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도르래 - 살인곰 서점의 사건파일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0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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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시리즈 중 가장 귀여운 표지가 무색하게 <녹슨 도르래>는 어둡고 상당히 무게감 있는 정통 하드보일드 작품이다.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는 와카타케 나나미가 작정하고 쓴 하드보일드 시리즈긴 하나 기본적으로 본인의 장기인 일상 추리물의 정체성 또한 놓치지 않았는데 <녹슨 도르래>는 그런 요소마저 거의 없는, 정말 꿈도 희망도 없는 설정과 전개를 선보인다. 이렇게 잔재주라곤 부리지 않은 플롯의 하드보일드를 언제 마지막으로 읽었을까 하고 생각해볼 정도였다. 

 나도 은근히 일본 소설을 많이 읽었기에 일본식 인명에 꽤 익숙한 편이라 자부했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그 자부심이 적잖이 흔들렸다. 저자나 역자라도 이 작품의 인물 관계도를 그리면 어땠을까 싶다. 그렇지 않아도 플롯도 복잡하고 전개도 상당히 빠르니 쫓아가기 버거웠고 '일본 이름은 그 이름이 그 이름 같아서' 란 말을 하며 백기를 흔들고 싶었던 건 일본 소설 중엔 이 책이 거의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진입 장벽이 사악한 작품은 아니었는데, 시선을 잡아끄는 자극적인 소재나 독특한 세계관을 중시하며 읽던 요즘에 정면으로 일상 속 범죄의 그림자를 쫓는 이 작품의 컨셉이 - 심지어 탐정인 하무라 아키라는 여타 하드보일드 탐정들과는 다르게 허세조차 없으니... - 참 오랜만이라 도리어 어색했던 것 같다. 


 아마 시리즈의 팬이 아니라면 우연히 이 작가의 책을 <녹슨 도르래>로 처음 접할 독자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싶다. 전편에서 이어지는 내용 같은 건 없으니 이 작품부터 접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표지 때문에 괴리감이 들 수도 있는 작품의 설정이나 작품의 진지함 때문에 당혹감을 느낄 독자도 적잖을 듯하다. 반면 와카타케 나나미의 작품을 한두 편 읽은 게 아닌 내게 있어 작가의 냉소적인 문체와 작심한 듯 주인공을 고생시키는 어딘지 고약한 면모, 그리고 단편에서 특히 잘 발휘됐던 구성미가 400페이지 넘는 장편에서도 생각보다 덜 지루하고 어색하지 않게 발휘된 게 아주 인상적인 작품이다. <녹슨 도르래>는 시리즈 최고의 작품은 아닐지언정 근래 보기 드문 깊이감이 작가의 노련한 솜씨와 더불어 눈부시게 빛나는 작품이라 보기에 손색이 없었다. 

 특히 하무라 아키라가 탐정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자각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사건을 파헤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무라 아키라는 예전엔 시종 시니컬하고 트러블에게 사랑을 받는 트러블 메이커라는 정체성이 더 부각됐지 탐정은 어디까지나 그녀를 거쳐간 수많은 직업 중 가장 적성에 맞을 뿐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기에 시리즈 2기의 서막을 알린 <이별의 수법>보다 더한 시련을 이 작품에서 겪으며 탐정으로서의 일종의 사명감을 전혀 어색하다거나 낯간지럽지 않게 자각하는 결말부가 그렇게 인상적일 수 없었다. 솔직히 이 작품에서 겪은 사건을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하무라는 전과 마찬가지로 운 나쁘게 휘말린 것에 지나지 않아 결말에서와 같은 심상의 변화가 와 닿지 않을 법도 했는데 실제론 그런 어색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귀찮은 것도 싫고 탐정이랍시고 착취당하는 건 더 싫고 경찰한테 모욕을 당하는 것도 마뜩찮고 범인이건 나발이건 간에 무례한 것들은 질색인 하무라 아키라는 이 작품에서 어딘지 심적으로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며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훈훈한 장면이 연출됐지만 작가가 더 이상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예측 불허하고 비극적인 일들을 연달아 하무라 아키라와 그 주변 인물들에게 선사한다. 계속 표지를 언급하는 게 좀 그렇지만 책의 저 귀여운 표지만으론 도저히 감도 안 잡히는 어둡고 민감한 소재가 많이 나와 가급적 언급을 하지 않고 직접 읽어보길 권하는 게 내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작품의 모든 인과를 조리 있게 설명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인상을 나열하는 식으로 감상을 남기는 것이지만... 

 이 작품의 후속작 <불온한 잠>은 단편집이라고 한다. <녹슨 도르래> 못지않게 귀여운 표지와 의미심장한 제목이 눈길을 끄는 책으로 수록작들에서 하무라 아키라가 또 어떤 심각한 일들에 휘말리고 상처 입을지 기대되면서도 걱정이 된다. 사람에 따라 아직 한창이라 여기는 경우도 있지만 마흔을 넘긴 하무라를 보면 정말이지 첫 등장에 비해 노쇠해져 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데 어째 갈수록 겪는 사건들의 수위는 점점 높아져만 가는 것 같다. 누가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를 언급하기도 하던데 나도 동의한다. 도대체 나중에 어떤 행복을 안겨주려고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건지... 아니, 과연 행복을 안겨주고픈 마음이 있기나 한 건지 의심된다. 물론 캐릭터의 운명은 누가 뭐라 하든 최종적으로 작가의 마음에 달린 것이지만, 이 정도로 오래 독자들과 만난 캐릭터들인 만큼 해리 홀레나 하무라 아키라의 행보가 독자로선 이젠 좀 광명해졌으면 하고 바라는 걸 작가들도 알아줬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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