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수법 - 살인곰 서점의 사건파일 ㅣ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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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표지에 장편소설이라 적혀 있었음에도 나는 이 작품이 영락없이 단편집인 줄 알았다. 국내에 소개된 와카타케 나나미의 작품이 거의 단편집이었고 특히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는 전부 단편집이었기 때문에 이 작품도 당연히 단편집이라 생각했다. 나중에 알아보니까 이 작품보다 <녹슨 도르레>라는 장편소설이 먼저 출간됐던데... 아무튼 요즘 들어 이 작가의 작품이 많이 출간돼 좀 얼떨떨한 기분이 든다.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과 '하자키' 시리즈로 이미 국내에는 약발(?)이 다한 작가라 여겼는데 이렇게 다시 흥하고 있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이제 <나쁜 토끼>의 출간을 기대해도 되는 건가.

 와카타케 나나미의 작품 중 가장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며 특히 초장에 수록된 등장인물 소개는 읽기 전부터 괜히 긴장하게 만들었다. 단편의 대가가 이토록 방대한 분량의 장편소설을 쓴다는 게 상상이 잘 안 갔는데 다 읽고 나니 이 작가가 장편을 많이 안 썼다 뿐이지 오히려 단편보다 더 잘 쓰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려 14년 만에 나온 시리즈의 정식 후속작인 만큼 작가가 작정하고 써내려갔다는 느낌을 받았다. 20년 전에 가출한 딸을 찾아달라고 의뢰를 받으며 탐정으로 복귀하는 이야기가 어떻게 확장되는지 엿볼 수 있던 게 흥미로웠던 작품인데 이 정도면 가히 성공적인 복귀작이 아닌가 싶었다.


 <이별의 수법>이라는 묘한 제목의 이 작품은 40대에 접어든 하무라 아키라가 등장하면서 짠내를 풍기며 시작된다. 전에는 잘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롭고 시니컬한 하무라 아키라가 이제 나이를 먹어 노안과 무릎 통증에 시달리다니... 더욱 짠한 것은 그녀가 이번 작품에서 전작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고생을 겪는다는 것이다. 고생도 고생이지만 무슨 머피의 법칙인 양 불행도 끊이지 않던데 헌책을 정리하다 바닥이 무너져 추락하고 그때 추락하면서 집에 매장된 백골하고 박치기를 하지 않나... 하여튼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고생은 다 겪게 된다. 심지어 나중엔 하무라 아키라는 불사신인 건가 싶을 만큼 스펙터클한 일까지 겪는다. 그런데 하무라 아키라 입장에선 그런 육체적 고통보다도 정신적 고통이 더 치명적이었을 듯하다. 이미 산전수전을 겪은 프로 탐정인 하무라 아키라가 정신적으로 타격 받을 일이 뭐가 있을까 싶겠지만, 오히려 그렇게 스스로를 과신했기 때문인지 이번 작품에선 유독 감정에 흔들리거나 실수를 남발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다루는 사건의 스타일, 전개되는 스타일은 어딘지 내 취향과 맞지 않았다. 뭐, 이 작가의 작품이 대부분 그런 편이어서 새삼스럽진 않았다. 스포일러일지 모르겠는데 비슷한 전개 방식으로 스티그 라르손의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 떠올라 그렇게 참신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봤을 때 어지간히 작가의 팬이거나 시리즈의 팬이 아니라면 스토리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었다. 대신 이 작가의 시니컬한 사고방식, 악의를 낯낯이 묘사하는 작풍, 하무라 아키라라는 캐릭터의 심리 묘사와 성장 과정에 집중하면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실수를 연발해 독자들과 자기 자신까지도 당혹스럽게 한 하무라 아키라는 전에 없이 자책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최후반부에서 어떤 연유로 탐정업에 다시 종사하게 되는데 이 부분이 무척이나 폭소를 유발했다. 폭소를 유발한 부분이 이 작품의 제목과 크게 연관이 있는데, 개인적인 얘기지만 이렇게 대충 지은 듯하지만 있어 보이면서 작품 내용과 아주 따로 놀지 않는 제목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이 작품, 정확히는 시리즈의 주인공 하무라 아키라의 아이러니한 운명을 확실히 강조해준 게 인상적이었다. 하무라 아키라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불행한 사건들이 그녀를 알아서 찾아가는 것이 꼭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마치 신이 존재하는데 그 신이 하무라 아키라가 탐정으로서의 재능을 썩히는 걸 아깝게 여겨 일부러 시련을 안기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달까. 그래서 그녀가 필요 이상으로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었겠지. 그녀가 주체적으로 탐정업을 하는 이상 불행을 최소한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 작품의 결말이 씁쓸하면서도 폭소를 유발한 것이리라.

 내 취향이 아닌 작품이라 했지만 분량이며 깊이가 남다르기에 나중에 한 번 더 읽게 될 것 같다. 그전에 시리즈의 다음 작품인 <조용한 무더위>와 <녹슨 도르레>도 읽어봐야지. 만약 이 두 작품을 읽기 전까지 <나쁜 토끼>가 출간된다면 그 작품을 먼저 읽을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작가의 작품이 출간되는 기세를 보면 <나쁜 토끼>의 출간은 정말 머지않은 듯하다. 이번 생에 가망이 없어 보였던 일의 불씨가 다시 살아나니까 딱히 작가의 팬이 아님에도 흥분을 감출 수 없다. 못해도 1년 안에 출간하지 않을까 싶은데...


 여담이지만 시리즈 2부에 해당하는 '살인곰 서점의 사건파일' 시리즈가 제법 흥한 덕인지 올 초엔 <하무라 아키라>라는 제목의 드라마도 방영됐다. 총 7편으로 구성된 그 드라마는 시리즈의 1부에 해당하는 내용이 6편을 차지해 2부의 내용은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 추측하기로 딱 한 편이 <조용한 무더위>의 표제작을 드라마로 옮긴 듯하다. - 내가 봤을 때 2부의 작품이 꽤 많이 출간된 만큼 드라마 2기도 충분히 나올 것 같다. 특히 이 작품 <이별의 수법>만으로도 드라마 한 편을 제대로 뽑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코로나가 종식된다면 충분히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다. 대체 코로나가 종식되는 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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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지 않습니다 - 최지은 기자의 페미니스트로 다시 만난 세계
최지은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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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대중 문화 웹 매거진의 최지은 기자가 한국 엔터테인먼트가 여성을 어떻게 다루고 묘사했는지 살펴본 페미니스트 책. 방송계에 대한 통찰은 <프로불편러 일기>를 쓴 위근우 기자보다 전문적이었고 저자 본인이 관철하려는 페미니즘의 실체를 논리 정연하게 풀어냈다는 점에서 여타 페미니즘 책보다 술술 읽혔다. 지금도 기억나는 인상적인 표현으로 '1주일의 독일 여행 동안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에 지겨워져 한시라도 빨리 모국어로 된 TV 프로그램을 시청할 수 있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막상 한국에 돌아오니 때론 알아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 고통인 말들도 있다.'는 것을 꼽을 수 있는데 이 말은 '여성은 한국 예능을 웃으며 볼 수 있을까?' 라는 글의 서두를 장식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얼마나 편향된 여성관에 노출됐는지 단번에 강조한 말이라 쓴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이 책이 출간된 즉시 읽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어쩌다 보니 늦게 읽게 돼 본의 아니게 작가가 책에서 다루는 이슈들이 지금 내 기준에선 약간 식상하게 다가왔다. 전에도 비슷하게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 페미니즘 책의 경우 가급적 최신의 책을 읽는 게 정말 중요하단 걸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말도 지금 몇 번째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부분은 당연히 작가의 불찰이 아닌 전적으로 내 실수라고 할 수 있는데, <82년생 김지영>이나 강남역 살인사건, 화장실 몰카 범죄 등의 이슈는 이미 여타 책에서 접해왔고 내 스스로도 어느 정도 재구성을 거쳤던 지라 책의 초반부는 상대적으로 더디게 읽혔다.


 책은 '갱년기 농담' 이후부터 탄력적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저자 본인의 경험을 통해 중년 여성의 갱년기를 웃음거리로 삼는 예능의 관례가 얼마나 문제인지 비판하는 것을 시작으로 책에는 우리가 지금껏 무심코 웃어 넘겼던, 정확히는 내가 웃어 넘겼던 장면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저자는 <아는 형님>을 비롯해 <복면가왕>, <냉장고를 부탁해>, <미운 우리 새끼> 등 화제성 높고 내가 자주 챙겨 보기까지 하는 프로그램을 다뤘는데 평소에 내가 챙겨 보는 TV 프로그램이 결코 많지 않다는 걸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익숙하고 생각해볼 수 있게 만드는 이슈를 저자가 잘 선정하지 않았나 싶다. 무엇보다 책에서 언급한 사례들이 아직도 우리나라 방송계에서 현재진행형인 문제가 수두룩한 만큼 저자의 논리를 전개함에 있어 이보다 좋은 예시는 없는 것 같다.

 저자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책에서 지적한 예능 프로그램의 편향된 여성관에 대해선 거의 빠짐없이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지적하는 분야가 드라마나 영화로 넘어가게 되자 중립성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몇 차례 받게 됐다. 주 전공은 아니지만 나도 엄연히 시나리오 작법을 공부하고 실제로 학교 과제로나마 써본 적도 있는 사람이기 때문인지 저자가 예능과 마찬가지로 앞뒤 맥락을 배제하고 드라마의 특정 장면을 걸고 넘어지는 부분들이 트집처럼 느껴졌다. 내 지론은 이렇다. 꼭 옳은 소리만 하는 캐릭터나 장면이 현저히 적더라도 보는 사람 입장에서 반면교사로 여기고 넘길 수 있다는 게 픽션이 예능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이라고. 때문에 저자가 열거하는 드라마와 영화의 장면들은 독자 입장에서 아무래도 어느 정도는 거르며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물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드라마/영화 속 클리셰를 지적하는 것의 바람직한 취지까지 부정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자가 저서에서 방송통신심의위원들이 모두 남자란 것에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이 책의 저자도 여성 저자 한 사람밖에 없는 터라 성별과 세대를 완벽히 아우르는 글에 이르진 못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아쉬움은 비단 이 책만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읽은 모든 페미니즘 도서에 해당되는 아쉬움이다. 여성 저자는 물론 남성 저자도 마찬가지다. 두 명 이상의 저자가 참여한 공동 저서도 이런 아쉬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왜냐하면 내가 읽은 공동 저서들은 저자들이 전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 정말로 세상의 절반을 지지하되 나머지 절반을 외면하자는 견해가 아니라면 슬슬 남녀 저자가 모두 참여한 공동 저서도 나와야 할 때가 아닐까? 작년에 읽은 일본 에세이 <설거지 누가 할래>는 동거남과 결혼에 이르는 과정에서 느낀 저자가 설거지를 시작으로 상대와 어떻게 대립이 심화됐고 또 어떻게 타협했는지를 다루고 있는데 인상적인 부분은 저자의 입장만 역설하다 끝내는 게 아니라 반드시 파트의 마지막 부분에 상대편인 남자의 입장인 '그의 주장'을 넣음으로써 공정함을 연출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두 남녀의 상황이 공정해졌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여기게끔 연출한 것에 있다. 이는 큰 차이가 있다.

 성비가 어떻건 간에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져 사는 이상 세상이 완벽하게 평등하고 공정하게 흘러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어떤 갈등이 터졌을 때 한쪽의 말만 듣는 건 위험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말하는 당사자는 당연히 본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얘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갈등이 타협점을 못 찾고 평생선을 달리는 걸 과연 어느 한쪽의 절대적으로 일방적인 잘못이라 여기는 것도 위험천만하다 생각하는데 내 개인적으론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대부분의 페미니즘의 도서들이 이 위험천만함의 기로에서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언제나 받곤 했다. 이번에 읽은 <괜찮지 않습니다>의 경우엔 메갈리아의 '위용'을 은근하게 편의에 맞춰 저평가하는 듯한 낌새가 보여 역시 단일 작가가 쓰는 페미니즘 책은 맹신하고 읽으면 안 된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논리의 예시들이 TV에서 쉽게 접할 수 있어 접근성이 낮았던 것, 우리가 원해서 그릇된 여성관의 컨텐츠가 소비되는지 제작자들이 무비판적으로 그릇된 여성관의 콘텐츠를 답습하고 있는지 그 선후 관계를 궁금하게 만든 것, 유난히 여성 연예인에게 요구하는 잣대가 많다는 걸 아주 객관적이고 호소력 있게 설명해 우리 스스로를 반성하게 유도한 것 등 근래 페미니즘 책 중 가장 개성적이고 전문적이며 주제의식 또한 짙었지만 늘 그렇듯 저자의 모든 논리에 완벽하게 감화될 수는 없었다. 난 지금도 이 책에 남자 저자가 공동 저자로 참여했더라면 최지은 기자가 열거한 일부 예시와 반대되는 예시 역시 적잖이 다뤄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맥락의 두 입장의 주장에서 분명 공통적이고 공정한 의견을 취합시켜 많은 독자를 감화시킬 만한 방향성이 제시됐으리라 본다. 적어도 지금보다 균형감을 갖추게 되리란 건 확실할 듯하다.

 어떤 책이건 독자가 작가한테 완벽하게 감화되지 못했다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결국 저자와 나도 전혀 다른 사람이고 생각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왜 페미니즘 책을 포스팅할 때는 저자의 말에 다 동의하기 힘들었다는 말을 하기가 그렇게 눈치가 보이는지 모르겠다. 내가 괜히 혼자 눈치를 보는 거라면 좋으련만 아무래도 뒤가 불안하다. 엉, 이 말도 왠지 눈치가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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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 (반양장) - 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ㅣ 창비청소년문학 89
이희영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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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아이를 버리는 부모가 많아진 어두운 미래, 국가는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고 그렇게 키워진 아이들은 NC(National Children)라는 꼬리표가 달리게 된다. NC라고 쓰고 '부모한테 버림받은 아이들', '부모 없이 자란 아이들'이라고 읽는 이 꼬리표를 우려한 국가는 아이들에게 직접 부모를 고를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부모 면접(PArent's INTerview)의 앞글자만 따온 '페인트'라고도 불리는 이 면접은 아이들의 판단을 절대적으로 우선한다.

 부모 면접은 아이들이 또 부모한테 버림받아선 안 된다는 일념에 따라 굉장히 엄격한 규칙 안에서 진행된다. 아이와 어른의 위치가 전복된 듯한 이 기묘한 면접 구조는 읽기 전부터 흥미를 자극시켰다. 막상 본편을 보니까 적잖은 사람들이 부모 면접의 의의가 무색해지게 만드는 선택을 많이 하던데 이런 쓴웃음 나오는 부분이 무척 재밌었다. 사회가 그럴싸한 제도나 대책을 내놓아도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따르긴커녕 오히려 허점을 발견하고 본인들 입맛대로 재구성한다는 묘사가 제법 현실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주인공의 연령대가 고등학생기도 하고 그 나이까지 입양을 거부하는 캐릭터라 그랬는지, 작품의 환상을 내다버린 듯한 설정이며 염세적인 가치관이 매력적이었다. 물론 마냥 염세적인 작품이었던 건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이 부모 면접의 의의를 무색하게 만드는지 예로 들어보겠다. 가령 국가로부터 얻는 혜택에 눈이 멀어 NC 아이들을 입양하려는 사람들이라든가, 아니면 NC 출신 아이들은 이대로 입양되지 않고 성인이 되면 NC 출신이란 꼬리표를 달고 사회에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너무 불안하니까 아무 어른이나 붙잡고 NC를 나가려는 아이들을 꼽을 수 있겠다. 이들의 선택과 행동은 개인적으로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지만 어느 정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진실로 서로 의지가 되는 부모 자식 관계를 우선하기엔 사회 분위기가 너무 삭막해 이해관계를 먼저 따지게 되는 상황이란 것과 한편으론 전통적인 부모 자식의 유대감은 이제 낡을 대로 낡아서 새로운 가치관이 당연히 필요한데 작중 기준으로 과거 사람인 내가 그 새로운 가치관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인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광경을 주위에서 접하고 또 본인이 직접 겪을 뻔한 적이 많았는지 주인공 제누 301은 시종 부모 면접에 삐띡하게 임한다. 나이도 적지 않은데 입양되길 거부하다가 이대로 NC 꼬리표가 떼지 못하는 거 아니냐고 우려한 NC의 가디(가디언의 줄임말)들은 더욱 제누 301을 위해 면접을 주선하지만 그럴수록 악순환은 반복될 뿐이다. 제누 301은 비인간적인 본인의 이름조차 애착을 가질 정도로 이 환경에 익숙해졌고 그를 위한 어른들의 노력은 다 뻘짓으로만 느껴진다. 그런 상황에서 제누 301은 어떤 부부에게 흥미를 갖게 된다. 면접을 보러 왔다는 그 부부는 누가 봐도 준비도 미흡하고 자격도 없어 보였지만 제누 301은 그들의 가식 없는 모습에 호감을 느낀 것이다.


 면접에서의 가식 없는 모습이라고 하니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보면 10년 주기로 가석방 심사를 받는 죄수 레드의 태도 변화가 떠올랐다. 10년차 죄수 때는 가석방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 아무말이나 하고 20년차 때는 체념을 한다. 시간이 흘러 30년차가 돼서 면접관도 경어를 쓸 정도로 늙어버린 레드는 '본인이 가석방될 준비가 됐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길게 답한다. 아무런 가식도 미련도 없어 보이는 그의 대답에서 진정성을 느꼈는지 얄궂게도 레드는 가석방되고 만다. 이미 감옥에 길들여졌던 레드는 그렇게 강제로 사회로 방출됐고 만약 앤디와의 약속이 없었더라면 끝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자살을 택했을 것이다.

 부모 자식 관계가 반드시 혈연으로 맺어진다는 것도 완전 옛말인 만큼 본작에서처럼 아예 국가 차원에서 면접을 보게 하는 제도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작중에서의 묘사에 거의 근접한 나라가 우리나라인 것 같아 - 한국이 고아들의 나라로 유명할 만큼 입양을 많이 보낸다니까... - 이 작품처럼 부모 자식 관계의 정의를 생각하게 되는 작품은 꽤나 중요하지 않은가 싶었다. 서로가 서로의 가족이 될 자격은 무슨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 그 자격이란 것에 합당한 기준은 무엇이며 어떻게 얻을 수 있고 또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등 우리가 돌아보지 않았던 문제에 대해 되돌아보게끔 질문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읽은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페인트>는 이래저래 허를 찌르며 할 얘깃거리도 방대해 보이는 설정에 비해 스토리 라인은 단선적이고 좋은 부모상, 나쁜 부모상에 대한 언급이나 묘사가 피상적인 감이 있어 기대보다 아쉬웠던 작품이었다. 그래도 결말이 좋아 끝인상은 나쁘지 않았는데, 제누 301의 말마따나 부모 자식 중 한쪽만 일반적으로 자격이나 희생이 요구되는 불평등한 잣대로는 좋은 가족 관계는 형성될 수 없다고 역설한 게 인상적이었다. 전개가 지루해 그리 짧지도 않은 분량임에도 결말의 임팩트가 살짝 묻히는 감이 있었지만......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나 통찰 없이 사회 현상에 맞춰 제도만 내놓아선 미래는 좋아지지 못한다는 듯한 주제의식도 인상적이었다. 작품에선 왜 부모들이 자식을 버리고 왜 부모 없는 자식들을 우리는 경계하는지 명확히 짚어내지 않지만 막판에 제누 301의 선택의 의의는 작품의 모든 여백을 메꾸고도 남았다. 자신의 예상치 못한 선택에 의아하는 사람들에게 제누 301이 NC 출신이란 꼬리표를 단 사람이 보란 듯이 사회에 적응하고 살아남아야 NC라는 꼬리표 자체가 사라질 것이란 말하는 장면은 확실히 멋있었다. 더 이상 부모 자식의 관계가 이전처럼 돌아갈 수 없는 세상인 데다가 자신이 살아온 집을 사랑하는 제누 301이기에 가질 수 있던 포부라 더 의미가 있었다.


 이런 포부를 가진 제누 301은 약속한 대로 자신이 마지막으로 면접을 봤던 부모들과 나중에 사회에서 만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쇼생크 탈출>의 레드와 달리 어떻게든 사회에 적응하고 살아남아 NC라는 꼬리표를 없애는 데 일조할 것이다. 그 꼬리표를 혼자 힘으로 없애긴 힘들 테지만, 제누 301 정도라면 '부모 없이 자랐다. 그래서 뭐? So what?'이라 일관해 사회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당황한 사회는 어떤 식으로든 변화할 것이다. 난 그 변화가 좋은 쪽이리라 믿는다.

세상 어떤 부모도 미리 완벽하게 준비할 수는 없잖아요.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 그건 만들어 가는 거니까요. - 91p




왜 부모에게만 자격을 따지고 자질을 따지세요? 자식 역시 부모와 잘 지낼 수 있는지 꼼꼼하게 따지셔야죠. 부모라고 모든 걸 알고 언제나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은 버리라고 하셨잖아요. 부모라고 무조건 희생해야 하는 시대는 지났다고요. -18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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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을 팔았다. 1년에 1만 엔으로 1~3 박스 세트 - 전3권 - 노엔 코믹스
미아키 스가루 지음, 타구치 쇼이치 그림, JYH 옮김 / 데이즈엔터(주)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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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9






 <수명을 팔았다. 1년에 1만엔으로>는 미아키 스가루의 소설 <3일간의 행복>을 만화화한 작품으로 저 제목은 원작 소설이 인터넷에 연재될 때 붙은 제목이라고 한다. 이래나 저래나 바뀐 제목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원래 제목은 작품의 시니컬함을 강조하고 바뀐 제목은 작품의 희망적인 부분을 보다 강조하기 때문이다. 다시 초창기 제목으로 바뀐 이 만화는 전에 읽은 소설과 내용면에서 큰 차이는 없는데 - 기대 이상으로 원작의 내용을 잘 재현됐거니와 오히려 더 잘 살린 부분도 있다. 심지어 문어체 말투까지 살렸다. - 그런 만큼 시니컬한 뉘앙스를 강조하는 저 제목은 뭔가 아쉽다. 너무 길기도 하고. 뭐, 강렬하다는 측면에서 저만한 제목도 없는 것 같지만 말이다.

 이 작품의 내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나라에서 꽤 유명했던 책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와 같은 듯 전혀 다른 결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방금 말한 책에선 결국엔 주인공이 다시 살기로 결심하지만 이 작품에선 주인공인 쿠스노키가 죽는 건 변함이 없다. 돈을 받는 대가로 수명을 팔았다는 설정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는 문제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끝이 정해졌기 때문에 쿠스노키는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거머쥐게 된다. 실제로 죽음에 이르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쿠스노키의 여정을 따라간 독자라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가 행복했으리라 상상하는 건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닐 것이다.


 수명에 대한 파격적인 가격 책정을 시작으로 이 작품은 시종 시니컬한 태도의 인생관을 설파한다.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던 고독한 쿠스노키는 수명을 팔고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자마자 과거의 인연들을 떠올린다. 첫사랑과 고등학교 시절의 유일한 절친,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호감을 보였던 여성을 떠올리지만 쿠스노키의 과거와 미래까지 모든 걸 파악한 감시자 미야기는 그의 낙관적인 기대를 산산조각 낸다. 호감을 보였던 여성을 외면한 쿠스노키는 누구와도 친해질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으며 고등학교 때 절친은 단지 그의 말을 잘 들어줘서 친하다고 생각했을 뿐 진심으로 친구다운 관계를 쌓았던 것도 아니며 첫사랑은 쿠스노키를 증오하기까지 한다. 쿠스노키가 소중하다고 여겼던 과거의 인연들은 결국 그에게 지나간 인연에 불과하며 남은 3개월의 삶을 정리하기에 하등 도움도 안 되고 되려 비참함만 안긴다.

 미래의 삶은 더욱 비관적이다. 수명을 팔아버림으로써 그 미래는 '올 수도 있었지만 이젠 영영 오지 않을 미래'가 돼버렸지만 그 내용이 어찌나 암울한지 쿠스노키는 미래의 삶이 어떤지 듣고나서 수명을 팔길 잘했다는 반응을 보인다. 무언가를 이룩하지도 못하고 행복해지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해 1년당 1만엔 밖에 못 받는다는 미래는 쿠스노키가 걸어왔던 나날들과 무관할 리 없다. 인생은 과거와 미래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네트워크다. 과거가 엉망인데 미래에 갑자기 보란 듯이 밝아질 리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소설도 그렇게 썼다간 개연성이 없다고 비판을 받을 것이다.


 씁쓸하게도 자신이 헐값에 팔아버린 미래의 내용을 듣고 그나마 희색이 만면해진 쿠스노키는 남은 3개월을 알차게 보내 세상에 뭔가 한 방을 먹이고자 한다. 하지만 평생 시한부 인생을 관찰한 감시자 미야기는 그의 허황된 계획을 듣고서 뭔가 착각하는 게 아니냐며 정곡을 찌른다. 과거의 실책을 깨달았다고 단번에 행복을 거머쥘 사람이었다면 미래의 수명이 그렇게 헐값에 책정됐겠냐고. 그리고 행복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나 막연하게 희망을 품게 되는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자신이 숨쉬고 있는 현재에서 거머쥘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인생관 때문인지 이 작품은 행복한 인생이란 어떤 것인지 묻고 있음에도 거창한 목표가 아닌 작지만 확실한 행복과 성취감이란 어떤 것인지 발견하고 실천해가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특기할 만한 부분은 미야기의 조언을 무시하고 과거의 인연을 찾아간 쿠스노키가 결국 깨달음을 얻고 현재에 집중하게 되는 과정과 뜻밖에도 자신과 비슷한 상처와 공감대가 있는 미야기와 가까워지고 결국엔 서로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진중하고 개연성 있게 그려낸 것이다. 원작 소설에선 둘이 가까워지는 전개가 약간 수월하면서 판타지적인 측면이 없잖다고 여겼는데 만화에선 이 부분을 보다 디테일하게 잘 표현한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쿠스노키와 달리 수명이 아닌 시간을 잃어버린 미야기가 세상과 격리된 채 타인의 인생을 관찰하기만 하는 서러움에 대해서 잘 조명했는데 이 부분이 바로 원작 소설가가 언급한 '간지러웠던 부분을 긁어주는' 요소가 아니었나 싶다.


 원작을 5년 전에 군대에서 읽었기 때문인지 내용이 가물가물했지만 소설의 내용을 무척 잘 살린 만화라고 느꼈다. 몇몇 부분은 생략한 것 같지만 만화 작가가 추가한 부분들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는데 그 부분들이 모두 좋았다. 만화를 담당한 작가도 원작을 열심히 분석하고 내면화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원작의 팬으로서 참으로 반가운 만화가 아닐 수 없었다. 오랜만에 군대 동기들한테 연락하고 싶어졌다. 그때 너희들이 빌려 읽고 감동을 받았다는 그 책이 만화로도 나왔다고.

 아마 추측하기로 원작 소설가가 지금의 나와 비슷한 연령대에 이 작품을 집필한 것 같다. 5년 전에도 울림을 주고 지금도 마찬가지고 나중에 또 읽어도 여전히 묵직하리라고 예상된다. 젊은 나이에 암울하지만 과장 없이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잘 풀어낸 작가에게 질투가 나면서도 경이로웠다. 행복은 현재에 있다는 것을 이렇게 극단적인 설정으로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품에서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과거에 대한 미련과 미래에 대한 집착을 필요악처럼 묘사했다. 나는 이런 묘사가 먼길을 돌아 현재에 충실하게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최근 1년 간은 크든 작든 뜻한 바가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는 걸 여러 번 경험했는데 그 과정에서 과거에 이랬으면 하고 자책하거나 그럼에도 미래는 더 나아질 것이라 낙관하며 지낸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그런 날들이 모두 부질없다고 생각할 수 없지만 이뤄질 수 없는 망상을 품느라 정작 현재에 소홀히 했던 건 부정할 수 없다. 비록 나는 이 작품에서 쿠스노키가 했듯 자포자기하며 수명을 팔거나 팔 고민도 하지 않겠지만 만약 판다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싼값이 책정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 점을 부끄러워하며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어지간한 자기계발서보다 훨씬 묵직하지 않나 싶다. 여담이지만 자기계발서를 쓰거나 써봤던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인생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면서.

 예상은 했지만 인생 그 자체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품인 만큼 후기를 남기기가 난감한 작품이었다. 난감했던 이유는 내가 내 인생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게 아직 어색하고 쑥스럽고 덤덤하게 해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 클 것이다. 읽을 때는 몰랐지만 이 포스팅을 쓰면서 아직 스스로가 내공이 부족함을 체감하게 됐다. 더도 덜도 말고 이 책을 다시 읽게 될 때는 지금보다 덜 난감하길 기대해본다. 최소 5년 뒤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3개월이란 시간은 뭔가 바꾸기엔 너무 짧습니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내기엔 너무 길죠. 그렇다면 작더라도 확실한 행복을 쌓아가는 게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요? 이기려고 하니까 지는 거예요. - 1권 제4화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그 사람이 불행해지길 바랐던 것 같아요. 절망하면서 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게... 그 사람이 혼자 꿋꿋하게 살 수 있다는 걸 알고 싶지 않았어요. - 2권 제11화




실패를 고친다고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어. 그때는 어디까지나 성공과 실패 사이의 출발점에 있지. 실패한 인간들은 그런 걸 몰라. - 3권 제13화




보편성이란 주위의 눈에 맞춘 그림에 깃드는 게 아니다. 자신의 우물 빝바닥에 내려가 고생해서 끌어올린 얼핏 지극히 개인적인 성과로 보이는 것에 깃드는 법이다.

그걸 깨달으려면 한차례 순수한 즐거움으로 ‘자신을 위해‘ 그릴 필요가 있었다. - 3권 제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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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쉴레, 클림트 - 표현주의의 대가들 ㅣ 아티스트 커플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16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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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뭉크와 클림트와 관련된 책은 몇 권 읽었지만 에곤 쉴레는 또 처음 접해보기에 의미가 있는 독서였다. 22,000원이라는 가격이 아깝지 않은 종이의 질과 더불어 걸작에서 습작까지 골고루 살펴본 저자의 디테일한 탐구가 인상적인 책으로 책에 수록된 그림이 엄청나게 많아 눈이 즐거웠던 책이다. '사물을 보이는 것이 아닌 자신이 보는 대로 그린다'는 표현주의의 원칙은 오늘날에 있어서 아주 기본적인 태도인 것 같지만 이런 스타일을 처음 고안하고 선보이고 세상에 정착시킨 세 거장의 작품을 여러 공통된 주제 안에서 살펴보니 신선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금방 말했듯 뭉크와 클림트와 관련된 책은 여러 권 읽어서 그 화가들의 삶이나 작품 세계는 딱히 새롭진 않았지만 쉴레까지 다루는 건 처음 읽어봤기에 당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중반에 이르는 유럽 회화의 변천사가 보다 입체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같은 나라 출신인 클림트와 쉴레라면 몰라도 뭉크까지 한 카테고리에 묶는 게 약간 생소할 법도 한데, 실제로 뭉크는 프랑스나 독일에서 유학은 했어도 오스트리아 화가와 크게 교류가 있었던 적은 없다. 다만 세 화가 모두 비슷한 시기에 이름을 떨쳤으니 서로의 작품과 명성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짐작만 하고 있는데 이는 충분히 나올 만한 가정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근본적으로 다른 스타일을 구사하지만 다들 굉장히 도전적인 화풍과 신념을 갖고 있었고, 특히 쉴레는 예술과 외설의 논란을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화가인 만큼 오늘날과 그 당시의 미적 기준의 차이를 살펴볼 수 있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지금이라면 세 화가의 스타일은 외설은커녕 논란거리도 될 수 없겠지만 - 그런데 쉴레의 그림은 분명 낯뜨거운 요소가 많긴 하다. 직접 보면 안다. 나는 이 책을 지하철에서 읽고 있는데 눈치가 좀 보이더라;; - 100년 전엔 사정이 달랐다. 쉴레는 특유의 나르시시즘과 과감한 포즈의 자화상 때문에 여러 번 곤욕을 치뤄야 했는데 심미안이 있는 판사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감옥에 몇 십 년을 썩을 뻔했다고 하니 그냥 해프닝으로 넘길 만한 일은 아니었다. 정말이지, 지금으로선 이런 논란으로 예술가가 감옥에 간다는 게 상상이 안 가는데...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 분위기는 위험천만하게 들리지만 한편으론 한 예술가의 작품 활동이 도시나 나라 전체를 들썩이게 했다는 게 조금 부럽기도 했다. 시대 분위기를 떠나서 그냥 쉴레가 시대를 앞서가는 뛰어난 예술성의 소유자였기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다행히 쉴레는 예술가로서의 기질이 다분하고 자신감도 높았던 사람이라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활동했다고 하는데 이런 사람이 스페인 독감 때문에 단명했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클림트도 그 병으로 죽었고 뭉크도 하마터면 명을 달리할 뻔했는데 -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뭉크는 엄청 장수했다. 평생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던 사람이 여든을 넘겼다는 게 아이러니한 일이다. - 이 대목에서 요즘 유럽에서 코로나가 재확산됐다는 얘기가 떠올라 뭔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뜬금없지만 책을 읽고 나서 병에 대한 경각심이 더 생기게 됐다. 병이란 정말로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뭉크와 쉴레, 클림트의 작품 세계를 둘러보며 표현주의의 의의, 지금에 와선 아주 당연한 회화의 법칙이 예전엔 대단히 파격적으로 여겨졌단 걸 이 책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회화가 사진과 구분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은 모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겠는데 막 사진기가 나왔을 뿐인 100년 전엔 아직 그런 인식이 없었다는 것, 오히려 사물을 미화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리거나 어두운 부분을 강조하는 화풍은 이해받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표현주의'라는 사상이 따로 명명됐다는 것 등이 명확하게 이해가 됐다.

 그런데 위에서 두 번째 부분, 사물의 어두운 부분을 강조하는 작품 세계가 이해받지 못한다는 건 지금까지도 현지진행형인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개인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선 나도 소설가 지망생으로서 학교에서나 주변 동기들과 자주 얘기했던 부분이었던 터라 남일 같지 않게 읽혔다. 이 얘길 시작하면 글이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질 것 같아 간략히 말하자면 -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더 자세히 얘기해보겠다. - 나 역시 사물의 밝은 부분을 자주 얘기하는 것과는 달리 어두운 부분에 대해서는 쉬쉬하는 걸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들 세 화가의 경향이 공감이 많이 갔다. 아마 그래서 내가 이들 작품에 그렇게 끌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뭉크와 클림트의 작품 세계는 언제 접해도 흥미롭고 요번에 본격적으론 처음 접하다시피 한 쉴레의 작품 세계도 흥미롭기 그지없었다. 나중에 쉴레만 다룬 책을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책도 재밌을 것 같으니 한 번 찾아봐야겠다. 물론 그 책에서도 클림트 얘기가 많이 나오겠지만 그래도 보다 디테일한 얘기가 담겨있을 테니 기대가 된다.

화가라면 대상의 외관을 변형시킬 때 추하게 나타내기보다는 이상화시키는 것이 일반이지만 뭉크와 쉴레는 그런 태도를 대상의 진실에서 멀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두 사람은 사물의 밝은 면 못지않게 어두운 면도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 26p




‘회화는 표현이다‘라고 말할 때 ‘예술은 모방이다‘라는 오래된 예술의 정의가 부정될 수 있다. 표현이 하나의 사조ism가 된 것이 좀 이상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특별히 ‘표현‘을 예술의 본질로 탐구하게 된 것은 예술을 단지 모방으로 본 서양미술의 편협한 사고를 부정한 혁명적 성과라 하겠다. - 3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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