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 - 사쿠라 마나 소설
사쿠라 마나 지음, 이정민 옮김 / 냉수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8.7







 현역 AV - Adult Video의 약자 - 배우가 썼다는 AV 배우 이야기. 일본 소설 중에 해당 '직업'에 대한 소재는 종종 접했지만 이렇게 작가가 그 직종에 종사하는 경우는 처음 접해봤다. 과연 이 작가는 자기가 속한 직업 세계를 어떻게 묘사했을지 궁금해 책을 펼쳐봤다. 그런데, 내가 계속 AV 배우를 직업이라고 지칭했는데 이 표현이 대단히 거슬리는 사람이 있을 듯하다. 흔히 '성진국'이라 불리는 일본에서도 AV 배우는 패배자 - 일본식 표현으론 '싸움에 진 개'라고 한단다. 아니, 개는 왜 건드려? - 라 할 정도로 사회적 인식이 바닥을 기는데 그래서 이 작품집의 제목을 '최저'라 지은 게 아닐까 싶다. 내가 봤을 땐 너무 자학적인 제목이 아닌가 싶은데... 실제로 자학적인 건 제목만이다. 작가는 자기가 속한 직업 세계를 꽤나 덤덤하게 묘사한다. 어떤 판타지도 없이. 어떠한 과장도 없이. 어떤 식으로든 유리하다거나 동정적인 시선 또한 가미하지 않는다.

 <최저>는 총 4편의 단편이 수록된 연작 소설집이다. 공통점이라곤 '비스타'라는 가공의 AV 기획사가 등장한다는 것뿐이고 주인공은 저마다 직업이나 처지가 제각각이다. 처음엔 저자 자신의 모습을 강하게 투여했을 현역 AV 배우가, 두 번째엔 AV 기획사 비스타를 설립한 사장이, 세 번째엔 AV 배우가 되려는 유부녀가, 마지막엔 과거에 AV를 몇 편 찍은 엄마를 둔 외동딸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거두절미하고 딱 두 번째 이야기까지는 읽을 만했다. 책의 전반적인 만족도는 괜찮은 편이다. AV 배우가 쓴 소설이라는 다소 엉큼한 호기심으로 접했는데 문체라든가 이야기의 시작이나 끝맺음도 준수해 술술 거부감 없이 읽혔다. 글쎄, 냉정하게 말한다면 저자의 이름빨 덕에 독자를 많이 확보했을 뿐, 저자가 현역 배우가 아니었더라면 이만한 화제를 모을 수 있었을까 싶지만 기대 이상이라는 감상에 거짓은 섞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인물 설정이 더 다채롭고 입체적이었더라면 어땠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록작도 네 편에서 그치지 않고 더 늘였더라면 좋았을 것 같고. 세 번째 이야기의 유부녀가 섹스 없는 부부 사이에 지쳐 배우에 관심을 가진다는 도입은 너무 뻔했고 마지막 이야기는 너무 감상적이라 읽는 속도가 잘 나지 않았다. 첫 번째 이야기야 워낙에 작가의 목소리가 강하게 들어갔기에, 작가가 후기에서 밝힌 'AV 배우는 여러 가지를 견뎌내는 직업'이라는 말이 이 글에서 제일 호소력 있게 나타났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에 눈길이 갔는데, 유일하게 남자인 이 인물은 건실하게 AV 기획사를 운영하려는 모습을 비춘 것이 인상적이었다. AV 기획사를 운영하는데 건실하다니, 마치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햄버거 나오셨습니다~' 같이 어색하게 들리겠지만 이런 캐릭터야말로 바로 작가가 현역 AV 배우이기에 자연스럽게 등장시킬 수 있던 캐릭터인 것 같아 작가의 경력이 빛을 본 케이스라 할 수 있겠다. 이는 작가가 자기 직업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과도 일맥상통하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일본의 AV 산업에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밀거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작중에선 AV 산업을 일종의 틈새시장으로 여기는 등 작가는 자신의 솔직한 시선을 가감없이 소신껏 드러낸다. 이런 작가의 시선에 불편함을 표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코웃음을 치거나 기껏해야 패배자의 변명이라 일축하는 사람도 적잖으리라. 물론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 작가도 그렇게 생각한다. 떳떳한 직업까진 못 되지만 그러한 경멸 어린 시선까지 견뎌내는 게 이 직업 종사자로서의 고충이라니까. 이쪽 업계에 발을 들였다간 변명의 여지 없이 가족한테 의절당하는 게 비일비재한 일이니까. 그런 동료들의 모습을 봤기 때문일까. 저자는 그래도 자신들도 사람이고 세상 모두가 외면하려는 이쪽 세계에도 감정이 있고 노력하는 삶이 있다고 말을 이어간다.


 내게는 이 책의 본편보다 오히려 저자 후기가 더 무게감 있게 읽혔다. 본편은 몰라도 후기는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저자가 우연히 책을 읽는 재미를 알고 글을 끄적이게 된 경위, 소설을 발표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다른 소설이 아닌 AV 배우의 이야기를 맨 처음 선보이게 된 이유 등이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컸다. 작가 역시 현역 배우로서 사람들한테 평가 받는 것에 있어서 프로라 그런지 자세가 남달랐다. 자신이 쓴 글이 보다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려면, 자신처럼 '에로장이'가 쓴 에로 배우 이야기가 첫 번째 선보이는 소설로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이 책을 발표했단다. 전략 한 번 잘 잡았다고 생각했고 - 실제로 나도 그런 식으로 호기심이 동해 읽게 됐으니까. - 내심 감탄했다. 이 사쿠라 마나라는 사람은 진짜 열심히 살고 있다는 생각에. 누군가는 단지 AV 배우라는 이유로 인생 낙오자 취급하겠지만 이 사람은 아랑곳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다는 걸 생각하니 이 작가만큼이나 노력 없이 산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인정한다. 나라고 AV 배우를 패배자라 생각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진짜 패배자는 자기가 패배자라 여기는 존재보다 더 노력을 하지 않는 존재가 아닌가.

 이 책을 작품 외적인 요소를 제외하고서 후기를 쓰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따지고 보면 그런 요소까지 개입시켜 읽을 수밖에 없는 소설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고 작가로서 달가운 상황도 아닐 듯한데 의외로 이 작가는 '그럼 그렇지' 하며 의연하게 넘어갈 듯하다. 그만큼 소신이 있는 작가니까 앞으로도 자기가 쓰고 싶은 걸, 그리고 하고 싶은 걸 맘껏 도전할 것이다. 여담이지만 작가의 '다른 작품'을 접해본 적은 없는데... 순전히 사쿠라 마나라는 사람한텐 호기심이 좀 생겼다.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보다 더욱. 물론 영화도 볼 것이다. 궁금하긴 하다.

아야코는 두려웠다.

성장해 가는 자신의 몸과 마음이 저만치 가버릴까 봐. 지금 여기 서 있는 자신의 마음과 생각이 홀로 남겨질까 봐. 나이를 먹어 갈수록 주변 어른들처럼 ‘어쩔 수 없다‘는 편리한 핑계를 대면서 그동안 좇던 꿈까지 내팽게치게 될까 봐. - 227p




그때 깨달았다. 아, 책을 좋아하는 기분과 국어 수업을 재미있게 즐기는 감각은 지금 내가 느끼는 ‘말의 포옹‘이라는 것과 통하지 않을까. 이건 틀림없는 ‘만남‘이다. 지금 작가 후기를 읽어 주시는 분들도 분명히 책을 매우 좋아할 뿐 아니라 글자를 접하는 시간마저도 좋아할 것이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어느 정도 살짝 녹아들었다는 감동이었다. - 232p




쓰고 싶은 것이 아무리 많아도 그냥 쓸 뿐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자위행위 같은 것이다. - 2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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