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김혜은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8.1






 거의 정설로 통하는 '독일인의 썰렁한 유머 감각'을 적어도 나만은 부정하게 만들었던 책. 7년 전에 읽고 7년만에 다시 읽었는데 유머 포인트가 많이 달라졌는지 옛날만큼 웃기진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독일인의 썰렁한 유머 감각'에는 마냥 동의하지 못하게 한다.

 독일의 코미디언, 만담가인 호어스트 에버스가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이나 만담 대본이나 사설 같은 것들을 모은 책이다. 그렇다 보니 구성적인 부분에서 잡다한 구석이 있으나 개개의 작문을 살펴보면 무릎을 치며 터지게 만드는 유머도 존재한다. 유머 코드가 맞지 않아 곤혹스러울 때도 있지만 이건 문화권이 달라서 그런 것일지 모르니 무턱대고 '독일인은 역시 유머 감각이 떨어진다'고 단정 짓기도 애매하다.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이야기다.


 짧고 가볍다. 제목에서부터 풍겨오는 가벼움은 절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실상은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다. 각 파트가 너무 짧아서 적으면 스포일러가 되니 좀 애매한데 그래도 제목만 열거하자면


화요일 파트 - '헤딩슛은 아무나 하나'

목요일 파트 - '베를린식 흥정', '쟤는 대체 누굴 닮아...'

금요일 파트 - '실황중계'

토요일 파트 - '알뜰여행의 끝', '독일인으로서 여행한다는 것'

그리고 에필로그


 정도다. 열거하니 그리 많지 않지만 그래도 이 글들 때문에라도 심심하면 가끔 들춰보고 그럴 것 같다. 아무리 가볍다 할지라도.



 p.s 어느 작품을 읽어도 주석을 이딴 식으로 다는 작가는 본 적이 없다. 이렇게 대놓고 웃기려고 개인적인 생각을 마구 적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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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플 라이프
기타가와 에리코 지음, 김난주 옮김 / 해냄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7.7






 내가 한창 일드에 빠졌을 때가 있다. 기무라 타쿠야 주연의 <히어로>로 입문했는데 그렇다 보니 같은 주연의 드라마를 찾아보고 그랬다. 그는 상당히 많은 작품에 출연했고 제법 재밌기도 해 돌이켜 보면 정말 하나같이 즐거운 시간을 선사해줬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뷰티풀 라이프>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 <뷰티플 라이프>가 그 드라마를 그대로 활자로 옮긴 것이다.

 방금 '활자로 옮긴 것'이라고 썼는데 '소설로 옮긴 것'을 지웠다고 고친 것이다. 사소하지만 중대한 차이라고 생각한다. '뷰티풀'과 '뷰티플'이 다른 것 - 도대체 '뷰티플'은 뭐지? - 처럼. 이 소설은 지나치게 드라마 같아서 감상하기가 곤혹스러웠다.


 지나치게 드라마 같다는 것은 말 그대로다. 내용이 똑같기도 하지만 전달하는 방식도 똑같다. 너무 새삼스러워서 말하기가 껄끄러울 정도다. 아무래도 드라마화를 염두에 뒀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활자로 전달되는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문장에 전체적으로 깊이가 없어서 정말이지 TV 화면을 읽는 것만 같았다.

 드라마와 내용이 같은 것은 상관없었다. 너무 똑같아서 맥빠지긴 했지만 제법 쫄깃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러브 스토리기에 크게 상관없었다. 비록 드라마를 처음 봤을 때랑 지금이랑 감성이 달라져서 옛날만큼 - 그게 중학생 때였나. - 감동적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옛추억이 떠올라 반갑기도 했다.


 미용사와 휠체어에 탄 여자의 사랑 이야기. 이 작품의 포인트는 바로 이 여자 주인공의 '장애'에 있다. 지금은 장애인 시설 선진국인 일본이지만 10몇 년 전에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보편적이지 않았는가 보다. 일본 여행 갈 때마다 장애인을 위한 배려가 아주 자연스레 녹아들어서 보기 좋았는데 참 많이 발전했구나 싶었다. 어쨌든 장애를 이유로 많은 것을 포기하는 인생은 장애인이 아닌 이상 알 수가 없는 것인데 이 부분에 있어서 작가가 조사를 많이 해서 그런지 감탄하며 읽었다.

 내가 좀처럼 드라마를 보질 않아서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일 수 있는데 아무튼 지천에 널린 러브 스토리와 동렬에 넣기엔 소재의 통찰과 감성을 잘 융합시켰기에 한번쯤은 보기를 추천한다. 드라마를. 소설은... 절판되기도 했지만 활자의 묘미가 없다시피 해 드라마를 보는 게 백 번 낫다.


 드라마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기무라 타쿠야와 토키와 타카코의 연기가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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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8.0






 송강호, 강동원 주연의 <의형제>가 그랬고 김수현이 출연한 웹툰 원작의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도 마찬가지고 곧 개봉될 예정인 영화 <공조>도 간첩 얘기를 그리고 있다. 그러고 보면 간첩이란 소재는 잊을만 하면 꼭 다뤄지는 것 같은데 대체로 다루는 양상이나 주제가 크게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그건 이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김영하의 작품이라서 개인적으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읽는 내내 지루함과 싸웠다. 설정 자체만으로 봤을 때 평범해도 좀처럼 있을 법하지 않은 얘기라서 그래도 신선하게 읽힐 법 했는데 새삼 신선함과 지루함은 정반대의 개념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간첩은 화려한 액션을 동반한 임무 수행 장면을 보이기 일쑤지만 김영하의 <빛의 제국>에서의 간첩은 다르다. 아직 보진 않았지만 김명민 주연의 <간첩>이란 영화와 크게 비슷할 듯하다. 소시민에 가정을 두고 북쪽에서 존재조차 잊었는지 완전히 현지에 적응해버린, 아예 완연한 현지인이 된 간첩을 만나볼 수 있다. 어처구니 없지만 참 재밌는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두 개의 세계를 가졌다가 이윽고 바뀐 세계의 주민이 된 형용 불가한 스토리를 간직한 인물의 심정이 내 짧은 상상력으로는 감도 잡히질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기 전에 내 짧은 상상력을 보완해주리라고 기대했던 것 같다.

 소설은 대게 추상적인 이미지를 활자화한 상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굳이 간첩이라는 소재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네 삶의 군상을 그린 이 작품은 분명 나쁘지 않았다. 학생 운동을 했건 간첩을 했건 뭘 했건 지금은 소시민으로서, 사회의 톱니바퀴로서 사는 주인공의 인생을 그린 것이 퍽 나쁘지 않았다.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그 어떤 간첩 이야기보다도 특별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찌 됐든 간에 참 지루한 이야기임엔 변함이 없다.


 간첩으로 하여금 많은 이야기를 풀어낸 건 좋았는데 반대로 굳이 간첩을 들먹이면서까지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주인공만 이야기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아내나 딸까지 집어넣으니까 이야기는 풍성해졌지만 전체적으로 늘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늘어짐은 거의 배신에 가까울 수준이라서 솔직히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다.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 표지의 그림이 바로 <빛의 제국>이다. - 에서 본뜬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서로 반대되는 것이 공존한 환상적인 세계를 주인공의 내면과 잘 일치시키긴 했는데 그게 다일 뿐이다. 북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나서 24시간 동안 방황하는 간첩의 일상이 궁금해서 읽었는데 이야기 구조며 사유며 하는 것들이 살면서 이미 떠올렸거나 한번쯤 떠올려 볼 법한 것들이라서 그렇게 인상적이진 못했다. 결국 작가도 분명하게 내제되지 않았으면서 간첩을 그저 소재로써 사용했을 뿐인가 싶어 심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옮겨다 심은 사람‘이었으므로 적응이야말로 최우선의 과제였다. 변화를 거부하거나 방기할 자신감과 배짱이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은 이곳에서 태어나 살아온, 원주민들의 특권이었다. - 84~85p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는 없지만 오늘 어제와도 달랐고 어제 이전의 그 어떤 날과도 달랐다. - 4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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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각관의 살인 ㅣ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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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일본 추리소설계에서는 신고전주의(=르네상스)를 의미하는 '신본격'이란 말이 있다. 서구권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자취를 감춘 본격 추리소설의 고전미를 지향하면서도 뭔가 새로운 것을 첨가시킨 작품의 성향을 일컫는 용어인데 80년대 후반에 여러 신인들이 이런 신본격 작품을 내면서 하나의 트렌트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신본격 운동의 선두에 섰던 작가가 바로 아야츠지 유키토인데 이 작품 <십각관의 살인>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올렸다고 평가받는다.

 제목을 워낙에 많이 들어서 읽지 않았음에도 익숙한 작품이었다. <이니시에이션 러브>에서도 언급되고 당대 추리소설가, 현재의 추리소설가들한테도 전설적인 작품으로 꼽히나 본데 그 진면목을 드디어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을 여행하는 중에 기차를 오랜 시간 탈 일이 있었는데 기차에는 뭐니뭐니 해도 본격 추리소설이란 생각에 가져가봤다.


 외딴 섬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클로즈드 서클 연쇄 살인을 다룬 대놓고 본격적인 추리소설이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많이 오마주했는데 팬심이랄지 풋풋함이랄지 이런 오만가지 것들이 중첩돼서 피식거리며 읽게 된다. 십각형으로 된 저택, 외부와 단절된 섬, 나카무라 세이지라는 기묘한 건축가의 이야기 등 분위기 하나만큼은 발군이었는데... 까놓고 말하면 작가의 미숙함이 선명하게 드러난 작품이었다.

 당시의 경향을 생각하면 확실히 대담하고 재기 넘치는 작풍이긴 했다. 등장인물들이 추리소설을 동경해 황금기의 추리소설가의 이름을 닉네임으로 삼질 않나 추리소설의 미학에 대한 의견이 오가질 않나 적당히 마니악하면서도 진지한 구석도 있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추리소설적 기교를 놓고 봤을 때 매력적인 분위기가 무색하게 사건의 전개나 캐릭터의 매력, 반전 등이 다소 긴장감이 부족하고 느닷없으며 복선은 미비해서 사뭇 놀라운 반전마저도 퇴색된 경향이 있다. 더구나 캐릭터를 너무 소모적으로 등장시키고 범인의 동기를 설명하는 부분도 세련되지 못해서 전체적으로 추리소설의 단점이 잘 부각되기까지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리즈의 진정한 주인공인 나카무라 세이지의 존재감이나 전형적이지 않은 탐정의 활약이 오히려 소설 본편보다 신선하고 - 이런 굴욕이 있을 수가. - 재밌었다. 평단과 팬들 사이에서도 저택물치곤 물리 트릭 외의 요소로 승부를 보는 이상한 시리즈라고 얘기하던데 나 또한 그들이 느낀 배신감에 동의한다. 이런 걸 보면 신본격의 특성이 한 번에 이해되기는 했다. 신본격이 뭔지를 물으면 이 작품을 권해도 괜찮을 듯하다. 나라면 이 작품 말고 다른, 이를테면 더 재밌는 작품을 권하겠지만.

 아야츠지 유키토나 '관' 시리즈를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처음에 읽은 <미로관의 살인>은 정말 괜찮았는데 다른 작품은 나랑 영 안 맞는 것 같다. 그래도 개성만큼은 확실한데 개인적으로 뭔가 되다 만 느낌이 들어서... 이 작가의 작품을 앞으로 또 읽을 날이 올라나?

나는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 이런저런 논리를 내세우는 탐정 따위는 꼴도 보기 싫어. - 1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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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피트 - Wheel of Fortune
이누이 구루미 지음, 서수지 옮김 / 북스피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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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지난 번에 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를 봤다. 타임슬립을 연애소설식으로 풀어낸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이번에 내가 읽은 <리피트>는 같은 소재인 타임슬립을 추리소설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이니시에이션 러브>로 강렬한 반전을 선사한 이누이 구루미의 또 하나의 국내 출간작이기도 하다. 국내에 딱 두 작품만 출간했는데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이대로 묻히기엔 너무 아쉬운데.

 사실 처음 이 작품의 소재를 들었을 땐 그렇게 흥미가 일진 않았다. 타임슬립이란 소재가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보긴 하지만 그런 만큼 다뤄지기도 많이도 다뤄져서 진부하기도 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미래를 예고하는 시간여행자가 주인공 앞에 나타나면서 대놓고 시간여행 설정을 드러내는데 그 이후가 평범하리만치 신선했다. 이렇게 현실적인 시간여행이 있을 수 있나? 오히려 지금까지 접한 시간여행자의 이야기들이 와닿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주인공은 과거에 크나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미치도록 후회하는 일도 없고 과거를 바꿔서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다. 주인공에게 시간여행을 제안한 '리피터'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특별한 사명감이 아닌 단지 심심해서 주인공과 여러 사람들을 시간여행에 초대했으니 정말 말 다했다. 어느 날, 어느 장소에 가면 10개월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데 현재까지 무려 9번을 돌아간 리피터는 자신과 함께 인생을 '리피트'하지 않겠느냐고 사람들에게 제안한다.

 그의 미래 예언은 전부 들어맞지만 아무래도 미심쩍어 신중하게 되지만 결국 제안대로 리피트를 하는 주인공네들은 어느 날을 기점으로 10개월 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영락없이 10개월 전의 자신으로 돌아간 그들은 다시 돌아온 인생의 기회를 살리고자 미리 알아둔 경마 기록으로 돈을 벌고 사소한 실수를 만회하거나 아니면 미리 알게 된 세상사에 어떤 식으로 개입할 방법은 없는지 고심하면서 10개월을 다시 살게 된다.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는 시간의 흘러가면 절대 되돌릴 수 없는 성질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후회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남기 마련이지만 그 횟수를 줄이기 위해서 열심히 산다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른다. 그런데 시간은 절대 되돌릴 수 없다는 전제가 뒤바뀌면 우리네 삶의 방식에 큰 변화가 찾아올 것이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의 경우에는 리피트라는 확실한 기회가 있으니 게임을 하는 감각으로 살게 된다. 더욱이 앞의 결과도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는 만큼 공략법도 터득했으니 결코 첫 번째와 같이 살 수는 없게 된다. 그리고 그 여파는 반드시 당사자 이외의 세계에도 영향을 끼치고 만다.

 개인적으로 시간여행이란 순전히 인간의 희망에 불과하며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일단 과거로 간다 해도 내가 같은 시간대에 두 명이 있는지, 아니면 정신만 과거의 몸으로 돌아가는지 애매한 상황에서 과거를 바꿔 미래도 바꾼다는 이야기, 하물며 과거와 미래의 평행 세계에 관한 이론 역시 재미는 있지만 허무맹랑하게 여겨질 뿐이다. 그래서 사실 시간여행 소재를 그렇게 반기지 않았는데 이 작품은 좀 남달랐다.


 일단 한없이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점을 들 수 있다. 일체의 감상적 요소를 배제하고 어떻게 효율적으로 다시 살지 고민하거나, 혹은 남과 다른 인생을 살게 된 김에 어떤 식으로 세상에 기여할지 고민하는 게 실로 공감됐던 것이다. 물론 과거의 첫사랑을 만나러 가거나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어떤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그건 너무 극적이다. 더군다나 이 작품처럼 어정쩡하게 10개월 전으로 돌아간다면 극적인 연출이 마냥 쉽진 않을 것이다.

 이 10개월 전으로 돌아간다는 제약이 리피터들로 하여금 제법 차분하고 게임하는 기분을 이끌어내는가 보다. 흡사 '인생 게임'을 몇 번이고 하는 것처럼 자신의 10개월 간의 삶을 철저히 지배할 수 있는 재미를 안겨준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작품을 보는 내내 주인공네들의 행동거지가 어딘지 부러운 한편 너무 계산적이라서 질리기도 했다. 그런 내 심정에 부응한 걸까. 몇 번이고 반복하는 인생에 자꾸 변수를 두는 리피터들에게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은 게임에 참여했음을 여지없이 시사하고 있다.


 SF 문학이나 과학계에서 익히 다뤄온 시간 여행의 위험성을 따끔하게 지적하는 작품이었다. 이걸 또 추리소설적인 미스터리함과 반전으로 풀어내 의외성을 과시하기도 했는데 과연 <이니시에이션 러브>의 작가답구나 싶었다. 그 작품에서의 놀라움이나 복선이 있던 것은 아닌데 리피터들의 비인간성을 부각시키는 반전인지라 적잖이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이후에는 막장에 가까운 전개가 펼쳐지면서 주제의식이 심화되니 그것 참 볼만했다.

 지금까지는 운명을 다소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이뤄야 하는 목표가 있어 시간여행이 미화된 반면, 이 작품에선 한낱 사사로운 고양감을 위해 운명에 손대는 이들을 단죄하고 있어 새삼 설정의 위험성을 진지하게 마주보게 된다. 비록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 혹시 미래에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난 믿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미래의 시간여행자가 몇 번이고 과거와 현재에 들락거릴 텐데... 어쩌면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 인생을 대하는 자세가 절로 달라지니 참 의미있지 않았나 싶다. 자신의 인생이 자신만의 것으로 여겨지지만 타인과 관계를 맺은 이상 타인의 존재도 부정할 수 없는 만큼 더욱 만만히 볼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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