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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대기 - 택배 상자 하나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 ㅣ 보리 만화밥 9
이종철 지음 / 보리 / 2019년 5월
평점 :
9.5
원래 책을 오래 읽으면 자세 때문에 허리가 아프곤 했는데 이 책은 다른 의미로 내 허리를 아프게 했다. 택배 업체에서 상자를 내리는 파트를 가리키는 은어 '까대기' 알바를 하게 된 주인공의 1년 동안의 이야기인데 주인공의 이름이 다른 것만 빼면 작가의 경험이 오롯이 담겨진 작품이었다. 작가는 만화를 그리면서 6년을 까대기 알바를 했다는데 나 역시 이들의 작업 현장이 어떤지 아주 모르진 않기에 읽는 내내 작가가 절로 존경스러워졌다.
물론 작중의 작업 환경은 실제에 비하면 많이 유순한 편이었을 것이다. 훨씬 거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고 우울한 분위기와 욕설이 팽배했을 것이다. 비록 짧게 일하고 떠났지만 예전에 교보문고 북센터와 다른 공장에서 단기 알바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반복적이고 고된 작업 성격에 지친 것도 있지만 인간 관계 때문에 그만둔 게 훨씬 컸다. 그에 비하면 작중의 근무 환경은 비록 미래는 어두워도 사람들끼리 인정은 넘쳐 아무래도 작가의 창작이 가미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니면 작가가 성실하면서 기본적으로 세상의 따뜻한 모습을 주목하는 긍정적인 멘탈의 소유자거나.
땀내나면서 정감 넘치는 이야기는 교훈도 있으면서 비판적인 요소도 충분했다. 우리나라의 택배 업계는 규모에 비해 법률과 융통 사이를 오가는 열악한 근무 환경, 육체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노고에 비해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경험자인 작가는 무척 뼈아프게 전달해냈다. 여기서 말하는 푸대접이란 단순히 임금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인식도 크게 한몫한다. 택배가 있기에 우리의 삶이 윤택해진 걸 간과한 지난날을 강하게 반성하게 되는데 정작 작품은 그렇게까지 비판 일변도는 아니다. 우리가 좋건 나쁘건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는 택배 업계의 실상을 제대로 보여주는데, 상상 이상으로 전문적으로 분업이 된 점과 정이 있어 마냥 지옥 같은 곳도 아니라는 게 제일 인상적이었다. 나는 작가가 적잖이 겸손하다고 보는데 어쩌면 이런 성정 덕분에 그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작가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부러운 부분이다.
일과 집필의 병행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나로선 육체 노동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까대기 알바를 6년이나 해낸 작가가 그렇게 대단해 보일 수 없었다. 어찌나 대단해 보이는지 자괴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마치 지금 내 고민은 너무나 어리광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현실적인 문제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기 힘든 예술가의 이야기란 점에서 내게 대단히 무겁게 읽히는 만화였다. 작중 주인공이 상자를 옮길 때마다 내 허리도 같이 아픈 것 같았고 - 특히 겨울에 장갑이 부족해 벌벌 떠는 장면은 내가 다...... - 주인공이 만화가란 꿈에 다가가는 장면은 내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나는 지금 뭐하는 것인가. 언제까지 책만 읽고 있을 것인가.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친구가 있는데, 내 이런 심정에 대해 얘기했더니 사람마다 저마다의 성공 비결이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 말이 아니었으면 난 아직도 자괴감에 허덕였을 것이다. 확실히 작가의 사정과 내 사정을 동일시하기 힘들긴 하다. 작가는 타향살이 중에다 빚도 있어 까대기 알바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이 작가의 시련은 그야말로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의 고민과 상황은 내게 필연적인 시련인 것일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됐다.
종교는 믿지 않지만 신이 우리의 시련을 해결해주지 않고 시련을 내려주고 지켜보기만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걸 뚫을 힘을 내길 바라서란 얘기는 꽤 좋아한다. 말인즉슨 우리의 시련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이 마음에 들었는데, 만약 지금의 내 고민도 필연적인 시련이라면 나와 살아온 나날이 다른 타인의 이야기에 자괴감을 느끼며 주저앉는 건 그 시련을 뚫을 힘에 하등 보탬이 안 되겠구나 싶었다. 요즘 멘탈이 약해져서 이 책을 읽고 본의 아니게 더욱 우울해졌는데 결과적으로 - 친구의 도움도 빼먹을 수 없겠지만. 고맙다, 친구야. - 내게 자극이 된 것 같아 참으로 의미 있는 독서였다. 저자가 이런 효과를 노리고 이 만화를 그렸을 것 같진 않지만... 작가가 겸손하기 때문인지 더욱 자극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