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가방 2 (완결)
다니구치 지로 글.그림, 오주원 옮김, 가와카미 히로미 원작 / 세미콜론 / 2014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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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가와카미 히로미의 원작 소설과 다니구치 지로의 그림이 만난 작품. 비록 원작은 읽지 못했지만 원작에 한없이 가깝거나 혹은 그 이상으로 잘 그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압권인 작품이었다. 어느날 선술집에 들른 주인공이 우연히 고등학교 때 선생님을 만나며 시작되는 이 작품은 두 사람이 어떻게 술친구가 되고 나중에 어떻게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지 섬세하게 그려낸다. 대충 2, 30살 정도 차이나는 두 사람의 연애 관계라고 하면 어쩐지 불경스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실제로 작중에선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술친구에서 친구로, 친구에서 연인으로 관계가 발전해 괜히 안 좋은 선입견을 품은 내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이 작품은 여자 제자인 츠키코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터라 노년의 선생님은 정확히 무슨 생각을 품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츠키코는 어느 순간부터 선생님에게 끌리기 시작하면서 의도적으로 거릴 두려고 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선생님은 몰라도 츠키코만큼은 세간의 시선이란 걸 어느 정도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는 좋은 술친구라는 선은 주말에 버섯을 따러 가거나 시장 구경 등을 하면서 서서히 허물어지고 어느덧 상대방에게 구애를 펼치는 단계에 이르렀는데 이 과정 중에서 어떤 장면도 과하지 않아 소위 말하는 막장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선생님의 경우엔 십 몇 년 전에 가출한 아내에 대한 허무함, 원망, 자책감을 떨치지 못하는 터라 어딘지 초연한 느낌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이미 장성한 아들이 있는 늙은 교직자라 일반적인 세간의 시선에서 보자면 어느 뭐로 보나 연애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지만, 약간은 고루한 구석은 있어도 참 묘한 매력을 풍기는 지라 츠키코로서 그에게 빠져들지 않기가 오히려 힘든 일로 비춰졌다. 츠키코가 구애를 하는 장면을 보고 약간 갑작스러운 듯하면서도 '이제서야 하는 건가' 싶었는데 서로 눈치를 보느라 정식으로 연인으로서 교제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렇게 서로 눈치를 봤기 때문인지 더 진실되고 여운이 짙은 관계가 이뤄졌다는 생각도 든다. 둘의 관계는 5년이 흘러 선생님의 죽음으로 끝이 나고 말지만 츠키코에겐 선생님의 가방이 남겨져 정말로 이 관계가 끝났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유품이 고작 가방인 건가 싶은데... 사실 난 아직까지도 가방의 의미가 대관절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추측컨대 가방은 선생님이 항상 들고 다닌 물건이었던 만큼 츠키코가 자기가 죽어서도 곁에 있는 듯한 느낌을 가져달라는 모종의 위로였던 것 같다. 선생님의 가방은 선생님이 버섯을 따러 고된 산행 중에도 들고 다닐 정도로 항시 휴대했던 물건이라 그렇게 추측했을 뿐 확신은 없다.


 4년 전에 읽은 책이고 그때 포스팅을 쓰기가 꽤 난감했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내공이 부족한 것인지 연애 소설이 원작인 작품답게 감정 표현이 얼마나 섬세하게 품격이 있었는지 전달하기가 참 까다로웠다. 원작이 다니자키 준이치로상이라는 걸출한 문학상을 받았다는데 원작은 물론 다른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수상작들이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도 읽어본 적이 없는 등 일본 순수문학 자체가 많이 낯설어 제대로 표현이 안 된 듯하다. 나는 분명 읽는 중엔 내용을 다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포스팅으로 쓰려니 피상적인 감상밖에 나오지 않는다. 보통이라면 순수문학은 모름지기 다 그런 법이라고 넘겼을 테지만 이 작품만큼은 워낙에 분위기가 출중해 이렇게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는 게 속상할 따름이다.

 다니구치 지로의 디테일한 그림도 작품의 분위기에 크나큰 역할을 했지만 그림에 관해서도 문외한인 터라 정확히 어떻게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전달하기 어렵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면 일반적으로 일본 만화라고 하면 떠오르는 모에(?)하다거나 과장된 그림체가 아닌 사실적인 그림체라 남녀노소 부담 없이 만화를 읽을 수 있으리란 말밖엔 없다. 확실한 건 지금은 고인이 된 다니구치 지로가 왜 생전에 그토록 유명세를 떨쳤는지 그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란 것이다. 일전에 읽은 <수명을 팔았다. 1년에 1만 엔으로>의 작가한테서도 느낀 거지만 다니구치 지로도 그저 소설의 내용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 아닌 소설의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고 내면화한 다음에 화폭에 옮겼다는 느낌이 강해 단순히 그림만 잘 그리는 작가라는 아니구나 싶었다.


 이 작품을 처음 읽을 때 쓴 포스팅에서 다니구치 지로의 다른 작품과 이 작품의 원작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말했지만 이 다짐은 그다지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니구치 지로의 <겨울 동물원>이나 <고독한 미식가>는 읽긴 했지만 그 양이 너무 적고 가와카미 히로미의 소설은 아직도 읽지 못해 솔직한 말로 민망하다. 내가 참 느릿느릿한 사람이구나 싶기 때문인데... 뭐 그런 일로 민망해하고 반성을 다 할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4년 전 포스팅과 지금의 포스팅의 내용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게 꼭 제자리걸음을 하는 느낌을 받아 작은 다짐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공은 그런 식으로 쌓이는 것일 테지. 그걸 이제 깨닫다니 나도 참 갈 길이 멀었다.

키우니까 자라는 거야. 연애 감정이란 그런 거지. - 제15회 귀뚜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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