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 - 사쿠라 마나 소설
사쿠라 마나 지음, 이정민 옮김 / 냉수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8.7







 현역 AV - Adult Video의 약자 - 배우가 썼다는 AV 배우 이야기. 일본 소설 중에 해당 '직업'에 대한 소재는 종종 접했지만 이렇게 작가가 그 직종에 종사하는 경우는 처음 접해봤다. 과연 이 작가는 자기가 속한 직업 세계를 어떻게 묘사했을지 궁금해 책을 펼쳐봤다. 그런데, 내가 계속 AV 배우를 직업이라고 지칭했는데 이 표현이 대단히 거슬리는 사람이 있을 듯하다. 흔히 '성진국'이라 불리는 일본에서도 AV 배우는 패배자 - 일본식 표현으론 '싸움에 진 개'라고 한단다. 아니, 개는 왜 건드려? - 라 할 정도로 사회적 인식이 바닥을 기는데 그래서 이 작품집의 제목을 '최저'라 지은 게 아닐까 싶다. 내가 봤을 땐 너무 자학적인 제목이 아닌가 싶은데... 실제로 자학적인 건 제목만이다. 작가는 자기가 속한 직업 세계를 꽤나 덤덤하게 묘사한다. 어떤 판타지도 없이. 어떠한 과장도 없이. 어떤 식으로든 유리하다거나 동정적인 시선 또한 가미하지 않는다.

 <최저>는 총 4편의 단편이 수록된 연작 소설집이다. 공통점이라곤 '비스타'라는 가공의 AV 기획사가 등장한다는 것뿐이고 주인공은 저마다 직업이나 처지가 제각각이다. 처음엔 저자 자신의 모습을 강하게 투여했을 현역 AV 배우가, 두 번째엔 AV 기획사 비스타를 설립한 사장이, 세 번째엔 AV 배우가 되려는 유부녀가, 마지막엔 과거에 AV를 몇 편 찍은 엄마를 둔 외동딸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거두절미하고 딱 두 번째 이야기까지는 읽을 만했다. 책의 전반적인 만족도는 괜찮은 편이다. AV 배우가 쓴 소설이라는 다소 엉큼한 호기심으로 접했는데 문체라든가 이야기의 시작이나 끝맺음도 준수해 술술 거부감 없이 읽혔다. 글쎄, 냉정하게 말한다면 저자의 이름빨 덕에 독자를 많이 확보했을 뿐, 저자가 현역 배우가 아니었더라면 이만한 화제를 모을 수 있었을까 싶지만 기대 이상이라는 감상에 거짓은 섞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인물 설정이 더 다채롭고 입체적이었더라면 어땠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록작도 네 편에서 그치지 않고 더 늘였더라면 좋았을 것 같고. 세 번째 이야기의 유부녀가 섹스 없는 부부 사이에 지쳐 배우에 관심을 가진다는 도입은 너무 뻔했고 마지막 이야기는 너무 감상적이라 읽는 속도가 잘 나지 않았다. 첫 번째 이야기야 워낙에 작가의 목소리가 강하게 들어갔기에, 작가가 후기에서 밝힌 'AV 배우는 여러 가지를 견뎌내는 직업'이라는 말이 이 글에서 제일 호소력 있게 나타났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에 눈길이 갔는데, 유일하게 남자인 이 인물은 건실하게 AV 기획사를 운영하려는 모습을 비춘 것이 인상적이었다. AV 기획사를 운영하는데 건실하다니, 마치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햄버거 나오셨습니다~' 같이 어색하게 들리겠지만 이런 캐릭터야말로 바로 작가가 현역 AV 배우이기에 자연스럽게 등장시킬 수 있던 캐릭터인 것 같아 작가의 경력이 빛을 본 케이스라 할 수 있겠다. 이는 작가가 자기 직업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과도 일맥상통하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일본의 AV 산업에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밀거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작중에선 AV 산업을 일종의 틈새시장으로 여기는 등 작가는 자신의 솔직한 시선을 가감없이 소신껏 드러낸다. 이런 작가의 시선에 불편함을 표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코웃음을 치거나 기껏해야 패배자의 변명이라 일축하는 사람도 적잖으리라. 물론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 작가도 그렇게 생각한다. 떳떳한 직업까진 못 되지만 그러한 경멸 어린 시선까지 견뎌내는 게 이 직업 종사자로서의 고충이라니까. 이쪽 업계에 발을 들였다간 변명의 여지 없이 가족한테 의절당하는 게 비일비재한 일이니까. 그런 동료들의 모습을 봤기 때문일까. 저자는 그래도 자신들도 사람이고 세상 모두가 외면하려는 이쪽 세계에도 감정이 있고 노력하는 삶이 있다고 말을 이어간다.


 내게는 이 책의 본편보다 오히려 저자 후기가 더 무게감 있게 읽혔다. 본편은 몰라도 후기는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저자가 우연히 책을 읽는 재미를 알고 글을 끄적이게 된 경위, 소설을 발표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다른 소설이 아닌 AV 배우의 이야기를 맨 처음 선보이게 된 이유 등이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컸다. 작가 역시 현역 배우로서 사람들한테 평가 받는 것에 있어서 프로라 그런지 자세가 남달랐다. 자신이 쓴 글이 보다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려면, 자신처럼 '에로장이'가 쓴 에로 배우 이야기가 첫 번째 선보이는 소설로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이 책을 발표했단다. 전략 한 번 잘 잡았다고 생각했고 - 실제로 나도 그런 식으로 호기심이 동해 읽게 됐으니까. - 내심 감탄했다. 이 사쿠라 마나라는 사람은 진짜 열심히 살고 있다는 생각에. 누군가는 단지 AV 배우라는 이유로 인생 낙오자 취급하겠지만 이 사람은 아랑곳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다는 걸 생각하니 이 작가만큼이나 노력 없이 산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인정한다. 나라고 AV 배우를 패배자라 생각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진짜 패배자는 자기가 패배자라 여기는 존재보다 더 노력을 하지 않는 존재가 아닌가.

 이 책을 작품 외적인 요소를 제외하고서 후기를 쓰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따지고 보면 그런 요소까지 개입시켜 읽을 수밖에 없는 소설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고 작가로서 달가운 상황도 아닐 듯한데 의외로 이 작가는 '그럼 그렇지' 하며 의연하게 넘어갈 듯하다. 그만큼 소신이 있는 작가니까 앞으로도 자기가 쓰고 싶은 걸, 그리고 하고 싶은 걸 맘껏 도전할 것이다. 여담이지만 작가의 '다른 작품'을 접해본 적은 없는데... 순전히 사쿠라 마나라는 사람한텐 호기심이 좀 생겼다.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보다 더욱. 물론 영화도 볼 것이다. 궁금하긴 하다.

아야코는 두려웠다.

성장해 가는 자신의 몸과 마음이 저만치 가버릴까 봐. 지금 여기 서 있는 자신의 마음과 생각이 홀로 남겨질까 봐. 나이를 먹어 갈수록 주변 어른들처럼 ‘어쩔 수 없다‘는 편리한 핑계를 대면서 그동안 좇던 꿈까지 내팽게치게 될까 봐. - 227p




그때 깨달았다. 아, 책을 좋아하는 기분과 국어 수업을 재미있게 즐기는 감각은 지금 내가 느끼는 ‘말의 포옹‘이라는 것과 통하지 않을까. 이건 틀림없는 ‘만남‘이다. 지금 작가 후기를 읽어 주시는 분들도 분명히 책을 매우 좋아할 뿐 아니라 글자를 접하는 시간마저도 좋아할 것이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어느 정도 살짝 녹아들었다는 감동이었다. - 232p




쓰고 싶은 것이 아무리 많아도 그냥 쓸 뿐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자위행위 같은 것이다. - 2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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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구라치 준 지음, 김윤수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7.8







 참 기묘한 제목의 책이었다. 국내에 두 권의 책이 소개된 구라치 준의 신작 단편집인데 표제작을 비롯해 특이한 작품이 몇 있었다. 아주 인상적인 작품은 아쉽게도 없었지만 모든 수록작의 완성도가 대체로 비슷해 흥이 식지 않았던 건 좋았다.



 'ABC 살인'


 미싱 링크의 허점, 즉 연쇄 살인에 편승하는 내용은 추리소설을 조금만 읽었더라면 식상하게 다가올 것이다. 또한 굳이 추리소설을 많이 안 읽어봤어도 이 작품의 전개 방식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듯하다. 뭐, 그도 그럴 것이 어떻게 보면 그 식상함이 포인트인 작품이니까. 그래서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사실  나름대로 신선한 작품인데 이 정도 신선함으론 추리소설론 어림도 없다고. 이토록 냉정한 감상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나같이 추리소설을 쓰고자 하는 사람을 낙담하게 만드는 작품이지 않았나 싶다.



 '사내 편애'


 SF적 상상력이 가미된 약간 공포스런 작품. 범죄 소설 뺨치는 상황이 소름 끼치게 연발한다. 변뎍을 부리는 AI라니, 그 존재의의에 대해선 솔직히 납득이 안 가지만 제법 신선하게 다가오는 측면도 있었다. 말 그대로 AI가 변덕을 부리니 황당하기까지 했는데 그래서 오히려 결말 부분에서의 마지막 문장이 예상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과연 이런 미래가 도래할까 상상해봤는데 위에서 말했듯 변덕을 부리는 AI가 설득력이 떨어져서 어디까지나 재미로 읽고 말면 그만일 듯하다.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작품이다. 살해된 피해자 앞에서 반드시 범인을 잡겠다고 다짐하는 형사, 피해자의 주변인을 만날 때마다 그녀의 명복을 빌어주는 사람들, 피해자의 머리맡엔 케이크를, 입에는 파가 꽂아 놓은 범인의 행위... 전자는 피해자가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이고 후자는 싫어하던 음식이다. 이 의미불명의 살인 현장은 후에 논리적으로 파헤쳐지는데 이때 밝혀지는 범인의 저의가 생각할수록 소름 끼친다. 살인사건을 다루는 추리소설은 그 자체로 개연성과 목적 의식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는데, 간혹 자극에 눈이 멀어 살인사건 수사의 중요성이나 죽음의 무게를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는 추리소설이 많은 것 같아 이처럼 진지한 추리소설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밤을 보는 고양이'


 고양이를 좋아하긴 하지만 작중의 묘사며 전개 양상, 주인공의 설정이나 사건의 전말 등이 평범하게만 느껴졌던 작품. 인간의 오감을 초월한 동물의 감각, 그 동물의 감각을 근거로 하여 논리적으로 접근해 드러난 사건의 전말은 작년에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일본 영화 <어느 가족>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그 영화가 해당 사회 이슈를 더 효과적으로 잘 드러냈다고 본다.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제목은 일본의 관용구로 주로 융통성 없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답답한 사람을 조소할 때 쓰는 표현이라는데 작중에선 다른 의미로 쓰였다. 정말로 홧김에 저주하는 목적으로 썼고 실제로 이 말을 들은 당사자는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듯한 모양새로 발견됐다.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은 다들 느끼겠지만 가장 의외였던 부분은 작품의 배경이 1940년대의 일본이란 것이다. 패전의 분위기를 애써 외면하며 가미카제 같은 작전을 대안으로 삼던 그 미친 시대를 배경으로 젊음을 유린당하는 인물들의 처지가 애처로웠다. 오히려 작품 전체에 걸쳐 설명되는 기술이나 사건의 전개와 해결따윈 관심도 없었다. 너무 허무하게 설명되고 끝날 뿐이라서... 마치 '사건을 해결하는 게 뭐 그리 중요한가?'라는 투라 읽는 내가 바보가 되는 것 같았다. 참 황당한 마무리였고 예상치 못했던 작중 배경도 더한데 해당 시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꽤 읽을 만할 듯하다. 당시의 답이 없던 분위기가 잘 전달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비판하는 목적에선 최고의 작품이었던 것도 같다. 왜 굳이 두부 모서리 뭐시기인지 하는 관용구를 언급했는지 모르겠지만.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


 지난 번에 읽은 작가의 <지나가는 녹색 바람>에서도 등장했던 네코마루 선배가 탐정역으로 나오는데 이번에도 그의 매력이 뭔지 잘 와 닿지 않았다. 벌써 두 번째 접하지만 어째 작가만 마음에 들어하는 캐릭터인 것 같다. 아무튼 매력은 덜해도 추리력은 상당하고 또 작품 자체의 반전이나 작가 특유의 뜬금없는 주제의식은 재밌었는데 그에 비해 전개는 되게 지루해서 그게 좀 불만이다. 내가 너무 바라는 게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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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 미친 듯이 웃긴 북유럽 탐방기
마이클 부스 지음, 김경영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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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복지, 사회 제도, 경제 성장, 그리고 행복도 등 여러 면에서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하는 북유럽의 이모저모를 이방인의 시선에서 살펴보는 책.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순으로 진행된다. 저자는 자신이 10년 가까이 살았다는 덴마크는 물론이고 그 사이에 짬짬이 들렀던 북유럽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사유를 해보인다. 저자에게 가장 친숙할 덴마크와 북유럽의 패자인 스웨덴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당 할애된 페이지가 100쪽이 넘지 않아 걱정이 좀 됐지만 예상 외로 수박 겉 핥기 이상의 성과를 냈다. 물론 내가 이렇게 느끼는 데엔 저자만큼은 아니어도 나 역시 자체적으로 북유럽 국가들에 관심을 가져왔던 덕분도 있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선 지구본에서 북유럽이 어디 있는지 찾느라 한참 헤맬 수도 있으므로 이 책이 완벽하게 입문용으로 좋았다고는 볼 수 없다. 글쎄, 북유럽에 딱히 관심도 없으면서 이 책을 집어 들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지만... 어쨌든 북유럽 나라들에 대해 어느 정도 선행 학습이 이뤄지지 않은 이상 저자가 말하는 내용이 쫓아가기 버겁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이 말은 반대로 말하면 한 번이라도 북유럽에 관심을 가져본 사람들, 여행책을 들여다봤든 그곳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나 영화를 접한 사람들, 실제로 여행으로 다녀오기까지 한 사람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책이라는 것이다. 나는 북유럽에 지대한 관심이 있을 뿐더러 북유럽 작가가 썼거나 그곳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과 영화들을 꽤 좋아하며며 심지어 북유럽 5개국 중 한 곳인 노르웨이까지 다녀왔으니 이 책이 적잖이 술술 읽혔던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 후기를 두루 살펴보니까 취향을 꽤나 타는 모양이던데, 솔직히 납득은 안 되지만 - 이 책의 번역이 그렇게 이상한지 난 잘 모르겠다. 내가 주로 외국 문학을 많이 읽어서 그런 걸까? 진짜 이상한 번역의 문학을 종종 접해서 그런지 비문학은 아무리 번역이 개판이라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쉽게 읽히지 않았나 싶다. - 나라마다 짧게 훑고 지나간다는 건 나 또한 느꼈다. 조금 더 길었으면 어땠을까.


 철저하고 단호한 양성 평등 정책이나 높은 세율과 신뢰가 있는 연금 제도, 때론 북해의 유전 같은 행운이나 전반적으로 인구가 적어 모든 국민이 복지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등 북유럽 사회의 성공엔 여러 요인을 언급해볼 수 있을 듯하다. 저자는 처음부터 자신의 짧은 글로는 북유럽 전체를 살펴보기엔 턱없이 부족함을 인정하지만 제법 효과적이고 폭넓은 취재로 북유럽 사회가 거의 완벽에 가까워질 수 있던 이유에 사뭇 가까이 다가갔다. 모름지기 국민성이란 걸 한마디로 쉽게 정의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북유럽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은 마냥 간과할 수많은 없는 것이기에 이 책은 그 자체로 의의가 있다. 덴마크랑 스웨덴, 핀란드를 다룬 책은 읽어봤어도 이 책처럼 노르웨이랑 아이슬란드까지 아우르는 책은 처음이라 마냥 신선했다.

 각 나라의 역사적 맥락이나 고충을 굳이 내 후기에까지 옮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매우 흥미로운 얘기지만 저자처럼 잘 쓸 자신도 없거니와 그보다 더 중요하고 말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 과감히 생략하려고 한다. 북유럽은 다른 서방 국가와 다르게 비교적 같은 피부색, 머리칼을 가진 사람들끼리 살아왔기에 상대를 신뢰하기가 대체로 용이했고 - 서로 별다른 말 없이도 마음이 전달된다고 생각할 정도라고... - 그러한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어 복지며 사회 제도가 안착이 가능했으리란 게 이 책에서 내내 거론되는 부분이다. 이는 이민자나 외부인이 아닌 순수히 그 나라 국민에게 해당이 되는데 그 때문에 최근 들어 노르웨이에서 테러며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비극이 터지기도 하지만 이런 비극 역시 더 발달되고 차별이 없는 사회 제도로 극복할 수 있다고 앞다퉈 목소릴 높이는 북유럽 국가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라면 인상적이었다.


 아무래도 북유럽이라고 하면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복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폐해는 현시점에 와선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는 중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너무나 편안한 복지가 있어 사람들에게서 경쟁력과 같은 능동적인 감정을 결여시키는 건 분명 문제고 그 복지에 수반되는 높은 세금도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평등을 추구하느라 엘리트들을 홀대하고 그들이 자국을 떠나는 걸 막을 방도가 없다는 건 어떻게 보면 치명적인 이야기다. 일전에 읽은 <덴마크 사람들처럼>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왔다. 역사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저력을 가졌음에도 너무나 완벽에 가까운 사회 제도 때문에 도리어 엘리트들이 해외로 떠나고 점점 해외에 비해 국가 경쟁력이 희미해진다면, 가령 아이슬란드처럼 경제적 위기에 처하거나 노르웨이처럼 언젠가 고갈이 날 것이 분명한 석유에 크게 의존하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간과해선 안 될 일이니까.

 이런 상황에 대해 저자는 명확한 답을 제시하는 건 아니다. 저자는 결론에서 은근히 낙관적인 태도로 북유럽이 지금까지 이뤄놓은 것들이 더 나은 형태의 결과를 낼 것이라고 아부인 듯 아부 아닌 - 500쪽 내내 삐딱선 타면서 깐족거릴 땐 언제고... 특히 스웨덴에선 정말이지... - 단언을 해버린다. 북유럽에 콩깍지라도 씐 것 아니냐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데, 나도 북유럽의 사회 제도가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대안이 없는 현존하는 가장 완벽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북유럽이 그 정도의 복지나 그 정도의 평등을 추구할 수 있는 건 여러 북유럽만의 특수성이 있었음을 가벼이 여겨선 안 되지만 그래도 배울 점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상이라 여기는 영역을 북유럽이 제도화했는데 그 이면에 단점이 있다고 한들 그들이 추구하는 바까지 훼손되는 건 아니니 아직은 그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 때라고 본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이란 제목은 어딘지 비꼬는 투가 역력하지만 저자도 어느 정도 인정하듯 이 비꼬는 투엔 질투도 포함됐다. 당연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도를 넘은 질투나 트집이 아니다. 이방인의 시선에서 생소한 지점에 매스를 들이대는 건 중요하지만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계속 말했듯 거의 완벽에 가까우니까 말이다. 계속 말하다 보니 참 기막힌 제목이 아닐 수 없네.

‘자신을 좋아한다는 망상에서 벗어나는 순간 순수함은 끝난다.‘ 존 디디온, <자존심에 대하여> 중에서. - 34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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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마십니다, 맥주 - 이왕이면 지적이고 우아하게 한잔합시다
이재호 지음 / 다온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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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난 맥주를 마시는 걸 정말로 좋아한다. 알코올이 약해서 맥주밖에 못 마시는 게 아니라, 정말로 맥주 특유의 씁쓸함과 시원함을 좋아하는 것이다. 맥주만큼 갈증을 달래는 술도 없고 맥주만큼 덜 취하고 맛을 음미할 수 있는 술도 없다. 술에는 저마다 역할이 제각각인 것 같은데 그중 나는 맥주가 주는 느낌을 가장 선호한다. 물론 막걸리도 좋고 와인도 좋고 소주는... 가끔 좋다. 최근엔 칵테일도 먹게 됐지만 그래도 역시 맥주가 좋다. 해외로 여행가면 여행지 근처에 맥주 공장이 있는가 살펴볼 정도니 말 다했다.

 그런 내가 맥주에 대해 얘기하는 책을 이제서야 처음 읽은 건 어떻게 보면 신기할 지경이다. 이 책 <오늘도 마십니다, 맥주>는 순전히 저자가 자기 친구에게 어떤 맥주를 추천하면 좋을지 생각하면 쓰게 됐다는데 그런 것치곤 너무나 전문적이었다. 저자는 겸손하게 말하지만 이건 뭐 어느 뭐로 보나 전문가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각 장마다 쓰게 된 목적이나 개요를 밝히는 게 친절했는데, 어느 한 문장이라도 허투루 읽고 싶지 않아서 정독해버렸다. 맥주의 역사는 진짜 흥미롭더라. 그 뒤 내용은 전문적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좀 머리 아파졌지만... 아무래도 편의점에서 일반적으로 구매할 수 없는 맥주에 대해 얘기하니까 쫓아가기 버거웠던 측면이 있던 것 같다. 추천하는 맥주를 전부 마셔보고 싶었지만 귀찮아서 맥주 구입을 편의점에서 다 해버려서 우연히 그 맥주들을 발견해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까 싶다. 하도 많은 맥주를 소개받아서...


 책의 퀄리티가 전반적으로 고급스러웠다. 사진이나 일러스트도 큼지막하고 알아보기 쉽게 수록됐고 특히 맥주의 종류를 설명함에 있어 용이하지 않았나 싶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니 맥주에도 정말 다양한 종류가 있던데 저자가 족집게처럼 잘 짚어줘서 그간 마셨던 맥주들의 맛을 몇 차례나 떠올릴 수 있었다.

 '못난 맥주는 다 비슷하지만 훌륭한 맥주는 저마다 이유가 다르다.' 라는 게 저자의 지론이다. 정말 그 말대로다. 수많은 맥주가 저마다의 이유로 시장에서 이름을 드높이고 있다는 게 무척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크래프트'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었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단순히 '수제'라는 말이 아닌, 만드는 이의 철학이 들어갔다는 의미로 이해하니 비로소 크래프트의 존재 의의가 와 닿더라. 펍이나 어디 식당엘 가면 수제 맥주는 꼭 주문하는데 앞으로도, 아무리 비싸더라도 꼭 주문해 마셔야겠다고 다짐했다.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맥주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사람에겐 이보다 더 적합한 책은 없을 듯하다. 맥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읽어보면 재밌을 듯하다. 맥주의 다양한 종류에 잠깐 넋이 나갈 테지만 그건 그것대로 상상이 자극되니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맥주를 마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 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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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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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챈들러의 <빅슬립>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도 느낀 거지만 지금 읽어도 복잡한 플롯 때문에 읽는 내내 지루함과 싸웠다. 처음에 의뢰인이랑 만나고 의뢰인의 기괴한 가족들과 몇 차례 대면하고 사건의 이면에 다가설수록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것까진 볼 만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전개가 너무 반복적이서 흥미를 잃게 됐다. 이 점은 다시 읽어도 극복되질 않네. 가끔은 유명세가 무색하게 나와 안 맞는 고전도 있는 법이다.

 오해할까봐 하는 말인데, 탐정이 멋들어진 대사를 날리고 어떤 상황에서건 삐딱한 유머를 잃지 않고 뒷거리를 배회하고 두뇌만큼이나 주먹과 총도 사용해가며 사건을 해쳐나가는 하드보일드 특유의 스타일엔 딱히 거부감은 없다. 특히 <빅슬립>은 하드보일드의 원조격 작품으론 둘째 가라면 서러울 작품이기에 - 시초는 대실 해밋이라지만 작풍에 걸맞는 캐릭터로까지 살펴보면 챈들러만큼 하드보일드의 스타일을 확립한 인물도 없다고 한다. - 후대의 겉멋든 작품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특정 작품을 의식한 게 아닌 온전히 본인의 작품 세계에 심취해서 탄생한 작품이라 해야겠다. 이런 게 당대, 그러니까 셜록 홈즈나 애거서 크리스티로 대표되는 추리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에겐 대단히 신선하게 다가왔을 듯하다. 나는 일본의 하라 료의 작품으로 하드보일드를 처음 접했는데 그 작가가 바로 일본의 챈들러라고 불리니 이렇게 원조를 읽는 게 얼마나 기대됐는지 모른다.


 특별히 1950년대 이전의 미국의 풍경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나지만, 엘러리 퀸이 그린 맨해튼 섬에 비하면 챈들러의 캘리포니아의 뒷골목은 사뭇 다른 느낌을 안겨준 게 인상적이라면 인상적이었다. 동부보단 좀 더 무법지대인 듯한 서부를 배경으로 조금만 처신을 잘못하고 수읽기에 실패하면 여지없이 폭력이 작렬하는 분위기가 눈으로 펼쳐질 듯 선명했다. 누군가는 냄새까지 느껴질 정도라고 하는데 재밌는 표현이지만 제법 그럴싸하다. 아무튼 이런 식의 가감없는 작풍은 제목인 '빅슬립'이 잘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여러 해석이 난무하지만 결국 '영면'으로 해석되는데 - 누군가는 '꿀잠'이라 해석했다는데ㅋㅋㅋ - 듣기론 챈들러가 만든 표현이라고 한다. 참 장중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미국 문학에서 챈들러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감은 잘 안 오지만 이런 비범하다고도 볼 수 있는 면모가 평단으로 하여금 그를 고평가하게 만드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두 번째 읽었음에도 작중 서사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해 결국 이번에도 수박 겉만 핥는 후기가 되고 말았지만... 다른 사람의 후기를 접하면서 챈들러나 필립 말로와 연관되는 후대의 여러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소개받을 수 있어서 그런대로 위안 삼을 수 있었다. 은근히 나와 하드보일드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일전에 읽은 로스 맥도널드의 <소름>은 꽤 괜찮게 읽어서 - 반면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는 별로였다. 주인공인 샘 스페이드가 너무 마초라서 재수 없... - 이 장르에도 조금은 용기를 갖고 도전해보려고 한다.

사람이 악행을 저지를 때도 대리인을 통해서 해야만 한다면, 갈 데까지 다 간 거지. - 16p




일단 죽으면 어디에 묻혀 있는지가 중요할까? 더러운 구정물 웅덩이든, 높은 언덕 꼭대기의 대리석 탑이든 그게 중요한 문제일까? 당신이 죽어 깊은 잠에 들게 되었을 때, 그러한 일에는 신경쓰지 않게 된다. 기름과 물은 당신에게 있어 바람이나 공기와 같다. 죽어버린 방식이나 쓰러진 곳의 비천함에는 신경쓰지 않고 당신은 깊은 잠에 들게 되는 것뿐이다. - 352~3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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