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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이르는 병
구시키 리우 지음, 현정수 옮김 / 에이치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8.7
철학 서적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이 책의 제목을 보고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일본 추리소설 좀 좋아하는 분이라면 <살육에 이르는 병>을 떠올릴 제목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직 읽지 못해서 비교는 못하겠지만 <살육에 이르는 병>을 읽은 나로선 이 책의 제목은 단순히 패러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다고 너무 막 지은 제목이란 뜻은 아니고, 단지... 유명 책의 제목을 센스 있게 비틀어 저자 자신이 연쇄살인자에 대해 갖는 태도를 드러낸다는 게 은근히 재밌게 다가왔다.
사회가 고도로 발달하고 범죄는 개개인의 잘못이 아닌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 있는 병폐일 수 있다는 의견이 내가 알기로는 일본에선 80년대 후반에 많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한편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얘기긴 하겠으나 범죄자는 환경이 아닌 유전에서 더 많이 비롯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모르긴 몰라도 난 둘의 주장을 맹신하긴 그렇고 정확히 반반씩 맞는 얘기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그 원인을 들여다보는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 평소 내 지론이었는데 이 작품 <사형에 이르는 병>은 내 평소 생각을 그대로 실현시켜줘 꽤나 반가운 마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어둡고 가독성 떨어지는 이야기일지언정 말이다.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특징으로 타인을 자기 입맛대로 조종하는 특성이 정말 소름 끼치도록 잘 구현된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주인공만이 아니라 독자인 나마저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는데 특히 사람의 성질이 서서히 폭력적으로 변질되어 가는 작중의 몇몇 사례로 인해 착잡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됐다. 결국 폭력성이란 타인이 심어주는 것인가 아니면 원래 내제됐는데 명분이 생기면 지체 없이 터지게 되는 것인가. 작품의 최종 반전에 비하면 이런 질문은 사사로운 수준에 불과하겠으나, 폭력이란 게 정말 주먹으로 누군가의 얼굴을 실제로 가격하는 것만이 아닌 마음을 품는 것만으로도 해당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됐다. 절대로 물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는 개가 없듯 사람 역시 경우에 따라서 동물보다 훨씬 충동적일 수 있기에 '폭력적인 생각을 품는 것의 위험성'이 전에 없이 와 닿은 것 같다.
물론 그 자제력 없는 몇몇 문제 있는 인간들 때문에 이 작품을 비롯한 추리소설, 폭력을 다룬 모든 창작물이 검열에 들어가는 건 또 다른 차원의 폭력이라 생각하고 나는 실제로 늘 그렇게 주변에 주장해왔다. 물론 이 작품의 주인공처럼 연쇄살인범의 일대기를 엿봄으로써 희색이 만면해지며 활력 있게 살아가는 골때리는 경우도 있지만, 이 작품의 반전을 생각해본다면 그조차도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한 결과이니 섣불리 '폭력성을 부추기는 작품'이란 근거로 창작물을 검열하려는 태도를 취하는 것도 큰 문제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우린 이 작품의 소재와 이야길 통해 폭력의 위험성과 예측불허함에 대해 간과해선 안 되며 우리가 다소 폭력적일 수 있는 창작물을 정말 아무런 대가 없이 즐겨도 될 만큼 가벼이 여겨선 안 된다는 교훈도 얻었다.
쉽게 말해 이러한 작품의 내용은 픽션으로 즐기되 나중에 행여 문제가 되는 상황에 놓였을 때 '이런 책이나 보니까 저러지' 하고 주변에 책잡힐 만한 짓을 저지르거나 아니면 애꿎게 이런 책을 핑계로 내세우는 찌질한 짓은 제발 하지 말잔 것이다. 정말 과장 어린 교훈이란 생각도 들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이 작품의 불쾌함을 반면교사 삼으며 씻어내고 싶다. 그래, 반면교사... 어쩌면 높은 수위의 범죄를 다룬 창작물을 우리가 감상하는 이유는 단지 그 폭력에 매료당해서가 아닌 반면교사 삼으려고 접하고자 하는 것인지 모른다.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감상을 이끌어내면 이보다 더한 교훈도 없으리라. 아, 그래서 작가가 이 책의 제목을 '사형에 이르는 병'이라 지은 건가? 그 병에 걸리지 말라고. 그 병에 걸리면 사람 목숨을 개미 목숨처럼 여기게 되지만 그러한 타락엔 끝이 있다고. 비꼬는 말이 아니라 정말 멋진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점점 더 마음에 드는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