오래는 읽기 힘들다는 단점도 있지만 그래도 결국 더 길었으면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흐와 달리 뭉크의 삶은 2차 창작이 된 적이 사실상 전무해서 이런 작품이 더욱 소중할 수밖에 없다. 욕심을 더 부려본다면 만화말고도 영화도 나왔음 좋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욕심에 지나지 않겠지. 이 책을 읽어보니까 뭉크의 삶이 이렇게 만화화된 게 오히려 기적이라 여겨질 정도로 뭉크의 삶은 2차 창작으론 애매한 감이 있으니까. 어두워서? 그런 이유도 있고, 솔직히 말하면 픽션화시키기에 다소 덜 드라마틱한 측면이 있어서... 물론 뭉크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을 일이겠지만 그래도 이 만화를 읽으니까 어쩐지 뭉크의 이야기가 세간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서두에서 밝혔듯 뭉크와 관련된 책이라면 어지간하면 찾아보려고 한다. 아마 이 다음에 읽을 책은 뭉크의 <절규>가 도난당한 실화를 다룬 <사라진 명화들>이 될 듯한데 그 책은 상당히 기대된다. 슬슬 뭉크 이야기가 익숙해질 무렵 그런 신선한 이야길 접하는 것도 좋은 자극이 될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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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증명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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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도진기 작가의 시리즈물이 아닌 단편집은 처음 읽어본다. 몇몇 단편은 엔솔로지나 잡지에서 읽어본 적 있는 작품이라 반가웠다. 고정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 단편을 쓸 때 그 소설가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법인데 역시 이 작가는 내실이 있는 작가였다. 모든 작품이 다 내 취향은 아니었고 - 어떤 작품은 작가의 <정신자살>을 연상시켰다... - 일부는 식상하기도 했지만 현직 판사라는 경력을 살린 - 지금은 전직 판사이자 현직 변호사 - 부분은 흠잡을 구석이 하나 없었다. 내 주제에 무슨 흠을 잡느냐 싶겠지만, 전문성을 살린다고 소설이 무조건 재밌는 법도 아니라서 전문성과 재미를 잘 조율한 작가의 솜씨가 더욱 주목해야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악마의 증명'


 표제작. 작가의 이름을 처음 알린 작품이라 한다. 그야말로 판사이기에 쓸 수 있는 법의 허점을 파고든 작품이다. 법의 허점을 이용한 범인이나 그 범인을 제대로 물먹이는 호연정 검사나 보통내기들이 아니다. 호연정 검사가 몇 수 앞을 내다보는 게 비현실적이라 느껴졌지만 법에 통달한 사람이라면 범인의 속임수 같은 건 훤히 보이겠지. 호연정 검사의 활약도 활약이지만 범인의 독백도 역시 인상적이었다. 담백하게 자아도취를 하고 있는 꼴을 보노라니 역겨워서 치가 떨렸다.



 '정글의 꿈'


 미안한 얘기지만 하나도 놀랍지 않은 반전이었다. 다만 기시 유스케의 <천사의 속삭임>의 엔딩 장면과 유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건 언급하고 싶다. 표절이라는 건 아니고, 이 작가의 통념적이지 않은 가치관 같은 걸 엿볼 수 있던 걸 짚고 넘어가기 위해. 이를테면 기존의 윤리나 법 같은 게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없다는 것이 느껴져서 말이다. 참 냉소적이야, 이 작가도.



 '선택'


 한국추리작가협회상 신인상을 수상한 작품. 이 작품 속 사건의 전말이 정말 뜻밖이었는데 개인적으로 내 취향이기도 했다. 스포일러라 이 이상 뭐라 말은 못하겠지만 뜻밖의 따뜻한 이야기에 '피가 튀기지 않는 추리소설'이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 말은 읽은 사람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여담이지만 <한국추리소설 걸작선>에 실린 작품인데 이 작품이 다른 작품보다 월등히 재밌었다. 그리고 그 점은 이 소설집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구석의 노인'


 바로 전에 읽은 작가의 장편소설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가 연상되던 작품. 추리소설 잡지 엘릭시르에 실렸을 때 읽은 작품으로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물에 속한다. 구석의 노인이란 캐릭터성은 좀 미묘하지만 사건의 미스터리를 꿰뚫는 최적의 개연성을 지닌 인물로는 적격이었다. 사건의 개연성은 애매하다만...



 '시간의 뫼비우스'


 작가의 자전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초반엔 좀 지루했지만 설정 자체는 한 번쯤 생각해본 것이라서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하게 읽혔다. 어떤 식으로든 개입할 수 없는 정해진 인생을 100번은 넘게 반복해서 산 남자가 자기 삶을 통제할 수 있게 됐을 때 취한 선택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 남자의 고통과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 환희가 무척 대비돼 잠시 인생에 대해서도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강렬한 몰입감과 여운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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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메레르 9 - 용들의 연합 ㅣ 판타 빌리지
나오미 노빅 지음, 공보경 옮김 / 노블마인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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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내가 손을 대고 있는 판타지 소설 중 가장 짧은 분량 안으로 완결이 난 시리즈다. 다 읽기까지 6년이 걸렸다. 너무 띄엄띄엄 읽은 감이 있어서 항상 전편의 내용이 가물가물했는데... 아무튼 생각보다 깔끔하게 끝나서 그런대로 여운이 남았다. 걱정했던 것만큼 암울하게 끝나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솔직히 4부가 시작될 때까진 여전히 지루했고, 마지막 장에 들어서야 1권에서 느꼈던 스펙터클한 맛이 작렬했는데 특히 나만 그랬는지 몰라도 테메레르의 이름의 기원이기도 한 군함 테메레르와 같이 전투에 임하는 장면에선 전율이 느껴졌다. 그야말로 대단원의 막에 어울리는 연출이었다고 본다.


 이 소설이 처음엔 '용이 실존하는 동물이었다면?' 이란 상상에서 시작된 판타지라고 여겨 호기심을 갖고 읽었는데 어느 순간 대체 역사물의 면모를 보이면서 전개 양상이 어딘가 내 기대와는 달라졌던 것 같다. 이게 실제 역사인지 대체 역사인지 구분을 못할 정도로 나폴레옹 전쟁사에 무지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게 판타지인지 역사물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던 건 내게는 좀 아쉬웠던 부분이다. 용의 크기를 비롯해 용의 전쟁에서의 역할, 인간과의 관계 등이 점점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더는 새로울 것이 없으니 이야기의 방황을 급선회한 건 아니냐는 의심도 들지만... 미묘하게 컨셉이 달라졌음에도 작가가 그 안에서 나름대로 결말을 낸 게, 그리고 내가 그 결말까지 읽은 건 못내 뿌듯하다.

 완결까지 읽었음에도 생각보다 할 말이 그리 많지 않은데 아마 무척이나 담백하게 끝난 결말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시리즈가 처음 시작될 때의 로렌스와 테메레르에 비하면 완결될 때의 둘은 많이 차이가 있는데 한마디로 전쟁이 끝나고 바라던 대로의 자유를 얻고 난 뒤의 속시원한 결말이 극적이지 않아서 인상적이다면 인상적이었다. 난 혹시 누구 하나 죽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나폴레옹 전쟁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한텐 최고의 시리즈일 테고, 판타지를 좋아하는 사람한텐 평가가 미묘한데 난 후자에 속한다.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되는 건 과정이 어찌 됐든 역사대로라 별 감흥이 없었고 테메레르와 로렌스의 숙적이랄 수 있는 리엔과의 결전은 연출이 영 싱거웠던 건 마음에 걸린다. 어떻게 보면 가장 기대한 부분인데... 이게 또 영상으로 봤으면 느낌이 달랐으려나.

 그나저나 이 시리즈를 피터 잭슨이 영화화한다고 얘기만 무성하지 구체적인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작품의 스케일이 여러모로 커서 시나리오 작업이며 CG 작업이 정말 골치가 아플 것 같긴 한데... 제대로 만들었을 때 전달될 전율을 상상하노라면 정말로 영화화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영화화가 빠를까, 내가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는 게 더 빠를까. 다시 읽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므로 영화가 먼저 나오면 좋겠건만, 내 바람대로 이뤄지기는 쉽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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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릴리 프랭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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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7.2








 아마 일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배우로 더 유명한 릴리 프랭키의 자전적 소설인 <도쿄타워>를 오랜만에 읽었다. '지하철에서 읽으면 위험한 소설'이란 광고 문구로 유명한 소설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동명의 소설도 있으니 헷갈리면 안 된다. 아무튼 상당히 다재다능한 행보를 보이는 릴리 프랭키의 예술 작품 중 어떻게 보면 가장 처음에 접한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10년이 흘러 읽은 이 책은 처음 읽을 때완 아무래도 만족도 면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자 소개란에 '한 번 쓰고 거의 퇴고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듯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산만하게 읽혔다. 작품의 자전적인 성격도 한몫했을 터다. 사실 모든 자전적인 소설이 산만한 건 아니니 어쩌면 내가 이 소설에 감흥을 느끼지 못한 것에 일종의 핑계를 찾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독자분들은 내가 이 책의 감상평을 '산만하다'는 말로 시작하는 게 못마땅할 듯하다. 그들의 불만에 특별히 변명을 하거나 하진 않겠다. 어쨌든 더 솔직히 말하자면 오히려 처음 읽을 때보다 책의 내용이 심정적으로 와 닿지 않았다. 나는 의외로 이야기의 형식적인 완성도가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하다 싶으면 마음이 쉽게 동하지 못하는 편인 것 같다. 사물의 본질을 봐야 하건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지. 이 이야기 역시 보편성을 잘 취득한 소설이란 걸 먼저 강조하고 싶다. 최근에 영화로도 흥하고 있는 <82년생 김지영>도 보편성이란 무기의 저력을 보여준 바 있다. 물론 두 작품의 보편성의 결은 매우 다르다. <도쿄타워>의 근간이 되는 아낌없는 모성은 좀 더 읽는 이의 근원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것과 비판적인 논조를 띈 <82년생 김지영>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


 소재를 보여주는 방식에서도 차이가 있다. 자꾸 두 작품을 비교한다는 게 뜬금없다곤 나도 느끼지만... <82년생 김지영> 김지영 씨의 빙의 현상을 통해 제법 눈길이 가는 방식으로 주제의식을 드러냈다면 <도쿄타워>는 소재를 보여주고 어쩌고 잴 것도 없이 그저 담백하게 나열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와 우리 엄마의 관계에 대입하며 읽어도 상당한 집중력을 요할 정도로 좀처럼 몰입하기 힘들었는데 이런 부분엔 역시 개인차가 클 것이다. 어쩌면 나는 나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불효자식이라 아무런 감흥이 없는 걸까, 싶을 만큼 말이다. 물론, 나 자신을 이렇게까지 깎아내리고 싶진 않다. 이 소설이 워낙 자전적이니까 말이다. 마지막에 주인공의 엄니가 돌아가시는 장면에선 꽤 울컥했다만, 다른 사람들의 서평을 보면 나는 다른 사람들보단 비교적 평온하게 읽은 것 같다. 적어도 지하철에서 읽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

 이 소설은 오다기리 죠 주연의 영화로도 유명한데 그 영화도 봤다. 가물가물하지만 어떤 부분에선 영화가 전개에 있어서 좀 더 몰입감이 있었던 것 같다.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는 연출이 괜찮았던 걸로 기억한다. 여담이지만 아예 자전적인 이야기인 만큼 오다기리 죠 대신 릴리 프랭키 본인이 출연하면 또 어떨까 싶다. 뭐, 그땐 릴리 프랭키가 배우 활동을 하기 전이라 어디까지나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만. 아니, 그럼 너무 대놓고 자전적이라 더 별로려나? 어쩌면 너무 감정적이라 더 별로였을 수도 있다. 이 소설의 보편성과 신파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갔던 감동이 오히려 훼손될 수 있으니까.


 내게서 모성에 관한 이야기를 이끌어내기엔 이 작품은 약간 부족했다. 난 아무래도 모성을 냉소적으로 다루는 작품에 좀 더 반응을 하는 것 같다. 가령 미나토 가나에의 <모성> 같은 작품. 아무튼 거의 10년이 지나 다시 읽은 이 소설에서 내가 얻은 거라곤 내 취향을 좀 더 분명히 알게 된 것이라니, 이것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어떤 작품보다 모성을 이야기하는 작품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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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방콕 - 우리가 함께 좋아하고 설레는 거의 유일한 무엇 ㅣ 아무튼 시리즈 11
김병운 지음 / 제철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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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며칠 전에 방콕을 다녀왔다. 좋은 여행이었다. 가기 전엔 반신반의했는데 가보니까 다들 왜 방콕, 방콕 하는지 알겠더라. '도대체 방콕이 어땠기에-' 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은 이후에 포스팅할 방콕 여행기를 읽어주시길. 이변이 없는 한 올해 마지막 여행이니 애정을 갖고 포스팅해보겠다.

 아무튼, 방콕에 가져가서 읽을 책을 물색해봤는데 생각보다 방콕과 어울리는 책이 없어서 놀랐다. 방콕 혹은 태국 태생의 작가가 쓴 책이나, 어떤 식으로든 태국을 배경으로 한 책을 가져갈 - 가급적 소설을 - 생각이었는데... 우리나라에 태국 소설이 한 권도 출간되지 않은 것에 한 번, 그리고 태국을 배경으로 했거나 소재로 삼은 소설을 이미 읽었다는 데서 두 번 놀랐다. 요 네스뵈의 <바퀴벌레>와 엘러리 퀸의 <샴 쌍둥이 미스터리>가 그러한데 두 작품 다 나쁘지 않지만 좀 새로운 책을 읽고 싶었던 나는 조금 마뜩찮지만 이 책 <아무튼, 방콕>을 이번 방콕 여행 때 가져가서 읽기로 했다.


 조금 마뜩찮았던 데엔 일단 5박 6일 여행에 들고갈 책으로썬 너무 앏거니와 당장 서두만 읽었을 땐 그렇게 구미가 당기지 않았던 게 크게 작용했다. 사실 얇은 분량이야 조금씩 나눠서 읽으면 되니까 딱히 문제될 건 없으나 너무나 일기처럼 읽히는 책의 내용엔 크게 눈길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거의 연례행사처럼 연인과 방콕을 방문한다는 저자의 경험에 이끌려 결국 이 책을 읽게 됐다.

 서두가 길었는데... 결과적으로 생각 이상으로 흥미진진하게 읽어내려갔다. 작가 소개란을 보면 신인상으로 등단한 사람이라는데 아니나 다를까 문장력이 준수했고 그래선지 다소 커다란 줄기 없이 툭툭 끊어지는 구성의 글들도 흥미롭게 읽혔던 것 같다. 작가 소개란을 마저 살펴보면 작가는 사실 방콕보단 방콕을 함께 여행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더 크다고 하는데 이 부분이 참 커다란 장점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난 연애세포가 메마른 편이라서 남의 연애론 좀처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편이었는데 이번엔 좀 설레고 부럽더군. 여행엔 참으로 다종다양한 목적이 있다지만 이렇게 '함께' 하는 여행의 즐거움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참 싱숭생숭해졌다.  


 방콕 여행에 대한 정보를 얻기엔 조금 부적절한 책이라 할 수 있겠다. 그 흔한 그림이나 사진도 없고 드문드문 나오는 거리나 가게 이름도 단편적이기 그지없다. 이 책은, 아울러서 이 '아무튼' 시리즈는 저자 자신의 세계를 만든 키워드에 대해서 얘기하는 시리즈라 그런지 방콕 또한 저자의 인생에 대해 얘기하는 매개체로 기능할 뿐이지 작가는 독자에게 굳이 방콕의 매력을 어필하려 들지 않는다. 이 점이 글에서 한 번 언급되는데 이 책은 여행책이 아니니까. 어쩌면 방콕은 굳이 저자까지 매력을 어필해야 할 정도로 덜 알려진 곳이 아니니까 특별히 손을 거들지 않은 것뿐인지도 모른다. 여담이지만 방콕 가기 전에 주변에 물어보니까 일본은 안 가봤어도 태국은 가본 사람이 진짜 많더라. 신기했다.

 개인적으론, 아무래도 나 역시 소설가 지망생이다 보니 여행 중간에 저자가 카페에서 책을 읽다 느낀 자괴감이 심히 공감됐다. 나도 간혹 여행을 하는 중에 참담함을 느끼곤 하는데, 저자처럼 나 역시 글 한 줄 제대로 못 쓰는데 여행이나 오고 있느냐고 스스로를 꾸짖는 마음이 들어서다. 하지만 저자 맞은편에 있는 애인이 바로 대답하길, 여행 때 겪은 어떠한 에피소드라도 일단 쓰라고 한다.


 여행 때 겪은 일? 그러니까 우리가 여행 중에 겪은 어떤 사소한 일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말고, 이게 소설로 적합한지 아닌지 저울질하지 말고 그냥 쓰라고. 바로 이 부분 때문에 내가 이 책에 비로소 빠져들며 읽었던 것 같다. 나는 왜 여행을 떠나는가, 그 물음에 대한 일종의 답을 얻은 것 같아서... 게다가 앞으로 여행을 더 자주 가야겠다는 일종의 좋은 핑계를 발견한 것 같아서 말이다. 아니, 오히려 조금은 나를 꾸짖었던 것 같다. 나도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이 여행을 간 편인데 왜 지금 이 글을 읽을 때까지 저런 생각을 못했느냐면서. 차마 그동안 여행을 헛 다녔다곤 말 않겠지만 그래도 지난 여행을 더 뒤돌아보게 됐다. 여행 에세이는 잘 안 읽는 편인데 지금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적으면서 왜 지금까지 안 읽었는지 하고 생각해봤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여행만 다녔지 여행 에세이는 너무 등한시해서 위와 같은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내가 너무 비관적인 걸까. 하지만 여행이 끝났으니 이젠 비관을 좀 해서라도 글을 써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젠 진짜 뭐라도 써야지.

 이 책엔 비단 소설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소소한 이야기가 훨씬 많고 물론 방콕 이야기도 많다. 그 이야기들에 대한 감상은 나중에 방콕 여행기 때 섞어서 해보겠다. 짧은 글이지만 이렇게 많은 감상이 나오다니, 참 신기하고 좋은 글이었다.

라이프 노노, 드라마 오케이, 라이프 노노, 트래블 오케이. - 42p




원하는 거 고집하고 관철하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최선은 서로 한발씩 물러서는 과정에서 우연히 맞닥뜨리게 되는 무엇일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으니까. - 73p




정말이지 쓰기 전까지는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아는 것 같아도 그건 아는 게 아니니까. - 82p




아마도 우리는 우리일 수 있을 때까지 방콕을 찾지 않을까. 우리는 우리이고 싶을 때까지 방콕을 좋아하지 않을까. 만약 우리가 더는 방콕을 찾지 않는다면, 더는 방콕을 찾지 않기로 동의한다면, 그건 우리가 더는 우리가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 그때의 우리는 지금의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지 않을까. -1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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