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개
하세 세이슈 지음, 손예리 옮김 / 창심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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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8.3 







 반려견이 무지개 다리를 건넌 지 5년째 되는 지금에 이 책을 읽으니 난 사실 개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반려견을 안락사시킬 때 얼굴의 피부에 경련이 올 만큼 울었었고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지만 시간이 약이었는지, 아니면 지금 반려묘를 무려 세 마리나 키우고 있어서 그런지 그날의 상처는 어느 정도 아물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개를 다룬 소설이라기에 읽으면서 대성통곡을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지만 <소년과 개>를 읽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나오키상 수상작이란 것치고 서사적으로 그리 촘촘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여섯 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연작소설집으로 내용으로만 따지면 일본의 그 유명한 하치 이야기에 비견될 만한 감동적인 서사를 자랑하면서 눈물을 쥐어짜는 듯한 신파적인 문체가 아닌 담백하면서 가독성 있는 문체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글쎄, 이 가독성 있는 문체란 것이 담백하게 집필된 덕분도 있지만 촘촘하거나 무게감이 있는 문장이나 서사와는 거리가 멀어 구현된 장점이라 생각하는데, 저자가 본래 누아르 작품을 쓰던 분이라 당초 예상보다 개와 일종의 거리감을 둔 듯한 문체가 인상적이라면 인상적이었다. 나오키상 심사평을 보니 미야베 미유키가 '개를 의인화하지 않고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풀어낸 감동적인 수작' 이라고 하던데, 잘은 몰라도 동화가 아닌 이상 개를 의인화하는 작품이 그렇게 많나 싶어 그게 이 작품만의 장점인지 잘 모르겠으나 '개와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점에서 꽤 괜찮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큰 부담감 없이 읽히리란 점에서 말이다. 


 개를 싫어하다 못해 공포를 느끼는 사람 앞에서 아무리 개가 위대한 동물이라고 떠들어도 효과가 있을 리 만무하다. 저자가 서두에서 개는 인간에게 가르침을 주는 동물이라며 예찬을 하길래 이 작품 자체도 개에 대한 근거 없는 예찬으로 점철됐으면 어쩌지 하고 우려됐으나 누누이 말했듯 신파적으로 흐르지 않고 상당히 자연스런 감동을 연출했다. 재밌는 건 개는 가만히 있는데 그 개를 대하는 사람들이 자기들 멋대로 깨닫고 삶을 돌아보고 모종의 결심을 하는 장면들인데, 인간을 향한 개의 무조건적인 태도로 하여금 인간이 모종의 깨달음을 얻는 구도가 워낙에 흔한 클리셰고 이 책에서만도 여섯 번 반복되기에 뒤로 갈수록 지겨웠던 걸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서사에 특별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예상했던 대로 어느 정도는 감성에 호소하는 측면이 강해 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모두에게 어필할 만한 작품이리라곤 장담하진 못하겠다. 그럭저럭 감동적이라고 느낀 내가 너무 메마른 감성의 소유자인 걸까? 

 하나 격하게 공감한 것은 동물은 인간에게 큰 감정은 없지만 인간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동물의 행동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는 대목이었다. 그를 제외하면, 난 아직까지 동물에게 매달려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하지 않았는지 이 여섯 편의 단편이 안일하게 반복되는 시나리오란 감상만 나왔을 뿐이다. 사람들이 이 작품을 둘러싸면서 감동적이라고 하면서 심지어 나오키상을 수상한 걸 보니 이 책을 작가의 문체 그대로 덤덤하게 읽은 내 스스로가 다소 얼떨떨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내 기대가 너무 컸던 건가? 차라리 신파가 더 효과적이었으려나? 마지막 수록작이자 표제작인 '소년과 개'에서 살짝 위태로운 순간이 있었지만, 어쩌면 마음속 깊이 묻어둔 탓에 더 이상 개의 이야기에 눈물을 흘릴 여력이 사라져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분석하게 됐다. 


 누가 누아르 작가 아니랄까봐 개의 이야기라고 예상했던 것에 비해 수위 높은 범죄 묘사도 나오고 주인이 바뀔 때마다 그냥 지나치기 힘들 만큼 강렬한 결말에 이르게 되니 순전히 개의 이동, 개가 이동하는 목적에 몰입하기 힘들었던 측면도 있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굳이 개가 등장하지 않더라도 서사적으로 흥미로운 지점이 충만했는데 개가 등장함으로써 서사가 느슨해지고 획일적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어 이 점이 단점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대중소설에게 수여되는 상이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나오키상인데 이렇게 느슨한 서사여도 괜찮은 건가 하는 의구심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저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개를 등장시킨 소설로 나오키상을 받은 것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라니 너무 어깃장을 놓고 싶지 않지만, 솔직히 말해 언제부터 나오키상 수상이 이렇게 쉬웠나 하고 빈정거리기까지 했다. 

 물론 이 작품이 쉽게 집필된 작품이라는 말은 아니다. 획일적인 서사긴 해도 사람의 이야기나 사람들이 개와 교감하는 이야기는 결코 안일하게 그려졌다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과 개가 교감한 역사가 무척 길기도 하고 실제로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하고 모두가 알 만한 장면을 다룬 서사가 나오키상 수상으로 이어졌다는 게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반려견이 무지개 다리를 건넌 지 5년이 지난 탓에 내 감성이 덩달아 무뎌진 것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교감의 이야기가 아직도 너무 당연한 탓에 이 소설의 내용이 강렬하지 못했던 것인지... 난 후자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실제로는 무슨 연유인지 잘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저자가 범죄를 그리는 솜씨가 보통내기가 아닌 듯해 저자가 주특기라는 누아르 작품이 읽고 싶어졌다. <불야성>이라는 작품이 상당히 유명하던데 한 번 찾아봐야겠다. 정작 그 소설을 읽었는데 어색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은 들지만, 뭐... 왠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보단 읽을 만하지 않을까 하고 기대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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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미술관 산책 - 파리, 런던, 뉴욕을 잇는 최고의 예술 여행 ㅣ 미술관 산책 시리즈
최경화 지음 / 시공아트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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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일전에 읽은 <런던 미술관 산책>이 생각 이상으로 좋아서 당연히 <스페인 미술관 산책>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페인의 미술관 중 몇 곳은 내가 버킷 리스트에 넣은 곳이기도 해 저자가 그곳의 대표작을 어떻게 소개해줄는지, 그리고 그밖에 알려지지 않은 스페인 명화나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미술관엔 어떤 작품이 있을지 궁금했다. 내가 알기론 스페인은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거의 자국 화가의 작품으로 미술관을 꾸린 것에 자부심이 있는 나라다. <런던 미술관 산책>에서 내가 모르고 지냈던 좋은 영국 화가, 영국 그림을 소개받았듯 이 책도 내가 몰랐던 신세계를 선사해주지 않을까 하며 적잖이 기대를 품었다. 

 허나 같은 시리즈에 속했을 뿐 저자도 다르고 저자의 전공도 엄밀히 말해 미술 쪽도 아니고 무엇보다 두 책의 방향성이 달라 내 기대는 상당 부분 어긋났다. 내가 이 책을 먼저 읽었다면 <런던 미술관 산책>을 그토록 기대했을까 하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책의 제목을 차라리 '마드리드 미술관 산책'으로 바꾸는 게 어떨까 싶을 정도로 마드리드에 있는 미술관에 비해 바르셀로나나 빌바오에 있는 미술관에 대한 설명은 상대적으로 부족해 내가 몰랐던 신세계에 대한 갈망은 채워지지 못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카탈루냐 미술관이나 미로 재단, 빌바오에 있는 그 유명한 구겐하임 미술관엔 어떤 대표작이 있을지 궁금했는데, 이 책을 읽고나서도 그 미술관은 그냥 미술관 자체가 더 유명하단 인상을 지우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저자의 전공이라 할 수 있는 프라도 미술관의 대표작에 대한 소개는 어땠느냐면, 말 그대로 그 미술관의 대표작과 그 그림들을 그린 화가를 소개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마찬가지로 기대가 충족되지 못했다. 프라도 미술관이 책의 초반을 장식하는데도 처음부터 흥미가 반감된 채로 읽게 된 셈이다. 계속 비교하는 게 저자한테 미안하긴 하지만 새삼 <런던 미술관 산책>이 대단히 뛰어난 미술 서적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책에선 해당 미술관의 대표작 여부를 떠나서 런던, 나아가 영국에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 위주로 소개해 굉장히 신선했고 - 누가 영국 미술관에서 'made in 영국'은 건물과 경비원밖에 없다고 했지만 그건 틀린 말이었다. - 그럼에도 대표작들을 차마 소개하지 않고는 못 지나가겠는지 뒤에 따로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들'이라고 소개하는 걸 놓치지 않아 구성적으로 매우 풍부하고 다채로웠던 기억이 난다. 

 <런던 미술관 산책>은 2010년에, 이 책 <스페인 미술관 산책>은 3년 뒤인 2013년에 출간돼 저자가 같은 시리즈의 이전 책을 참고할 만도 했는데... 이 특성이 미처 이어지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비롯해 여러 스페인의 명화는 확대도 하고 긴 시간을 들여 설명을 곁들이는 등 가독성을 높인 점과 왜 이 작품들이 명화라 칭송받는지 그 이유를 저자가 원래는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던 사람으로서 솔직하게 자기도 몰랐었는데 하고 운을 떼는 점은 사뭇 인상적이었지만 말이다. 이 책으로 스페인의 미술 세계를 처음 접할 독자에겐 좋은 입문작이자 길라잡이가 되지 않을까 싶을 만큼 진입 장벽도 굉장히 낮아서 읽는 데엔 여러모로 부담이 없었다. 이는 그만큼 깊이가 얕다는 말과도 같지만...... 생각해보니 이와 비슷한 감상을 작가의 다른 책인 <포르투갈, 시간이 머무는 곳>의 포스팅에도 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진입 장벽이 낮은 길라잡이 책을 집필하는 것에 특화된 작가인 모양이다. 


 어쩌다 보니 이 책을 실컷 까긴 했지만, 달리 보면 진입 장벽이 낮고 길라잡이가 될 만한 책을 쓰는 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재주인 만큼 분야가 다르긴 해도 작가를 지망하는 내가 함부로 씹고 뜯을 만한 작가가 아니란 생각이 갑자기 들기 시작했다. 쉽게 읽히는 문체를 얕잡아 본 적은 추호도 없지만, 그래도 이 포스팅을 마무리하려는 지금 어딘지 '주제 넘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내가 자존감이 낮은 탓이겠지? 그래서 매우 뜬금없지만 열심히 살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참,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참 많은 것 같다. 당장 이 책에 관련된 이유만으로 말할 것 같으면 프라도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나 고야의 <1808년 5월 3일>과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의 건축물들과 피카소 미술관에서 피카소의 <시녀들>을, 소로야 미술관에서 소로야의 작품들과 미로 재단에서 미로의 작품들을, 그리고 책에서 다뤄지지 않았지만 달리 미술관에서 달리의 작품들을 감상해야 하니까 말이다. 시국을 떠나서 내게 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도록 열심히, 그리고 착실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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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1 2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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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던 조선인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
김금숙 지음, 정철훈 원작 / 서해문집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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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퀴즈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내가 모르고 지내던 우리나라의 위인들의 존재를 알게 되기도 하는데 이 책을 읽을 때의 느낌이 그때와 비슷했다. 내가 진짜 식견이 좁긴 하다고, 하지만 사람들에게 그 업적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데엔 어느 정도 이유가 있다고 고개가 끄덕거려지도 했다. 이 책의 표지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던 조선인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라고 김알렉산드라라는 인물을 수식한다. 조선인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라니, 볼셰비키라는 단어 자체가 여러 이유로 일상적이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이만한 업적을 달성했음에도 김알렉산드라라는 이름이 그리 알려지지 않은 것엔 어떤 의미에선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라 볼 수 있다. 

 사회주의, 인민, 혁명, 노동운동... 사전적 의미나 최초의 의도완 다르게 점점 변질되다가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버린 단어들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말하는 돌이킬 수 없는 선이란 두 번 다시 우리 사회에서 저 단어들이 긍정적인 의미로 쓰일 일은 없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이나 노동운동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지만 사회주의나 인민은 정말 돌이킬 수 없다. 특히 인민은, 그 단어의 본뜻을 생각한다면 참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뜻을 곡해한 채 남발하는 소련, 중국, 북한은 인민이란 단어에 대한 어마어마한 실례를 저질러버렸다. 그렇게 인민을 상대로 통제하고 감시하고 학살하고 지들 입맛대로 벗겨먹을 때 명분으로 내세우라고 있는 단어가 아닌데. 


 의외로 그런 경우가 많지만 받아들인 사람들의 행동 때문에 단어가 원래 가졌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인식되는 단어로 인민을 넘어서는 게 또 있을까 싶다. 사실, 이슬람교부터 시작해 그런 단어나 개념이 몇 개 더 떠오르긴 하지만 그건 나중에 그 단어들과 관련된 포스팅에서 얘기해보기로 하겠다. 아무튼 이 책은 그래픽노블이란 장르에 걸맞게 만화다운 가독성보단 정보와 메시지 전달에 주력하는 책이다. 때문에 배경 지식이 거의 없거나 관심이 없었다면 진도가 잘 나가지 않을 텐데, 뿐만 아니라 사실상 김알렉산드라를 제외하면 우리가 정을 두거나 눈길이 자연스럽게 가는 매력적인 캐릭터도 전무해 아무리 실화 바탕이라지만 엄연히 그림이 있는 형식의 작품임에도 그냥 역사책처럼 읽게 돼 그 딱딱함은 못내 아쉽다. 

 하지만 그 점은 반대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다. 사회주의가 어찌 됐든 인류 역사에서 왜 중요하고 우리는 왜 공부해야 하는지 납득시키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가 이미 실패가 검증됐음에도 배워둬야 하는 이유를 학창 시절의 윤리 시간엔 잘 와 닿지 않았는데 역사를 가미해, 이렇게 한 인물의 생애를 쫓아가다 보니 비로소 그 필요성이 이해됐다. 그리고 표지에선 '조선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라고 보기 쉽게 수식했지만, 김알렉산드라의 이야기는 비단 조선만의 이야기가 아닌 동아시아를 넘어 극동 러시아,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이야기임을 강조하는 터라 저 수식은 약간 의미가 맞지 않는 표현이라 생각됐다. 맞는 비유인지 모르겠는데, 김알렉산드라를 '조선인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라고 하는 것은 마치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외국인 부부한테 입양된 아이가 나중에 유명 인사가 됐을 때 '자랑스런 한국인'이라고 언론에 보도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 


 김알렉산드라는 조선에서 태어났을 뿐 사실상 러시아에서만 활동했기에 본인이 조선 출신이란 것에 얼마나 의미를 부여하며 정체성을 가졌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 김알렉산드라 여성 노동자이자 운동가로서의 자부심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죽기 직전 법정에서 '여성으로서 죄를 뉘우치라'고 제안받았을 때 그건 세상의 절반인 모든 여성들을 배신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 일침을 가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니, 대체 '여성으로서' 죄를 뉘우치라는 건 또 뭔지? 발언 자체가 역겹기 그지없어 김알렉산드라가 꽤 시원하게 되받아쳤음에도 불구하고 읽는 나의 분노가 미처 다 가시지 않을 정도였다. 

 20세기 초반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모든 나라가 민족주의로 미쳐 날뛰는 한편으로 지금보다 사람들이 훨씬 글로벌하고 국경이 없다시피 지냈다고 느끼곤 했는데 이 책에서도 또 한 번 느꼈다. 특히 노동자를 부려먹고 여성이라 더 무시당하고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대우받지 못한 이에겐 동일한 욕구가 있다는 걸 통해 진정 국경따윈 무의미한 인간으로서의 동지애라는 게 있긴 하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그 덕분인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지금까진 돌이키기 힘든 흑역사의 출발점으로 인식하던 내가 처음으로 그 혁명이 정말로 시작만큼은 희망 가득한 것이었겠음을 마음 깊이 공감하게 됐다. 정작 그 뒤가 문제였지만 그만한 혁명이 일어나고도 남을 이유가 충분히 설득력 있게 다뤄져서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책 말미에 김알렉산드라의 연보도 수록됐는데 거기서 김알렉산드라가 2009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고 적혀 있다. 이 책의 내용 외의 다른 정보는 모르는 내게 있어 김알렉산드라가 건국에 이바지한 위인이라기엔 조금 결이 다른 느낌이라서 정확히 애국장이 추서된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건 다른 책을 통해 알아보기로 하고, 내가 봤을 땐 이 책에서의 김알렉산드라로 말할 것 같으면 세상에 둘도 없는 선구자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여성의 몸으로 전설적인 업적을 남기기 쉽지 않은데 100년도 더 전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아마 이 책의 내용이 실화가 아닌 픽션처럼 느껴지는 이유일 터다. 

 아무튼 그 덕분에 그래픽노블로는 가독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역사책으로 생각한다면 짧고 쉽게 넘어가고 임팩트가 상당해 알게 모르게 공부 좀 했다는 보람마저 안겨주는 책이었다. 정말이지 위에서 언급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단어들이 그 강을 건너기 전엔 좋은 의미로도 사람들 입에 쓰였겠구나 하고 몇 번을 체감했는지 모른다. 이 책의 원작이 되는 책과 그림을 담당한 김금숙 작가의 다른 책도 이와 비슷한 느낌인 것 같으니 찾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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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없는 동물원 - 수의사가 꿈꾸는 모두를 위한 공간
김정호 지음, 안지예 그림 / Mid(엠아이디)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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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몇 년 전에 어린이대공원에 간 적이 있었다. 난 어렸을 때 그 공원에 간 기억이 없어서 그 안에 동물원이 있는 줄도 몰랐고 설마 코끼리까지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동물원 특유의 동물 냄새와 미묘한 배설물의 냄새를 맡으면서 멀리 있는 코끼리를 바라보며 쟤네는 이곳이 얼마나 답답할까 싶어 괜히 왔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내 입장에서야 괜히 왔을 뿐이지만 평생 여기서 지냈고 자기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는 동물들 입장에선 이 동물원이란 공간이 대체 어떤 곳일까 생각해볼 법도 했지만, 그땐 그저 거부감만 들었다. 

 <코끼리 없는 동물원>은 동물원을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동물, 원>에 등장했었다는 청주 동물원의 수의사인 저자의 에세이집이다. 덤덤하고 따뜻한 문체로 동물과 시선을 맞추며 어떻게든 동물원을 동물들의 본성에 맞게끔 최대한 살기 좋게 만들고자 하는 이야기들이 다양하게 수록됐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동물들과 이름도 처음 듣는 동물들이 많아서 순서대로 소개되는 그들의 이야기, 동물의 본성에 대한 수의사의 전문적인 시선과 그 동물의 본성에 따라 바뀌는 동물원의 시스템도 대단히 흥미롭게 읽혔다. 아쉽게도 저자가 필력이 좋은 편이긴 하나 전문 작가까지는 아니라서 반복되는 글의 전개에 뒤로 갈수록 지루해지긴 했는데 이분의 인격이나 철학이 느껴져 뒷장을 저항감 없이 넘길 수 있었다. 이분이 출연하신다는 영화도 나중에 볼 생각이다. 영화라면 조금 더 흡입력 있게 동물 이야기가 다뤄졌을 테지. 


 2020년 초에 코로나에 대응하고자 유럽에서 시행된 극단적인 봉쇄 조치로 인해 독일의 동물원에서 동물들이, 주로 인기 없는 동물들부터 순서대로 안락사한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재정적인 이유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한 일이라지만, 관람객을 위해 경쟁력 있는 동물들을 모아 애지중지 키웠을 동물들을 너무 개죽음으로 내모는 게 아닌가 싶어 그 기사를 접하고서 인간의 이기심에 분노했던 기억이 난다. 반면 <코끼리 없는 동물원>에선 - 여담이지만 위의 동물원 논리대로라면 코끼리야말로 어느 순서에 안락사를 당할까? 돈이 많이 드니까 의외로 금방 순서가 올 것 같다는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 공간의 특성상 한도 끝도 없이 동물만을 위한 공간이 될 수 없지만, 절충과 합의를 거쳐 동물들로 하여금 심신이 괜찮은 공간으로 여겨지게끔 노력하는 저자의 이야기 내지는 철학을 접할 수 있어 진정 동물을 위한 공간이란 무엇인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이대공원에 가기 이전부터 개인적으로 동물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없앨 수 있으면 다 없애버려야 하는 곳으로 여겨왔다. 물론 동물을 연구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필요한 공간일 순 있겠지만, 이 책의 저자도 얘기했듯 동물원이란 기본적으로 인간의 욕심을 우선한 공간이기 때문에 그에 맞춰서 삶 전체가 희생당해야 하는 동물들 입장에선 감옥 그 이상의 공간이다. 감옥은 지은 죄가 있으니 못 나오는 거지만 동물들이 무슨 죄를 지어서 동물원 우리 안에 갇혀 있는 건 아니잖은가. 그런 의미에서 감옥과는 성질이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모든 변화에는 그에 적절한 속도가 있으며, 또 동물원에서 태어나 야생이 뭔지 모르고 건강의 문제로 동물원에 있을 수밖에 없는 동물들을 생각해서라도 동물원은 여러모로 당장 없애기엔 시기상조란 것을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새롭게 깨닫게 된 사실이다. 결국 동물원에서 그 누구보다 동물을 우선하며 동물의 삶의 개선에 가장 관심이 있고 심혈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바로 동물원의 직원들이라는 것을 책을 읽으며 새로이 알게 됐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동물원 직원들이 무슨 악의 축이라 다 같이 합심해서 동물원 우리를 지은 것도 아닐 텐데 우린 왜 그토록 싸잡아 동물원을 안 좋게 봤는지 모르겠다. 

 따라서 동물원 직원들의 태만을 의심하되 그들의 열정과 철학을 지지해야겠다며 책을 읽기 전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감상이 도출됐다. 난 아마도 어지간하면 동물원에 제 발로 갈 일이 앞으로도 없을 테지만 그전까진 무조건 불편하고 빨리 나가고 싶은 공간에 불과했다면 이제는 그 공간을 최대한 동물에게 편한 공간으로 꾸미고자 하는 직원들의 노력을 떠올리고 발견하려고 노력할 테니 그 공간이 마냥 불편하게 느껴지진 않을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제 발로 갈 일은 없을 것 같으나 최소한 동물원을 경시하고 봐선 안될 일임을 염두에 둬야겠다고 읊조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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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오단장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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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11년 전 내가 처음으로 접했던 요네자와 호노부의 책이다. 추리소설이라 부르기엔 좀 뭐하지만 일본에서 출간했을 당시 여러 일본 추리소설 랭킹에 이름을 남긴 저력이 있는 작품이다. 일단 내가 딱 잘라서 추리소설이라 부르지 못하겠다는 이유는 결말이 읽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리들 스토리'의 형식을 취하는 작품이기에 적어도 확실한 사건 해결이란 구성을 취하는 것이 공식인 추리소설과는 코드가 다른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저평가 받아야 된다는 건 아니지만 취향에 맞지 않는 사람에겐 약간 당혹스런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리들 스토리의 형식을 취하는 점을 제외한다면 나는 이 소설이 제법 훌륭한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두 개 이상 제시되는 사건의 진실 후보들이나 그 진실에 접근하는 근거가 생전에 용의자였던 작가가 썼던 다섯 편의 소설이란 점, 그 소설들이 읽는 이의 성향에 따라 해석이 극과 극으로 나뉠 수도 있는 점 등 자꾸 상상과 추리를 불러일으킨다는 측면에서 여지없이 몰입도 높은 추리소설이라 여겨졌다. 그렇다 보니 추리소설의 결말이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도 스스로에게 던져봤다. 추리소설의 결말이란 작가가 논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가장 결점이 없는 결말이며 그 결말을 위해 처음부터 철저히 디자인되는 것이 추리소설의 특징이다. 독자가 결말을 접했을 때 충격을 받고 일말의 의문이 남지 않도록 버릴 장면 하나 없이 빈틈없이 몰입을 유발하는 동시에 결말을 예측 불가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추리소설의 공식인데 <추상오단장>은 이런 점에서 추리소설에 훌륭히 부합하는 소설이다. 


 이 작품의 시놉시스를 처음 접했을 땐 독자로서 여러모로 몰입할 구석이 적어 보였다. 고서점에서 일을 거드는 주인공 요시미츠에게 어떤 여성으로부터 자신의 아버지가 생전에 썼던 소설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니까 단순한 일상 추리소설인 건가 예상하기 십상이다. 자극적인 사건도 없고 이야기의 분위기는 시종 우울하고 실제로 작중의 시간대가 버블 경제 직후라 등장인물들이 그 여파에 찌들었고, 그래서 아버지가 쓴 소설 한 편을 찾으면 10만 엔 - 지금 환율로 약 100만 원이지만, 90년대 초니까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 이란 수상하지만 매력적인 보수의 의뢰를 요시미츠가 받아들이는 당위성이 성립하게 된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추리소설에서 사건을 해결하려는 동기에 돈이 많이 개입한 것만큼 몰입이 잘 안 되는 경우도 없는데, 신기하게도 이 작품에선 그런 반감이 덜했다. 

 요시미츠는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일일 줄 알았던 소설 찾기는 여러 지인을 통해 의외로 수월하게 찾아내는데 그 소설들의 내용이 하나같이 기이하다. 요시미츠 입장에선 소설만 찾고 돈만 받으면 그만이지만 소설 분량이 짧기도 하고 나름대로 발품을 팔아 구한 만큼 읽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10만 엔이란 값어치가 있는 소설인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을 테고... 아무튼 그렇게 읽은 소설들의 내용은 외국을 여행 중인 화자가 남편과 아내와 딸로 구성된 어떤 가족에게 벌어지는 모종의 비극적인 사건을 목도하는 공통된 전개를 펼치고 있었다. 두 번째로 찾은 소설도 그렇고 그 이후에 찾은 소설들도 화자가 방문한 외국이 어디냐만 다르지 실질적으로 원인이 어떻든 이 가족에게 비극이 닥친다. 특이한 점은 비극이 벌어지기 일보직전에 그 여부를 알 수 있는 문장을 적지 않고 끝내는 리들 스토리란 점인데, 그 점에서 모두 같은 작가의 작품임을 - 다른 필명으로 발표된 작품도 있었다. - 알 수 있었다. 


 의도치 않게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뢰인의 아버지가 남긴 소설을 전부 읽은 독자가 된 요시미츠에게 의뢰인은 아버지가 남겼던 소설들의 결말을 알려준다. 생전에 아버지가 소설의 결말만 따로 적어놓았다고 하는데 그 결말들이 특별한 반전도 없고 오히려 없는 게 더 나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냥저냥한 내용인 지라 되려 요시미츠로선 의문이 남지 않을 수 없다. 애당초 왜 전부 리들 스토리로 집필했으며 따로 결말을 적어둔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진실이야 아무래도 좋을 미스터리와 남은 소설들의 행방을 쫓느라 요시미츠는 잠시나마 삶의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이 소설을 남긴 의뢰인 아버지의 생애와 그가 실제로 살인사건의 용의자이기도 했단 점을 알게 되면서부터 소설들이 달리 보이게 됐고 몇몇 우연한 기회와 발상의 전환을 통해 숨겨진 다른 하나의 진실의 가능성과 마주하기에 이른다. 

 단기간에 리들 스토리 여러 편을 접하다 보니 소설의 결말을 독자의 해석의 몫으로 남기는 게 참 까다로운 일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 <추상오단장>은 리들 스토리 특유의 '독자의 해석의 몫으로 남기는 결말의 필요성'에 작가 나름대로 당위성을 부여해본 작품이며 이를 통해 결국 소설에서 결말의 여부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있음을 역설해냈다. 소설 내적으로는 읽는 이의 믿음이 진짜 진실따위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 적어도 그 소설들을 쓴 저자 입장에서 말이다. - 보여준 점, 소설 외적으로는 결국엔 다섯 편의 작중 소설말고도 <추상오단장>이란 소설 자체도 리들 스토리였으나 단순히 설정과 결말 처리방식 말고도 몰입감을 자아내는 분위기나 캐릭터들의 진중함 등 자잘자잘한 요소들이 섞여 낯선 소재임에도 충분히 만족하고 덮을 수 있음을 경험케 한 것이 그 근거다. 사실 아마도 진실일지도 모르는 미제 사건의 내막은 10년이 흘러 다시 읽은 지금도 납득이 안 가고 전반적으로 읽는 내내 우울한 작품이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독특한 지점들 덕분에 꼭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소설의 인상이 전부 달라지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모름지기 소설이란 결말이 가장 중요하고 특히 추리소설이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한데, 그 탓에 심할 때는 반전이나 결말 외엔 크게 남는 게 없는 작품도 있어 만족도가 없다시피 한 경우가 허다했다. 요즘들어 소설일수록 공감의 여지가 많은 인물이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법이고 이 세상 거의 모든 독자가 삶의 결말을 맞이하기 훨씬 전이란 것을 - 직전이라 하더라도 절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 생각했을 때 완벽하고 확실한 결말이 때론 몰입도를 떨어뜨리기도 한다고 여겨왔는데, 그런 와중에 오랜만에 다시 읽게 된 <추상오단장>의 내용은 아주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트릭이긴 했지만 그냥저냥한 작중 소설들의 결말을 통해 마무리 못지않게 과정 역시 중요함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과정이 중요하단 말은 성과 중심의 세상에서 참으로 간과되기 쉬운 말인데, 새로운 다짐을 하기에 매우 적절한 연초에 의외의 깨달음을 주는 이 작품을 접하니 그 깨달음이 더욱 깊이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통상적인 추리소설의 공식을 따르지 않지만 소재, 분위기, 몰입도 등이 화려하진 않아도 독보적인 구석이 있는 터라 왜 내가 10년 전에 읽었을 때 다시 읽자고 생각했었는지, 왜 요네자와 호노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자고 생각했었는지 떠올랐다. 작가의 대표작이자 최대 흥행작으로 주로 '고전부' 시리즈, <인사이트 밀>, <부러진 용골>, <야경> 등이 꼽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 작품들을 밀어내고 이 작품을 대표작으로 꼽고 싶다. '청춘'을 독창적인 시각에서 다루는 작가의 개성의 정수를 경험해볼 수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고전부' 시리즈나 '소시민' 시리즈도 청춘을 제법 잘 묘사했지만 <추상오단장>의 성숙함에 못 미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자 후기에서 나온 '청춘이 끝나가는 지점'에 슬슬 내 나이대가 걸쳐져 있기 때문일까. 설명이 되지 않지만 주인공의 심정에 공감이 가서 더욱 정이 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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