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울 따뷔랭 - 작은책
장자끄 상뻬 지음,최영선 옮김 / 열린책들 / 199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9.6







 기억하기론 <꼬마 니꼴라> 다음에 접했던 장 자끄 상뻬의 작품이다. 아마 교과서에 실려서 접하지 않았나 싶은데 이렇게 시간이 흘러 이야기의 전문을 읽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교과서에는 분량상 하이라이트 부분만 실렸었는데, 그 부분만 따로 놓고 읽어도 괜찮았지만 역시 기승전결을 모두 접하니 이야기가 풍성하게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자전거 위에서 균형을 못 잡던 라울 따뷔랭은 아이러니하게도 동네 최고의 자전거 수리 기사가 됐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자전거를 못 탄다는 비밀은 견고해진다. 그런 비밀을 갖고 있던 라울이 어느날 한 사진사의 '자전거 타는 모습을 찍고 싶다'는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일생일대의 사진을 찍는다는 게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다. 100쪽이 채 안 되는 이 소설은 삽화를 제외한다면 실제 분량은 30쪽도 겨우 채우는 단편일 텐데 교과서에는 거기서 더 축약한 내용을 실었던 것이다. 그런 것치고 핵심은 잘 담아냈지만 그래도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에 대한 남모를 고충이란 주제의식은 사진 에피소드만으론 부족했다고 본다.


 나도 라울처럼 자전거를 못 타는 사람이지만 그걸 유달리 비밀이라거나 치부라 여기진 않는다. 내가 자전거를 못 탄다고 말해도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사람도 있는 법이지.' 라고 이해하는 편이다. 그런데 라울이나 사진 기사 피구뉴가 남들에게 쉽사리 비밀을 털어놓기 힘든 이유는 그들의 직업과 너무 어울리지도 않을 뿐더러 그들의 경력에 치명적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전거를 못 타는 자전거 수리 기사, 결정적인 순간은 포착하지 못하는 사진사라고 남한테 밝혀봤자 재미없는 농담, 심하면 사기꾼으로 취급될지 모를 일이다. 실제로 피구뉴가 자기 비밀을 고백하자 라울은 '박제 동물이나 찍어야 될 사기꾼 때문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며 성을 내지 않던가. 라울이 자기와 썸을 타던 여자에게 비밀을 고백하자 자길 놀린다며 외면을 당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있어 비밀은 너무나도 치명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라울이나 피구뉴의 명성이 과연 그들이 비밀을 잘 숨겼기에 쌓을 수 있던 것일까? 이 부분에서 장 자끄 상뻬의 스토리 텔링이 그의 간결하고 예술적인 화풍만큼이나 빛을 발휘한다. 라울의 비밀의 무게며 아이러니한 처지 같은 것들을 알기 쉽고 공감이 가게 묘사함과 동시에 그의 비밀이 계속 비밀로 남을 수밖에 없던 이유는 단지 라울이 남모를 자격지심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이 소설은 질문하고 있다. 자전거를 못 타는 이유를 분석하다가 최고의 자전거 수리 기술을 체득한 라울은 '자전거 수리 기사니까 당연히 자전거를 탈 줄 알 것'이라고 주변 사람들이 믿어의심치 않는 모습을 차마 뒤집을 수가 없어 점점 속이 타들어간다. 비밀의 내용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은 그 자체로 병이 된다.


 그래서 막판에 피구뉴에게라도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한 라울의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다. 라울로선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지만 의외로 충동적이고 쉽게 결정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그가 자전거를 못 타더라도 그의 수리 기술이 어디 가버리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사실 비밀의 내용 자체는 대수로운 일도 아니니까. 결국 주변 사람들의 편견이 굳건하다는 건 핑계고, 비밀의 무게를 무겁게 했던 건 비밀을 간직한 당사자의 몫이 가장 크다는 걸 소설은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피구뉴는 아무래도 전문 사진사인 만큼 그의 비밀은 라울보다 치명적일 수 있으나 결국 그도 라울에겐 용기를 내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는가. 그럼 라울이라고 하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소설은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고 있다.

 <라울 따뷔랭>은 단순히 자전거를 탈 수 있느냐 아니냐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자기 비밀을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관해 질문하는 작품이었다. 혹시 장 자끄 상뻬를 삽화가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꼭 추천하고 싶은 작품인데, 다소 난해하고 지루했던 <뉴욕 스케치>에 비해 너무나 매력적으로 읽혀서 이 작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길 권한다. 어떻게 보면 <꼬마 니꼴라>를 넘어선 대표작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