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던 조선인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
김금숙 지음, 정철훈 원작 / 서해문집 / 2020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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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퀴즈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내가 모르고 지내던 우리나라의 위인들의 존재를 알게 되기도 하는데 이 책을 읽을 때의 느낌이 그때와 비슷했다. 내가 진짜 식견이 좁긴 하다고, 하지만 사람들에게 그 업적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데엔 어느 정도 이유가 있다고 고개가 끄덕거려지도 했다. 이 책의 표지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던 조선인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라고 김알렉산드라라는 인물을 수식한다. 조선인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라니, 볼셰비키라는 단어 자체가 여러 이유로 일상적이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이만한 업적을 달성했음에도 김알렉산드라라는 이름이 그리 알려지지 않은 것엔 어떤 의미에선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라 볼 수 있다. 

 사회주의, 인민, 혁명, 노동운동... 사전적 의미나 최초의 의도완 다르게 점점 변질되다가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버린 단어들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말하는 돌이킬 수 없는 선이란 두 번 다시 우리 사회에서 저 단어들이 긍정적인 의미로 쓰일 일은 없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이나 노동운동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지만 사회주의나 인민은 정말 돌이킬 수 없다. 특히 인민은, 그 단어의 본뜻을 생각한다면 참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뜻을 곡해한 채 남발하는 소련, 중국, 북한은 인민이란 단어에 대한 어마어마한 실례를 저질러버렸다. 그렇게 인민을 상대로 통제하고 감시하고 학살하고 지들 입맛대로 벗겨먹을 때 명분으로 내세우라고 있는 단어가 아닌데. 


 의외로 그런 경우가 많지만 받아들인 사람들의 행동 때문에 단어가 원래 가졌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인식되는 단어로 인민을 넘어서는 게 또 있을까 싶다. 사실, 이슬람교부터 시작해 그런 단어나 개념이 몇 개 더 떠오르긴 하지만 그건 나중에 그 단어들과 관련된 포스팅에서 얘기해보기로 하겠다. 아무튼 이 책은 그래픽노블이란 장르에 걸맞게 만화다운 가독성보단 정보와 메시지 전달에 주력하는 책이다. 때문에 배경 지식이 거의 없거나 관심이 없었다면 진도가 잘 나가지 않을 텐데, 뿐만 아니라 사실상 김알렉산드라를 제외하면 우리가 정을 두거나 눈길이 자연스럽게 가는 매력적인 캐릭터도 전무해 아무리 실화 바탕이라지만 엄연히 그림이 있는 형식의 작품임에도 그냥 역사책처럼 읽게 돼 그 딱딱함은 못내 아쉽다. 

 하지만 그 점은 반대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다. 사회주의가 어찌 됐든 인류 역사에서 왜 중요하고 우리는 왜 공부해야 하는지 납득시키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가 이미 실패가 검증됐음에도 배워둬야 하는 이유를 학창 시절의 윤리 시간엔 잘 와 닿지 않았는데 역사를 가미해, 이렇게 한 인물의 생애를 쫓아가다 보니 비로소 그 필요성이 이해됐다. 그리고 표지에선 '조선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라고 보기 쉽게 수식했지만, 김알렉산드라의 이야기는 비단 조선만의 이야기가 아닌 동아시아를 넘어 극동 러시아,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이야기임을 강조하는 터라 저 수식은 약간 의미가 맞지 않는 표현이라 생각됐다. 맞는 비유인지 모르겠는데, 김알렉산드라를 '조선인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라고 하는 것은 마치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외국인 부부한테 입양된 아이가 나중에 유명 인사가 됐을 때 '자랑스런 한국인'이라고 언론에 보도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 


 김알렉산드라는 조선에서 태어났을 뿐 사실상 러시아에서만 활동했기에 본인이 조선 출신이란 것에 얼마나 의미를 부여하며 정체성을 가졌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 김알렉산드라 여성 노동자이자 운동가로서의 자부심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죽기 직전 법정에서 '여성으로서 죄를 뉘우치라'고 제안받았을 때 그건 세상의 절반인 모든 여성들을 배신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 일침을 가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니, 대체 '여성으로서' 죄를 뉘우치라는 건 또 뭔지? 발언 자체가 역겹기 그지없어 김알렉산드라가 꽤 시원하게 되받아쳤음에도 불구하고 읽는 나의 분노가 미처 다 가시지 않을 정도였다. 

 20세기 초반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모든 나라가 민족주의로 미쳐 날뛰는 한편으로 지금보다 사람들이 훨씬 글로벌하고 국경이 없다시피 지냈다고 느끼곤 했는데 이 책에서도 또 한 번 느꼈다. 특히 노동자를 부려먹고 여성이라 더 무시당하고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대우받지 못한 이에겐 동일한 욕구가 있다는 걸 통해 진정 국경따윈 무의미한 인간으로서의 동지애라는 게 있긴 하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그 덕분인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지금까진 돌이키기 힘든 흑역사의 출발점으로 인식하던 내가 처음으로 그 혁명이 정말로 시작만큼은 희망 가득한 것이었겠음을 마음 깊이 공감하게 됐다. 정작 그 뒤가 문제였지만 그만한 혁명이 일어나고도 남을 이유가 충분히 설득력 있게 다뤄져서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책 말미에 김알렉산드라의 연보도 수록됐는데 거기서 김알렉산드라가 2009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고 적혀 있다. 이 책의 내용 외의 다른 정보는 모르는 내게 있어 김알렉산드라가 건국에 이바지한 위인이라기엔 조금 결이 다른 느낌이라서 정확히 애국장이 추서된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건 다른 책을 통해 알아보기로 하고, 내가 봤을 땐 이 책에서의 김알렉산드라로 말할 것 같으면 세상에 둘도 없는 선구자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여성의 몸으로 전설적인 업적을 남기기 쉽지 않은데 100년도 더 전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아마 이 책의 내용이 실화가 아닌 픽션처럼 느껴지는 이유일 터다. 

 아무튼 그 덕분에 그래픽노블로는 가독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역사책으로 생각한다면 짧고 쉽게 넘어가고 임팩트가 상당해 알게 모르게 공부 좀 했다는 보람마저 안겨주는 책이었다. 정말이지 위에서 언급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단어들이 그 강을 건너기 전엔 좋은 의미로도 사람들 입에 쓰였겠구나 하고 몇 번을 체감했는지 모른다. 이 책의 원작이 되는 책과 그림을 담당한 김금숙 작가의 다른 책도 이와 비슷한 느낌인 것 같으니 찾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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