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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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챈들러의 <빅슬립>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도 느낀 거지만 지금 읽어도 복잡한 플롯 때문에 읽는 내내 지루함과 싸웠다. 처음에 의뢰인이랑 만나고 의뢰인의 기괴한 가족들과 몇 차례 대면하고 사건의 이면에 다가설수록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것까진 볼 만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전개가 너무 반복적이서 흥미를 잃게 됐다. 이 점은 다시 읽어도 극복되질 않네. 가끔은 유명세가 무색하게 나와 안 맞는 고전도 있는 법이다.

 오해할까봐 하는 말인데, 탐정이 멋들어진 대사를 날리고 어떤 상황에서건 삐딱한 유머를 잃지 않고 뒷거리를 배회하고 두뇌만큼이나 주먹과 총도 사용해가며 사건을 해쳐나가는 하드보일드 특유의 스타일엔 딱히 거부감은 없다. 특히 <빅슬립>은 하드보일드의 원조격 작품으론 둘째 가라면 서러울 작품이기에 - 시초는 대실 해밋이라지만 작풍에 걸맞는 캐릭터로까지 살펴보면 챈들러만큼 하드보일드의 스타일을 확립한 인물도 없다고 한다. - 후대의 겉멋든 작품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특정 작품을 의식한 게 아닌 온전히 본인의 작품 세계에 심취해서 탄생한 작품이라 해야겠다. 이런 게 당대, 그러니까 셜록 홈즈나 애거서 크리스티로 대표되는 추리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에겐 대단히 신선하게 다가왔을 듯하다. 나는 일본의 하라 료의 작품으로 하드보일드를 처음 접했는데 그 작가가 바로 일본의 챈들러라고 불리니 이렇게 원조를 읽는 게 얼마나 기대됐는지 모른다.


 특별히 1950년대 이전의 미국의 풍경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나지만, 엘러리 퀸이 그린 맨해튼 섬에 비하면 챈들러의 캘리포니아의 뒷골목은 사뭇 다른 느낌을 안겨준 게 인상적이라면 인상적이었다. 동부보단 좀 더 무법지대인 듯한 서부를 배경으로 조금만 처신을 잘못하고 수읽기에 실패하면 여지없이 폭력이 작렬하는 분위기가 눈으로 펼쳐질 듯 선명했다. 누군가는 냄새까지 느껴질 정도라고 하는데 재밌는 표현이지만 제법 그럴싸하다. 아무튼 이런 식의 가감없는 작풍은 제목인 '빅슬립'이 잘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여러 해석이 난무하지만 결국 '영면'으로 해석되는데 - 누군가는 '꿀잠'이라 해석했다는데ㅋㅋㅋ - 듣기론 챈들러가 만든 표현이라고 한다. 참 장중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미국 문학에서 챈들러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감은 잘 안 오지만 이런 비범하다고도 볼 수 있는 면모가 평단으로 하여금 그를 고평가하게 만드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두 번째 읽었음에도 작중 서사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해 결국 이번에도 수박 겉만 핥는 후기가 되고 말았지만... 다른 사람의 후기를 접하면서 챈들러나 필립 말로와 연관되는 후대의 여러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소개받을 수 있어서 그런대로 위안 삼을 수 있었다. 은근히 나와 하드보일드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일전에 읽은 로스 맥도널드의 <소름>은 꽤 괜찮게 읽어서 - 반면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는 별로였다. 주인공인 샘 스페이드가 너무 마초라서 재수 없... - 이 장르에도 조금은 용기를 갖고 도전해보려고 한다.

사람이 악행을 저지를 때도 대리인을 통해서 해야만 한다면, 갈 데까지 다 간 거지. - 16p




일단 죽으면 어디에 묻혀 있는지가 중요할까? 더러운 구정물 웅덩이든, 높은 언덕 꼭대기의 대리석 탑이든 그게 중요한 문제일까? 당신이 죽어 깊은 잠에 들게 되었을 때, 그러한 일에는 신경쓰지 않게 된다. 기름과 물은 당신에게 있어 바람이나 공기와 같다. 죽어버린 방식이나 쓰러진 곳의 비천함에는 신경쓰지 않고 당신은 깊은 잠에 들게 되는 것뿐이다. - 352~3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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