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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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이름 때문에 '한때 세계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소설가'라는 농담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실제로 서머셋 몸은 세계에서 가장 몸값이 높았는지는 몰라도 꽤나 탑클래스에 속한 문인인 것은 분명하다. <달과 6펜스>는 몸의 출세작으로 이 작품의 성공 덕에 그의 이전 작품인 <인간의 굴레에서>까지 재조명됐다고도 한다. 출간된 해가 무려 1919년에 나온 소설로 제목은 많이 들어봤는데 실제로 읽어보긴 처음이었다. 독특한 제목 때문에 늘 읽어야지 생각만 했었는데 막상 다 읽으니 본문만으론 제목의 의미를 알 수 없어 하마터면 대단히 실망할 뻔했다. 제목의 의미는 역자 후기에서 밝혀지는데... 은근히 기대하며 읽었던 것에 비해 당혹스럽고 불쾌한 내용의 작품이라 제목의 의미라도 알 수 있던 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달(정신적인 가치)과 6펜스(세속적인 가치)라니... 잘 지은 제목이다. 

 스트릭랜드처럼 위대한 사람이라는 화자의 발언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시종 위대함에 대한 화자의 생각을 다소 두서 없고 장황하게 설명한 탓에 인내심이 심심찮게 요구됐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중이 아닌 집에서 읽었더라면 분명 책장에 도로 넣고 다른 책을 펼쳤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두의 내용이 꽤 중요한 편이었지만 어쨌든 서두치고 흡입력은 많이 떨어졌다. 아무튼 이야기의 시동은 화자가 파리로 가출한 스트릭랜드를 찾아내 가출의 이유를 따지는 장면에서부터 걸리게 된다. 뜬금없이 화가가 되고 싶다고 안정적인 직업과 처자식마저 내팽개친 것도 모자라 그에 대해 조금도 뉘우치거나 나 몰라라 하는 스트릭랜드의 태도가 보는 사람 기가 막히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뭐 기가 막힌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초반에 화자가 장황하게 스트릭랜드의 위대함에 대해 애기했기에 문제가 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느낌이 들어 의구심이 드는 한편 뒤가 궁금해졌다. 화자가 스트릭랜드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달라질 정도의 사건이 뒤에 펼쳐진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그 외면하기 힘든 궁금증 때문에 이래저래 밥맛인 스트릭랜드와 어째 시원시원한 맛이 없어 답답하기 그지없는 화자 등 누구 하나 마음에 드는 인물이 없음에도 모처럼 시간을 내 인내심을 최대로 발휘해 하루 안에 완독해냈다. 그래서 결과는, 나에겐 끝내 스트릭랜드의 '위대함'이란 것이 피부로 와 닿지 않았다. 

 굳이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예술가가 작품 활동을 하기 위해선 얼마간 부도덕한 일이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은근히 많다. 좋은 예술 작품이 분명 여러 사람의 영혼을 구하긴 하지만 그 예술 작품의 탄생을 위해 예술가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줘야 하는 것인지는 난 잘 모르겠다. 마음 같아선 어림도 없으며 그런 부도덕한 행위나 일탈에 기대지 않고서 예술 활동을 이어나갈 수 없다면 예술가이기 이전에 정상적인 직업인으로서 대우받을 자격도 없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극악한 범죄 행위를 제외하고, 때론 그런 행위들마저 포함시켜서, 인간에겐 누구나 권력에 대한 선망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데... 어쨌든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스트릭랜드는 예술가로 살아가기 위해 위악적인 태도를 유지한 건 아닌지 의심도 해봤지만 계속 읽어나가니 딱히 그렇지도 않고 그냥 타고난 도덕적 해이인 것 같아 다른 식으로 스트릭랜드의 됨됨이에 접근해봤다. 


 예술가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이라면 단연 그 예술성 덕분에 주변 인물들이 온갖 기행, 비행이 묵인해주는 것일 텐데 스트릭랜드는 이런 권력을 신인 시절부터 아낌없이 행사한 인물이다. 처음엔 모두가 코웃음을 치지만 이내 모두 호구인가 싶을 정도로 스트릭랜드의 재능과 매력 반해 몸과 마음을 바친다. 스트릭랜드는 그러한 사람들의 태도가 자신의 권력, 아니 특권이라 여기는지 후에 주변 사람들의 삶이 망가지고 그 원흉이 전적으로 자기자신임에도 죄책감도 갖지 않는다. 심지어 그 모습을 힐난하는 화자에게 대는 변명도 가관이라 과연 그에게서 '위대함'을 느낄 수 있을 만한 장면이 뒤에 나올지 진심으로 걱정됐다. 그리고 그 걱정은 어느 정도 그대로 들어맞았다. 

 스트릭랜드는 고갱을 모델로 삼고 만든 캐릭터라고 한다. 고흐는 어느 정도 알아도 고갱은 이름만 들어봤지 의외로 잘 모르는 화가였는데, 듣자하니 작중의 스트릭랜드는 고갱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며 실제 고갱의 삶은 그보다 저질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환상적인 문체로 미화 내지는 돌려 까였던 스트릭랜드와는 다르게 - 묘하게 돌려 까는 듯한 주제의식 전달 방법이 채만식의 '치숙'을 연상시켰다. - 현실의 예술가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이상하고 저질인 자들이 아주 많다. 달리도 기이하기 짝이 없고 피카소나 로댕, 디에고 리베라는 오늘날 페미니스트들이 질색하는 작자들이다. 자의든 타의든 범죄 없이 평탄하게 산 화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화가를 비롯한 모든 예술가의 사생활의 난잡함, 그럼에도 그들의 '위대한' 업적에 그 사생활들이 묻히는 것은 결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니 위대함 운운하는 것이 나에겐 돌려 까기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아무래도 스트릭랜드가 화가라서 그랬던 걸까? 직접 스트릭랜드의 그림을 봤더라면 또 모를까, 화자의 묘사만으로 상상하려니까 내가 소설을 읽으며 쌓아왔던 스트릭랜드의 부정적 인상이 방해해 그의 위대함이 화자가 전달하고자 했던 만큼 내게 전달되지 못했다. 일부러 필력이 딸리는 화자인 척 작가가 의도하며 글을 쓴 것인지, 아니면 원래 이 정도 필력의 저자인 것인지는 저자의 다른 대표작 <인간의 굴레에서>를 통해 확인해야 될 부분이지만... 적어도 이 작품만으론 내겐 '비인간적인 인간이 아이러니하게도 도달할 수 있던 위대함'보단 '위대한 예술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고평가를 받아온 밥맛 인간을 비꼬는' 한편의 블랙유머 소설로 읽혔다. 죽을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인간으로서 가급적 저지르지 않았으면 싶은 짓을 최소한의 망설임도 없이 척척 저지르니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예술가 지망생의 불굴의 의지라며 교훈을 얻기에도 참 거리감이 느껴졌다. 특히, 위대한 예술가와 좋은 인간은 양립하기 어렵다는 전제를 깐 것 같아서 말이다. 여담이지만 좋은 군인과 좋은 인간이 양립하기 어렵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호불호 갈리는 작품이지만 그만큼 이야깃거리도 풍부하고 읽는 사람의 가치관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라서 그 자체로는 굉장히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내게 거의 확실하게 불호였지만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스트릭랜드한테 반감이 드는 것이 내 글이 시원하게 써지지 않는 것에 대한 답답함을 떠올리게 하며 왜 나는 스트릭랜드만큼 단호하게 꿈을 향해 매진하지 못하는지 반문하게 만드는 등 그에게 모종의 질투와 열등감의 발로가 아닌가 하고. 글쎄, 내가 잘 풀리는 소설가라고 해서 스트릭랜드에게 퍽 공감했을 것 같지 않지만, 다른 건 몰라도 질투와 열등감은 지금의 나로선 정말 무시하기 힘든 민낯인 것 같다. 이 질투와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각고의 노력 말고는 답이 없겠지. 하지만 스트릭랜드와 같은 짓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몸소 증명하겠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인간의 천성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를 몰랐다. 성실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가식이 있으며, 고결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비열함이 있고, 불량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있는지 몰랐다. - 56p



여자는 말이오. 자기에게 해를 입힌 사람은 용서하지. 하지만 자기를 위해 희생한 사람은 용서하지 못해. - 20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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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미식가 - 솔로 미식가의 도쿄 맛집 산책, 증보판 ㅣ 고독한 미식가 1
구스미 마사유키 원작, 다니구치 지로 지음, 박정임 옮김 / 이숲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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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초창기에 발매된 버전이 아닌 증보판을 드디어 읽게 됐다. 병원 밥마저 맛있게 먹는 고로의 에피소드와 저자들의 대담이 추가된 증보판은 비록 기존 발매 버전과의 차이가 적긴 하나 팬으로서 그 차이마저 놓칠 수 없었다. 

 드라마는 배우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시즌을 이어나갈 것 같지만 원작 만화는 더 이상 내용이 이어질 수 없다. 그림을 담당한 다니구치 지로가 몇 년 전에 별세했기 때문이다. 이 증보판에 새로 실린 대담에서 다니구치 지로의 생전 모습을 짧게나마 볼 수 있어 그 점이 무엇보다 좋았다. 아직 살아계셨다면 3권도 읽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한편으로 드라마와 달리 만화는 2권에서 딱 멈춘 게 오히려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2권은 드라마 속 고로의 모습을 너무 의식해 기존의 고독한 모습보다 조금 해맑은 모습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1권에서의 냉소적이고 보수적인 모습이 나름대로 매력적인 요소였는데 그 미묘하고도 중요한 지점이 흔들린 것 같아서 차라리 2권에서 멈춘 게 다행이지 않은가 싶었다. 물론 그 이유가 그림 작가가 별세했기 때문이란 건 실로 애석한 일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만약 1권에서와 같은 분위기라면 3권에선 그림이 달라져도 볼 의향이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건 드라마나 영화에서 배우가 바뀌는 것관 차원이 다른 일이다. 만화 <고독한 미식가>는 다니구치 지로의 그림이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말로 본의 아니긴 해도 이 시리즈가 박수칠 때 우리 곁을 떠난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화는 드라마보다 훨씬 다채로운 식당 방문기가 담겨 있다. 드라마보다 메뉴가 다채롭진 않지만 식당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들, 가령 드라마에선 사실상 한 번밖에 다루지 않았던 실패담마저 만화에선 심심찮게 그린 편이다. 화려하지 않고 맛도 그냥저냥이지만 분위기나 가게 점원이 친절해서 기분 좋게 가게 문을 나서는 경우도 있잖은가? 반대로 음식 맛은 출중해도 사장이 밥맛이라 한바탕 싸우는 경우도 우리네 삶에서 적지만 분명 존재한다. 만화는 식당에서 겪을 수 있는 희로애락 거의 대부분을 그려냈고 간단히 길에서 먹는 간식을 비롯해 먹방물에서 다루지 않을 법한 야구장 식당이나 편의점, 심지어 맛이 없다는 병원에서 먹는 밥까지도 소재로 다룬다. 꼭 잘 차려진 음식이 아닌 단순히 뭔가를 먹는다는 행위 자체를 이렇게 사소한 순간 하나까지 진지하게 그린 작품이 또 있을까 싶어 황당하면서 정감이 간다. 

 그래서 진짜 별 내용이 없긴 하고 실제로 읽을 때도 가벼운 기분으로 읽지만 고로가 식당에서 메뉴 고민을 하거나 메뉴 선정 실패로 혀를 차는 모습이 공감이 가 기분 좋게 책장을 넘기게 된다. 뭐 이런 일상적인 내용을 만화로 다 그렸을까 하면서 도리어 그런 꾸밈없음과 과하지 않음에 매료된다. 작가가 생각하는 좋은 식당의 요소를 이 작품이 똑같이 갖고 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이른바 틈새시장을 잘 공략한 작품이라며 감탄스럽기도 했다. 이런 감성의 이야길 만화로 그려내겠다는 생각이 어떤 의미에선 혁명이니까. 


 아, 참고로 책 뒤에 실린 후기도 은근히 재밌다. 드라마에서 본 작가는 완전히 외향적인 사람이었는데 글로 접한 작가는 생각보다 쭈뼛거리며 어딘지 답답한 구석도 있어 과연 동일인물인가 하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만화도 그리고 글도 쓰고 연주도 하고 간간히 연기도 하는 등 - <도쿄타워>를 쓴 릴리 프랭키가 연상된다. - 다재다능한 양반이 처음 간 지방의 미스터리한 분위기의 식당이나 직원들에게 묘하게 쩔쩔매는 이야기가 왜 그렇게 웃기고 공감이 가는지 모르겠다. 

 최근 드라마도 별로 덜 고독해지는 마당에 사실상 진짜 '고독한' 미식가는 1권의 고로가 마지막이란 생각이 드는데 그런 점에서 이 1권은 더욱 귀중하다. 먹방이 주는 특유의 먹음직스러운 묘사는 당연히 드라마에 비해 떨어지지만 나름대로의 사유와 분위기가 압도하는 지라 드라마 못지않게 주기적으로 챙겨볼 듯하다. 그리고 다니구치 지로와 더불어 쿠스미 마사유키의 다른 작품도 찾아 읽어야겠다. 특히 쿠스미 마사유키의 경우 다른 작품을 접한 적이 없어 더욱 궁금하다. 

먹는 사람이 편안하고 안락하게 음식을 즐길 수 없다면, 최고의 요리라 한들 무슨 소용이오? 방해받지 않고, 혼자 조용히 식사할 수 없다면. - 1권 12화



음식을 먹을 때, 고독하게 혼자 무언가를 먹을 때, 나는 이노가시라 고로가 자유로웠다고 믿는다. 그는 그 순간 자유로웠다. 마음대로 행동하고, 시간이나 사회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행복하게 허기를 채움으로써, 현대의 원시인으로 변하여 왜곡되었던 자신을 치유한 것은 아닐까. - 1권 작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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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이르는 병
구시키 리우 지음, 현정수 옮김 / 에이치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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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8.7 







 철학 서적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이 책의 제목을 보고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일본 추리소설 좀 좋아하는 분이라면 <살육에 이르는 병>을 떠올릴 제목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직 읽지 못해서 비교는 못하겠지만 <살육에 이르는 병>을 읽은 나로선 이 책의 제목은 단순히 패러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다고 너무 막 지은 제목이란 뜻은 아니고, 단지... 유명 책의 제목을 센스 있게 비틀어 저자 자신이 연쇄살인자에 대해 갖는 태도를 드러낸다는 게 은근히 재밌게 다가왔다. 

 사회가 고도로 발달하고 범죄는 개개인의 잘못이 아닌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 있는 병폐일 수 있다는 의견이 내가 알기로는 일본에선 80년대 후반에 많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한편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얘기긴 하겠으나 범죄자는 환경이 아닌 유전에서 더 많이 비롯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모르긴 몰라도 난 둘의 주장을 맹신하긴 그렇고 정확히 반반씩 맞는 얘기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그 원인을 들여다보는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 평소 내 지론이었는데 이 작품 <사형에 이르는 병>은 내 평소 생각을 그대로 실현시켜줘 꽤나 반가운 마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어둡고 가독성 떨어지는 이야기일지언정 말이다.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특징으로 타인을 자기 입맛대로 조종하는 특성이 정말 소름 끼치도록 잘 구현된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주인공만이 아니라 독자인 나마저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는데 특히 사람의 성질이 서서히 폭력적으로 변질되어 가는 작중의 몇몇 사례로 인해 착잡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됐다. 결국 폭력성이란 타인이 심어주는 것인가 아니면 원래 내제됐는데 명분이 생기면 지체 없이 터지게 되는 것인가. 작품의 최종 반전에 비하면 이런 질문은 사사로운 수준에 불과하겠으나, 폭력이란 게 정말 주먹으로 누군가의 얼굴을 실제로 가격하는 것만이 아닌 마음을 품는 것만으로도 해당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됐다. 절대로 물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는 개가 없듯 사람 역시 경우에 따라서 동물보다 훨씬 충동적일 수 있기에 '폭력적인 생각을 품는 것의 위험성'이 전에 없이 와 닿은 것 같다. 

 물론 그 자제력 없는 몇몇 문제 있는 인간들 때문에 이 작품을 비롯한 추리소설, 폭력을 다룬 모든 창작물이 검열에 들어가는 건 또 다른 차원의 폭력이라 생각하고 나는 실제로 늘 그렇게 주변에 주장해왔다. 물론 이 작품의 주인공처럼 연쇄살인범의 일대기를 엿봄으로써 희색이 만면해지며 활력 있게 살아가는 골때리는 경우도 있지만, 이 작품의 반전을 생각해본다면 그조차도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한 결과이니 섣불리 '폭력성을 부추기는 작품'이란 근거로 창작물을 검열하려는 태도를 취하는 것도 큰 문제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우린 이 작품의 소재와 이야길 통해 폭력의 위험성과 예측불허함에 대해 간과해선 안 되며 우리가 다소 폭력적일 수 있는 창작물을 정말 아무런 대가 없이 즐겨도 될 만큼 가벼이 여겨선 안 된다는 교훈도 얻었다. 


 쉽게 말해 이러한 작품의 내용은 픽션으로 즐기되 나중에 행여 문제가 되는 상황에 놓였을 때 '이런 책이나 보니까 저러지' 하고 주변에 책잡힐 만한 짓을 저지르거나 아니면 애꿎게 이런 책을 핑계로 내세우는 찌질한 짓은 제발 하지 말잔 것이다. 정말 과장 어린 교훈이란 생각도 들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이 작품의 불쾌함을 반면교사 삼으며 씻어내고 싶다. 그래, 반면교사... 어쩌면 높은 수위의 범죄를 다룬 창작물을 우리가 감상하는 이유는 단지 그 폭력에 매료당해서가 아닌 반면교사 삼으려고 접하고자 하는 것인지 모른다.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감상을 이끌어내면 이보다 더한 교훈도 없으리라. 아, 그래서 작가가 이 책의 제목을 '사형에 이르는 병'이라 지은 건가? 그 병에 걸리지 말라고. 그 병에 걸리면 사람 목숨을 개미 목숨처럼 여기게 되지만 그러한 타락엔 끝이 있다고. 비꼬는 말이 아니라 정말 멋진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점점 더 마음에 드는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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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도르래 - 살인곰 서점의 사건파일 ㅣ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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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시리즈 중 가장 귀여운 표지가 무색하게 <녹슨 도르래>는 어둡고 상당히 무게감 있는 정통 하드보일드 작품이다.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는 와카타케 나나미가 작정하고 쓴 하드보일드 시리즈긴 하나 기본적으로 본인의 장기인 일상 추리물의 정체성 또한 놓치지 않았는데 <녹슨 도르래>는 그런 요소마저 거의 없는, 정말 꿈도 희망도 없는 설정과 전개를 선보인다. 이렇게 잔재주라곤 부리지 않은 플롯의 하드보일드를 언제 마지막으로 읽었을까 하고 생각해볼 정도였다. 

 나도 은근히 일본 소설을 많이 읽었기에 일본식 인명에 꽤 익숙한 편이라 자부했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그 자부심이 적잖이 흔들렸다. 저자나 역자라도 이 작품의 인물 관계도를 그리면 어땠을까 싶다. 그렇지 않아도 플롯도 복잡하고 전개도 상당히 빠르니 쫓아가기 버거웠고 '일본 이름은 그 이름이 그 이름 같아서' 란 말을 하며 백기를 흔들고 싶었던 건 일본 소설 중엔 이 책이 거의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진입 장벽이 사악한 작품은 아니었는데, 시선을 잡아끄는 자극적인 소재나 독특한 세계관을 중시하며 읽던 요즘에 정면으로 일상 속 범죄의 그림자를 쫓는 이 작품의 컨셉이 - 심지어 탐정인 하무라 아키라는 여타 하드보일드 탐정들과는 다르게 허세조차 없으니... - 참 오랜만이라 도리어 어색했던 것 같다. 


 아마 시리즈의 팬이 아니라면 우연히 이 작가의 책을 <녹슨 도르래>로 처음 접할 독자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싶다. 전편에서 이어지는 내용 같은 건 없으니 이 작품부터 접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표지 때문에 괴리감이 들 수도 있는 작품의 설정이나 작품의 진지함 때문에 당혹감을 느낄 독자도 적잖을 듯하다. 반면 와카타케 나나미의 작품을 한두 편 읽은 게 아닌 내게 있어 작가의 냉소적인 문체와 작심한 듯 주인공을 고생시키는 어딘지 고약한 면모, 그리고 단편에서 특히 잘 발휘됐던 구성미가 400페이지 넘는 장편에서도 생각보다 덜 지루하고 어색하지 않게 발휘된 게 아주 인상적인 작품이다. <녹슨 도르래>는 시리즈 최고의 작품은 아닐지언정 근래 보기 드문 깊이감이 작가의 노련한 솜씨와 더불어 눈부시게 빛나는 작품이라 보기에 손색이 없었다. 

 특히 하무라 아키라가 탐정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자각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사건을 파헤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무라 아키라는 예전엔 시종 시니컬하고 트러블에게 사랑을 받는 트러블 메이커라는 정체성이 더 부각됐지 탐정은 어디까지나 그녀를 거쳐간 수많은 직업 중 가장 적성에 맞을 뿐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기에 시리즈 2기의 서막을 알린 <이별의 수법>보다 더한 시련을 이 작품에서 겪으며 탐정으로서의 일종의 사명감을 전혀 어색하다거나 낯간지럽지 않게 자각하는 결말부가 그렇게 인상적일 수 없었다. 솔직히 이 작품에서 겪은 사건을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하무라는 전과 마찬가지로 운 나쁘게 휘말린 것에 지나지 않아 결말에서와 같은 심상의 변화가 와 닿지 않을 법도 했는데 실제론 그런 어색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귀찮은 것도 싫고 탐정이랍시고 착취당하는 건 더 싫고 경찰한테 모욕을 당하는 것도 마뜩찮고 범인이건 나발이건 간에 무례한 것들은 질색인 하무라 아키라는 이 작품에서 어딘지 심적으로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며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훈훈한 장면이 연출됐지만 작가가 더 이상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예측 불허하고 비극적인 일들을 연달아 하무라 아키라와 그 주변 인물들에게 선사한다. 계속 표지를 언급하는 게 좀 그렇지만 책의 저 귀여운 표지만으론 도저히 감도 안 잡히는 어둡고 민감한 소재가 많이 나와 가급적 언급을 하지 않고 직접 읽어보길 권하는 게 내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작품의 모든 인과를 조리 있게 설명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인상을 나열하는 식으로 감상을 남기는 것이지만... 

 이 작품의 후속작 <불온한 잠>은 단편집이라고 한다. <녹슨 도르래> 못지않게 귀여운 표지와 의미심장한 제목이 눈길을 끄는 책으로 수록작들에서 하무라 아키라가 또 어떤 심각한 일들에 휘말리고 상처 입을지 기대되면서도 걱정이 된다. 사람에 따라 아직 한창이라 여기는 경우도 있지만 마흔을 넘긴 하무라를 보면 정말이지 첫 등장에 비해 노쇠해져 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데 어째 갈수록 겪는 사건들의 수위는 점점 높아져만 가는 것 같다. 누가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를 언급하기도 하던데 나도 동의한다. 도대체 나중에 어떤 행복을 안겨주려고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건지... 아니, 과연 행복을 안겨주고픈 마음이 있기나 한 건지 의심된다. 물론 캐릭터의 운명은 누가 뭐라 하든 최종적으로 작가의 마음에 달린 것이지만, 이 정도로 오래 독자들과 만난 캐릭터들인 만큼 해리 홀레나 하무라 아키라의 행보가 독자로선 이젠 좀 광명해졌으면 하고 바라는 걸 작가들도 알아줬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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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 gone 2 - 완결
수신지 지음, 윤정원 외 감수 / 귤프레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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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낙태를 소재로 한 만화 <곤>은 <며느라기>로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한 수신지 작가의 작품이다. <며느라기>에서 호평을 받았던 요소들, 이를 테면 귀여운 그림체와 대비되는 서늘한 비판은 이 작품에서도 건재했는데 차이가 있다면 소재가 소재라 그런지 보다 명확히 비판적인 주제의식을 갖고서 연재에 임한 것이었다. 1권에 수록된 작가 노트를 보면 상당한 연구 끝에 연재에 들어간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아쉽게도 기획했던 모든 요소가 완벽히 녹아들진 않았으나 낙태를 죄로 몰아가는 개념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불합리하단 걸 역설해냈다는 점에서 완전히 대성공을 거둔 작품이었다. 

 흡사 유명 고전 SF 소설 <시녀 이야기>의 프리퀄로 쳐도 무방할 정도의 작품으로 출산을 신성시한 나머지 막장으로 치닫는 국가의 모습을 작가는 유감없이 그려낸다. 막장인 점이 어디 한둘은 아니지만 가장 압권이었던 것은 과거에 낙태를 한 여성도 색출해 죄를 묻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만약 여성 징병제를 하게 되면 실질적으로 어느 연령대의 여성까지 징집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질문과 유사해 법의 형평성을 달성시킨다는 게 정말 미치도록 어려운 일이란 걸, 그렇기에 작중 세계관이 얼마나 막장인지 남성 독자인 나에게도 전혀 어렵지 않게 와 닿았다. 페미니스트들이 제기하는 문제가 적절한 예시가 동반되지 못하면 때론 지독히도 와 닿지 않은 걸 생각하면 작중 세계관의 막장스러움을 드러내는 장치치고도 너무 무리수였던 '과거의 낙태 여성 색출'이란 전개가 극단적일지언정 여러모로 필수불가결한 전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국민 수준에 맞는 정부와 정책이 나오기 마련이라니까 마냥 허무맹랑한 전개도 아니었고 말이다. 


 일본 작가 가키야 미우의 소설 <70세 사망법안, 가결>과 유사점이 많은 작품이었는데 정부가 이 정도로 막장 정책을 펼치게 된 계기나 물러나는 원인엔 설명과 설정이 부족하거나 썰렁했던 것, 그리고 소재의 스케일에 비해 그 제도로 인해 피해를 입는 한 가족을 비추는 등 디테일한 묘사에 집중했다는 것이 특히 비슷했다. 전자의 요소는 나름대로 독자로 하여금 더욱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써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후자는 독자마다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까 싶은데 나는 개인적으로 아주 좋았다. 일찍이 이 작가가 미묘한 가족 갈등의 점화나 폭발을 <며느라기>에서 성공적으로 선보인 바가 있는데 이 작품은 등장인물들이 훨씬 많은 탓에 인물 묘사가 그 작품보다 상대적으로 단편적이긴 해도 기본 성격 자체가 답답하지가 않아 좋게 말해 아주 사이다였지만, 반대로 매사에 공격적으로 진행돼 가독성이 좋은 것에 비해 읽기 불편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여성들을 하루 아침에 범죄자로 몰아가는 작중 세계관 때문에 갈등이 폭발하거나 공격적인 언사가 오가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는데 주요 인물들 사이의 갈등 몇 개가 석연찮게 봉합돼서 나름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의 결말이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일단 작중 주인공 중 삼남매 중 첫째인 노민형은 자식 때문에 남편과 이혼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이었지만 남편이란 작자가 입만 번지르르하지 실상은 아주 꽉 막힌 인물인 터라 언제 언제 갈등이 터지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고 낙태죄 폐지가 되지 않았더라면 이혼은 기정사실이었기에 그 이혼이 불발된 게 내심 불만이었다. 정작 민형은 물론이고 민형의 남편은 자신이 아내에게 상처를 줬으리라고 자각도 못했을 가능성이 커 이 부부에게 드리운 그림자는 어둡기 그지없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부부가 자식 때문에 마지못해 이혼하지 않는다면 아직 자녀가 없는 둘째 노민아는 결단을 내린다. 노민아는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호감이 간 인물인데 자식을 키울 자신이 없어 낙태를 고려하는 모습이 아주 바람직해 그녀가 무슨 선택을 하든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가정폭력을 다룬 만화 <단지>을 읽어서 그런가 준비가 안 된 부모가 아이가 생겼다는 이유로 낳아 키우는 건 그야말로 무책임함의 극치임을 제대로 깨달아 특히 공감했던 것 같다. 그밖에도 결혼 생활엔 꼭 자녀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고 자식의 성을 꼭 아버지의 성으로 해야 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등 내가 평소에 의문을 갖던 부분에 대해 아주 시원스런 태도와 철학을 갖고 있어 그녀가 어쩌다 그런 한심한 남자와 결혼까지 했는지 의심이 들기까지 했다.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성씨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는 남자들의 마음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와 닿지 않았다. 물론 나와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을 보면 약간이라도 더 반가운 마음이 들기야 하지만 그래봤자 성이란 건 글씨에 불과하고 아이도 혼자 만들어서 키우는 게 아니니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처럼 부모의 성 둘 다 넣어야 하는 게 - 정말 여담이지만 스페인/포르투갈 위인 중 우리도 알 만한 인물 몇 명은 모계 성씨를 쓰고 있다. 벨라스케스, 피카소, 페소아... - 도의적으로나 합리적으로나 더 옳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작중 세계관에 따르면 낙태를 하면 여자가 죄인이고 남자는 아닌데, 여자가 힘들게 출산해도 (남자 입장에서) 성씨를 주는 영광을 남자만 갖고 있다는 것도 확실히 이상하고 불합리하긴 하다. 학교에 가면 자식이 손가락질을 당하면 안 된다는 이유로 아빠 성을 주는 가정이 적지 않다는데, 차라리 그런 이유라면 딱하게도 납득은 가지만 작중 남성들이 말한 것처럼 '남자는 자기 자식이 당연히 자기 성을 물려받을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왔으니 이 부분은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는 여자들이 양보해라' 라는 논리는 남자인 내가 들어도 헛웃음이 다 나왔다. 부디 모든 남자가 다 저렇게 생각한다고 여성분들은 생각하지 말아주시길. 같이 남자로 엮이기도 싫은 논리니까.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들에 질문을 던진다는 점이었다. 그에 대한 작가의 대안이나 주장엔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언정 이와 같은 질문은 퍽 중요했다. 그리고 낙태죄 찬성론자가 낙태에 죄를 부여하는 근거로 도덕성을 들먹이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국가의 출산율과 도덕성인데, 내 생각에 출산율은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만 태아 살해니 도덕성이니 하는 건 말 그대로 전근대적이라 때때로 들어주기 민망할 정도였다. 출산율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국민의 수가 많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건강한 국민이 많은 게 중요할 텐데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이 덜컥 임신했을 때 보호해주긴커녕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은 전형적으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태도다. 그렇게 낳은 아이가 퍽이나 잘 자라겠다. 차라리 지구온난화나 환경 보호 운동과 같은 맥락으로 출산율 장려와 그에 관한 혜택을 강조하는 쪽으로 진행시키면 또 모를까, 덮어놓고 낙태한 여자들을 감옥으로 보내는 작품의 설정은 황당하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낳았다. 과연 우리네 현실은 이 만화 속 세계와 다르면 얼마나 다르단 말인가. 


 하지만 셋째 노민태와 여자친구 나샛별의 에피소드는 다소 미묘했다. 이 두 커플의 에피소드는 현재진행형으로, 낙태죄가 합법화됐을 때 하필 덜컥 임신한 샛별이가 우여곡절 끝에 낙태를 결심하고 그 과정에서 남자친구 민태에 실망하고 헤어지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상황이 하도 절망적인 나머지 샛별이는 누구도 돌을 던지기 힘든 피해자로 이 작품에 내내 등장하는데, 난 이런 연출엔 다소 동의하기 힘들었다. 얘길 들어보니까 억지로 성관계한 끝에 생긴 아이도 아니고 또 민태가 남자가 보기에도 멋대가리가 없는 남자긴 하지만 둘이 똑같이 수술비를 냈음에도 막상 수술에 들어가자 태아는 사망한 지 오래라 낙태죄가 적용도 안 되고 수술비도 적게 든다는 걸 안 샛별이가 민태가 낸 수술비를 돌려주지 않은 것은 엄연한 사기가 아닌가 싶었다. 

 뿐만 아니라 과정이 얼마나 실망스러웠든 캐나다 유학을 포기하고서 낸 민태 몫의 400만 원을 샛별이가 고스란히 자신의 캐나다 유학에 써버리는 것엔 정말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본인은 이 모든 일에 있어서 그저 피해자라 여겼고 남자친구 돈은 자길 임신시켰다는 괘씸죄 때문에 꿀꺽한 건가? 임신의 원인이 된 성관계가 어떤 경위에서 벌어졌고 샛별이의 의지가 얼마나 개입됐는지는 작중에서 그려지지 않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낙태가 여성의 권리이자 자유라면 임신은 곧 책임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어쩌다 보니 저렇게 사기를 친 꼴이 된 샛별이의 선택이나 태도는 이 작품에 있어 엄청난 옥의 티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남자라 그런 건지 어쩌면 샛별이에겐 영원히 감정을 이입하지 못할 것 같다. 


 끝으로 샛별이가 아나운서가 된 모습이 에필로그에 나올 때 단발인 것도 너무 전형적인 클리셰라 코웃음이 나왔던 것도 얘기해야겠다. 탈코르셋과 단발, 화장하지 않는 것의 의의와 무관하게 그냥 너무나도 보여주기식인 것 같아서 말이다. 그렇게라도 이 작품이 페미니즘 작품임을 공고히 하는 게 그렇게도 중요한가? 몇몇 의문점과 석연찮은 옥의 티에도 불구하고 <곤>은 좋은 작품이지만, 작가 후기나 노골적인 페미니즘 색채는 오히려 사족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 페미니즘 색채야 작가의 표현의 자유니까 문제 삼을 순 없지만 작가 후기는 이 작품이 더 좋은 작품이 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변명 같은 느낌이라 좀 더 간결하게 썼어야 했다고 본다. 가령, '돌봄의 담당하는 여성이 떠난 세계'라는 의미로 지은 작품의 제목 곤GONE은 시놉시스로 접했을 땐 아주 매력적이지만 작품에는 반영도 되기 전에 결말이 나버렸기에 차라리 안 읽었으면 독자 나름대로 이리 뜯고 저리 뜯으며 음미하는 재미가 있었을 텐데, 그 점이 반감되는 등 여러모로 득보단 실이 많았다. 

 하긴, 이렇게 사회적인 메시지가 강한 작품일수록 독자 마음대로 이야길 음미하는 꼴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법이지만, 작가도 이미 알고 있겠으나 메시지가 강한 사람은 그 메시지가 강한 만큼 환대 못지않게 반발도 세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의 메시지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꽤 성공적으로 녹여내 이 작품으로 인해 받을 비판 또한 묵묵히 감내해야 할 것이다. <며느라기>는 이런 아쉬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작품이었는데... 아무튼 <곤>은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드는 한편, 왠지 이 작품보다 더 못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들게 하는 복잡한 작품인데, 부디 내 걱정따윈 기우에 불과한 멋진 작품을 그려주길 바란다. <곤>의 후속작도 나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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