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명을 팔았다. 1년에 1만 엔으로 1~3 박스 세트 - 전3권 - 노엔 코믹스
미아키 스가루 지음, 타구치 쇼이치 그림, JYH 옮김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9년 7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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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수명을 팔았다. 1년에 1만엔으로>는 미아키 스가루의 소설 <3일간의 행복>을 만화화한 작품으로 저 제목은 원작 소설이 인터넷에 연재될 때 붙은 제목이라고 한다. 이래나 저래나 바뀐 제목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원래 제목은 작품의 시니컬함을 강조하고 바뀐 제목은 작품의 희망적인 부분을 보다 강조하기 때문이다. 다시 초창기 제목으로 바뀐 이 만화는 전에 읽은 소설과 내용면에서 큰 차이는 없는데 - 기대 이상으로 원작의 내용을 잘 재현됐거니와 오히려 더 잘 살린 부분도 있다. 심지어 문어체 말투까지 살렸다. - 그런 만큼 시니컬한 뉘앙스를 강조하는 저 제목은 뭔가 아쉽다. 너무 길기도 하고. 뭐, 강렬하다는 측면에서 저만한 제목도 없는 것 같지만 말이다.

 이 작품의 내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나라에서 꽤 유명했던 책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와 같은 듯 전혀 다른 결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방금 말한 책에선 결국엔 주인공이 다시 살기로 결심하지만 이 작품에선 주인공인 쿠스노키가 죽는 건 변함이 없다. 돈을 받는 대가로 수명을 팔았다는 설정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는 문제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끝이 정해졌기 때문에 쿠스노키는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거머쥐게 된다. 실제로 죽음에 이르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쿠스노키의 여정을 따라간 독자라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가 행복했으리라 상상하는 건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닐 것이다.


 수명에 대한 파격적인 가격 책정을 시작으로 이 작품은 시종 시니컬한 태도의 인생관을 설파한다.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던 고독한 쿠스노키는 수명을 팔고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자마자 과거의 인연들을 떠올린다. 첫사랑과 고등학교 시절의 유일한 절친,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호감을 보였던 여성을 떠올리지만 쿠스노키의 과거와 미래까지 모든 걸 파악한 감시자 미야기는 그의 낙관적인 기대를 산산조각 낸다. 호감을 보였던 여성을 외면한 쿠스노키는 누구와도 친해질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으며 고등학교 때 절친은 단지 그의 말을 잘 들어줘서 친하다고 생각했을 뿐 진심으로 친구다운 관계를 쌓았던 것도 아니며 첫사랑은 쿠스노키를 증오하기까지 한다. 쿠스노키가 소중하다고 여겼던 과거의 인연들은 결국 그에게 지나간 인연에 불과하며 남은 3개월의 삶을 정리하기에 하등 도움도 안 되고 되려 비참함만 안긴다.

 미래의 삶은 더욱 비관적이다. 수명을 팔아버림으로써 그 미래는 '올 수도 있었지만 이젠 영영 오지 않을 미래'가 돼버렸지만 그 내용이 어찌나 암울한지 쿠스노키는 미래의 삶이 어떤지 듣고나서 수명을 팔길 잘했다는 반응을 보인다. 무언가를 이룩하지도 못하고 행복해지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해 1년당 1만엔 밖에 못 받는다는 미래는 쿠스노키가 걸어왔던 나날들과 무관할 리 없다. 인생은 과거와 미래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네트워크다. 과거가 엉망인데 미래에 갑자기 보란 듯이 밝아질 리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소설도 그렇게 썼다간 개연성이 없다고 비판을 받을 것이다.


 씁쓸하게도 자신이 헐값에 팔아버린 미래의 내용을 듣고 그나마 희색이 만면해진 쿠스노키는 남은 3개월을 알차게 보내 세상에 뭔가 한 방을 먹이고자 한다. 하지만 평생 시한부 인생을 관찰한 감시자 미야기는 그의 허황된 계획을 듣고서 뭔가 착각하는 게 아니냐며 정곡을 찌른다. 과거의 실책을 깨달았다고 단번에 행복을 거머쥘 사람이었다면 미래의 수명이 그렇게 헐값에 책정됐겠냐고. 그리고 행복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나 막연하게 희망을 품게 되는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자신이 숨쉬고 있는 현재에서 거머쥘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인생관 때문인지 이 작품은 행복한 인생이란 어떤 것인지 묻고 있음에도 거창한 목표가 아닌 작지만 확실한 행복과 성취감이란 어떤 것인지 발견하고 실천해가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특기할 만한 부분은 미야기의 조언을 무시하고 과거의 인연을 찾아간 쿠스노키가 결국 깨달음을 얻고 현재에 집중하게 되는 과정과 뜻밖에도 자신과 비슷한 상처와 공감대가 있는 미야기와 가까워지고 결국엔 서로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진중하고 개연성 있게 그려낸 것이다. 원작 소설에선 둘이 가까워지는 전개가 약간 수월하면서 판타지적인 측면이 없잖다고 여겼는데 만화에선 이 부분을 보다 디테일하게 잘 표현한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쿠스노키와 달리 수명이 아닌 시간을 잃어버린 미야기가 세상과 격리된 채 타인의 인생을 관찰하기만 하는 서러움에 대해서 잘 조명했는데 이 부분이 바로 원작 소설가가 언급한 '간지러웠던 부분을 긁어주는' 요소가 아니었나 싶다.


 원작을 5년 전에 군대에서 읽었기 때문인지 내용이 가물가물했지만 소설의 내용을 무척 잘 살린 만화라고 느꼈다. 몇몇 부분은 생략한 것 같지만 만화 작가가 추가한 부분들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는데 그 부분들이 모두 좋았다. 만화를 담당한 작가도 원작을 열심히 분석하고 내면화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원작의 팬으로서 참으로 반가운 만화가 아닐 수 없었다. 오랜만에 군대 동기들한테 연락하고 싶어졌다. 그때 너희들이 빌려 읽고 감동을 받았다는 그 책이 만화로도 나왔다고.

 아마 추측하기로 원작 소설가가 지금의 나와 비슷한 연령대에 이 작품을 집필한 것 같다. 5년 전에도 울림을 주고 지금도 마찬가지고 나중에 또 읽어도 여전히 묵직하리라고 예상된다. 젊은 나이에 암울하지만 과장 없이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잘 풀어낸 작가에게 질투가 나면서도 경이로웠다. 행복은 현재에 있다는 것을 이렇게 극단적인 설정으로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품에서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과거에 대한 미련과 미래에 대한 집착을 필요악처럼 묘사했다. 나는 이런 묘사가 먼길을 돌아 현재에 충실하게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최근 1년 간은 크든 작든 뜻한 바가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는 걸 여러 번 경험했는데 그 과정에서 과거에 이랬으면 하고 자책하거나 그럼에도 미래는 더 나아질 것이라 낙관하며 지낸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그런 날들이 모두 부질없다고 생각할 수 없지만 이뤄질 수 없는 망상을 품느라 정작 현재에 소홀히 했던 건 부정할 수 없다. 비록 나는 이 작품에서 쿠스노키가 했듯 자포자기하며 수명을 팔거나 팔 고민도 하지 않겠지만 만약 판다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싼값이 책정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 점을 부끄러워하며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어지간한 자기계발서보다 훨씬 묵직하지 않나 싶다. 여담이지만 자기계발서를 쓰거나 써봤던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인생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면서.

 예상은 했지만 인생 그 자체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품인 만큼 후기를 남기기가 난감한 작품이었다. 난감했던 이유는 내가 내 인생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게 아직 어색하고 쑥스럽고 덤덤하게 해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 클 것이다. 읽을 때는 몰랐지만 이 포스팅을 쓰면서 아직 스스로가 내공이 부족함을 체감하게 됐다. 더도 덜도 말고 이 책을 다시 읽게 될 때는 지금보다 덜 난감하길 기대해본다. 최소 5년 뒤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3개월이란 시간은 뭔가 바꾸기엔 너무 짧습니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내기엔 너무 길죠. 그렇다면 작더라도 확실한 행복을 쌓아가는 게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요? 이기려고 하니까 지는 거예요. - 1권 제4화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그 사람이 불행해지길 바랐던 것 같아요. 절망하면서 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게... 그 사람이 혼자 꿋꿋하게 살 수 있다는 걸 알고 싶지 않았어요. - 2권 제11화




실패를 고친다고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어. 그때는 어디까지나 성공과 실패 사이의 출발점에 있지. 실패한 인간들은 그런 걸 몰라. - 3권 제13화




보편성이란 주위의 눈에 맞춘 그림에 깃드는 게 아니다. 자신의 우물 빝바닥에 내려가 고생해서 끌어올린 얼핏 지극히 개인적인 성과로 보이는 것에 깃드는 법이다.

그걸 깨달으려면 한차례 순수한 즐거움으로 ‘자신을 위해‘ 그릴 필요가 있었다. - 3권 제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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