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세 사망법안, 가결
가키야 미우 지음, 김난주 옮김 / 왼쪽주머니 / 201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9.5






 스포일러 : 결말에 대해 언급했음


 작년에 읽은 <노후자금이 없습니다>에서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의 전율을 선사해준 가키야 미우의 다른 작품을 읽어봤다. 제목과 설정 덕에 작가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지 않을까 싶은데 - 일각에선 일본판 <82년생 김지영>이라고도 하더라. 일리가 있는 얘기다. - 막상 읽어보니 기대에 비해 SF적으로 풀어나가지 않아 의외였다. 아니, 무엇을 숨기랴.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대단히 실망했다.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70세가 되면 사망해야 한다는 사상 초유의 법률을 두고 고부 갈등이니 세대 차이에 대해서만 얘기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굉장히 상상을 자극하고 할 얘기도 많은 소재인데 너무 작가 본인의 장기에만 치중하는 듯한 전개가 아닌가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오히려 이게 더 정답이고 그래서 더 신선하게 다가왔다. 시어머니와 남편, 딸의 비중이 적지 않나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지만.

 70세 사망법안이 가결되기까지 2년이 남았다는 설정은 색다른 긴장감을 자아낸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처럼 국가적 규모의 공익을 위해 사람 목숨 빼앗는 일까지 손을 대는 극단적이고 반인륜적인 법률 및 사상을 다루는 작품을 꽤 좋아하는데 당장 생각나는 건 소설 <백년법>, <살인출산>과 만화 <이키가미>, 그리고 타노스가 등장했던 '어벤져스' 3, 4편이다. 이 작품들에선 70세 사망법안조차 귀엽게 보일 정도로 충격적인 '인구 조절' 계획을 묘사하는데 흔히 이런 작품은 이미 이런 계획이 사회에 깊숙이 녹아들어 모든 사람이 세뇌를 당한 상황과 반대로 그 계획이 기존 사회의 관념과 충돌해 갈등을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나뉘는 것 같다. <70세 사망법안, 가결>의 경우엔 일단은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기존 사회의 관념과 충돌을 보인다고 말하기엔 사람들의 동요가 너무 적어 묘하게 몰입이 되지 않았다. 이 부분은 지금 생각해도 작가의 SF적 상상력이 빈약하단 반증이다. 작중 다카라다 집안의 양상이 우리 현실을 마주보게 하고 그 집안 문제가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 작품을 완독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작가가 오쿠다 히데오에 버금가는 가독성 좋은 문체나 캐릭터 설정을 갖추지 못했다면 더더욱 힘들었을 듯하다.


 보통 이런 종류의 작품은 한 가족의 이야기만 그리기 보단 여러 가족이나 집단,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주목하면서 군상극의 모습을 보이기 마련인데 작가는 우리 시대의 갈등 양상을 대표할 만한 가족에 집중함으로써 효율을 극대화시켰다. 처음엔 소재가 충격적인 것에 비해 시시한 주제의식과 전개라 생각했지만 이야기의 주역인 도요코가 시어머니 병 수발에 지치다 폭발한 다음 가출에 이르는 과정의 개연성과 몰입도가 보통이 아닌 터라 초반의 불만은 잠시 잊을 수 있었다. 특히 남편이란 작자의 행태 때문에 읽는 내가 다 살의가 솟았던 것과 도요코처럼 체념하거나 아예 포기해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이 빛을 발한 게 인상적이었다. 나처럼 제3자가 보면 저렇게 불합리하고 엇나간 관계도 없는데 그런 관계를 날 때부터 이어온 당사자들에게 있어선 다들 자신이 당면한 문제에 허덕이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에서다. 명문대를 졸업해놓고 취업이 불발돼 히키코모리가 되기 직전인 아들이나 쉽사리 가출을 결심하지 못하는 도요코가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 이해가 갔던 게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70세 사망법안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대체 무슨 일을 겪으면 나라가 '70세가 되는 모든 국민을 안락사시키자, 그러면 연금을 비롯한 모든 사회 문제가 일시에 해결되니까.' 라고 말을 하겠는가? 그런데 이 모든 결정은 하루이틀 논의된 게 아니라 몇 번의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기에 설득력을 얻은 것일 텐데 그 사건의 예로 바로 다카라다 가족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곧 불행해질 가족의 모습이었으니까. 이들의 모습에 집약적인 사회 병폐, 세대 갈등 가부장적 사고와 취업난 등은 작중에서 70세 사망법안이 가결되는 핵심적인 이유였으니까.


 이 밑엔 스포일러 있음


 알고 보니 70세 사망법안은 국민들로 하여금 노후가 없어지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 일종의 쇼였음이 밝혀진다. 개인적으로 너무 도박인 것 같아 현실성도 떨어지고 이후 정부가 취할 방침이란 것도 너무 희망적이라 어째 의심스러웠지만 어느 정도 그럴싸한 계획이고 또 실제로 다카라다 가족한테 일어난 변화가 너무 바람직해서 작품의 소재가 전에 없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작가의 성격이 원래 그런지 <노후자금이 없습니다> 때처럼 상당한 해피엔딩이 아닐 수 없었는데 그 작품과 마찬가지로 과정에 있어서 누군가 인내하고 희생해서 일어난 결과가 아니라 저마다 결점이 있던 인물들이 그 결점을 고침으로써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리란 전망을 품게 해 진정 좋은 해피엔딩이었다고 본다.

 70세 사망법안이라는 정부 차원의 극단적인 개입 덕분이긴 하지만 어쨌든 스스로 변화하는 용기를 낸 것은 그들 다카라다 가족 구성원 스스로의 몫이었던 것, 그리고 기대완 사뭇 달랐지만 한 가족에 집중해 작가 본인의 장기를 살리면서도 SF적인 구색을 갖추고 신선한 해석을 가미한 것이 엄청난 반전 매력으로 다가왔다. 왜 항상 인구 조절을 다룬 SF는 비장하고 비참한 결말이어야 하는가,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라고 다들 말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하는 질문에 대한 작가의 답변이 정말 멋졌다. 제목이 주는 막장스런 인상과는 달리 여러 의미에서 힐링이 되는 작품이 아닐 수 없었는데, 개중 장르적 글쓰기에 대한 내 고정관념을 깨부쉈다는 측면에서 적잖은 충격적이었다. 아직 이 작가의 작품을 두 권밖엔 못 읽었는데 다른 작품들도 기대된다. 이 작품을 제외하면 다들 제목이 비슷비슷해서 별로 관심이 안 갔는데, 이거 아무래도 괜한 선입견은 버려야겠다.

우리 세대는 죽을 때까지 일하지 않으면 먹고살기도 힘들다고. 그러니까 아빠도 죽을 때까지 일해요. - 35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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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피 블랙 캣(Black Cat) 13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전주현 옮김 / 영림카디널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8.3







 을씨년스럽고 상투적인 제목의 이 소설은 아이슬란드 추리소설가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의 '에를렌뒤르 형사' 시리즈에 속한 작품이다. 흔히 접하기 힘든 아이슬란드의 소설이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한국 독자인 내게 있어서 그렇게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란 것에 놀라게 된다. 물론 아이슬란드식 인명과 지명은 지금도 익숙하지 않지만... 아무튼 이 작가의 작품을 <저체온증>, <무덤의 침묵>에 이어 세 번째로 접하는데 본의 아니게 시리즈를 정반대의 순서로 접하게 됐다. 원래대로라면 이 작품을 제일 먼저 접했어야 했다. 시리즈의 주인공인 에를렌뒤르 형사의 개인사가 사건 자체와는 연관은 없지만 비중은 어마어마하기에 가급적 순서대로 읽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가 된다. 하긴 처음 <저체온증>의 책장을 펼치면서 설마 이 시리즈를 이렇게까지 찾아가며 읽을 줄 몰랐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려나.

 일부 아이슬란드식 문화는 낯설지만 저자의 각주가 있어 이해하기 어렵진 않았다. 가령 아이슬란드의 국토 면적이며 인구나 인구 밀도라든지, 아니면 그들이 이름을 짓는 문화 등을 딱히 선행 학습하지 않아도 됐던 건 다행이었다. 개중 에를렌뒤르 형사와 그의 동료들이 초반에 주기적으로 언급했던 '아이슬란드식 범죄'란 게 내 눈길을 끌어냈는데, 이는 '아이슬란드에서 과연 추리소설적인 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작가의 답변이기도 해 적잖이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이런 질문은 아이슬란드 추리소설은 물론 다른 북유럽 추리소설, 흔히 '노르딕 누아르'라 불리는 추리소설에 있어 피할 수 없는 질문인데, 그도 그럴 것이 북유럽 문화권은 워낙에 인구 밀도도 낮고 범죄율이 낮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구 밀도가 어떻고 범죄율이 어떻고 하는 건 다른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이나 주목하는 요소일 뿐이다. 아무리 인구가 적고 복지 제도로 인해 범죄율이 현저히 적어도 극악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있을 확률은 하나도 다르지 않으므로.


 어떻게 보면 이번에 읽은 <저주받은 피>가 그런 의미에서 가장 세계적으로 두루 읽힐 만한 소설이었는데, 전에 읽은 작가의 작품과는 달리 어딘가 아이슬란드스런 맛은 떨어졌지만 이것이야말로 아이슬란드처럼 외따로 떨어진 섬나라도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정서를 가졌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언젠가 나는 시리즈의 주인공인 에를렌뒤르 형사를 두고 '마치 아이슬란드의 가가 형사 같다'고 한 적이 있는데 이 작품에서 두 캐릭터와 시리즈의 유사성이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었다. 단순히 피해자와 가해자만이 아닌 사건 관계자 모두의 심리를 살펴보기를 소홀히 하지 않는 점이 특히 닮았는데 차이가 있다면 히가시노 게이고는 가가의 천재성과 더불어 인격도 묘사하며 이상적인 경찰의 모습을 그린 반면에 인드리다손은 에를렌뒤르를 천재적으로 묘사하지도 않고 오히려 결점이 많은 인물로 그려 그의 행보에 진한 연민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는 것에 있다.

 어쩌면 작가는 자신의 소설과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가 국제 무대에서 적잖이 낯서리라고 여긴 것일까? 낮은 인구 밀도와 느슨한 수사 조직 덕분인지 조작이나 은폐처럼 뒷일따윈 생각 않고 범죄를 저지르고 보는 게 '아이슬란드식 살인'이라는 에를렌뒤르와 동료 형사들의 발언은 작중 사건을 통해 철저히 부정당한다. 사건 현장엔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요상한 글귀가 남겨졌고 사망한 피해자의 과거는 역겹기 짝이 없어 형사들 발걸음을 무겁게 만든다. 그가 과거에 일으킨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이, 혹은 그의 자녀들 중 한 명이 범인으로 의심되는데 당연히 형사들이 수사를 진행할수록 과거의 피해자들의 아픔까지 들춰내게 되므로 작중에선 여러모로 형사들의 '도덕적 역경'이 끊이질 않는다. 이런 식의 역전된 발상, 이른바 '죄 많은 피해자와 동정할 수밖에 없는 범인'은 '김전일'을 통해 이미 익숙한 테마였는데 작품의 무대가 아이슬란드라서 그런지 묘한 울림을 줬다.


 좋게 말하면 세계적으로 두루 읽힐 만한 소설이지만 개인적으론 제목이 주는 인상대로 평범한 추리소설에 불과했다. 물론 작가의 주제의식이나 그를 묘사하는 방식은 훌륭했다. 아까 히가시노 게이고와 잠시 비교했는데 그 작가와 비교하면 문체의 가독성은 떨어져도 깊이와 통찰은 그에 견줄 만하거나 그 이상이었다. 사실 이 깊이 있는 분위기 때문에 너무 무겁게 읽히는 감도 있지만 단순히 흥미 위주로 성폭행이란 범죄를 다루지 않는다는 건 작가로서 좋은 자세였다. 성폭행이 낳을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을 상상해낸 것도 마찬가지로 주목할 부분이다. 범인의 동기는 설득력이 있었고 그렇기에 작품의 씁쓸함은 더욱 배가됐다. 비슷한 소재로는 의외로 가까운 나라인 노르웨이의 추리소설,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이 떠오르는데 이런 걸 보면 북유럽이라고 그들의 정서를 우리가 이해 못하리란 건 그저 편견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북유럽의 추리소설은 그들 사회의 문제를 돌아보기 위해 집필됐다는 해석이 있다. 복지 제도가 있음에도 범죄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 점을 두고 제도에 무슨 빈틈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근본적으로 간과했던 부분이 있는지 반성하는 차원에서 말이다. <저주받은 피>도 그런 경향하고 아주 동떨어진 작품은 아닌 것 같다. 생각해보면 이 책을 읽기 전엔 나는 아이슬란드엔 성범죄가 없으리라 여겼던 것 같은데 그 막연한 편견엔 분명 선구적인 복지 제도를 가진 북유럽 국가들의 이미지가 분명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아니면 인구가 그렇게 적은데 범죄가 일어나봤자 얼마나 일어나겠느냐고 여긴 탓도 클 것이다. 아까도 말했듯 인구가 적다고 해서, 또 복지 제도가 있다고 해도 사람 본성이 크게 바뀌는 것도 아닐 텐데... 아무래도 아아이슬란드를 너무 우리나라와 별개의 정서를 가진 나라이리란 편견이 너무 컸던 것 같다.


 이미 작가의 작품을 세 번째로 접하는 내가 이런 편견을 아직도 갖고 있다니 부끄러운 노릇이다. 이 작가가 작품을 통해 가장 크게 어필하고 싶었던 게 바로 이런 편견과 관련이 있을 터다. 아이슬란드라는 배경과는 상관없이 얼마든지 세계 여러 독자들이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추리소설을 쓸 수 있고 그 기저엔 인간이 본질적으로 국적과는 상관없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깔렸을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한 평단의 호평과 유리열쇠상 수상, 영화화된 걸 보면 작가의 생각은 성과를 얻었다고 볼 수 있겠다.

 개인적으론 평범한 추리소설이란 생각은 여전하지만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에를렌뒤르 형사가 내뿜는 분위기나 범인의 기구한 사연, 그리고 피해자가 생전에 남긴 천인공노할 비극은 제법 강렬하단 건 인정한다. 하지만 작품의 준수한 만듦새에도 자꾸 평범한 인상을 받았다고 하는 데엔 이러한 보편성을 의식했기 때문인데, 반대로 이런 요소 덕에 달리 말하면 작가의 작품이나 아이슬란드 소설에 입문하기엔 꽤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내 경우엔 <저체온증>으로 입문하긴 했지만...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이 그토록 흥행하고 국내에도 가장 먼저 소개된 '해리 홀레' 시리즈 작품이란 걸 생각하면 '에를렌뒤르 형사' 시리즈도 <저주받은 피>부터 읽는 게 가장 좋을 듯하다. 더욱이 순서상 국내 출간된 시리즈 작품들 중 시간 순서상 가장 앞에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

 그나저나 이제 내가 읽을 수 있는 작품은 <목소리> 한 작품밖에 없다. 그 작품은 <무덤의 침묵>과 <저체온증> 사이에 나온 작품으로 알고 있다. 작가의 명성에 비해 국내에 소개된 작품이 너무 적지 않나 싶은데 내가 그 작품을 읽을 즈음엔 작품이 몇 권 더 소개됐으면 좋겠다. 국내에서의 아이슬란드 추리소설의 입지를 생각하면 너무 큰 바람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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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랑 받기를 허락지 않는다 - 콩나물 팔다 세상을 뜬 경제학사 일제강점기 새로읽기 3
최영숙 지음 / 가갸날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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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50개의 키워드로 읽는 북유럽 이야기>에서 접한 최영숙은 1930년대에 스톡홀름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재원이란 점에서 내 눈길을 끌었다. 오늘날에 봐도 시대를 앞선 인물인 최영숙은 귀국 당시 이런 재원이 나라 발전에 어떻게 도모할 것인지 기대돼 대중의 주목을 한껏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최영숙이란 이름은 굉장히 낯설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녀는 귀국하고 1년도 지나지 않아 요절해 역사 속에 그 이름을 제대로 아로새기지 못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새로읽기'라는 기획 아래 편간됐으며 책 속엔 생전에 최영숙이 집필한 글들과 그녀가 귀국했을 적과 그녀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사의 기사 등이 수록됐다. 구사하는 언어만 5개가 됐던 그녀치곤 살아생전에 남긴 글은 굉장히 적은 편인데 유학 생활 중에 꿈꿔온 '여성들이 차별 없이 살 수 있는 사회'를 그럴싸하게 실현해보기도 전에 숨이 다한 게 못내 아쉽다.


 책에 수록된 글들만으로 최영숙이 우리나라에 귀국하고 겪은 차별이나 역경, 당시 시대상은 느끼기 힘들었다. 뿐만 아니라 스웨덴 유학 생활이나 귀국길에 인도에 들러 간디나 나이두와 만난 것, 그녀가 사랑했던 인도 남자와의 이야기도 단편적으로 접해 상상의 여지가 남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녀의 행보를 디테일하게 접하고 싶던 나로선 아쉬운 부분이었다. 본문의 글들이 나름 다양한 취지로 수록되긴 했지만 뭔가 했던 얘기 반복하는 느낌도 적잖았단 것도 마찬가지로 아쉬웠다.

 최영숙에 대한 자료가 매우 희박한 탓에 이 200쪽을 못 넘기는 결과물도 편집하는 입장에선 최선이었는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최영숙의 일생은 소설적인 접근을 동원할 수밖에 없겠는데, 그녀가 임신했던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면서 저속한 궁금증을 숨기지 않던 신문 기사 같은 태도만 아니라면 아예 그녀의 삶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는 것도 꽤 괜찮은 아이디어일 듯하다. 최영숙 생전의 행보들이 워낙 범상치 않아서 상상을 자극시킨 만큼 만약 성사된다면 꽤 흥미진진한 결과물이 될 것이다. 고증만 잘 된다면 나쁘지 않을 텐데... 쉽진 않을 것 같다.


 만약 최영숙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유학 생활 당시 그녀에게 관심을 표하던 남성에게 조국으로 돌아가 발전에 이바지할 생각에 '네 사랑 받기를 허락지 않는다'고 했던 그녀가 자기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보다 살기 좋은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조선인과 여성에 대한 차별이 극심한 시대 탓에 재능을 펼칠 수 없었다는데 정도가 덜해졌을지언정 근본적인 면에선 요즘에도 같은 문제가 현재진행형인 것 같아 그녀가 가슴에 품었을 비전이 궁금하다.

 역사에 'if'는 없다지만... 그녀를 비롯해 미처 꿈을 개화시키지 못했던 사람들의 삶에서도 배울 부분이 많다는 걸 느꼈다. 국경따윈 개의치 않는 최영숙의 과감한 행동력과 외국 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조국에 돌아온 패기 등은 지금도 울리는 바가 크다. 적어도 패기 부족한 요즘의 나를 채찍질하기에 충분했다. 지금 내 환경은 그리 열악하지도 않고 목표도 명확한 만큼 늑장 좀 작작 부려야지. 거참, 요새는 뭘 읽어도 이런 감상만 남는 것 같다.;;



 p.s 글이 집필된 시기가 시기다 보니 문체가 옛스러우면서 독특하게 읽혔는데 많이 낯설었지만 묘하게 중독성이 있었다. 매끄럽게 현대화하기도 해서 읽기에 부담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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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대기 - 택배 상자 하나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 보리 만화밥 9
이종철 지음 / 보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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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원래 책을 오래 읽으면 자세 때문에 허리가 아프곤 했는데 이 책은 다른 의미로 내 허리를 아프게 했다. 택배 업체에서 상자를 내리는 파트를 가리키는 은어 '까대기' 알바를 하게 된 주인공의 1년 동안의 이야기인데 주인공의 이름이 다른 것만 빼면 작가의 경험이 오롯이 담겨진 작품이었다. 작가는 만화를 그리면서 6년을 까대기 알바를 했다는데 나 역시 이들의 작업 현장이 어떤지 아주 모르진 않기에 읽는 내내 작가가 절로 존경스러워졌다.

 물론 작중의 작업 환경은 실제에 비하면 많이 유순한 편이었을 것이다. 훨씬 거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고 우울한 분위기와 욕설이 팽배했을 것이다. 비록 짧게 일하고 떠났지만 예전에 교보문고 북센터와 다른 공장에서 단기 알바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반복적이고 고된 작업 성격에 지친 것도 있지만 인간 관계 때문에 그만둔 게 훨씬 컸다. 그에 비하면 작중의 근무 환경은 비록 미래는 어두워도 사람들끼리 인정은 넘쳐 아무래도 작가의 창작이 가미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니면 작가가 성실하면서 기본적으로 세상의 따뜻한 모습을 주목하는 긍정적인 멘탈의 소유자거나.


 땀내나면서 정감 넘치는 이야기는 교훈도 있으면서 비판적인 요소도 충분했다. 우리나라의 택배 업계는 규모에 비해 법률과 융통 사이를 오가는 열악한 근무 환경, 육체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노고에 비해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경험자인 작가는 무척 뼈아프게 전달해냈다. 여기서 말하는 푸대접이란 단순히 임금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인식도 크게 한몫한다. 택배가 있기에 우리의 삶이 윤택해진 걸 간과한 지난날을 강하게 반성하게 되는데 정작 작품은 그렇게까지 비판 일변도는 아니다. 우리가 좋건 나쁘건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는 택배 업계의 실상을 제대로 보여주는데, 상상 이상으로 전문적으로 분업이 된 점과 정이 있어 마냥 지옥 같은 곳도 아니라는 게 제일 인상적이었다. 나는 작가가 적잖이 겸손하다고 보는데 어쩌면 이런 성정 덕분에 그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작가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부러운 부분이다.

 일과 집필의 병행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나로선 육체 노동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까대기 알바를 6년이나 해낸 작가가 그렇게 대단해 보일 수 없었다. 어찌나 대단해 보이는지 자괴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마치 지금 내 고민은 너무나 어리광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현실적인 문제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기 힘든 예술가의 이야기란 점에서 내게 대단히 무겁게 읽히는 만화였다. 작중 주인공이 상자를 옮길 때마다 내 허리도 같이 아픈 것 같았고 - 특히 겨울에 장갑이 부족해 벌벌 떠는 장면은 내가 다...... - 주인공이 만화가란 꿈에 다가가는 장면은 내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나는 지금 뭐하는 것인가. 언제까지 책만 읽고 있을 것인가.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친구가 있는데, 내 이런 심정에 대해 얘기했더니 사람마다 저마다의 성공 비결이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 말이 아니었으면 난 아직도 자괴감에 허덕였을 것이다. 확실히 작가의 사정과 내 사정을 동일시하기 힘들긴 하다. 작가는 타향살이 중에다 빚도 있어 까대기 알바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이 작가의 시련은 그야말로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의 고민과 상황은 내게 필연적인 시련인 것일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됐다.

 종교는 믿지 않지만 신이 우리의 시련을 해결해주지 않고 시련을 내려주고 지켜보기만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걸 뚫을 힘을 내길 바라서란 얘기는 꽤 좋아한다. 말인즉슨 우리의 시련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이 마음에 들었는데, 만약 지금의 내 고민도 필연적인 시련이라면 나와 살아온 나날이 다른 타인의 이야기에 자괴감을 느끼며 주저앉는 건 그 시련을 뚫을 힘에 하등 보탬이 안 되겠구나 싶었다. 요즘 멘탈이 약해져서 이 책을 읽고 본의 아니게 더욱 우울해졌는데 결과적으로 - 친구의 도움도 빼먹을 수 없겠지만. 고맙다, 친구야. - 내게 자극이 된 것 같아 참으로 의미 있는 독서였다. 저자가 이런 효과를 노리고 이 만화를 그렸을 것 같진 않지만... 작가가 겸손하기 때문인지 더욱 자극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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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범죄에 고양이는 몇 마리 필요한가 이카가와 시 시리즈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권일영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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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8.5








 최근 잇달아 고양이를 소재로 한 일본 추리소설을 접했다. 저번에 읽은 <밀실에서 검은 고양이를 꺼내는 방법>에선 동명의 표제작으로나마 일본인들의 고양이 사랑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 읽은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완전범죄에 고양이는 몇마리 필요한가>는 다소 광기 어린 고양이 사랑을 다뤄 스산할 정도였다. 가만 보면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이카가와시' 시리즈가 작풍이 한없이 유머러스한 것에 비해 사건의 양상은 섬뜩한 경우가 허다한데 이 작품이 그런 점에서 가장 역대급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이런 분위기를 중화시키기 위해 일부러 유머를 남발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전편에서와 마찬가지로 시도 때도 없이 남발되는 유머는 좀 거슬렸지만 그래도 이번엔 무난히 넘어갈 수 있었다. 말장난하고 슬랩스틱 코미디하고 마니아가 일장 연설을 하는 장면은 호불호가 좀 갈리겠지만 개중엔 유익한 장면도 더러 있었다. 마네키네코에 얽힌 전설이나 종류 같은 건 이 책을 접하기 전엔 몰랐던 정보라서 흥미롭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작중 몇몇 인물처럼 마네키네코에 매료되거나 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일본인들의 고양이에 대한 사랑 못지않게 마네키네코에 대한 애착도 남다르단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식당이나 가게 앞에 놓아두는 한 손을 올린 고양이 인형에도 이렇게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다니, 세상만사 관심을 가져서 손해볼 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분량이 다소 긴 감은 있지만 특수한 소재와 설정과 반전 덕에 끝마무리는 나쁘지 않았던 소설이다. 물론 특정 인물의 남다른 고양이 사랑은 논란거리긴 한데 이 부분은 작가가 너무 반전에 치중해서 벌어진 논란이라고 생각한다. 그 문제의 인물의 됨됨이를 보다 직접적으로 묘사한 장면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뜬금없다거나 말도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 당사자 없이 추측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자연스레 소설적 완성도나 흥미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추리소설적인 재미인 반전은 잘 살린 건 인정하지만...

 개인적으로 핵심 트릭을 그림이나 표처럼 시각적인 자료를 동원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수많은 종류의 트릭이 있지만 이 트릭이야말로 그림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데 끝까지 말로 설명한 게 아쉬웠다. 내가 요새 이해력이 떨어진 건지 추리소설 속 물리트릭이 잘 와 닿지 않는 걸 감안해야겠지만 그래도 그림은 있는 게 더 좋았을 것 같다. 솔직히 이 정도 트릭이면 만든 작가도 그림으로라도 재현해보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보다 그림을 삽입하는 게 까다로운 작업인지 궁금해졌다.


 탐정 사무소와 형사팀의 시선이 번갈아 진행되는 전개가 이번 작품에서 유독 빛을 발한 것 같다. 어느 한 쪽으로도 활약이 쏠리지 않고 양쪽이 이인삼각하는 식으로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는데 탐정과 형사, 둘 중 한 명도 없었다면 해결되지 않았을 걸 생각하면 이 둘의 만남은 필연적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처음에 탐정이 그랬듯 독자인 나 역시 고양이 찾는 전개가 시시하게 느껴졌지만 그렇게 삽질이나 하는 줄 알았던 탐정이 사건 가장 깊숙한 곳에 있던 범인의 동기를 짚어낸 것도 눈길이 갔다. 사실 작품의 복선은 너무 사사로운 데가 많아 공정했다고 보긴 어려웠지만 대충 말은 돼 아주 억지스럽진 않았다. 다만 탐정 우카이 모리오나 스나가와 경부나 평소 행동거지에 비해 추리력이 비범한 걸 보면 추리소설이 뭘 어째도 픽션이란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새삼스럽지만 픽션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극적으로 사건이 해결될 수도 없고 애당초 그 자잘한 복선을 다 놓치지 않고 해결에 근접하기도 쉽지 않을 테니까.

 초반엔 마네키네코니 일본 영화니 해서 너무 마니악한 소재가 연달아 등장해 상당히 지루하게 읽혔고 사건 양상도 흥미롭지 않았지만 작가를 믿고 읽어내려가니 또 그럴싸한 이야기가 펼쳐져 첫인상과는 달리 만족스럽게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막판에 동기 부분의 연출이 미약한 것만 제외하면 구성이나 트릭이 준수한 편이었는데 작가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무난히 도전해볼 작품일 것이다. 단, 이 작품이 왜 <저택섬>과 함께 국내에 처음 소개된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다. 시리즈 중간 작품이기도 하고, 오히려 1편인 <밀실의 열쇠를 빌려드립니다>가 가장 완성도가 있어서 그 작품부터 출간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이미 9년이나 지난 일이라 지금 논해봐야 아무 소용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실제로 이 작가의 작품들이 제법 반향을 일으켰으니 결과적으로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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