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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평점 :
9.2
이름 때문에 '한때 세계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소설가'라는 농담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실제로 서머셋 몸은 세계에서 가장 몸값이 높았는지는 몰라도 꽤나 탑클래스에 속한 문인인 것은 분명하다. <달과 6펜스>는 몸의 출세작으로 이 작품의 성공 덕에 그의 이전 작품인 <인간의 굴레에서>까지 재조명됐다고도 한다. 출간된 해가 무려 1919년에 나온 소설로 제목은 많이 들어봤는데 실제로 읽어보긴 처음이었다. 독특한 제목 때문에 늘 읽어야지 생각만 했었는데 막상 다 읽으니 본문만으론 제목의 의미를 알 수 없어 하마터면 대단히 실망할 뻔했다. 제목의 의미는 역자 후기에서 밝혀지는데... 은근히 기대하며 읽었던 것에 비해 당혹스럽고 불쾌한 내용의 작품이라 제목의 의미라도 알 수 있던 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달(정신적인 가치)과 6펜스(세속적인 가치)라니... 잘 지은 제목이다.
스트릭랜드처럼 위대한 사람이라는 화자의 발언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시종 위대함에 대한 화자의 생각을 다소 두서 없고 장황하게 설명한 탓에 인내심이 심심찮게 요구됐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중이 아닌 집에서 읽었더라면 분명 책장에 도로 넣고 다른 책을 펼쳤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두의 내용이 꽤 중요한 편이었지만 어쨌든 서두치고 흡입력은 많이 떨어졌다. 아무튼 이야기의 시동은 화자가 파리로 가출한 스트릭랜드를 찾아내 가출의 이유를 따지는 장면에서부터 걸리게 된다. 뜬금없이 화가가 되고 싶다고 안정적인 직업과 처자식마저 내팽개친 것도 모자라 그에 대해 조금도 뉘우치거나 나 몰라라 하는 스트릭랜드의 태도가 보는 사람 기가 막히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뭐 기가 막힌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초반에 화자가 장황하게 스트릭랜드의 위대함에 대해 애기했기에 문제가 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느낌이 들어 의구심이 드는 한편 뒤가 궁금해졌다. 화자가 스트릭랜드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달라질 정도의 사건이 뒤에 펼쳐진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그 외면하기 힘든 궁금증 때문에 이래저래 밥맛인 스트릭랜드와 어째 시원시원한 맛이 없어 답답하기 그지없는 화자 등 누구 하나 마음에 드는 인물이 없음에도 모처럼 시간을 내 인내심을 최대로 발휘해 하루 안에 완독해냈다. 그래서 결과는, 나에겐 끝내 스트릭랜드의 '위대함'이란 것이 피부로 와 닿지 않았다.
굳이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예술가가 작품 활동을 하기 위해선 얼마간 부도덕한 일이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은근히 많다. 좋은 예술 작품이 분명 여러 사람의 영혼을 구하긴 하지만 그 예술 작품의 탄생을 위해 예술가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줘야 하는 것인지는 난 잘 모르겠다. 마음 같아선 어림도 없으며 그런 부도덕한 행위나 일탈에 기대지 않고서 예술 활동을 이어나갈 수 없다면 예술가이기 이전에 정상적인 직업인으로서 대우받을 자격도 없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극악한 범죄 행위를 제외하고, 때론 그런 행위들마저 포함시켜서, 인간에겐 누구나 권력에 대한 선망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데... 어쨌든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스트릭랜드는 예술가로 살아가기 위해 위악적인 태도를 유지한 건 아닌지 의심도 해봤지만 계속 읽어나가니 딱히 그렇지도 않고 그냥 타고난 도덕적 해이인 것 같아 다른 식으로 스트릭랜드의 됨됨이에 접근해봤다.
예술가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이라면 단연 그 예술성 덕분에 주변 인물들이 온갖 기행, 비행이 묵인해주는 것일 텐데 스트릭랜드는 이런 권력을 신인 시절부터 아낌없이 행사한 인물이다. 처음엔 모두가 코웃음을 치지만 이내 모두 호구인가 싶을 정도로 스트릭랜드의 재능과 매력 반해 몸과 마음을 바친다. 스트릭랜드는 그러한 사람들의 태도가 자신의 권력, 아니 특권이라 여기는지 후에 주변 사람들의 삶이 망가지고 그 원흉이 전적으로 자기자신임에도 죄책감도 갖지 않는다. 심지어 그 모습을 힐난하는 화자에게 대는 변명도 가관이라 과연 그에게서 '위대함'을 느낄 수 있을 만한 장면이 뒤에 나올지 진심으로 걱정됐다. 그리고 그 걱정은 어느 정도 그대로 들어맞았다.
스트릭랜드는 고갱을 모델로 삼고 만든 캐릭터라고 한다. 고흐는 어느 정도 알아도 고갱은 이름만 들어봤지 의외로 잘 모르는 화가였는데, 듣자하니 작중의 스트릭랜드는 고갱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며 실제 고갱의 삶은 그보다 저질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환상적인 문체로 미화 내지는 돌려 까였던 스트릭랜드와는 다르게 - 묘하게 돌려 까는 듯한 주제의식 전달 방법이 채만식의 '치숙'을 연상시켰다. - 현실의 예술가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이상하고 저질인 자들이 아주 많다. 달리도 기이하기 짝이 없고 피카소나 로댕, 디에고 리베라는 오늘날 페미니스트들이 질색하는 작자들이다. 자의든 타의든 범죄 없이 평탄하게 산 화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화가를 비롯한 모든 예술가의 사생활의 난잡함, 그럼에도 그들의 '위대한' 업적에 그 사생활들이 묻히는 것은 결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니 위대함 운운하는 것이 나에겐 돌려 까기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아무래도 스트릭랜드가 화가라서 그랬던 걸까? 직접 스트릭랜드의 그림을 봤더라면 또 모를까, 화자의 묘사만으로 상상하려니까 내가 소설을 읽으며 쌓아왔던 스트릭랜드의 부정적 인상이 방해해 그의 위대함이 화자가 전달하고자 했던 만큼 내게 전달되지 못했다. 일부러 필력이 딸리는 화자인 척 작가가 의도하며 글을 쓴 것인지, 아니면 원래 이 정도 필력의 저자인 것인지는 저자의 다른 대표작 <인간의 굴레에서>를 통해 확인해야 될 부분이지만... 적어도 이 작품만으론 내겐 '비인간적인 인간이 아이러니하게도 도달할 수 있던 위대함'보단 '위대한 예술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고평가를 받아온 밥맛 인간을 비꼬는' 한편의 블랙유머 소설로 읽혔다. 죽을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인간으로서 가급적 저지르지 않았으면 싶은 짓을 최소한의 망설임도 없이 척척 저지르니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예술가 지망생의 불굴의 의지라며 교훈을 얻기에도 참 거리감이 느껴졌다. 특히, 위대한 예술가와 좋은 인간은 양립하기 어렵다는 전제를 깐 것 같아서 말이다. 여담이지만 좋은 군인과 좋은 인간이 양립하기 어렵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호불호 갈리는 작품이지만 그만큼 이야깃거리도 풍부하고 읽는 사람의 가치관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라서 그 자체로는 굉장히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내게 거의 확실하게 불호였지만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스트릭랜드한테 반감이 드는 것이 내 글이 시원하게 써지지 않는 것에 대한 답답함을 떠올리게 하며 왜 나는 스트릭랜드만큼 단호하게 꿈을 향해 매진하지 못하는지 반문하게 만드는 등 그에게 모종의 질투와 열등감의 발로가 아닌가 하고. 글쎄, 내가 잘 풀리는 소설가라고 해서 스트릭랜드에게 퍽 공감했을 것 같지 않지만, 다른 건 몰라도 질투와 열등감은 지금의 나로선 정말 무시하기 힘든 민낯인 것 같다. 이 질투와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각고의 노력 말고는 답이 없겠지. 하지만 스트릭랜드와 같은 짓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몸소 증명하겠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인간의 천성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를 몰랐다. 성실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가식이 있으며, 고결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비열함이 있고, 불량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있는지 몰랐다. - 56p
여자는 말이오. 자기에게 해를 입힌 사람은 용서하지. 하지만 자기를 위해 희생한 사람은 용서하지 못해. - 20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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