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긴 변명
니시카와 미와 지음, 김난주 옮김 / 무소의뿔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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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이 작품의 저자가 직접 감독으로서 촬영한 동명의 영화를 인상 깊게 봐서 원작 소설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저자는 모든 작품의 시나리오를 직접 썼으며 - 국내에는 오다기리 조가 출연한 <유레루>로 유명한 감독이다. - 그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소설을 쓰거나, 반대로 본인이 쓴 소설을 영화로도 만드는 등 상당한 필력을 가진 사람인 듯했다. 다행히 그 기대는 거의 들어맞았지만, 의외로 비슷한 결의 이야기임에도 결말을 보고 난 다음의 만족도가 영화보다 못해 그 점이 의아했다. 보통 똑같은 스토리라면 영화보단 소설이 더 좋은 법인데? 특히 이 작품처럼 예민한 인물이 주인공으로 나올수록 그런 경향이 짙은데 말이다.

 주인공이 이래저래 문제적 인물인 지라 영화에서처럼 여백 있는 묘사가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영화에서는 이미 사랑이 떠난지 오래인 아내의 죽음에 슬퍼하지 못하는 모습이나 대중의 시선을 의식해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는 점, 잊을 만하면 예민하게 굴어 주변을 난감하게 구는 모습 등은 반감을 줬지만 그래도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참작의 여지도 있었는데 소설에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살펴보노라니 갈수록 정이 떨어졌다. 제목대로 변명이 끝날 기미 없이 길게 이어지는 느낌이라 오히려 소설이 끝났을 땐 후련하기 보단 황당했다. 너무 느닷없이 결말이 나버린 탓도 있지만, 솔직히 말해 소설의 문체가 디테일하고 수려하긴 해도 영화에 비해선 다소 지리멸렬해 눈에 잘 안 들어왔던 것이 불리하게 작용했다. 아무리 필력이 좋아도 결국 본업이 영화 감독이라 그런가... 그 외에도 영화와는 아예 다른 내용이 몇 가지 있던데 나는 영화에서 수정된 버전이 훨씬 좋았다. 가령 요이치가 사고를 당하지 않고 경찰서에 가게 된 경위라거나 초반에 주인공이 옛날 여자친구와의 에피소드도 너무 과하거나 사족인 감이 있어 영화 쪽이 없앨 건 잘 없앴고 살릴 건 잘 살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주인공의 1인칭 관점보다 가끔씩 주변인물의 시선을 통해 주인공을 바라보던 전개가 더 흥미로웠다. 주인공의 자격지심과 염세주의, 어느 순간에서고 떳떳하지 못한 모습은 처음엔 흥미롭다가도 뒤로 갈수록 질렸던 것에 비해 한 번씩 등장하고 말았던 주인공의 방송 쪽 매니저나 다큐멘터리 스태프, 출판사 담당 편집자의 시선에서 주인공을 까는 게 신랄한 맛이 있어 책이 탄력적으로 읽혔다. 작가도 주인공의 1인칭 전개만으론 독자들이 버거워할 것을 알았는지 이런 교차 서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내가 봤을 땐 이 연출이야말로 신의 한 수라고 여겨졌다. 단순히 가독성의 문제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작품의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꾸며줬고, 무엇보다 주인공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선을 엿볼 수 있어 독자 입장에서 주인공과 거리를 두며 작품 전체에 녹아있는 감정선을 받아들이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이런 연출이 없었더라면 지나치게 주인공에게 물들었거나 혹은 완전히 질릴 대로 질려 다 읽기도 전에 책을 집어던졌을 것이다.

 작가라는 직업에 종사하는 주인공을 여러모로 부정적으로 묘사한 게 어떻게 보면 작가의 자학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분명 글을 잘 쓰면 사람들이 선생이라 부르며 인정해주지만 과연 집필 행위가 그 정도로 대접을 받을 만한 노동이라 부를 수 있는지에 관한 작가 나름대로의 신랄한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당장 주인공부터가 작가로 성공하지 못했다면 어디에서도 내세울 수 없는 자격지심에 찌든 인물인데 그 특유의 예민함을 장기로 내세웠을 소설들로 유명세를 얻어 그만한 지위를 얻었다는 게 참 아이러니했다. 객관적으로는 별로 상대하고 싶지도 않은 기질의 남자가 그 기질을 적극적으로 작품 속에 투영해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기며 상대해주는 사람이 됐다는 점에서 예술의 위력 내지는 허상까지 느껴졌다. 작품 주제에서 좀 벗어난 얘기인 것 같지만, 작가로서 성공한 주인공의 모습을 선망하는 사람인 터라 주인공이 작가로서 자신의 삶을 어떤 식으로 영위하는지 그 여부가 몹시 눈길이 갔다.


 <아주 긴 변명>은 이미 사랑이 떠난 아내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주인공이 긴 시간에 걸쳐 변명을 쏟아내는 작품이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내내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감정선을 어디에도 피력하지 않은 채 속으로 꽁꽁 숨기면서도 알게 모르게 자기 고민을 실토해버린다. 쉽게 말해 인간으로서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라는 질문을 했다가 이내 무언가를 깨닫고서 드디어 제정신을 차려 사람이라면 마땅히 보여야 할 모습을 내비치며 작품은 끝난다. 영화에선 주인공이 나름대로 이방인으로서 세상의 흐름에 순응해 갈 것이라는 느낌을 받은 것에 비해 소설에선 안에 있는 감정을 모두 토해내고 정상적인 감정과 마주한다는, 약간 식상하고 크게 감흥도 없는 마무리를 선보여 어째 뒷맛이 찝찝했다.

 내가 영화를 본 지 시간이 좀 지나서 기억이 안 나는 건가. 시간이 흘러 내 감성에도 변화가 생겼으리란 걸 감안해도 3년 전에 본 영화나 지금 읽은 소설의 느낌이 달라 당혹스럽다. 단순히 소설의 부족한 점을 영화에서 잘 보완한 것이라고 넘어가기엔 영화나 소설 둘 다 내용은 판박이라 왜 이렇게 감상의 차이가 나는지 좀처럼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 궁금증은 아무래도 영화를 보면서 해소해야겠다. 영화를 볼 때 소설의 내용이 기억나야 할 텐데......

저렇게 참혹한 일을 당했을 때, 사치오 자신은 저 사람들을 능가하는 무지막지한 증오심에 미쳐 날뛸 가능성을 갖고 있거나 또는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들처럼 주저 없이 순수하게 분노나 슬픔에 잠길 수 없는 경우, 그 앞에는 뭐가 있을까를 생각하면 그 역시 두려웠다. - 74p




친근한 사람들 앞에서는 걱정이나 억측을 하지 않도록 더욱이 금실을 가장했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해야 했던 것은 우리 부부가 이미 금실의 실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나. - 1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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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2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뿔(웅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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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8.9







 노르웨이를 여행할 때 서점을 많이 갔는데 한 가지 재밌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Krim' 코너가 꽤 크게 마련된 것인데 여기서 'Krim'은 노르웨이어로 범죄를 가리킨다. 북유럽에서 추리소설, 범죄소설이 주류 문학이라고 듣긴 했지만 이렇게 서점에서 크게 진열할 정도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 풍경에 적잖이 놀랐다. 그 코너엔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추리소설가인 요 네스뵈의 작품이 주를 이뤘지만 개중에는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작가의 작품 역시 진열되어 있었다. 바로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였다.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는 현존하는 북유럽 추리소설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일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로도 유명하고 작가가 시리즈 출간 전에 심장마비로 돌연사한 것, 자신의 작품이 초대박이 나는 걸 당사자가 보지 못했다는 아이러니함과 이후 이 작품의 저작권에 대한 소송과 새로운 대필 작가가 투입해 시리즈가 이어진 점까지... 지금 시점에선 오히려 작품 외적인 요소 때문에 인구에 회자된다는 생각도 들 정도로 참으로 얘깃거리가 풍부한 작품이다. 그래서 묘하게 시리즈의 스토리와 주제의식이 덜 주목받는 느낌도 있는데... 최근에 다비드 라게르크란츠가 완결을 낸 시리즈 2부가 마음에 들지 않아 중도 하차한 독자로서 역시 스티그 라르손이 작업한 1부가 훨씬 낫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전에 비해 스티그 라르손의 진가가 더 느껴져서 이번 재독은 제법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다.


 자극적인 제목 못지않게 내용도 상당히 자극적인 작품이다. 간단히 말해 이 작품은 '여자를 증오하는 남자들'을 증오하는 여자인 리스베트가 여자를 증오하는 남자들을 발견 즉시 묵사발을 내는 내용이다. 혹자는 제목만 보고 여혐 작품이라 근거도 없는 추측을 하던데 - 설마 그럴까 싶겠지만 실제로 봤다... - 이 작품은 여혐과는 영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여혐을 혐오한다. 작가는 주인공 리스베트의 말을 빌려 그 어떤 핑계를 붙여도 결국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자기 의지로 여자를 증오하기로 선택한 쓰레기들이라 일갈한다. 개인적으로 그들이 무슨 연원으로 그런 쓰레기가 됐는지 그 배경을 헤아려보는 것도 중요하다 생각하지만 리스베트처럼 폭력적일 정도로 단호한 태도도 필요하단 건 인정한다. 세상엔 양심과 논리가 통하지 않는 치들이 너무나도 많으니까. 그래서 이 작품이 유독 쾌감이 넘치는 것일 테고 사람들이 그에 열광해서 그렇게 많이 팔린 거겠지.

 위에서 잠깐 말했듯 북유럽 문화권에선 추리소설이 꽤 주류 문학으로 인정받는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쪽 나라가 범죄율도 너무 낮고 평화로워서 소설로라도 짜릿한 이야기를 찾는 거라 말하는데,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그 말은 명백히 잘못된 말이라 생각한다. 물론 추리소설이 오락적 요소를 중시하는 장르인 건 맞지만 북유럽 추리소설은 단순히 오락적 요소만 추구한다고 하기엔 안 맞는 구석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봤을 때 북유럽 사람들은 추리소설을 일종의 사회학 보고서로 여기는 듯하다. 자국의 사회 문제를 두고 '우리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가?' 하고 자문하는 보고서 말이다. 그들의 선진적인 정책, 가령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하는 복지 시스템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지만 그런 대외적인 측면으로 선망하기엔 결국 북유럽도 사람 사는 동네고 극악무도한 범죄가 발생하는 곳임을 북유럽 추리소설가들은 꽤나 낱낱이 묘사한다. 북유럽에 대한 로망이 있던 독자라면 이처럼 누워서 침 뱉는 격의 작풍에 놀라는 경우가 적잖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읽은 북유럽 추리소설 중 자국에 대해 긍정적으로 얘기하는 작품은 단 한 개도 없었고 반대로 외국인이 읽기에도 이건 좀 너무한 것 아닌가 싶을 만큼 범죄의 소굴로 그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밀레니엄' 시리즈는 그러한 경향의 북유럽 추리소설의 최전선을 달린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스웨덴의 사회상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첫 장이 대뜸 '스웨덴 여성의 18퍼센트는 살아오면서 한 번 이상 남성의 위협을 받은 적이 있다'고 시작될 정도니 말 다했다. 그 이후로 스웨덴 복지 시스템의 모순과 구멍, 복지국가라 과대평가된 스웨덴의 현실을 과감없이 비판하는데 기자 출신 작가라 그런지 묘사들에 거침이 없다. 너무나 직설적이라 때론 내가 지금 소설을 읽고 있는 건지 르포를 읽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는데 이 부분에서 대부분의 독자들의 호불호가 갈릴 것이고 나 역시도 어느 정도는 불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기자 출신 작가다 보니 소설적 문체와는 결이 다른 구석이 많이 느껴졌다. 특히 재벌의 비리를 고발하고 추적하는 초반부와 최후반부의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상당한 끈기를 요구했는데 이 부분만 따로 놓고 보면 이 시리즈가 왜 그렇게 인기가 많은지 납득이 안 될 정도로 지루해서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기 그지없었다. 작품의 유명세를 믿고 끝까지 읽었기에 망정이지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읽었으면 중도 하차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나마 기자로서의 경험을 녹여낸 부분들이 후반에 기자 윤리에 관한 중요한 딜레마를 다룰 때 꽤 강렬한 효과를 낳기에 최소한 본전치기는 한 셈이 됐다. 왜 이 작품의 주된 화자를 기자로 설정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기에 호불호는 갈릴지언정 작품의 단점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한 거대 기업의 회장의 명예를 훼손시킨 혐의로 기자로서 신용도가 땅에 떨어진 미카엘은 방예르 가문의 회장 헨리크에게서 기이한 의뢰를 받게 된다. 30여년 전 실종된 손녀의 사건을 해결해달라는 의뢰였는데, 기자가 받을 만한 의뢰가 아니었지만 마땅히 당장 할 일도 없고 헨리크가 제시하는 조건이나 보상이 파격적이기도 해 결국 미카엘은 의뢰를 수락한다. 처음엔 헨리크의 말대로 수확이 없어 미카엘 본인도 심드렁할 뿐이었지만 조사할수록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단서들이 드러나게 된다. 의욕이 붙은 미카엘은 천재 해커이자 탐정인 리스베트까지 동원해 끝내 예상치 못한 추악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진실의 내용보다도 진실이 드러나거나 다다르는 연출이 정말로 예상치 못했다고. 좋게 말해 신선하고 나쁘게 말하면 너무 허무하다고.

 이야기 자체는 아주 고전적인 본격 추리소설의 전형이지만 실상은 기대와 다르게 진행된다. 일단 '밀레니엄' 시리즈는 사회파 추리소설이라 밀실이니 알리바이니 하는 트릭은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거대하고 알기 쉬운 미스터리가 등장하긴 하지만 작가는 수수께끼 풀이만큼이나 스웨덴의 현실을 비판하는 것에 주력해 얼핏 이야기가 지루하고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등장인물도 많고 진행도 더뎌 과연 800페이지 안으로 이 소설이 끝나긴 할까 싶었는데 막상 이야기가 발동이 걸리자마자 미스터리는 허무하게 풀리고 결말도 다소 썰렁한 데가 있어 그 잔혹한 묘사들을 모두 견디고 후반부까지 쫓아온 보람이 기대보다 덜하다는 아쉬움도 들었다. 누가 이 작품을 두고 주제의식과 캐릭터를 제외하면 남는 것 없다고 말하던데 난 그 평가를 크게 부정할 생각은 없다. 이 소설은 엄밀히 말해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 독자들의 감성과 취향에 부합해 한국 독자들한테 어필하기 미묘한 구석도 많다고 본다. 특히 마성의 남자 미카엘과 강인한 여성 리스베트는 그 난잡하다고 할 수 있을 사생활 때문에라도 반감을 느낄 독자들이 많을 것 같다.


 10년 전에 읽었을 때는 작중에서 호불호가 갈릴 요소들이 거의 불호로 다가왔지만 나이 좀 먹고 다시 읽으니까 단점이 명확히 보이면서도 취향에 맞는 요소들도 제법 있었다. '밀레니엄' 시리즈를 두고 '어른들의 해리포터'란 수식어가 있던데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괜히 해리포터란 단어에 혹해 어린 독자들이 읽는 일이 없게끔 만류하고 싶은 장면들이 많기 때문인데... 이 말은 다소 고루한 발언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어지간하면 이렇게나 사회 비판적인 작품이기에 남녀노소 모두가 읽어야 바람직하다고 말했겠는데 이 작품은 나이 어린 독자들도 포용하기엔 너무 정신 나간 매력으로 충만한 작품이라 남녀라면 몰라도 노소한테 추천하긴 꺼려진다.

 '밀레니엄' 시리즈 1부에 해당하는 1편부터 3편까지는 스티그 라르손이 집필했다. 2부를 인정하지 않는 나로선 1부만이 오리지널로 느껴지는데 그렇기 때문인지 다시 읽어도 눈에 밟히는 단점들이 지금 와선 보물처럼 느껴졌다. 신인 소설가 특유의 패기와 거칠고 투박한 문체까지 총망라된 데뷔작을 읽고 있으니 여럿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독서했다. 일부 가독성이 열악한 구간만 제외한다면 재독한 보람이 충분한 작품이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남은 2편과 3편이 기대됐다. 비교적 본격 추리소설의 느낌을 풍긴 1편과 달리 2, 3편은 결이 또 다른데 어떻게 보면 그렇게 바뀐 스타일이 스티그 라르손이 추구한 사회파 추리소설엔 대단히 잘 어울렸던 걸로 기억한다. 적어도 1편보다 덜 지루하겠구나 싶어 벌써부터 안심이 된다.

당신 생각이 틀린 것 같아요. 그자는 성경을 너무 읽다가 미쳐버린 연쇄 살인범이 아니에요. 그저 여자들을 증오하는 쌔고 쌘 쓰레기일 뿐이죠. - 2권 15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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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가방 2 (완결)
다니구치 지로 글.그림, 오주원 옮김, 가와카미 히로미 원작 / 세미콜론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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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가와카미 히로미의 원작 소설과 다니구치 지로의 그림이 만난 작품. 비록 원작은 읽지 못했지만 원작에 한없이 가깝거나 혹은 그 이상으로 잘 그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압권인 작품이었다. 어느날 선술집에 들른 주인공이 우연히 고등학교 때 선생님을 만나며 시작되는 이 작품은 두 사람이 어떻게 술친구가 되고 나중에 어떻게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지 섬세하게 그려낸다. 대충 2, 30살 정도 차이나는 두 사람의 연애 관계라고 하면 어쩐지 불경스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실제로 작중에선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술친구에서 친구로, 친구에서 연인으로 관계가 발전해 괜히 안 좋은 선입견을 품은 내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이 작품은 여자 제자인 츠키코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터라 노년의 선생님은 정확히 무슨 생각을 품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츠키코는 어느 순간부터 선생님에게 끌리기 시작하면서 의도적으로 거릴 두려고 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선생님은 몰라도 츠키코만큼은 세간의 시선이란 걸 어느 정도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는 좋은 술친구라는 선은 주말에 버섯을 따러 가거나 시장 구경 등을 하면서 서서히 허물어지고 어느덧 상대방에게 구애를 펼치는 단계에 이르렀는데 이 과정 중에서 어떤 장면도 과하지 않아 소위 말하는 막장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선생님의 경우엔 십 몇 년 전에 가출한 아내에 대한 허무함, 원망, 자책감을 떨치지 못하는 터라 어딘지 초연한 느낌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이미 장성한 아들이 있는 늙은 교직자라 일반적인 세간의 시선에서 보자면 어느 뭐로 보나 연애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지만, 약간은 고루한 구석은 있어도 참 묘한 매력을 풍기는 지라 츠키코로서 그에게 빠져들지 않기가 오히려 힘든 일로 비춰졌다. 츠키코가 구애를 하는 장면을 보고 약간 갑작스러운 듯하면서도 '이제서야 하는 건가' 싶었는데 서로 눈치를 보느라 정식으로 연인으로서 교제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렇게 서로 눈치를 봤기 때문인지 더 진실되고 여운이 짙은 관계가 이뤄졌다는 생각도 든다. 둘의 관계는 5년이 흘러 선생님의 죽음으로 끝이 나고 말지만 츠키코에겐 선생님의 가방이 남겨져 정말로 이 관계가 끝났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유품이 고작 가방인 건가 싶은데... 사실 난 아직까지도 가방의 의미가 대관절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추측컨대 가방은 선생님이 항상 들고 다닌 물건이었던 만큼 츠키코가 자기가 죽어서도 곁에 있는 듯한 느낌을 가져달라는 모종의 위로였던 것 같다. 선생님의 가방은 선생님이 버섯을 따러 고된 산행 중에도 들고 다닐 정도로 항시 휴대했던 물건이라 그렇게 추측했을 뿐 확신은 없다.


 4년 전에 읽은 책이고 그때 포스팅을 쓰기가 꽤 난감했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내공이 부족한 것인지 연애 소설이 원작인 작품답게 감정 표현이 얼마나 섬세하게 품격이 있었는지 전달하기가 참 까다로웠다. 원작이 다니자키 준이치로상이라는 걸출한 문학상을 받았다는데 원작은 물론 다른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수상작들이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도 읽어본 적이 없는 등 일본 순수문학 자체가 많이 낯설어 제대로 표현이 안 된 듯하다. 나는 분명 읽는 중엔 내용을 다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포스팅으로 쓰려니 피상적인 감상밖에 나오지 않는다. 보통이라면 순수문학은 모름지기 다 그런 법이라고 넘겼을 테지만 이 작품만큼은 워낙에 분위기가 출중해 이렇게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는 게 속상할 따름이다.

 다니구치 지로의 디테일한 그림도 작품의 분위기에 크나큰 역할을 했지만 그림에 관해서도 문외한인 터라 정확히 어떻게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전달하기 어렵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면 일반적으로 일본 만화라고 하면 떠오르는 모에(?)하다거나 과장된 그림체가 아닌 사실적인 그림체라 남녀노소 부담 없이 만화를 읽을 수 있으리란 말밖엔 없다. 확실한 건 지금은 고인이 된 다니구치 지로가 왜 생전에 그토록 유명세를 떨쳤는지 그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란 것이다. 일전에 읽은 <수명을 팔았다. 1년에 1만 엔으로>의 작가한테서도 느낀 거지만 다니구치 지로도 그저 소설의 내용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 아닌 소설의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고 내면화한 다음에 화폭에 옮겼다는 느낌이 강해 단순히 그림만 잘 그리는 작가라는 아니구나 싶었다.


 이 작품을 처음 읽을 때 쓴 포스팅에서 다니구치 지로의 다른 작품과 이 작품의 원작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말했지만 이 다짐은 그다지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니구치 지로의 <겨울 동물원>이나 <고독한 미식가>는 읽긴 했지만 그 양이 너무 적고 가와카미 히로미의 소설은 아직도 읽지 못해 솔직한 말로 민망하다. 내가 참 느릿느릿한 사람이구나 싶기 때문인데... 뭐 그런 일로 민망해하고 반성을 다 할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4년 전 포스팅과 지금의 포스팅의 내용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게 꼭 제자리걸음을 하는 느낌을 받아 작은 다짐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공은 그런 식으로 쌓이는 것일 테지. 그걸 이제 깨닫다니 나도 참 갈 길이 멀었다.

키우니까 자라는 거야. 연애 감정이란 그런 거지. - 제15회 귀뚜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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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수법 - 살인곰 서점의 사건파일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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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표지에 장편소설이라 적혀 있었음에도 나는 이 작품이 영락없이 단편집인 줄 알았다. 국내에 소개된 와카타케 나나미의 작품이 거의 단편집이었고 특히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는 전부 단편집이었기 때문에 이 작품도 당연히 단편집이라 생각했다. 나중에 알아보니까 이 작품보다 <녹슨 도르레>라는 장편소설이 먼저 출간됐던데... 아무튼 요즘 들어 이 작가의 작품이 많이 출간돼 좀 얼떨떨한 기분이 든다.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과 '하자키' 시리즈로 이미 국내에는 약발(?)이 다한 작가라 여겼는데 이렇게 다시 흥하고 있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이제 <나쁜 토끼>의 출간을 기대해도 되는 건가.

 와카타케 나나미의 작품 중 가장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며 특히 초장에 수록된 등장인물 소개는 읽기 전부터 괜히 긴장하게 만들었다. 단편의 대가가 이토록 방대한 분량의 장편소설을 쓴다는 게 상상이 잘 안 갔는데 다 읽고 나니 이 작가가 장편을 많이 안 썼다 뿐이지 오히려 단편보다 더 잘 쓰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려 14년 만에 나온 시리즈의 정식 후속작인 만큼 작가가 작정하고 써내려갔다는 느낌을 받았다. 20년 전에 가출한 딸을 찾아달라고 의뢰를 받으며 탐정으로 복귀하는 이야기가 어떻게 확장되는지 엿볼 수 있던 게 흥미로웠던 작품인데 이 정도면 가히 성공적인 복귀작이 아닌가 싶었다.


 <이별의 수법>이라는 묘한 제목의 이 작품은 40대에 접어든 하무라 아키라가 등장하면서 짠내를 풍기며 시작된다. 전에는 잘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롭고 시니컬한 하무라 아키라가 이제 나이를 먹어 노안과 무릎 통증에 시달리다니... 더욱 짠한 것은 그녀가 이번 작품에서 전작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고생을 겪는다는 것이다. 고생도 고생이지만 무슨 머피의 법칙인 양 불행도 끊이지 않던데 헌책을 정리하다 바닥이 무너져 추락하고 그때 추락하면서 집에 매장된 백골하고 박치기를 하지 않나... 하여튼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고생은 다 겪게 된다. 심지어 나중엔 하무라 아키라는 불사신인 건가 싶을 만큼 스펙터클한 일까지 겪는다. 그런데 하무라 아키라 입장에선 그런 육체적 고통보다도 정신적 고통이 더 치명적이었을 듯하다. 이미 산전수전을 겪은 프로 탐정인 하무라 아키라가 정신적으로 타격 받을 일이 뭐가 있을까 싶겠지만, 오히려 그렇게 스스로를 과신했기 때문인지 이번 작품에선 유독 감정에 흔들리거나 실수를 남발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다루는 사건의 스타일, 전개되는 스타일은 어딘지 내 취향과 맞지 않았다. 뭐, 이 작가의 작품이 대부분 그런 편이어서 새삼스럽진 않았다. 스포일러일지 모르겠는데 비슷한 전개 방식으로 스티그 라르손의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 떠올라 그렇게 참신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봤을 때 어지간히 작가의 팬이거나 시리즈의 팬이 아니라면 스토리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었다. 대신 이 작가의 시니컬한 사고방식, 악의를 낯낯이 묘사하는 작풍, 하무라 아키라라는 캐릭터의 심리 묘사와 성장 과정에 집중하면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실수를 연발해 독자들과 자기 자신까지도 당혹스럽게 한 하무라 아키라는 전에 없이 자책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최후반부에서 어떤 연유로 탐정업에 다시 종사하게 되는데 이 부분이 무척이나 폭소를 유발했다. 폭소를 유발한 부분이 이 작품의 제목과 크게 연관이 있는데, 개인적인 얘기지만 이렇게 대충 지은 듯하지만 있어 보이면서 작품 내용과 아주 따로 놀지 않는 제목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이 작품, 정확히는 시리즈의 주인공 하무라 아키라의 아이러니한 운명을 확실히 강조해준 게 인상적이었다. 하무라 아키라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불행한 사건들이 그녀를 알아서 찾아가는 것이 꼭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마치 신이 존재하는데 그 신이 하무라 아키라가 탐정으로서의 재능을 썩히는 걸 아깝게 여겨 일부러 시련을 안기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달까. 그래서 그녀가 필요 이상으로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었겠지. 그녀가 주체적으로 탐정업을 하는 이상 불행을 최소한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 작품의 결말이 씁쓸하면서도 폭소를 유발한 것이리라.

 내 취향이 아닌 작품이라 했지만 분량이며 깊이가 남다르기에 나중에 한 번 더 읽게 될 것 같다. 그전에 시리즈의 다음 작품인 <조용한 무더위>와 <녹슨 도르레>도 읽어봐야지. 만약 이 두 작품을 읽기 전까지 <나쁜 토끼>가 출간된다면 그 작품을 먼저 읽을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작가의 작품이 출간되는 기세를 보면 <나쁜 토끼>의 출간은 정말 머지않은 듯하다. 이번 생에 가망이 없어 보였던 일의 불씨가 다시 살아나니까 딱히 작가의 팬이 아님에도 흥분을 감출 수 없다. 못해도 1년 안에 출간하지 않을까 싶은데...


 여담이지만 시리즈 2부에 해당하는 '살인곰 서점의 사건파일' 시리즈가 제법 흥한 덕인지 올 초엔 <하무라 아키라>라는 제목의 드라마도 방영됐다. 총 7편으로 구성된 그 드라마는 시리즈의 1부에 해당하는 내용이 6편을 차지해 2부의 내용은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 추측하기로 딱 한 편이 <조용한 무더위>의 표제작을 드라마로 옮긴 듯하다. - 내가 봤을 때 2부의 작품이 꽤 많이 출간된 만큼 드라마 2기도 충분히 나올 것 같다. 특히 이 작품 <이별의 수법>만으로도 드라마 한 편을 제대로 뽑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코로나가 종식된다면 충분히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다. 대체 코로나가 종식되는 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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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지 않습니다 - 최지은 기자의 페미니스트로 다시 만난 세계
최지은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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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대중 문화 웹 매거진의 최지은 기자가 한국 엔터테인먼트가 여성을 어떻게 다루고 묘사했는지 살펴본 페미니스트 책. 방송계에 대한 통찰은 <프로불편러 일기>를 쓴 위근우 기자보다 전문적이었고 저자 본인이 관철하려는 페미니즘의 실체를 논리 정연하게 풀어냈다는 점에서 여타 페미니즘 책보다 술술 읽혔다. 지금도 기억나는 인상적인 표현으로 '1주일의 독일 여행 동안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에 지겨워져 한시라도 빨리 모국어로 된 TV 프로그램을 시청할 수 있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막상 한국에 돌아오니 때론 알아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 고통인 말들도 있다.'는 것을 꼽을 수 있는데 이 말은 '여성은 한국 예능을 웃으며 볼 수 있을까?' 라는 글의 서두를 장식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얼마나 편향된 여성관에 노출됐는지 단번에 강조한 말이라 쓴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이 책이 출간된 즉시 읽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어쩌다 보니 늦게 읽게 돼 본의 아니게 작가가 책에서 다루는 이슈들이 지금 내 기준에선 약간 식상하게 다가왔다. 전에도 비슷하게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 페미니즘 책의 경우 가급적 최신의 책을 읽는 게 정말 중요하단 걸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말도 지금 몇 번째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부분은 당연히 작가의 불찰이 아닌 전적으로 내 실수라고 할 수 있는데, <82년생 김지영>이나 강남역 살인사건, 화장실 몰카 범죄 등의 이슈는 이미 여타 책에서 접해왔고 내 스스로도 어느 정도 재구성을 거쳤던 지라 책의 초반부는 상대적으로 더디게 읽혔다.


 책은 '갱년기 농담' 이후부터 탄력적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저자 본인의 경험을 통해 중년 여성의 갱년기를 웃음거리로 삼는 예능의 관례가 얼마나 문제인지 비판하는 것을 시작으로 책에는 우리가 지금껏 무심코 웃어 넘겼던, 정확히는 내가 웃어 넘겼던 장면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저자는 <아는 형님>을 비롯해 <복면가왕>, <냉장고를 부탁해>, <미운 우리 새끼> 등 화제성 높고 내가 자주 챙겨 보기까지 하는 프로그램을 다뤘는데 평소에 내가 챙겨 보는 TV 프로그램이 결코 많지 않다는 걸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익숙하고 생각해볼 수 있게 만드는 이슈를 저자가 잘 선정하지 않았나 싶다. 무엇보다 책에서 언급한 사례들이 아직도 우리나라 방송계에서 현재진행형인 문제가 수두룩한 만큼 저자의 논리를 전개함에 있어 이보다 좋은 예시는 없는 것 같다.

 저자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책에서 지적한 예능 프로그램의 편향된 여성관에 대해선 거의 빠짐없이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지적하는 분야가 드라마나 영화로 넘어가게 되자 중립성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몇 차례 받게 됐다. 주 전공은 아니지만 나도 엄연히 시나리오 작법을 공부하고 실제로 학교 과제로나마 써본 적도 있는 사람이기 때문인지 저자가 예능과 마찬가지로 앞뒤 맥락을 배제하고 드라마의 특정 장면을 걸고 넘어지는 부분들이 트집처럼 느껴졌다. 내 지론은 이렇다. 꼭 옳은 소리만 하는 캐릭터나 장면이 현저히 적더라도 보는 사람 입장에서 반면교사로 여기고 넘길 수 있다는 게 픽션이 예능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이라고. 때문에 저자가 열거하는 드라마와 영화의 장면들은 독자 입장에서 아무래도 어느 정도는 거르며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물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드라마/영화 속 클리셰를 지적하는 것의 바람직한 취지까지 부정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자가 저서에서 방송통신심의위원들이 모두 남자란 것에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이 책의 저자도 여성 저자 한 사람밖에 없는 터라 성별과 세대를 완벽히 아우르는 글에 이르진 못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아쉬움은 비단 이 책만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읽은 모든 페미니즘 도서에 해당되는 아쉬움이다. 여성 저자는 물론 남성 저자도 마찬가지다. 두 명 이상의 저자가 참여한 공동 저서도 이런 아쉬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왜냐하면 내가 읽은 공동 저서들은 저자들이 전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 정말로 세상의 절반을 지지하되 나머지 절반을 외면하자는 견해가 아니라면 슬슬 남녀 저자가 모두 참여한 공동 저서도 나와야 할 때가 아닐까? 작년에 읽은 일본 에세이 <설거지 누가 할래>는 동거남과 결혼에 이르는 과정에서 느낀 저자가 설거지를 시작으로 상대와 어떻게 대립이 심화됐고 또 어떻게 타협했는지를 다루고 있는데 인상적인 부분은 저자의 입장만 역설하다 끝내는 게 아니라 반드시 파트의 마지막 부분에 상대편인 남자의 입장인 '그의 주장'을 넣음으로써 공정함을 연출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두 남녀의 상황이 공정해졌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여기게끔 연출한 것에 있다. 이는 큰 차이가 있다.

 성비가 어떻건 간에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져 사는 이상 세상이 완벽하게 평등하고 공정하게 흘러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어떤 갈등이 터졌을 때 한쪽의 말만 듣는 건 위험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말하는 당사자는 당연히 본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얘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갈등이 타협점을 못 찾고 평생선을 달리는 걸 과연 어느 한쪽의 절대적으로 일방적인 잘못이라 여기는 것도 위험천만하다 생각하는데 내 개인적으론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대부분의 페미니즘의 도서들이 이 위험천만함의 기로에서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언제나 받곤 했다. 이번에 읽은 <괜찮지 않습니다>의 경우엔 메갈리아의 '위용'을 은근하게 편의에 맞춰 저평가하는 듯한 낌새가 보여 역시 단일 작가가 쓰는 페미니즘 책은 맹신하고 읽으면 안 된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논리의 예시들이 TV에서 쉽게 접할 수 있어 접근성이 낮았던 것, 우리가 원해서 그릇된 여성관의 컨텐츠가 소비되는지 제작자들이 무비판적으로 그릇된 여성관의 콘텐츠를 답습하고 있는지 그 선후 관계를 궁금하게 만든 것, 유난히 여성 연예인에게 요구하는 잣대가 많다는 걸 아주 객관적이고 호소력 있게 설명해 우리 스스로를 반성하게 유도한 것 등 근래 페미니즘 책 중 가장 개성적이고 전문적이며 주제의식 또한 짙었지만 늘 그렇듯 저자의 모든 논리에 완벽하게 감화될 수는 없었다. 난 지금도 이 책에 남자 저자가 공동 저자로 참여했더라면 최지은 기자가 열거한 일부 예시와 반대되는 예시 역시 적잖이 다뤄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맥락의 두 입장의 주장에서 분명 공통적이고 공정한 의견을 취합시켜 많은 독자를 감화시킬 만한 방향성이 제시됐으리라 본다. 적어도 지금보다 균형감을 갖추게 되리란 건 확실할 듯하다.

 어떤 책이건 독자가 작가한테 완벽하게 감화되지 못했다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결국 저자와 나도 전혀 다른 사람이고 생각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왜 페미니즘 책을 포스팅할 때는 저자의 말에 다 동의하기 힘들었다는 말을 하기가 그렇게 눈치가 보이는지 모르겠다. 내가 괜히 혼자 눈치를 보는 거라면 좋으련만 아무래도 뒤가 불안하다. 엉, 이 말도 왠지 눈치가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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