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녹색 바람 ㅣ 네코마루 선배 시리즈
구라치 준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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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이 세상에는 과작 성향의 작가들이 몇 있다. 작가적 신념,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공부하고 써내느라 작품 수가 적은 경우가 이상적이지만 좀처럼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서, 혹은 그저 귀찮아서 과작이게 된 경우도 있다. 이 작가 구라치 준이 한 '냉장고가 빌 때까지 작품을 쓴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아주 전형적인 후자라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에는 두 번째로 출간되는 구라치 준의 작품이다. 첫 번째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은 단순하지만 획기적인 트릭이 있어 가히 역대급의 재미가 폭발했던 기억이 난다. 이 정도면 과작일 만하다고 전율했던 기억도 난다. 그래서 이번 작품 <지나가는 녹색 바람>도 어떠한 의심도 없이 기대하며 읽게 됐다.


 작가의 유일했던 국내 출간작을 읽고서 쓴 포스팅을 다시 찾아보니 '작가의 냉장고를 털어서라도 빨리 다음 작품을 집필하게 만들고 싶다'고 했었는데 이번엔 생각이 약간 달라졌다. 이 작품은 네코마루 선배라는 작가가 주로 등장시키는 탐정이 등장하는 장편소설로 500쪽이 넘는다. 이렇게 외적인 부분만 보면 참 기대가 됐는데 내용은 아주 그렇지 못했다.

 일단 이 작품에서도 획기적인 트릭이 등장한다. 이런 종류의 트릭은 많이 보긴 했지만 제법 참신하게 풀어냈다. 어떻게 보면 참 작은 장난이라 할 법도 한데 그 작은 틈새 사이로 미스터리와 연쇄 살인이 비집고 들어왔으니 세상 일은 참 알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독자인 우리는 물론이고 작중 등장인물들, 특히 피해자들은 정말이지 꼼짝도 없이 희생당했으니 실로 비극이라 할 만하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종류의 트릭인데 어딘가 쓰임새가 싱거웠다. 이런 종류의 트릭은 주제의식이나 교훈과 접목시키면 극도의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는데 그 수준에 달하진 않았다. 감성적이고 시사하는 바가 퍽 있지만 뜬금없고 약간 과한 측면이 있었다. 이 트릭을 잘못됐다고 부정하는 것은 이 작품의 전부를 부정하는 것과 같으니 약간 주저되나 그럼에도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반드시 필요했던 트릭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선은 절대 아니고 차선이라 할 수 있겠다.

 탐정역을 맡은 네코마루 선배란 캐릭터도 애매했다. 무신경하니 막말을 일삼고 독특한 걸 넘어 도덕 관념도 부족해 보이지만 사건을 날카롭고 신속하게 해결한다. 아쉽게도 사건에 너무 늦게 개입해 비극을 미연에 방지 못했지만... 그런데 이런 탐정의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진 않다. 다른 작품에서의 활약은 모르겠지만 이 작품에서 보인 모습인 그저 조금 별난 정도에 불과하다.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가? 너무 기인도 아니고 아주 냉소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가 형사처럼 사려가 깊어 보이지도 않으니 이 작품에서의 모습만으론 평가가 애매하기 그지없다.


 간단하지만 허를 찌르는 트릭 때문에 재독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소 감성적인 측면을 강조했던 작품치곤 크게 인상에 남는 작품은 아니었다. 단순히 추리소설적인 측면으로만 보면 분량에 비해 사건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우연이 개입해 은근히 실망스럽고 그나마 작가가 공들였을 사에코의 시점은 막상 분량이 적어 알게 모르게 아쉬웠다. 작품은 지루한데 사에코의 감정선은 흥미진진한 구석이 있어 적재적소에 읽는 맛이 살아나는 효과가 있었다. 적은 분량은 작가가 노린 부분일 수 있지만 차라리 이 부분을 더욱 살렸으면 더 재밌지 않을까 싶었다.

 국내에 소개된 작품이 너무 적어 속단하긴 이른 만큼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는 수밖에 없겠다. 이 작품은 그저 그랬지만 작가의 행보를 보니 굴직한 작품도 많이 남은 것 같다. 작가의 말마따나 냉장고가 너무 텅텅 비었나 보다. 아무튼 작가의 다른 작품이 출간된다면 이 작품을 골랐던 것처럼 일단은 큰 고민 않고 집어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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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의 요리사들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권영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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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나는 일본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 나머지 관련 소식을 틈틈이 찾아보곤 한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 혹은 흥미로운 제목이나 설정을 가진 작품을 보면 우리나라엔 언제 출간할까 궁금해 하는데 이 작품이 그런 작품들 중 하나였다. 전쟁터의 요리사들. 취사병 주인공이 전쟁터에서 마주하는 몇몇 미스터리를 푼다는 일상 추리소설 계열의 작품으로 설정만으로 적잖은 관심이 갔다. 비록 3개월간 지원을 갔을 뿐이지만 나 역시 군대에서 취사병에 적을 두긴 했으니까.

 내 원래 주특기는 포병이었는데 포병 부대에 가는 병사는 주로 두 가지 분류로 나뉜다. 전투 포병, 비전투 포병으로. 줄여서 전포, 비전포인데 나는 전포였고 이제 나머지 계원, 운전병, 사격지휘병, 관측병, 측지병, 통신병, 그리고 취사병이 이에 속했다. 한 대대에 전포와 비전포가 대략 반씩 있었는데 주특기 별로 나눈다면 똑같은 주특기를 가진 전포의 수가 월등히 많아서 그들의 입지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전포가 다른 주특기를 가진 병사를 어떻게 업신여기는 일이 많았는데 도대체 그를 눈앞에서 몇 번을 봤는지 모르겠다.


 그중 취사병의 입지가 가장 약했다고 할 수 있다. 쉬는 날 없이 조리에 시달리는 취사병이 어떻게 보면 가장 저평가 받는 보직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처럼 '엄마 놀이'라고 비아냥거린 사람은 못 봤지만 '꿀을 빤다'는 욕은 진짜 많이 들어봤다. 물론 전투에 나서는 병사가 가장 중요한 병사라 할 수 있지만 군대 조직에 있어 아주 불필요한 병사가 있을 수 없다. 그런 만큼 취사병을 두고 한 당시의 뒷담들은 아주 생각이 짧은, 그야말로 혐오에 가까운 편견이라는 말 외엔 붙일 말이 없다. 막말로 안 먹고 어떻게 전투를 하겠다는 건데?

 앞서 말했듯 비록 3개월이지만 취사병 생활을 해봤기에 이 작품의 소재에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작 내 기대완 달리 작중 주인공들은 취사병임에도 전투도 겸하는 병사들이었지만 나름 주특기의 고충과 애환은 잘 살리기도 했다. 때는 미국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2차 세계대전에 화려하게 참전한 이후로 갖가지 사람들이 모인 주인공네 부대가 전쟁터에서 어떤 활약을 펼치고 곤경에 빠지는지 매우 사실적이고 중립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저자가 일본 사람인 만큼 전쟁에 대한 요상한 묘사가 있진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는데 정말이지 기우에 불과했다. 왜 하필 일본 저자가 미군의 얘길 썼겠는가, 이에 대한 답은 작중에 드러난 작가의 전쟁관에서 엿볼 수 있다. 하긴 일본에 극우만 있을 리도 만무하고...


 비교적 긴 분량의 단편이 5편 수록된 연작으로 전쟁의 이모저모를 잘 묘사했다. 전쟁을 다룬 문학 작품을 많이 찾아보진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이 작품은 그중에서도 수준급의 고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단순히 조국을 위해 용기 있게 나서 적을 죽이는 내용에 국한하지 않고 취사병이란 소잴 살려 군대라는 조직의 내부적인 이야기도 풀어나가 자연스레 인간에 대한 고찰도 담아내고 있다. 상황에 따라 달리 정의되긴 하지만 군대도 결국 하나의 직장이란 점, 그렇기에 군대에 적을 뒀다고 모두가 똑같은 목표 아래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을 통찰력 있게 바라봤다. 전선에 뛰어들고 싶지 않아 거래를 하고 싶어 하는 병사, 전투에 관여를 하지 않는 상사의 부정어린 행동을 목격했을 때의 병사들의 반응 등 상당히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았다. 군대를 다녀온 나 같은 독자는 물론 군대에 가지 않거나 갈 일이 없는 독자도 꽤 감탄하며 읽을 내용이지 않나 싶다.

 엄밀히 말해 군대 및 전쟁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 엄청나게 재밌게 읽진 않았지만 소재를 소홀히 다루지 않은 작가의 솜씨와 열정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추리소설의 틀 안에서 보면 약간 애매한 부분도 있지만 이런 애매한 요소는 재독할 경우 또 어떻게 읽힐는지 모른다. 아무튼 제법 긴 기다림 끝에 출간된 작품이 생각보다 괜찮게 읽혀서 참 다행이었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은 물론이고 내가 출간되길 기다리는 어떤 작품들도 빨리 번역본으로 만날 수 있길 바란다.

팀, ‘악의는 없었다‘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어. 중요한 건 굴절된 감정과 공포심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거다. 극복하느냐 아니냐는 너 자신이 결정해야 해. 언제 죽어도 후회가 없도록. - 2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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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철 한정 구리킨톤 사건 - 상 ㅣ 소시민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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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전작인 <여름철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을 읽었을 때 후속작을 언제 읽게 될까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그땐 요네자와 호노부가 지금만큼 이름값이 높던 때가 아니라서 그의 다른 작품이 출간되기를 기대한다는 게 다소 막막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제대로 빛을 받아 꾸준하게 신작이 출간되는 요즘이 정말 좋다. 책의 외관이 너무 예쁜 나머지 가격대가 좀 있지만 그만큼 소장 가치가 있으니 너그럽게 지갑을 열 수 있다.

 '소시민' 시리즈의 후속작은 분권으로 나왔다. 개인적으로 왜 굳이 분권했는진 모르겠다. 사토 다카코의 <한순간 바람이 되어라>은 학년별로 3권씩 나눴던 것처럼 이 작품에서도 그런 구분이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일본에서도 분권으로 출간했던데 뭔가 이유를 알 것 같으면서도 감이 안 잡힌다. 최근 한 권이 800쪽에 달하는 <가족사냥>을 2권에 걸쳐 읽었더니 그냥 넘기기 힘든 부분이다. 뭐, 어쩌자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총 500쪽 이상이라는 시리즈 역대급 분량은 시리즈 사상 역대급 스케일과 재미를 안겨줬다. 본성을 숨기고 소시민이 되겠다는 모토 아래서 많은 사건을 겪고 끝내 각자의 길을 걷기로 한 고바토와 오사나이. 이 둘의 개별적인 시점 속에서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해 이야기가 좀 더 방대해진다. 그 와중에 연쇄적인 방화 사건이 발생하는데 작품 전개 내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떠나지 않는다. 두 주인공이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소시민의 일상이 흘러가는 와중에 그림자를 드리운 사건, 과연 둘은 바람대로 소시민의 길을 관철할 수 있을까? 내가 봤을 때는 영 글러먹은 것 같다.

 '소시민'이라는 단어로 명명되는 평범한 인생살이가 주인공네들의 목표라니, 수수께끼와 그 풀이를 목적으로 삼는 추리소설의 갈래와는 사뭇 맞지 않는 감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본래 수수께끼를 좋아하고 혹은 수수께끼를 만드는 걸 좋아하는 이들인 이상 종래에는 자신들의 본성에 충실해진다. 그런 어쩔 수 없는 이치를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여서 깨닫는 게 개인적으로 좀 안쓰러웠다.


 작품을 읽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이 고백했다고, 상대를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가령 '소시민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상대와 사귀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것. 그렇게 이상하게 시작된 연애는 좋게 끝날 리가 없다. 고바토와 오사나이도 마찬가지. 둘의 마인드는 보기에 따라서 상당히 도발적이고 발칙하기까지 한데 관종인 우리노와 대조돼 짠함과 알싸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요네자와 호노부가 그리는 고등학생다웠다고 할 수 있으려나?

중간 중간 나오는 소소한 수수께끼와 추리도 재밌었는데 막판에 클라이맥스로 갈수록 그려지는 전개도 재밌었다. 재능이 있지만 그걸 살리기보다 죽이려고 하는 자가 활약할수록 재능은 없는데 명성을 얻고 싶은 자의 모습이 처량해진다. 이 전개는 그토록 읽고 싶었건만 막상 보게 되니 짠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한마디로 냉소가 극에 달한 작품이지 않나 싶다.


 전작들을 읽은 게 오래 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나름대로 흐름을 쫓아가기엔 문제는 없었다. 그나저나 후속작인 겨울철 뭐시기 사건은 언제 나올까? 작가의 고전부 시리즈가 일본에서 신작이 발표됨과 동시에 번역 출간되고 있으니 출간만 되면 머지않아 읽을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다만 걱정인 건 정말 다음 작품이 마지막일까 하는 것이다. 내가 봤을 땐 고전부 시리즈 못지않은 매력이 있는데... 이 시리즈도 재조명된다면 좋겠다. 마치 <빙과>의 애니메이션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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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7 - 시오리코 씨와 끝없는 무대 ㅣ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1부 7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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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시리즈가 후속편이 나오면서 이야기를 거듭할수록 독자로서 반가운 한편으로 처음 느꼈던 감동이 이전만 같지 않다는 이중적인 시선이 생김을 부정할 수 없다. 창작자 입장에서도 하나의 시리즈에 얽매여 창작의 재능을 소비하는 것도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닌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듯하다. 문제는 박수치는 때는 알겠는데 떠날 때는 언젠지 애매하다는 것.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시리즈는 적절한 타이밍에 떠난 것 같다. 1권을 접한 게 5년 전인데 5년 동안 7권에 걸쳐 이야길 풀었으니 그간 벌려놓은 걸 깔끔하게 마무리를 짓고 떠난 셈이다. 솔직히 말하면, 5권에서부터 식상함 이전에 이해를 포기하게 되는 수집가들의 세계가 그려지면서 슬슬 완결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 느껴졌던 시리즈 특유의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맛이 바래지는 것 같아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애정이 점점 식어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막상 마지막 권을 다 읽으니 아쉬움은 감출 수 없었다.


 급결말은 아니고 말 그대로 깔끔하게 끝냈다. 시오리코와 다이스케 사이의 관계도 확실하게 결실을 맺었고 해피엔딩 특유의 여운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물론 그 해피엔딩에 이르는 과정에서 사건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 사건이 마지막 사건인 것에 비해 해결이 비교적 손쉽게 된 게 좀 허무했지만 그래도 작가가 우려한 것에 비해 이야기가 상당히 잘 풀리지 않았나 싶다.

 작가는 처음 이 시리즈를 구상할 때 고서점과 고서를 추리소설의 소재로 적합한가, 수수께끼 풀이 중심의 이야기에 적절히 활용할 수 있을지 걱정이 들었다고 한다. 확실히 이전까진 이런 소설이 없긴 했으니까 작가 입장에선 참고 대상 없이 써내려간 것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블루 오션을 개척하려 한 사람의 도전은 역으로 피를 볼 때도 있지만 이 시리즈는 그야말로 블루 오션을 개척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비슷한 시리즈물이 많이 나왔지만 - 이를 테면 커피, 시계... 많기도 하다.;; - 이 시리즈만큼 소재가 전문적이고 또 미스터리와 자연스럽게 어울린 작품도 없던 것 같다. 게다가 라이트 노벨도 아닌 일반 소설의 영역 안에서 봐도 하자가 없다는 점을 주목한다면 이 시리즈가 사뭇 대단한 성과를 이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시오리코와 다이스케의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작가는 이 시리즈의 틀 안에서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도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그 생각이 담긴 결과물인 시리즈의 외전격인 책이 일본에선 출간됐다는데 아직 우리나라엔 소식이 없다. 하지만 별로 큰 걱정은 안 된다. 아마 올해 안에 번역 출간될 것 같으니까. 그 외전까지 읽고 1권부터 재독을 할 것인가, 아니면 외전이 나오기 전에 재독을 시작할 것인가... 전자를 택할 확률이 높지만 아무튼 시리즈가 괜찮게 완결이 나 그저 다행이고 아쉬울 따름이다.



p.s 여행을 다녀오느라 읽은 지 3주가 넘도록 포스팅을 못 했는데 그렇다 보니 내용이 가물가물해 어딘가 미흡한 감상만 남기고 말았다. 쓰고 보니 묘하게 디스하는 글이 된 것 같은데... 재독할 땐 이런 우를 범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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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냥 - 하 - 개정판
텐도 아라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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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8.4






 과작이지만 내놓을 때마다 어마어마한 분량을 자랑하는 텐도 아라타의 작품을 읽는 건 거의 도전에 가까운 일이었다. 상권과 하권 총 합쳐서 1,560 페이지인데 2주간 힘겹게 읽어냈다. 다 읽고 난 지금에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이후에 읽은 3, 400쪽 책들이 너무 빨리 읽히고 있다.

 텐도 아라타의 작품이 힘겹게 읽히는 건 비단 분량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분량에 비하면 빨리 읽히는 편에 속한다. 하지만 가독성이 좋으냐고 물어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아 고개를 좌우로 저을 것이다. 이 작가는 흔히 말하는 작가적 사명감을 안고서 집필에 임하는 작가라 다루는 내용이 하나같이 무겁다. 그런 작가 특유의 접근이 분량을 떠나서 독자의 호불호를 가르는 기준이 될 것이다. 나는 처음엔 압도적인 불호였다. 너무 부담스러운 데다 오글거리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은 있는 대로 긁어 모아 퍼붓는 직설적인 문장들은 차라리 인문학에 가까웠는데 엄연히 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으니 불협화음처럼 느껴졌다.


 <영원의 아이>, <애도하는 사람> 때도 느꼈지만 이 작가는 큰 흐름 속에 존재하는 갖은 인생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커다란 결론으로 달려가는 글쓰기가 능하다. 중간에 산으로 가지 않고 끝장을 보는 끈기는 확실히 대단하긴 하다. 하지만 작가 스스로가 발견하고 고찰해낸 주제의식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교훈적이거나 동의를 강요하는 느낌을 주곤 해 개인적으로 그리 좋아하는 스타일의 작가는 아니다.

 이 작품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설은 아동 보호 센터의 직원 히자키 유코, 직업의식이 없는 교사 스도 슌스케, 힘든 가정사를 외면하기 위해 막장어린 짓에 손을 댄 형사 마미하라, 이렇게 세 명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일가족 살해 및 자살 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중에 이들 세 주인공의 얘기가 진행되는데 도대체 각 이야기가 언제 접점을 이룰지 몰라 읽는 내내 답답했다. 평화니 전쟁이니 가족이니 폭력이니 아픔이니 하는 것들은 알겠으니까 제발 구체적으로 이야길 좀 진행시키자는 생각이 몇 번 들었는지 모른다.


 작가의 방대하고도 서서한 접근은 처음엔 가독성이 떨어졌고 중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차츰 작가가 원하는 바에 가까워지는 것 같아 묘하게도 계속 읽게 됐다. 단란할 줄 알았던 한 가정이 어떻게 망가지고 끝내 일가족 살해 및 자살로 치닫는지 살펴보기엔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으로써 괜찮은 진행이지 않았나 싶다. 등장 인물의 입을 빌린 작가의 설명이 어느덧 디테일한 심리 묘사로 발전해 사람을 참 방심할 수 없게 만들었다.

 히자키 유코나 스도의 부모님 같은 사람을, 특히 후자 같은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히자키 유코는 행동력에 있어 다소 무모한 경향이 있어 주위의 반감을 사는 인물이다. 그가 가진 사명감과 도덕적 기준이 바람직하다곤 생각하나 그런 신념 하나 믿고 독선적으로 밀고 나가는 건 안일한 사고방식이 아닌가 싶던 것이다. 자의식이 강하다거나 다른 사람을 깔보는 유형은 아니지만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나의 이런 느낌엔 논란이 있을 듯하지만 섬세하긴 커녕 오그라드는 말이 앞서는 인물 묘사를 보노라면 입만 살았다고 반감을 가지는 등장인물들의 심리가 그렇게 와 닿을 수 없었다. 스도의 부모 같은 경우엔 난감할 정도로 융통성도 없고 독선적이기까지 해 내심 그 가치관, 꼭 실패하고 불행해지길 바라기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작품이 단순히 입바른 소리만 해댔으면 애초에 완독하려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가족에 대해 갖는 전근대적 가치관은 우리나라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그 가치관에 전면으로 도전하는 듯 스도와 마미하라가 내면적 성장을 이루는 전개가 이뤄져 점점 몰입됐다. 작중에 그려지는 가족의 유형이 한둘이 아니라 뭐 하나 예로 꼽기가 쉽지 않은데... 어쩌면 균열이 일 운명이었을지 모를 가족상에 대해 작가가 진지하게 고찰하고 있는 터라 결말의 여운이 산뜻하게 다가왔다.

 반드시 이만큼 길었어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분량의 값어치는 뒤로 갈수록 해내고 있어 인내심을 갖고 읽길 추천한다. 뛰어난 서스펜스 드라마를 기대했다면 너무 진지한 이야기만 하는 내용을 보고 실망하는 건 당연한 일일 텐데 그래도 제법 갖가지 가족/소년 범죄를 총망라하고 있으니 사회파 추리소설의 틀을 벗어났다고도 하진 못하겠다. 아무튼 정서가 살짝 맞지 않아도 작가의 정성 하나만큼은 무지하게 티가 나기에 - 이제 와 말하긴 그렇지만;; - 작품을 이 이상 폄훼하기가 주저된다. 뛰어나게 문학적이진 않지만 방대한 전문성이 인문학 서적에 필적하는 만큼 관심 있는 사람은 읽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인생의 의미를 진지하게 묻지 않은 채 취직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부모가 되고...... 진정한 정신적 자립을 이루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부모가 된 사람은 가정을 자신의 인생을 긍정해 주는 곳으로써 원하게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 상 583p




이유도 모르면서 그냥 불안해하거나 재미있어 하거나 나 몰라라 하는 건 어른이 할 짓이 아니지. - 상 693p




도저히 답이 안 보이는, 이런저런 사람들의 고민들을 당신도 짊어져 봐, 이 나라 구석구석에 있는 약자들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짊어지고 걸어 보라고. 그러고 나서, 하지만 나는 이것밖에 할 수 없다고...... 조심조심 걸음을 내딛는 사람이 나는 좋아. - 하 528p




누군가한테 심각하게 생각해라, 생각하지 마라, 라는 소리 듣는 거, 너라면 받아들일 수 있겠니? - 하 6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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