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2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뿔(웅진)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8.9







 노르웨이를 여행할 때 서점을 많이 갔는데 한 가지 재밌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Krim' 코너가 꽤 크게 마련된 것인데 여기서 'Krim'은 노르웨이어로 범죄를 가리킨다. 북유럽에서 추리소설, 범죄소설이 주류 문학이라고 듣긴 했지만 이렇게 서점에서 크게 진열할 정도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 풍경에 적잖이 놀랐다. 그 코너엔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추리소설가인 요 네스뵈의 작품이 주를 이뤘지만 개중에는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작가의 작품 역시 진열되어 있었다. 바로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였다.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는 현존하는 북유럽 추리소설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일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로도 유명하고 작가가 시리즈 출간 전에 심장마비로 돌연사한 것, 자신의 작품이 초대박이 나는 걸 당사자가 보지 못했다는 아이러니함과 이후 이 작품의 저작권에 대한 소송과 새로운 대필 작가가 투입해 시리즈가 이어진 점까지... 지금 시점에선 오히려 작품 외적인 요소 때문에 인구에 회자된다는 생각도 들 정도로 참으로 얘깃거리가 풍부한 작품이다. 그래서 묘하게 시리즈의 스토리와 주제의식이 덜 주목받는 느낌도 있는데... 최근에 다비드 라게르크란츠가 완결을 낸 시리즈 2부가 마음에 들지 않아 중도 하차한 독자로서 역시 스티그 라르손이 작업한 1부가 훨씬 낫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전에 비해 스티그 라르손의 진가가 더 느껴져서 이번 재독은 제법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다.


 자극적인 제목 못지않게 내용도 상당히 자극적인 작품이다. 간단히 말해 이 작품은 '여자를 증오하는 남자들'을 증오하는 여자인 리스베트가 여자를 증오하는 남자들을 발견 즉시 묵사발을 내는 내용이다. 혹자는 제목만 보고 여혐 작품이라 근거도 없는 추측을 하던데 - 설마 그럴까 싶겠지만 실제로 봤다... - 이 작품은 여혐과는 영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여혐을 혐오한다. 작가는 주인공 리스베트의 말을 빌려 그 어떤 핑계를 붙여도 결국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자기 의지로 여자를 증오하기로 선택한 쓰레기들이라 일갈한다. 개인적으로 그들이 무슨 연원으로 그런 쓰레기가 됐는지 그 배경을 헤아려보는 것도 중요하다 생각하지만 리스베트처럼 폭력적일 정도로 단호한 태도도 필요하단 건 인정한다. 세상엔 양심과 논리가 통하지 않는 치들이 너무나도 많으니까. 그래서 이 작품이 유독 쾌감이 넘치는 것일 테고 사람들이 그에 열광해서 그렇게 많이 팔린 거겠지.

 위에서 잠깐 말했듯 북유럽 문화권에선 추리소설이 꽤 주류 문학으로 인정받는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쪽 나라가 범죄율도 너무 낮고 평화로워서 소설로라도 짜릿한 이야기를 찾는 거라 말하는데,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그 말은 명백히 잘못된 말이라 생각한다. 물론 추리소설이 오락적 요소를 중시하는 장르인 건 맞지만 북유럽 추리소설은 단순히 오락적 요소만 추구한다고 하기엔 안 맞는 구석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봤을 때 북유럽 사람들은 추리소설을 일종의 사회학 보고서로 여기는 듯하다. 자국의 사회 문제를 두고 '우리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가?' 하고 자문하는 보고서 말이다. 그들의 선진적인 정책, 가령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하는 복지 시스템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지만 그런 대외적인 측면으로 선망하기엔 결국 북유럽도 사람 사는 동네고 극악무도한 범죄가 발생하는 곳임을 북유럽 추리소설가들은 꽤나 낱낱이 묘사한다. 북유럽에 대한 로망이 있던 독자라면 이처럼 누워서 침 뱉는 격의 작풍에 놀라는 경우가 적잖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읽은 북유럽 추리소설 중 자국에 대해 긍정적으로 얘기하는 작품은 단 한 개도 없었고 반대로 외국인이 읽기에도 이건 좀 너무한 것 아닌가 싶을 만큼 범죄의 소굴로 그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밀레니엄' 시리즈는 그러한 경향의 북유럽 추리소설의 최전선을 달린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스웨덴의 사회상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첫 장이 대뜸 '스웨덴 여성의 18퍼센트는 살아오면서 한 번 이상 남성의 위협을 받은 적이 있다'고 시작될 정도니 말 다했다. 그 이후로 스웨덴 복지 시스템의 모순과 구멍, 복지국가라 과대평가된 스웨덴의 현실을 과감없이 비판하는데 기자 출신 작가라 그런지 묘사들에 거침이 없다. 너무나 직설적이라 때론 내가 지금 소설을 읽고 있는 건지 르포를 읽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는데 이 부분에서 대부분의 독자들의 호불호가 갈릴 것이고 나 역시도 어느 정도는 불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기자 출신 작가다 보니 소설적 문체와는 결이 다른 구석이 많이 느껴졌다. 특히 재벌의 비리를 고발하고 추적하는 초반부와 최후반부의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상당한 끈기를 요구했는데 이 부분만 따로 놓고 보면 이 시리즈가 왜 그렇게 인기가 많은지 납득이 안 될 정도로 지루해서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기 그지없었다. 작품의 유명세를 믿고 끝까지 읽었기에 망정이지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읽었으면 중도 하차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나마 기자로서의 경험을 녹여낸 부분들이 후반에 기자 윤리에 관한 중요한 딜레마를 다룰 때 꽤 강렬한 효과를 낳기에 최소한 본전치기는 한 셈이 됐다. 왜 이 작품의 주된 화자를 기자로 설정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기에 호불호는 갈릴지언정 작품의 단점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한 거대 기업의 회장의 명예를 훼손시킨 혐의로 기자로서 신용도가 땅에 떨어진 미카엘은 방예르 가문의 회장 헨리크에게서 기이한 의뢰를 받게 된다. 30여년 전 실종된 손녀의 사건을 해결해달라는 의뢰였는데, 기자가 받을 만한 의뢰가 아니었지만 마땅히 당장 할 일도 없고 헨리크가 제시하는 조건이나 보상이 파격적이기도 해 결국 미카엘은 의뢰를 수락한다. 처음엔 헨리크의 말대로 수확이 없어 미카엘 본인도 심드렁할 뿐이었지만 조사할수록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단서들이 드러나게 된다. 의욕이 붙은 미카엘은 천재 해커이자 탐정인 리스베트까지 동원해 끝내 예상치 못한 추악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진실의 내용보다도 진실이 드러나거나 다다르는 연출이 정말로 예상치 못했다고. 좋게 말해 신선하고 나쁘게 말하면 너무 허무하다고.

 이야기 자체는 아주 고전적인 본격 추리소설의 전형이지만 실상은 기대와 다르게 진행된다. 일단 '밀레니엄' 시리즈는 사회파 추리소설이라 밀실이니 알리바이니 하는 트릭은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거대하고 알기 쉬운 미스터리가 등장하긴 하지만 작가는 수수께끼 풀이만큼이나 스웨덴의 현실을 비판하는 것에 주력해 얼핏 이야기가 지루하고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등장인물도 많고 진행도 더뎌 과연 800페이지 안으로 이 소설이 끝나긴 할까 싶었는데 막상 이야기가 발동이 걸리자마자 미스터리는 허무하게 풀리고 결말도 다소 썰렁한 데가 있어 그 잔혹한 묘사들을 모두 견디고 후반부까지 쫓아온 보람이 기대보다 덜하다는 아쉬움도 들었다. 누가 이 작품을 두고 주제의식과 캐릭터를 제외하면 남는 것 없다고 말하던데 난 그 평가를 크게 부정할 생각은 없다. 이 소설은 엄밀히 말해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 독자들의 감성과 취향에 부합해 한국 독자들한테 어필하기 미묘한 구석도 많다고 본다. 특히 마성의 남자 미카엘과 강인한 여성 리스베트는 그 난잡하다고 할 수 있을 사생활 때문에라도 반감을 느낄 독자들이 많을 것 같다.


 10년 전에 읽었을 때는 작중에서 호불호가 갈릴 요소들이 거의 불호로 다가왔지만 나이 좀 먹고 다시 읽으니까 단점이 명확히 보이면서도 취향에 맞는 요소들도 제법 있었다. '밀레니엄' 시리즈를 두고 '어른들의 해리포터'란 수식어가 있던데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괜히 해리포터란 단어에 혹해 어린 독자들이 읽는 일이 없게끔 만류하고 싶은 장면들이 많기 때문인데... 이 말은 다소 고루한 발언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어지간하면 이렇게나 사회 비판적인 작품이기에 남녀노소 모두가 읽어야 바람직하다고 말했겠는데 이 작품은 나이 어린 독자들도 포용하기엔 너무 정신 나간 매력으로 충만한 작품이라 남녀라면 몰라도 노소한테 추천하긴 꺼려진다.

 '밀레니엄' 시리즈 1부에 해당하는 1편부터 3편까지는 스티그 라르손이 집필했다. 2부를 인정하지 않는 나로선 1부만이 오리지널로 느껴지는데 그렇기 때문인지 다시 읽어도 눈에 밟히는 단점들이 지금 와선 보물처럼 느껴졌다. 신인 소설가 특유의 패기와 거칠고 투박한 문체까지 총망라된 데뷔작을 읽고 있으니 여럿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독서했다. 일부 가독성이 열악한 구간만 제외한다면 재독한 보람이 충분한 작품이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남은 2편과 3편이 기대됐다. 비교적 본격 추리소설의 느낌을 풍긴 1편과 달리 2, 3편은 결이 또 다른데 어떻게 보면 그렇게 바뀐 스타일이 스티그 라르손이 추구한 사회파 추리소설엔 대단히 잘 어울렸던 걸로 기억한다. 적어도 1편보다 덜 지루하겠구나 싶어 벌써부터 안심이 된다.

당신 생각이 틀린 것 같아요. 그자는 성경을 너무 읽다가 미쳐버린 연쇄 살인범이 아니에요. 그저 여자들을 증오하는 쌔고 쌘 쓰레기일 뿐이죠. - 2권 15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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