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되기 5분 전 ㅣ 마음이 자라는 나무 20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양억관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8.9







 원래 이 작품을 시게마츠 기요시의 최고의 작품이라 생각했는데, <십자가>를 읽고 나니 상대적으로 깊이에 있어서 이 작품이 떨어진다고 느꼈다. 10년 전에 느낀 감동이 예전만 같지 않았고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 비해서도 거의 비슷하거나 약간 미흡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작품을 처음 읽을 당시인 고등학생 때는 등장인물들과 같은 연령대라 내 얘기 같이 읽혔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그 시절이 가물가물해 상대적으로 몰입이 덜 된 감도 있는 것 같다.

 금방 언급했다시피 이 작품은 <유어 프렌즈>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됐다. 영화는 9편의 연작으로 이뤄진 원작에서 5~6편 정도로 축약해서 스크린에 옮겨놨는데 그때 보면서도 느낀 거지만 참 적절한 각색이 아닐 수 없었다. 학교 안 다양한 인간 관계를 섬세한 관찰력으로 들여다보는 작품의 특성상 등장하는 캐릭터가 많은데 영화에선 분량상 너무 자잘하다 싶은 캐릭터는 아예 등장을 시키지 않고 주목할 캐릭터의 경우엔 확실히 주목해주니까 훨씬 집중력 있는 전개가 이뤄졌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에선 캐릭터에 따라 굉장히 섬세한 감정선이 묘사되기도 하는데 영화에선 그 묘미를 살리기 힘든 걸 생각하면 더욱 적절한 선택과 집중이었다.


 이 작품의 원제는 '너의 친구'다. 영화 제목 '유어 프렌즈'는 원제의 영어 버전이다. 밋밋한 제목이라 생각되겠지만 다 읽고 보면 이 제목이 훨씬 느낌이 사는 것 같다. 이 작품은 드물게 2인칭 관찰자 시점의 소설인데 형식상의 2인칭이 아닌 엄연히 실체가 있는 인물이 여러 명의 '너'를 들여다보는 터라 다 읽은 뒤엔 화자의 따뜻한 감성이 물씬 느껴졌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에 출간되면서 바뀐 <친구가 되기 5분 전>이란 제목은 개성적이긴 하지만 묘하게 내용과는 따로 노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 '친구가 되기 5분 전'이란 표현이 작중에서 언급되긴 하지만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제목이라 보기엔 약간 애매하다. 누가 보면 그 둘이 친구인가 싶을 정도로 미묘한 우정에 대해서 다루긴 하지만 한편으로 '친구인 듯 친구 아닌 친구 같은' 표현이 절로 나올 만큼 위태로운 관계가 또 우정이라 시사하기도 해 단순히 친구 관계 형성 이전을 가리키는 국내 제목이 잘 와 닿지 않았다. 그러자니 원제를 그대로 쓰자니 너무 밋밋하고... 제목을 짓는 건 늘 어려운 문제 같다.

 개인적으로 작가가 학창 시절을 다시 보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학교 생활에 대한 묘사가 사실감 넘쳤다. 어찌나 사실감 넘치는지 비슷한 연령대가 아니면 자칫 유치하다 느낄 정도였다. 그 정도로 상처 받기 쉬운 감수성의 소유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독자에 따라선 자기 학창 시절이 연상된다거나, 혹은 지금 현재의 사회 생활과 겹쳐 보이는 경우도 있을 테니 공감대 형성에 있어서 압도적인 힘을 가진 작품이라 생각한다. 내 경우엔 무리 생활에 쉽게 적응을 못하는 편이라 비슷한 처지의 캐릭터에 감정 이입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겠는데, 이 작품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와 비슷한 점이 없는 다른 처지의 등장인물에게도 감정 이입하게 만들어 놀라움을 선사했다.


 학교 안 같은 학급에서도 개개인의 기질이나 성향에 따라 파벌이 생기고 왕따가 있고 독자적인 무리도 존재하는데 이 작품은 학교 스타에서 불량 학생까지 각기 다른 위치와 시선을 가진 학생들이 저마다의 심각한 고민거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전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건 작가가 모든 캐릭터에 똑같은 애정과 관심을 두고 이야기를 썼겠구나 싶을 정도로 묘사의 퀄리티에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주역은 이야기의 주역대로, 조연에게는 또 조연대로 분량과 비중을 다르게 부여하는 게 아니라 모두 똑같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집필했다는 게 느껴졌는데 그렇다 보니 독자인 나 역시 캐릭터마다 감정 이입을 선별적으로 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캐릭터마다 감정 이입이 되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작품의 메시지를 이해함에 있어 문제가 없는 걸 보면서 시게마츠 기요시의 필력이 보통이 아닌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엔 이 작품을 진정한 우정에 관한 이야기로만 여겼는데 다시 읽은 지금은 저마다의 가치관에 따라 인간 관계도 다르고 친구 관계도 다르게 정의될 수 있다고 얘기하는 작품으로 인상이 변했다. 우정엔 정답이 있지 않고 모든 형태의 우정이 다 소중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 가지 유형의 우정만 시사하는 작품의 제목이 역시 아쉽게 느껴진다. 아무튼 다시 읽으니 이래저래 인상이 확 바뀐 작품이라 할 수 있겠는데 작품도 작품이지만 <십자가> 때 못지않게 시게마츠 기요시에 대한 인상도 많이 달라져 이후에 읽을 작가의 작품을 이전과는 다른 기분으로 읽게 될 것 같다. 학교가 배경이라고 해서 이 작가의 작품을 단순히 청소년 소설로만 여기긴 힘들게 됐다.

내 곁을 떠나도 평생 기억되는 친구 한 명이면 충분해. - 2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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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따뷔랭 - 작은책
장자끄 상뻬 지음,최영선 옮김 / 열린책들 / 199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9.6







 기억하기론 <꼬마 니꼴라> 다음에 접했던 장 자끄 상뻬의 작품이다. 아마 교과서에 실려서 접하지 않았나 싶은데 이렇게 시간이 흘러 이야기의 전문을 읽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교과서에는 분량상 하이라이트 부분만 실렸었는데, 그 부분만 따로 놓고 읽어도 괜찮았지만 역시 기승전결을 모두 접하니 이야기가 풍성하게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자전거 위에서 균형을 못 잡던 라울 따뷔랭은 아이러니하게도 동네 최고의 자전거 수리 기사가 됐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자전거를 못 탄다는 비밀은 견고해진다. 그런 비밀을 갖고 있던 라울이 어느날 한 사진사의 '자전거 타는 모습을 찍고 싶다'는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일생일대의 사진을 찍는다는 게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다. 100쪽이 채 안 되는 이 소설은 삽화를 제외한다면 실제 분량은 30쪽도 겨우 채우는 단편일 텐데 교과서에는 거기서 더 축약한 내용을 실었던 것이다. 그런 것치고 핵심은 잘 담아냈지만 그래도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에 대한 남모를 고충이란 주제의식은 사진 에피소드만으론 부족했다고 본다.


 나도 라울처럼 자전거를 못 타는 사람이지만 그걸 유달리 비밀이라거나 치부라 여기진 않는다. 내가 자전거를 못 탄다고 말해도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사람도 있는 법이지.' 라고 이해하는 편이다. 그런데 라울이나 사진 기사 피구뉴가 남들에게 쉽사리 비밀을 털어놓기 힘든 이유는 그들의 직업과 너무 어울리지도 않을 뿐더러 그들의 경력에 치명적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전거를 못 타는 자전거 수리 기사, 결정적인 순간은 포착하지 못하는 사진사라고 남한테 밝혀봤자 재미없는 농담, 심하면 사기꾼으로 취급될지 모를 일이다. 실제로 피구뉴가 자기 비밀을 고백하자 라울은 '박제 동물이나 찍어야 될 사기꾼 때문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며 성을 내지 않던가. 라울이 자기와 썸을 타던 여자에게 비밀을 고백하자 자길 놀린다며 외면을 당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있어 비밀은 너무나도 치명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라울이나 피구뉴의 명성이 과연 그들이 비밀을 잘 숨겼기에 쌓을 수 있던 것일까? 이 부분에서 장 자끄 상뻬의 스토리 텔링이 그의 간결하고 예술적인 화풍만큼이나 빛을 발휘한다. 라울의 비밀의 무게며 아이러니한 처지 같은 것들을 알기 쉽고 공감이 가게 묘사함과 동시에 그의 비밀이 계속 비밀로 남을 수밖에 없던 이유는 단지 라울이 남모를 자격지심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이 소설은 질문하고 있다. 자전거를 못 타는 이유를 분석하다가 최고의 자전거 수리 기술을 체득한 라울은 '자전거 수리 기사니까 당연히 자전거를 탈 줄 알 것'이라고 주변 사람들이 믿어의심치 않는 모습을 차마 뒤집을 수가 없어 점점 속이 타들어간다. 비밀의 내용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은 그 자체로 병이 된다.


 그래서 막판에 피구뉴에게라도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한 라울의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다. 라울로선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지만 의외로 충동적이고 쉽게 결정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그가 자전거를 못 타더라도 그의 수리 기술이 어디 가버리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사실 비밀의 내용 자체는 대수로운 일도 아니니까. 결국 주변 사람들의 편견이 굳건하다는 건 핑계고, 비밀의 무게를 무겁게 했던 건 비밀을 간직한 당사자의 몫이 가장 크다는 걸 소설은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피구뉴는 아무래도 전문 사진사인 만큼 그의 비밀은 라울보다 치명적일 수 있으나 결국 그도 라울에겐 용기를 내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는가. 그럼 라울이라고 하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소설은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고 있다.

 <라울 따뷔랭>은 단순히 자전거를 탈 수 있느냐 아니냐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자기 비밀을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관해 질문하는 작품이었다. 혹시 장 자끄 상뻬를 삽화가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꼭 추천하고 싶은 작품인데, 다소 난해하고 지루했던 <뉴욕 스케치>에 비해 너무나 매력적으로 읽혀서 이 작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길 권한다. 어떻게 보면 <꼬마 니꼴라>를 넘어선 대표작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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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젠더 수업 ㅣ 창비청소년문고 27
김고연주 지음 / 창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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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쓴 책이긴 한데 다루는 내용만 보면 어른 독자도 좀 읽어야 할 내용이었다. 작가는 의식적으로 '요새와는 달리 과거엔 이랬었죠' 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실제로 우리의 젠더 인식이라든가 성평등 의식은 그렇게 진일보한 건 아니라서 작가가 고도의 돌려까기를 하는 느낌을 받았다. 단호하게 비판 일색이었으면 옳은 말을 해도 반감이 생기는 법인데 차근차근 은근하게 돌려서 말하니까 오히려 효과적으로 메시지가 와 닿았던 것 같다. 우리는 이미 진보했어야 했는데 왜 그러질 못하는가? 그렇게 스스로를 돌아보기에 적절한 책이었다.

 혹시 젠더 수업이라고 제목이 지어져서 오해할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 단순히 성소수자에 대한 얘기만 하는 책은 아니다. 요새는 좀 덜할 것 같은데 당장 내가 청소년일 때만 해도 섹스sex 젠더gender의 차이를 바로 설명하지 못했었다. 전자는 생물학적 성, 후자는 사회학적 성이란 걸 명확하게 구분시켜주는 방송이나 책을 일찍이 접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만약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나한테 이 책을 추천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물론 10여년 전만 해도 이 책과 비슷한 목적의 책이 많았을 테고 단지 내가 견문이 좁아 알지 못했을 뿐이겠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같은 내용이라도 미래의 책이 조금이라도 더 최신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더 유익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당장 이 책의 첫 장에서부터 시대에 따라 기준이 판이해지는 가치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만큼 가급적 더 최신의 이야기를 접하는 게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적어도 2년 전엔 읽었어야 하지 않나 싶다. 물론 책의 내용 중에서 유달리 지금 기준에서 뒤떨어졌다거나 하는 내용은 - 지금 시점보다 진보하면 진보했지... - 없었다. 내가 이런 책에 관심이 어느 정도 있는 편이라 아예 새로 배웠다는 느낌을 준 내용은 없었지만 각 이슈에 따라 알기 쉽게 잘 설명하고 있어서 내가 이런 책을 조금이라도 일찍 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읽기엔 늦은 감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워낙에 작가가 내용을 잘 정리하고 있기도 하고, 사실 젠더 수업은 가급적 정기적으로 받아야 하는 거라 생각해서 자못 유익하게 읽혔다.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이 책은 사회적 성역할에 대한 고정 관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작가는 성별에 따라 어울리는 복장의 차이부터 시작해서 이성에 대한 인식, 연애관, 모성, 외모지상주의, 가부장제, 혐오주의 등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풍부하고 적절한 예시와 자료를 근거로 들며 설명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기억나는 내용 중에 호주제 폐지가 있는데, 어렸을 때 호주제가 폐지되는 것의 의의가 무엇인지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 책을 통해 새삼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작가의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부모 양쪽의 성을 쓰고 있다. 이전엔 이런 식으로 개명을 하는 게 너무 보여주기식 페미니즘이라 생각했는데, 책을 읽다보니 아버지의 성만 이어나가는 게 당연해진 사회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무서울 정도로 이상한 게 아닌가 싶었다. 부모 양쪽의 성을 쓰는 사람을 더 이상 아니꼽게 바라봐선 안 되겠다고 처음으로 실감했다. 많이 늦은 감이 있는데 지금이라도 생각이 바꿀 수 있게 도와준 작가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약간 빚을 진 느낌이기도 했다.

 작년에 읽은 <설거지 누가 할래> 라는 책에서 일본인 저자가 결혼할 때 성을 남편 성으로 바꾸는 과정에 대해 쓰는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그때도 느꼈지만 남성중심적인 사고, 가부장적 사고는 교묘하고도 짙게 남아있는 것 같다. 저자는 이처럼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가치관들에 대해 '과연 그럴까?' 하며 질문한다. 그야말로 페미니즘의 미학일 질문하기를 온전히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하면 그저 반감부터 갖는 사람이 있을 텐데, 페미니즘에서 재기하는 모든 질문의 내용이 모두 옳아 마땅하느냐 하면 꼭 그렇진 않으니 그 반감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질문하는 과정에서 한 번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을 생각하면 페미니즘이 결코 무의미하진 않은 것 같다.


 질문하는 것의 미학에 대해 쉽고 날카롭게 어필하는 점에서 이 책도 정말 유익하기 이를 데 없는 책이었다. 나같은 성인이 아닌 정말로 이 책의 예상 독자인 어린 독자들이 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한다. 책의 내용이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해보기에 매우 적합하기 때문이다. 요즘 학교에서 도서관이나 독서 교육이 얼마나 탄력적으로 운영되는지 모르지만 이 책이 학교 교재로라도 자주 다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과한 바람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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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선희 옮김 / 예담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9.0







 이지메, 학교 폭력에 천착하기로는 일가견이 있는 작가 시게마츠 기요시는 한때 내가 가장 신뢰하던 작가 중 한 명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작품마다 하는 얘기가 은근히 비슷하다고 느끼면서 신작을 잘 안 찾아보게 됐는데, 그래도 이 책의 '고단샤 100주년 기념 걸작'이자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은 예사롭지 않아 집어들게 됐다. 다 읽고 나서 이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가 은근히 비슷하다고 느꼈던 나 자신에 대해 반성을 하게 됐다. 같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깊이가 이렇게 다르다는 것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평생에 걸쳐 진지하게 자신이 천착한 바를 풀어내는 작가도 없어서 감히 비교를 불허할 정도였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어제오늘 사이에 불거진 일이 아니다. 안타깝지만 왕따 피해자가 자살하는 일도 작금의 세계에선 대수로운 일이라고 볼 수 없다. 아마 우리는 이런 사건사고에 대해 무뎌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 가령, 유서가 어지간히 충격적이지 않은 이상 쉽게 이슈화되기 쉽지 않은 세상이라 봐도 무방하겠다. 만약 이 작품에서 후지슌이 유서로 자신을 괴롭힌 동급생 두 명만이 아니라 생전에 좋아했던 여학생, 그리고 자신의 절친이 되어주어서 고맙다고 주인공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죽음이 그토록 이슈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유가족은 언제까지고 그 슬픔과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 없겠지만 후지슌과 무관하거나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방관했던 학생들은 그 죽음의 무게를 실감할 수 없었을 테고, 이는 주인공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절친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던 사람이 유서에다 자기 이름을 적었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십자가>는 주인공 사나다 유가 동급생 후지슌의 죽음 이후로 20년간 느껴왔던 심상을 적어낸 작품이다. 주인공은 다소 억울하긴 하지만 세상의 시선, 특히 후지슌 유가족의 시선과 마음을 배반할 생각을 못하고 얼떨결에 후지슌의 절친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후지슌의 장례식, 1주기, 가족 모임에도 주인공은 불편한 상황임에도 꼬박꼬박 유가족을 찾아간다. '절친이 자살을 할 때까지 넌 뭘 했는가?' 라며 후지슌 사건을 담당하는 경찰, 기차에게 불합리하다 싶은 취급을 받지만 주인공은 얼떨떨한 채로 감내하려고 한다. 처음엔 캐릭터 설정이 작위적인 게 아닌가 싶었지만 소설에선 '나이프의 말과 십자의 말의 차이'를 언급하며 속죄의 무거움과 개연성을 부여한다.

 비난의 말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나이프의 말은 순간적으론 아프지만 상처가 없어지면 사라진다. 그러나 십자가의 말은 평생 등에 지고 가야 한다. 내가 만약 평소에 친하지도 않다고 생각한 애가 유서에 내 이름을 적었다는 이유로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처지가 됐다면, 난 무척 불합리하다고 버티지 못했을 것 같다. 실제로 주인공도 결국엔 참다 못해 감정이 폭발했듯 십자가를 평생 짊어지길 강요하기엔 아무래도 잔인한 구석이 있다. 누군들 자신과 무관하다고 여긴 타인의 삶에 계속 책임감을 갖긴 쉽지 않으니까 말이다.


 주인공 선정이 참 절묘한 작품이었다. 작가는 실제로 자살로 자기보다 먼저 떠난 아들을 둔 어느 아버지의 인터뷰를 접하고서 이 소설을 집필했다고 한다. 그런데 작가는 실질적으론 사건의 제3자에 해당할 동급생 한 명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피해자 본인이 아닌, 유가족인 아버지가 아닌, 가해자도 아닌 작가 본인과 마찬가지인 제3자를. 사나다는 후지슌과 동급생일 뿐 윤리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느냐 여부는 작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물일지 모른다. 작중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 - 약간 기레기 기질도 없잖았던... - 는 나름 사명감을 갖고 주인공을 비롯한 방관한 동급생들을 매도하지만, 결국 동급생들이 방관해서 후지슌이 자살했다는 얘긴 결과론적인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후지슌에게도 삶을 이어나갈 기회는 있었고 결국 자살을 최종적으로 실행에 옮긴 건 자살한 당사자니까. 어쩌면 후지슌을 도우려고 한 사람이 많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렇다. 그렇게 생각하며 책임감에서 자유로워지긴 너무나 쉽다. 사나다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정확히는 시게마츠 기요시는 그런 식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작가는 꽤 진지하게 글을 이어나갔다. 얼마든지 동급생 자살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음에도 절대 그를 용납하지 않는다. 주인공에게 십자가를 지우려는 후지슌의 아버지와 기자를 더욱 부추긴다. 물론 작가는 이 두 인물에게도 어느 정도 스스로의 모습을 자각할 수 있게끔 여지를 남기긴 했다. 기자의 언론 플레이며 아버지의 냉담한 태도는 감정적인 걸 넘어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렇지 않기가 어렵단 건 인정하나 느닷없이 절친이 된 주인공의 심정을 헤아린다면 그를 향한 어른들의 취급은 너무 가혹했다.


 나 역시 제3자에 불과하기에 주인공의 감정에 몰입할 수밖에 없던 걸까? 20년에 걸쳐, 고향을 떠나서도 떳떳함이라곤 없이 사는 주인공의 일대기가 불편하게 읽혔다면 너무 본질을 놓치는 걸까? 제아무리 주인공이 곤혹스럽더라도 삶에 비관해 자살한 후지슌에 비한다면 배부른 상황이니 언제나 그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면 안 되는 걸까? 소설은 답이 없는 상황에서 그럴싸한 답을 내놓으려 시도하기 보단 진심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진심 어린 속죄는 무엇인지, 진심 어린 참회란 무엇인지 주인공은 2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되묻는다.

 이 답답하고 반복적이고 지리멸렬하기도 한 여정은 후지슌이 생전에 가고 싶어한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스코그쉬르코고르덴 묘지공원에 유가족들이 찾아가며 결말이 난다. 어느새 주인공은 유가족들에게 같이 묘지공원에 가자고 권유를 받을 정도로 거리감이 사라졌지만 주인공은 한사코 동행을 거절한다. 어떤 식으로도 정리가 되지 않는 자신만의 감정, 어쨌거나 제3자로서의 감정은 유가족과 함께가 아닌 혼자서 정리하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시간이 흘러 아들이 생기고서야 후지슌이 자신을 '절친'이라 한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은 주인공에겐 언젠가 진심으로 자기 감정을 정리할 순간을 상상하며, 또 오래전에 먼저 떠난 아들을 떠올리며 공원에 갔을 후지슌의 아버지와 남동생의 모습을 상상하며 소설은 끝맺어진다.


 모든 감정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는 소설임에도 여운이 남는 이유는 한결 같이 진지하고 솔직했기 때문일 것이다. 계속 몰입하며 읽기엔 답답하고 불편했지만 작가만큼은 고개 돌리지 않고 집필한 덕에 후반부의 여운이 상상 이상으로 짙었다. 시게마츠 기요시의 작품은 꽤 어린 시절부터 접했는데, 타성에 젖지 않고 연차에 어울리게 더 깊이가 있는 작품을 써내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게 바로 작가의 내공이리라. 

 오랜만에 작가의 작품을 접했는데 예전에 느꼈던 감동이 빛이 바래기는커녕 더 짙어져서 실로 반가웠다. 최근에 우타노 쇼고의 작품을 읽을 때도 느낀 거지만 한 작가를 시간을 두고 오랜만에 접하니까 만감이 교차한다. 특히 시게마츠 기요시는 뻔할 정도로 자주 동일한 소재에 천착해온 작가라 그의 진화하는 모습이 더욱 남다르게 다가왔다.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은, 남에게 상처를 준 것보다 죄가 무거울 때가 있으니까. - 2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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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의 살인사건, 실로 무서운 것은
우타노 쇼고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9.4







 우타노 쇼고의 작품은 오랜만에 읽는 것 같다. 한때 작가의 신작이 많이 소개됐지만 그 유행도 어느샌가 시드는 것 같고, 또 가끔 출간된 신작의 재미가 예전만 못해서 잘 찾아 읽지 않았다. 이 책의 경우엔 '우타노 쇼고 X 에도가와 란포, 꿈의 콜라보레이션'이라는 문구가 있긴 하지만, 예전에 <시체를 사는 남자>라고 이미 비슷한 컨셉의 작품이 출간한 적 있어 뭘 또 새삼스럽게 에도가와 란포인 건가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직 에도가와 란포를 접하지도 않은 주제에 벌써 란포라는 테마가 질린 것이다. 이게 뭔...

 이 책엔 우타노 쇼고가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을 자기 스타일대로 재해석한 7편의 단편이 수록됐다. 오마주한 작품 중엔 에도가와 란포를 한 번도 접하지 않은 나도 몇 번인가 들어본 제목도 있었고 국내에 아예 소개도 되지 않은 제목의 작품도 있었다. 하여튼 <시체를 사는 남자> 때완 다르게 란포의 작품을 아예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단편을 읽노라니 지금까지 이상할 정도로 관심이 안 가던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작가의 란포에 대한 애착을 반영하듯 작품들의 퀄리티도 출중하고 재미의 편차도 적은 편인데, 그래서 그런가 작가는 이 이후로 란포를 테마로 글을 쓰지 않겠다고 한다. 글쎄, 이 정도면 몇 번 더 써봐도 괜찮을 듯한데 워낙에 지금 내놓은 결과물이 걸출해서 만족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건 좀 개인적인 얘기지만, 오랜만에 읽는 작가의 작품이 이전에 작가의 작품을 접했을 때 못지않은 즐거움을 안겨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우타노 쇼고가 이렇게 반갑다니, 이보다 다행일 수 없었다.



 '의자? 인간!'


 처음을 강렬하게 장식했던 이야기. 우타노 쇼고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비호감 달변가 캐릭터가 작중 화자와 독자의 마음을 종횡무진 후벼판다. 참 섬뜩하기 그지없는 캐릭터였는데 오마주한 작품을 얼마나 참고했는지 몰라도 이 작품은 가장 우타노 쇼고답게 쓰지 않았나 싶다. 작가의 대표작 '밀실살인게임' 시리즈가 떠오르기도 했다.



 '스마트폰과 여행하는 남자'


 막판에 이해가 잘 안 갔지만 대체로 현대 기술을 잘 다뤄내 흥미진진하게 읽혔다. 오마주한 작품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에선 어떤 설정이었을지 가늠이 안 되는데, 작중에서 다루는 기술이 지금 기준으로도 워낙에 하이 테크놀로지라 우타노 쇼고가 어떻게 변주시킨 건지 궁금해졌다. 이 작품도 '밀실살인게임' 시리즈의 어떤 트릭을 연상시켰는데, 확실히 이 작가도 히가시노 게이고 못지않게 현대 기술에 관심이 많구나 싶었다. 오히려 요즘 히가시노 게이고를 생각하면 더 잘 다루는 듯하다.

 여담이지만 나가사키를 두 번 간 사람으로서 개인적으로 작중 전개에 따라 거론되는 지명이 반가웠다. 여행 생각이 많이 났다.



 'D의 살인사건, 실로 무서운 것은'


 작중 핵심 트릭이나 캐릭터 묘사는 그냥저냥이었는데 결말 때문에 상당히 오싹했다. 오마주한 작품에서도 이런 결말인지, 아니면 우타노 쇼고의 폭주인가... 작가의 다른 작품 <여왕님과 나>와 유사한 걸 보니 아마 후자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야기의 주역 둘의 감정의 골이 상하는 게 너무 급전개인 감이 있어서 이 부분은 좀 아쉬웠다. 먼저 관계에 금을 내버린 쪽의 심리가 너무 급작스러워 이 부분에 좀 더 공을 들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세이 등장]을 읽은 남자'


 대놓고 '나, 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하는 작품. 설정이며 결말까지 거의 유사하지만 시간 배경이 현재이므로 좀 더 교묘하고 기술적인 방식이 가미된 게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현대적인 재해석에 충실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지막 문장도 인상적이었다. 작가가 해당 작품을 인상 깊게 읽은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그래서 작가의 작품이 그렇게 씁쓸하고 비관적인지도 모르겠다.



 '붉은 방은 얼마나 바뀌었는가?'


 대놓고 '나, 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하는 두 번째 작품. 짧고 굵다. 처음엔 정신 없었고 뒤돌아 생각해보면 뻔한 반전이라고도 생각하는데 막상 다 읽은 직후의 기분은 유쾌했다. 연극의 묘미를 살린 설정이 일품이었다. 연극업계 종사자들의 고민을 이해한 작가가 자기 스타일대로 풀어낸 이야기였는데 단발성이긴 하지만 확실히 재밌었다.



 '음울한 짐승의 환희'


 에도가와 란포의 특징 중 하나로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를 꼽곤 하는데 그 분위기를 제대로 재현한 게 바로 이 작품이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우타노 쇼고 스타일의 비호감 작렬인 캐릭터와 설정도 빠지지 않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콜라보레이션이라 할 수 있겠다. 솔직히 가독성으로 따지면 이 작품이 단연 최고였다. 의외로 결말이 허무하다면 허무한 편이었지만 특유의 음울함은 제대로 풀어냈으니까.



 '비인간적인 사랑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작중 암호 해독을 이해하며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지만 작가도 그걸 아는지 질질 끌지 않고 속도감 있게 풀어냈다. 결말은 예상대로였지만 중간중간 드러나는 인물들의 감정선이 괜찮았다. 오마주한 작품이 국내에 소개가 안 된 작품이라는데, 그 작가의 작품 세계가 정말 방대하단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작품까지 읽으니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을 하나라도 접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 하도 많이 출간해서 뭘 읽을지 고민이 되던데, 한 번 찬찬히 살펴보고 읽어봐야겠다. 그래, 이제라도 읽는다면 그건 늦는 게 아닌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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