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삶 2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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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아직 작가의 전 작품을 읽지 못했지만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작가로 하진을 꼽곤 한다. 중국에서 태어나 영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에 갔다가 자국의 천안문 사태 소식을 듣고 절망해 그대로 미국에 살게 됐다는 하진은 이민자로서 외국어로 글을 쓰게 된다. 그런 그에게는 천부적인 감각이 있는지, 아니면 부던히 노력한 덕분인지 짧고 간결하고 쉽고도 쉽고도 쉬우면서 품위 있는 문장을 구사해 읽을 때마다 감탄하고 만다. 외국어로 소설을 쓴다는 건 정말 말로만 쉬운 일이다. 난 소설을 읽을 때 문장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읽는 편은 아니고 하진의 문장이 정독이 요구될 만큼 미학적이진 않지만 읽을 때마다 참 본받고 싶은 문장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영미권, 특히 미국 문학의 투박함과 중국 문학의 우아함이 혼합됐기 때문일까? 일전에 난 작가의 단편집 <멋진 추락>을 읽고 '외국에서 먹는 한식'이란 비유를 했는데 이 작가의 경우에는 정말 맛있는 '외국에서 먹는 한식'이 아닐 수 없다.

 하진은 그간 영어로 하여금 중국의 이야기를 썼는데 <자유로운 삶>이란 작품을 기점으로 미국에도 시선을 돌렸다고 한다. 미국, 그 중에서 자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민자들의 사회에 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하진이라면 이민자 사회에 대한 남다른 통찰이 있을 터다. 그래서 이 1,000페이지 가량의 소설을 읽는 게 그렇게 두렵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의 작품답게 금방 읽히고 실제로 적잖은 생각과 감동을 안겨줬다. 하지만 이렇게 길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작가는 서문에서 아니라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읽힐 수밖에 없다. 주인공 난 우도 마찬가지로 작가의 분신이란 생각이 안 들 수 없고. 이에 대해 작가는 자신은 난 우에 비하면 운이 꽤 편이라고 했는데 역자 후기에 적힌 내용을 보면 마냥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중국 정부가 입국을 허락하지 않아 친모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작가의 처지에 주목하면 난 우와는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아픔의 결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역자 후기를 읽고나선 작가와 주인공이 별개의 인물임을 알 수 있었는데, 그 전엔 딱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너무나도 디테일하기 때문이다.

 작품은 극적이면서도 일상적이다. 난 우가 아내와 아들과 함께 미국에서 힘겹게, 때론 도움도 받아가고 차근차근 안정을 찾아가지만 마음 어딘가가 허전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야기와 인물의 행복에 깊이 관여한 키워드는 바로 자유다. 주인공이 고국을 등지고 미국에 살게 된 건 자유 때문이나 다름없다. 국가에 종속되지 않은 채 부패하지 않은 국가에서 개인이란 주체로서 살아가는 것,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가 주창하는 자유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난 우는 그런 자유를 손에 넣기 위해 열심히 살지만 아무리 절망하고 또 아무리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어도 생각만큼 자유롭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왜 그런 걸까? 그 이유는 그가 중국인임에도 타지에서 자유를 찾으려는 아이러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중국에 대해서 무지하긴 하지만 그 나라 사람들이 자뻑이 심한 한편으로 자국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도 많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체제 때문에 비판적인 목소리는 강제로 수그러지는 사회인 것도 어렴풋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 작중에선 타국에 살면서도 여전히 자의로든 타의로든 중국의 그늘에 가려진 이민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난 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중국어로 글을 쓰는 것에 더 이상 미련도 없을 정도라 시를 쓰는 것을 포기했고 나중에 시간이 오래 지나 펜을 다시 잡을 때도 영어로 글을 쓰는 사람이다. 이렇게 중국을 등지려는 그의 모습에 미국내 중국인 이민자 사회의 사람들은 비웃고 경멸하길 서슴지 않는다. 난 우도 강단이 있는 인물이지만 자신의 출신과 현재 살고 있는 미국이란 장소 사이의 괴리 때문에 그 고립이 반갑지만은 않다. 이는 타인에 대한 고립이자 자기 스스로의 본심을 고립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자학적인 언행을 보이는 그를 보면 그 내면의 고통이란 게 충격적인 수준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작중의 중국과 미국에 대한 인식은 전적으로 작가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 견해에 기반한 것이므로 약간 불편함을 느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작가나 난 우의 의견에 적잖이 공감했는데, 국가가 국가를 위해 개인에게 자유를 우선하지 못하게끔 한다면 무구한 역사가 있건 국민의 수가 얼마나 되건 어딘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나 역시 동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특정 나라를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난 우의 고통을 무려 1,000페이지 동안 접했기에 내 의견을 감히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자전적인 얘기이자 가장 잘 쓸 수 있는 얘기일 것 같아 읽기 전에 기대를 좀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디테일해 깜짝 놀랐다. 중간엔 비슷비슷한 내용이 반복된다고 느껴질 정도로. 책의 뒷표지에 '두 걸음 나아갔다 다시 한 걸음 물러서는'이란 표현이 정확히 들어맞는 전개였다. 길고 디테일한 전개 덕분에 주인공 내면에 대한 이해는 넘칠 정도로 가능했는데 일상적이고 게다가 쉽고도 쉬운 문체도 계속 이어졌기 때문인지 어느 순간부턴 집중력이 점점 떨어지기도 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아무래도 분량이 너무 길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동병상련의 원리에 따른다면 이 부분엔 그다지 동의 못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사람에 따라선 짧다고 느낄 사람도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생각하는 자유란 국가에 지배되지 않는 삶이다. 그런 측면에서 제아무리 길고 지루했어도 일단 이 작품은 좋은 이야길 담고 있었고 아직은 다소 생소한 중국과 중국인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하진의 작품 중 가장 중국을 많이 얘기하는 작품이었는데 덕분에 이웃 나라에 보다 관심이 생기기도 했다. 기회가 닿는 즉시 작가의 작품은 물론이고 다른 중국 문학도 읽어봐야겠구나 싶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중국이란 나라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작품의 어떤 인물의 말을 빌리자면 국가와 인민을 따로 본다는 것이다. 나라와 사람은 많이 다른 것이지 않은가. 문화도 마찬가지다.

애국에 관한 헛소리는 작작해요. 애국주의는 당국이 휘두르는 마지막 회초리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걸로 때리죠. - 1권 161p




자유란 그것을 활용하는 법을 모르면 의미가 없는 거죠. - 1권 214p




내 인생이 엉망이 될지도 몰라요.

그건 흔한 일이죠. - 2권 144p




그래요, 독불장군이 되겠다는 거겠죠.

맞아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무엇보다 우리가 품위 있는 인간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에게 공정하고 정직해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 2권 253p




그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삶을 허비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조롱거리가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궁극적으로 그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각오를 하고 시를 쓰는 데 전념할 정도로 용감해져야 했다. - 2권 436p




시인의 작품은 늘 시인보다 좋아야 한다. 그것이 글을 쓰는 이유다. - 2권 44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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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 ㅣ 킬러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해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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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책을 고를 때 신작이라고 집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이 책의 경우에는 출간 기념으로 작가가 방한해 작가 초청회까지 가진다기에 부리나케 산 작품이었다. 초청회 당첨 문자가 너무 늦게 와서 이 책을 한 글자도 읽지 못한 채 초청회에 가야 했지만 이 책 덕분에 작가가 한국까지 왔으니 불만이 생길 수가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사카 코타로라니, 나중에 직접 대면해 사인을 받을 때는 전에 없이 가슴이 콩닥거렸다. 학교를 째길 잘했지.

 이 작품의 전작이랄 수 있는 '킬러' 시리즈의 작품들은 한 권도 못 읽어서 알게 모르게 진입하기 부담스러웠는데 초청회 때 얘기길 들어보니까 딱히 시리즈 전체를 크게 관통하는 스토리는 없다 하니 부담없이 펼칠 수 있었다. 작품의 초반 에피소드의 주요한 위트나 문장들은 초청회에서 스포를 당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리 읽지 않은 내 잘못이 크다. 게다가 위트가 전부이거나 결정적인 작품은 또 아니라서 작품을 다 읽을 즈음엔 초청회가 스포일러를 조심하려고 최선을 다했다며 은근 감탄하기도 했다.


 솔직히 설정만 놓고 봤을 땐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치곤 평범하단 생각이 딱 들었다. 킬러 주인공이 가족이 생기고 나이가 들면 으레 업계에서 발을 빼고 싶어하는 법인 것 같고 업계에서 전설적인 실력을 가진 킬러라지만 집에선 아내의 말에 긴장하며 살아간 나머지 아들의 동정도 받는 아이러니하고 코믹한 설정도 처음엔 그렇게 흥미롭진 않았다. 물론 작가가 내공이 탄탄해서 이런 아이러니함을 대놓고 우스꽝스럽거나 과장되게 그리지 않고 오히려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라면 격하게 고갤 끄덕일 정도로 현실적이고 적당히 웃프게 그려서 픽션의 형식을 취했지만 알고 보니 작가 본인의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초청회 때의 기억을 더듬자면 아마 자기 담당 편집자의 상사가 공처가인 것에 착안을 얻은 캐릭터 설정이라는데 어찌 됐든 새삼 작가의 내공이라는 게 자연스러운 묘사로써 드러난다는 것이 못내 인상적이었다.

 5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연작 소설집은 킬러가 일과 가족 사이에서 방황하다 고심 끝에 은퇴를 현실화시키려 하자 위협을 받는 이야기로 발전하게 된다. 으레 예상되는 수순이긴 하지만 디테일한 부분에 있어선 상술했듯 이사카 코타로가 보통 내공의 작가가 아님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두 번째 소설 'BEE'에서 벌집을 제거하는 장면에서 자기가 그간 저지른 살인의 무게를 통감하는 심리 묘사는 잊혀지질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 내에서 가장 일상적이고 스케일이 작은 사건이거늘 어떻게 보면 가장 박진감 넘치는 한편으로 감정 이입도 되면서 주인공의 용서 받을 수 없는 처지가 서글프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자기 딴에는 무자비한 살인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겠지만 결국 살인을 업으로 살아온 사람이 가정도 이루고 어느 정도 화목하게 지내는 건 자칫 기만에 가까운 설정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논란을 인물의 다단한 심리를 들춰냄으로써 세상은 빛과 어둠으로 이분시켜 바라보기엔 복잡하다는 이치를 다시금 상기시켜 주인공과 작품의 매력을 어필하는 데 성공하지 않았나 싶다.


 작가의 작품을 생각보다 많이 읽어서 아무래도 이 작품과 비교할 수밖에 없었는데, 엄밀히 말하면 이전만큼 신선하거나 골 때리게 엉뚱하기 보단 차분함이 돋보였고 연출에 있어서도 마지막 단편인 'FINE'도 교차 서술을 이용하는 것에 비해 무언가 쾌감이 덜해 전체적으로 무난한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스토리의 디테일이 뛰어나 큰 틀에서 보면 식상해 보이는 이야기도 마냥 식상하게 읽히지 않았고 오히려 휴머니즘이 지극해서 괜히 감동적이라 가슴이 먹먹하기까지 했다. 때문에 작가를 존경하는 나의 마음 역시 특별히 변화의 조짐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목이 마르다는 얘기는 한 번쯤 해둬야 할 것 같다. 작가에게 뭐라 그러는 게 아니라, 순전히 허튼 팬심으로 하여금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전부 미화하지 않으려는 나만의 다짐 같은 것이다. 그래서 요점이 뭐냐면, 삘이 꽂힌 김에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야 갈증이 해결될 테니.

 

 

누군가를 비난할 때도 누군가를 옹호할 때도 공정하자고 생각하라고. - 48p




남편에게 잘못을 지적당하고 기뻐할 아내는 없다. - 88p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불행 중 대다수는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 사이에서 생긴다. - 93p




부모라는 사람들은 늘 아차, 하고 생각하는 법이야. - 94p




"튀는 일이라는 게 뭔가요. 여둡다는 건 그저 조용히 일상을 즐길 수 있다는 뜻이에요." 밝은 성격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인간이 걸핏하면 다른 이를 끌어들이지 않고는 인생을 즐기지 못하는 경우를 풍뎅이는 알고 있었다. - 177p




온갖 무기나 흉기를 사용하고 또 상대해 온 풍뎅이 입장에서 보자면, 최종적으로 싸움을 방지하는 데 필요한 건 ‘신뢰‘라고 생각한다. - 199p




물든 안 물든 모기는 때려잡을 필요가 있다. 물리고 나서는 늦기 때문이다. - 2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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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10
모리 카오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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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이 만화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대원씨아이가 아닌 북박스에서 출판한 버전의 1권을 싸게 구입한 걸 계기로 읽게 된 작품이다. 북박스란 출판사가 지금은 없는지 같은 판형과 가격의 후속권들이 모조리 절판된 상태라 알라딘 중고서점에 재고가 언제 들어오는가 유심히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냥 대원씨아이에서 나온 신형을 구매했으면 그만이었지만 구형에 대한 나의 고집 때문에 완독하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는데... 왜 그토록 이 만화를 끝까지 읽으려 했는가 물어본다면 당연히 결말이 궁금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막상 다 읽으니까 신분 차이의 갈등과 비극을 차용한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인데다 흔히 말하는 사건의 위기 또한 너무 싱겁게 그려지고 끝나서 김새긴 했지만.

 사람들은 모리 카오루의 데뷔작인 이 작품을 두고 경지에 오른 작화라며 데뷔작이라기엔 지나치게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화려하고 예쁘기만 한 그림체와는 결이 달랐는데 매번 그림을 볼 때마다 장인 정신과 더불어 정말이지, 메이드와 당시 영국의 시대를 거의 흠모하다시피 빠져든 작가가 자기 로망을 제대로 실현하는구나 싶어 헛웃음이 나다가도 부럽기도 했다. 좋아하는 걸 하는 사람은 부럽기 마련이다.


 처음엔 스토리가 정말 흥미진진해서 다음 권을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이야기긴 한데, 사랑에 빠진 두 남녀 사이엔 일개 메이드와 존슨 가문의 장남이라는 신분의 격차가 있어 초장부터 이 둘의 사랑은 부정당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배경이 무려 20세기도 안 된 영국이다. 시대는 산업화의 일로를 걷고 있지만 아직 신분의 차이에 따른 사람들의 사고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귀족의 모습은 지금 우리가 보기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전근대적인 구석이 있는데, 가령 사교를 위해 여자는 치장을 하고 사랑의 여부를 떠나서 신랑감을 찾아 결혼을 하고, 그 과정에서 부모나 가문 간의 합의가 중요하고...... 물론 요즘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이와 같은 과정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냐 아니냐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아니, 다른 걸 다 떠나서 사실상 말이 귀족이지 가문의 체면과 가문 간 결속을 위해 살아간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당시 여성들의 모습이 참 웃기고 안쓰러웠다. 작품은 작가의 로망을 위해 시대 비판적인 요소보단 단순히 사랑의 실현과 외면, 그리고 비극에 초점을 맞췄지만 나는 작중 귀족 여인들이 일을 한다거나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모습 하나 없이 하인들이 떠받들어줘 그저 예쁘게 존재하기만 하는 가축에 불과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말이 좀 심했는데, 그게 그 여성들의 잘못이 아닌 당시 사회와 시대가 조장한 여성의 모습이란 것에 참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의 스토리 텔링이 그렇게 나쁘진 않았고 디테일 면에서는 사뭇 훌륭했지만 깊이 파고들면 흥미롭게 논의가 오갈 만한 요소들이 작가의 로망에 가려 미묘하게 묻혔던 게 다소 아쉬웠다. 위에서 내가 했던 딱딱한 얘기 말고 또 다른 얘길 하자면, 엠마와 윌리엄의 사랑도 좋았지만 한편으론 그 사이에 끼어 '윌리엄을 짝사랑한 죄'로 상처만 받은 엘레노어가 너무 가여웠다. 어떻게 보면 작품에서 큰 시련을 안겨주는 핵심적인 인물이긴 하나 이 캐릭터에겐 악의도 없고 엄밀히 말하면 엠마 못지않은 피해자다. 약혼까지 해놓고 그걸 다시 무른 윌리엄은 남자인 내가 봐도 결과적으로 책임질 수 없으면서 상대의 마음만 가지고 논 추태를 보인 것이나 다름없어 작품의 결말이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작가도 이게 좀 심하다고 생각했는지 외전의 한 에피소드에서 엘레노어에게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리란 암시를 주지만 그 에피소드가 재밌는 것과는 별개로 본편의 스토리가 어딘가 전체적으로 특정 감정선에 편협했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로맨가 원래 이런 건가? 정통 로맨스를 언제 마지막으로 봤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당최 내성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총 10권으로 완결되는 이 작품은 7권에서 본편이 끝나고 나머지 3권은 외전인데 말 그대로 외전이라 큰 재미를 안겨주지 않는다. 단편 하나하나가 나름 완결성이나 완성도를 자랑하지만 외전이 3권 분량인 건 아무래도 과한 감이 있어 은근히 다 읽기 질렸다. ...쓰다 보니 작품을 엄청 비판하고 말았는데 작가의 로망 실현이 부러운 한편으로 그 로망 자체엔 생각보다 마음이 동하지 않아 말이 차갑게 나오는 것 같다. 다만 작가가 여성이라 그런지 메이드를 일체의 성적 대상화 없이 우아하고 고풍스럽게 묘사한 건 꽤 인상적이었다. 메이드에 환장한 적이 없지만 환장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느낄지 궁금한데 들리는 바로는 많은 메이드에 환장했다는  사람들을 '감화';;시켜서 그런 측면에서라도 의의가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글쎄;; 그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한 명의 독자로서 작가의 로망은 인정한다. 다시 말하지만 부럽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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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파파
구효서 지음 / 뿔(웅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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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학교 수업의 과제가 아닌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순문학을 읽기는 참 오랜만이다. 순전히 제목에 '나가사키'가 들어가고 나가사키가 배경이라 집은 책이다. 난 우리나라 소설 중 외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꽤 좋아하는데 그런 나의 기대에 실로 부응하는 작품이었다. 오히려 기대 이상이었다. 외국 배경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내가 외국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도 있지만 국적의 차이에 따른 일상의 변주와 주제 전달이 특히나 마음에 들기 때문이 더 크겠다.

 이 작품은 큰 틀로만 보면 보편적이고 식상한 이야기긴 하다. <나가사키 파파>는 아빠를 찾는 동시에 자아도 찾는 주인공의 여정을 은근히 유쾌하고 진지하게 그려낸다. 구효서 작가의 작품은 처음 읽는데 앞으로도 자주 찾아 읽어야겠다. 엄연히 문예 창작을 전공하지만 순문학은 아직도 쉽지 않은데 - 애당초 독서의 시작이 순문학이 아니었고 과 자체는 일단 성적이 맞아서 입학했을 뿐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적성에 잘 맞았던 게 신기한 거지. - 이 작품은 순문학 특유의 매력을 꽤나 상기시켜줬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해석하고 의미를 파악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좋은 이야기, 그런 걸 순문학이라 한다면 꽤 잘 들어맞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아무래도 필시 재독을 해야 하겠지만, 당장은 작품의 느낌과 여운을 숙지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듯하다. 뿌리인 아빠를, 나아가 자아를 찾기 위해 일본 나가사키에 체류하는 주인공이지만 방황을 좀 하다가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인 주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모종의 틀에 얽매이지 않은 채 관계를 맺거나 스스로를 마주하는 전개 자체는 앞서 언급했듯 지극히 보편적이고 식상하다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으레 그렇듯이' 정해진 수순대로 이야길 전개시켰을 뿐일 수도 있다. 다만 이런 식의 비판과 해석은 전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못을 박아야겠다. 이 이야기는 작가의 센스와 디테일과 연출이 노련한 작품이라서 통상적인 해석으로 접근했다간 한계에 부딫질 수밖에 없다.

 사람에 따라선 위에 내가 '정확하게 해석하고 의미를 파악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좋은 이야기'라고 말한 게 비꼰 거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난 정말로 진지하게 이런 설명할 수 없는 점 역시 문학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추리소설이나 SF 같이 장르에 따라서는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문학은 본질적으로 숫자와 공식 등 논리적인 개념으로만 이루어진 결과물이 아니다. 이야기로 하여금 작가와 독자 사이의 전적으로 소통하는 것이 문학이다. 완벽한 설명이 덧붙여지지 않아도 일단 좋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척 중요하다.


 내가 이 작품을 포스팅하면서 설마 문학의 매력이란 것에 대해 저렇게 길고 진지하게 얘기할 줄은 몰랐는데...... 작품 얘길 조금만 더 하자면, 일단 너무나 쉽게 읽히고 난해하진 않지만 바로바로 이해가 될 정도로 느슨하고 손쉽게 쓰인 작품은 아니라서 재독할 땐 또 다른 재미를 보장하리라는 강한 느낌을 준다. 솔직히 말해 작품이 좋은 반면에 매력을 쉽게 전달하긴 쉽지 않아 포스팅하기 까다로운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허점이랄 게 없는 노련한 작품이라 간만에 문학을 전공하든 아니든 떠나서 충분히 웃고 즐겼다. 그럼에도 '나도 좀 이렇게 써봤으면 좋으련만' 이란 부러움이 안 들 수가 없지만.

이름 짓는 거, 필요하겠지만 위험하고 불온해. - 24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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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향신료 10 - Extreme Novel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아야쿠라 쥬우 그림 / 학산문화사(라이트노벨)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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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슬슬 내가 읽지 않았던 에피소드에 거의 다달았다는 게 느껴진다. 시리즈의 대장정의 막을 확인하고자 이렇게 처음부터 다시 훑고 있는 중인데 이 복습도 막바지에 달했다고 볼 수 있다. 과연 어느 세월에 이 시리즈의 막을 확인할 수 있을는지.

 제법 긴 에피소드의 다음 권이라 부담이 됐을 법도 한데 작가는 새로운 무대로 하여금 잘도 흡입력 있는 얘길 펼쳐낸다. 개인적으론 분량이 짧은 요번 편이 훨씬 가독성이나 짜임새가 좋았던 것 같다. 섬나라 윈필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국에 처한 상황이 로렌스와 호로가 개입되면서 난장판으로 발전하는 게 볼 만했다. 작가도 자각하듯  '호로의 고향 찾기'라는 본래 목적을 두고 멀리 돌아가고 있는 중이지만 한눈 팔고 있는 것치곤 에피소드 하나 하나의 스케일이 장난이 아니다.


 작중 섬나라 윈필의 상황이 애석하게도 이래저래 모티브가 됐을 터인 영국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데 하필 작년에 브렉시트가 터져서 더욱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답이 없는 쇄국 정책을 펼쳐 국민 모두의 비아냥만 산 왕국의 꼬라지가 아주 정확하진 않더라도 영국을 여러모로 연상시키는 구석이 많았다.

 시리즈 특유의 암투를 순간의 기지로 타개하는 전개는 이젠 좀 흔한 패턴이 됐지만 매번 이만큼 벌려놓고도 그에 상응하는 전략이 준비됐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요번 작에선 호로와 비슷한 능력의 소유자가 등장하는데 이들의 가련하고도 각오로 다잡힌 처지가 후반부에 훌륭한 카드로 활용되는 것도 지극히 드라마틱했다. 애당초 이 정도로 목숨을 걸 사안은 아니라고 로렌스와 호로도 얘길 나누지만 그래도 그들이 이해타산 이전에 논해야 할 가치는 외면하지 않아 시리즈 전체의 분위기나 컨셉, 주제의식 같은 것들이 잘 살아나지 않았나 싶다.


 비교적 짧고 굵게 끝마친 단권 에피소드였다. 아마 다음 권을 시작으로 몇 권 더 지나야 상/하로 분권된 에피소드가 또 나올 것이다. 길이야 어찌 됐든 간에 이젠 한눈 좀 그만 팔았으면 좋겠다. 다른 독자들 말을 들어보니 끝을 향해 가는 내내 자잘한 '뭔가'가 계속 나올 거라고 하는데... 다시 말하지만 이제 한눈은 그만 팔았으면 한다.

거래상의 관계가 원만하게 유지되는 것은 상부상조가 가능한 동안뿐이다. - 14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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