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오단장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9.7 






 11년 전 내가 처음으로 접했던 요네자와 호노부의 책이다. 추리소설이라 부르기엔 좀 뭐하지만 일본에서 출간했을 당시 여러 일본 추리소설 랭킹에 이름을 남긴 저력이 있는 작품이다. 일단 내가 딱 잘라서 추리소설이라 부르지 못하겠다는 이유는 결말이 읽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리들 스토리'의 형식을 취하는 작품이기에 적어도 확실한 사건 해결이란 구성을 취하는 것이 공식인 추리소설과는 코드가 다른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저평가 받아야 된다는 건 아니지만 취향에 맞지 않는 사람에겐 약간 당혹스런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리들 스토리의 형식을 취하는 점을 제외한다면 나는 이 소설이 제법 훌륭한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두 개 이상 제시되는 사건의 진실 후보들이나 그 진실에 접근하는 근거가 생전에 용의자였던 작가가 썼던 다섯 편의 소설이란 점, 그 소설들이 읽는 이의 성향에 따라 해석이 극과 극으로 나뉠 수도 있는 점 등 자꾸 상상과 추리를 불러일으킨다는 측면에서 여지없이 몰입도 높은 추리소설이라 여겨졌다. 그렇다 보니 추리소설의 결말이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도 스스로에게 던져봤다. 추리소설의 결말이란 작가가 논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가장 결점이 없는 결말이며 그 결말을 위해 처음부터 철저히 디자인되는 것이 추리소설의 특징이다. 독자가 결말을 접했을 때 충격을 받고 일말의 의문이 남지 않도록 버릴 장면 하나 없이 빈틈없이 몰입을 유발하는 동시에 결말을 예측 불가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추리소설의 공식인데 <추상오단장>은 이런 점에서 추리소설에 훌륭히 부합하는 소설이다. 


 이 작품의 시놉시스를 처음 접했을 땐 독자로서 여러모로 몰입할 구석이 적어 보였다. 고서점에서 일을 거드는 주인공 요시미츠에게 어떤 여성으로부터 자신의 아버지가 생전에 썼던 소설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니까 단순한 일상 추리소설인 건가 예상하기 십상이다. 자극적인 사건도 없고 이야기의 분위기는 시종 우울하고 실제로 작중의 시간대가 버블 경제 직후라 등장인물들이 그 여파에 찌들었고, 그래서 아버지가 쓴 소설 한 편을 찾으면 10만 엔 - 지금 환율로 약 100만 원이지만, 90년대 초니까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 이란 수상하지만 매력적인 보수의 의뢰를 요시미츠가 받아들이는 당위성이 성립하게 된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추리소설에서 사건을 해결하려는 동기에 돈이 많이 개입한 것만큼 몰입이 잘 안 되는 경우도 없는데, 신기하게도 이 작품에선 그런 반감이 덜했다. 

 요시미츠는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일일 줄 알았던 소설 찾기는 여러 지인을 통해 의외로 수월하게 찾아내는데 그 소설들의 내용이 하나같이 기이하다. 요시미츠 입장에선 소설만 찾고 돈만 받으면 그만이지만 소설 분량이 짧기도 하고 나름대로 발품을 팔아 구한 만큼 읽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10만 엔이란 값어치가 있는 소설인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을 테고... 아무튼 그렇게 읽은 소설들의 내용은 외국을 여행 중인 화자가 남편과 아내와 딸로 구성된 어떤 가족에게 벌어지는 모종의 비극적인 사건을 목도하는 공통된 전개를 펼치고 있었다. 두 번째로 찾은 소설도 그렇고 그 이후에 찾은 소설들도 화자가 방문한 외국이 어디냐만 다르지 실질적으로 원인이 어떻든 이 가족에게 비극이 닥친다. 특이한 점은 비극이 벌어지기 일보직전에 그 여부를 알 수 있는 문장을 적지 않고 끝내는 리들 스토리란 점인데, 그 점에서 모두 같은 작가의 작품임을 - 다른 필명으로 발표된 작품도 있었다. - 알 수 있었다. 


 의도치 않게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뢰인의 아버지가 남긴 소설을 전부 읽은 독자가 된 요시미츠에게 의뢰인은 아버지가 남겼던 소설들의 결말을 알려준다. 생전에 아버지가 소설의 결말만 따로 적어놓았다고 하는데 그 결말들이 특별한 반전도 없고 오히려 없는 게 더 나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냥저냥한 내용인 지라 되려 요시미츠로선 의문이 남지 않을 수 없다. 애당초 왜 전부 리들 스토리로 집필했으며 따로 결말을 적어둔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진실이야 아무래도 좋을 미스터리와 남은 소설들의 행방을 쫓느라 요시미츠는 잠시나마 삶의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이 소설을 남긴 의뢰인 아버지의 생애와 그가 실제로 살인사건의 용의자이기도 했단 점을 알게 되면서부터 소설들이 달리 보이게 됐고 몇몇 우연한 기회와 발상의 전환을 통해 숨겨진 다른 하나의 진실의 가능성과 마주하기에 이른다. 

 단기간에 리들 스토리 여러 편을 접하다 보니 소설의 결말을 독자의 해석의 몫으로 남기는 게 참 까다로운 일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 <추상오단장>은 리들 스토리 특유의 '독자의 해석의 몫으로 남기는 결말의 필요성'에 작가 나름대로 당위성을 부여해본 작품이며 이를 통해 결국 소설에서 결말의 여부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있음을 역설해냈다. 소설 내적으로는 읽는 이의 믿음이 진짜 진실따위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 적어도 그 소설들을 쓴 저자 입장에서 말이다. - 보여준 점, 소설 외적으로는 결국엔 다섯 편의 작중 소설말고도 <추상오단장>이란 소설 자체도 리들 스토리였으나 단순히 설정과 결말 처리방식 말고도 몰입감을 자아내는 분위기나 캐릭터들의 진중함 등 자잘자잘한 요소들이 섞여 낯선 소재임에도 충분히 만족하고 덮을 수 있음을 경험케 한 것이 그 근거다. 사실 아마도 진실일지도 모르는 미제 사건의 내막은 10년이 흘러 다시 읽은 지금도 납득이 안 가고 전반적으로 읽는 내내 우울한 작품이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독특한 지점들 덕분에 꼭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소설의 인상이 전부 달라지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모름지기 소설이란 결말이 가장 중요하고 특히 추리소설이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한데, 그 탓에 심할 때는 반전이나 결말 외엔 크게 남는 게 없는 작품도 있어 만족도가 없다시피 한 경우가 허다했다. 요즘들어 소설일수록 공감의 여지가 많은 인물이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법이고 이 세상 거의 모든 독자가 삶의 결말을 맞이하기 훨씬 전이란 것을 - 직전이라 하더라도 절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 생각했을 때 완벽하고 확실한 결말이 때론 몰입도를 떨어뜨리기도 한다고 여겨왔는데, 그런 와중에 오랜만에 다시 읽게 된 <추상오단장>의 내용은 아주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트릭이긴 했지만 그냥저냥한 작중 소설들의 결말을 통해 마무리 못지않게 과정 역시 중요함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과정이 중요하단 말은 성과 중심의 세상에서 참으로 간과되기 쉬운 말인데, 새로운 다짐을 하기에 매우 적절한 연초에 의외의 깨달음을 주는 이 작품을 접하니 그 깨달음이 더욱 깊이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통상적인 추리소설의 공식을 따르지 않지만 소재, 분위기, 몰입도 등이 화려하진 않아도 독보적인 구석이 있는 터라 왜 내가 10년 전에 읽었을 때 다시 읽자고 생각했었는지, 왜 요네자와 호노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자고 생각했었는지 떠올랐다. 작가의 대표작이자 최대 흥행작으로 주로 '고전부' 시리즈, <인사이트 밀>, <부러진 용골>, <야경> 등이 꼽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 작품들을 밀어내고 이 작품을 대표작으로 꼽고 싶다. '청춘'을 독창적인 시각에서 다루는 작가의 개성의 정수를 경험해볼 수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고전부' 시리즈나 '소시민' 시리즈도 청춘을 제법 잘 묘사했지만 <추상오단장>의 성숙함에 못 미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자 후기에서 나온 '청춘이 끝나가는 지점'에 슬슬 내 나이대가 걸쳐져 있기 때문일까. 설명이 되지 않지만 주인공의 심정에 공감이 가서 더욱 정이 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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