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소년 아톰 박스세트 1~23 - 전23권 (완결)
데즈카 오사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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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옛날부터 읽어야겠다고 생각만 했지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 쉽지 않았던 작품이다. 그만큼 연식이 된 작품이기도 하고 분량도 길어서 기껏 박스 세트를 구입해놓고 손길이 잘 가지 않았다. 결국 다 읽기까지 3주 넘게 걸렸다. 구성이 옴니버스식이다 보니 하루에 한 권 이상 읽기 힘들더군. 여하튼 여러모로 거리감이 있던 작품이지만 다 읽고 나니 기대 이상으로 배울 점이 많아서 보람이 느껴지기도 했다. 옛날 만화 특유의 유치하면서도 기괴한 느낌도 도리어 신선했고 은근히 같은 패턴이 남발되는 듯하면서도 새로이 얘기할 지점을 낳는 에피소드들이 여간 흥미로운 게 아니었다. 

 뒤로 갈수록 아톰이 가장 구식 기술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상천외한 존재들이 등장하는 것도 재밌었고 특히 인상적인 것은 첫 번째 에피소드와 마지막 에피소드가 의외의 내용이란 것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첫 번째 에피소드는. 왜 '우주소년' 아톰인가 했더니... 이 만화가 처음 연재된 게 50년대란 걸 생각하면 평행 우주 설정은 참 신박하지 않은가 싶었다. 


 듣기로는 아톰은 일본인의 로봇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미국에서 만드는 로봇은 주로 전투용 로봇이나 채굴용 로봇인 반면 일본에서 만드는 로봇은 간호용 로봇인 것엔 다 그럴싸한 이유가 있었다. 아톰을 보고 자란 일본인들에게 로봇이란 인간과 공생하는 존재이며 그들이 인간에게 파괴당하지 않게끔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모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뇌리에 각인됐다는 것이다. 이는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로봇은 그저 인간이 누리기만 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듯 똑같이 배려하고 존중하는 대상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인데 실제로 작중에서 누누이 강조되는 주제기도 하다. 

 이런 주제의식은 지금 시점에서 봐도 파격적인데, 은근히 비정하고 현실감 넘치는 세계관과 대조되게 무척 따뜻한 인간애가 돋보이는 주제의식인 터라 경우에 따라서 무척 감동적으로 느껴졌다. 예를 들면 '클레오파트라'나 '로비오와 로비에트' 에피소드처럼 자신을 만든 부모(박사)의 뜻을 거스르지 못해 악행을 저질러야 하는 로봇들의 비애가 어떤 비극을 낳고 거기다 어떤 식으로든 인과응보의 결말을 맞이해 씁쓸함이 배가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두 에피소드는 천재적인 로봇 공학자들이 자신의 손으로 낳은 로봇을 통해 분에 넘치는 꿈을 이루려거나 소모적인 감정 싸움에서 이기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작가는 이러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과 그에 신음하는 로봇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이기심과 오만함은 모든 것을 망칠 뿐이라는 교훈을 한껏 강조한다. 


 아마 아톰을 읽은 모든 독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상 최대의 로봇'과 '청기사' 에피소드를 최고의 에피소드로 꼽을 듯하다. 전자는 단순히 배틀물로도 재밌었지만 그저 힘을 추구할 뿐인 로봇(기술)엔 미래는커녕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날카롭게 시사했고 후자는 로봇의 자존감과 권리에 대해 얘기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에피소드였다. 이 에피소드는 유례 없이 인간들로부터 등진 아톰의 모습이 인간인 독자 입장에서 공감이 갔던 것이나 그럼에도 인간을 향한 아톰의 선한 마음에 큰 변함이 없는 것 등 여러 면에서 눈길이 갔다. 어떤 때는 아톰이 약간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나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는 아톰의 처지가 고매하면서도 짠하게 느껴졌는데, 이는 반대로 말하면 인간이 바라는 로봇이란 경우에 따라선 진언도 날리는 동등한 존재가 아닌 무조건 자신을 섬기는 노예인 것 같아 어떤 면에선 인간의 한계를 엿볼 수도 있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말하지만 이 작품에선 인간이 굳이 아톰처럼 지성이 있는 존재를 만든다면 그를 대우할 때 가히 인간 못지않게 존중해야 함을 꾸준하게 강조하고 있다. 아톰을 포함해 작품에 등장하는 무수한 로봇들은 지성을 갖췄으나 인간들에게 도구로 취급당하면서 엇나가거나 오히려 인간이 그 화를 뒤집어쓰는 전개가 적잖이 묘사된다. 때론 존재 자체만으로 위험천만한 로봇은 꼭 아톰으로부터 파괴당해야만 하는 전개가 나오기도 하는데 이럴 때마다 아톰이나 파괴당하는 로봇이나 '왜 인간은 이렇게 위험한 로봇을 만들어서...' 라는 탄식을 낳는 장면은 반드시 나온다. 


 한마디로 철학적인 사유도 성찰도 없이 도구적이고 비인간적으로 기술을 발전시키고 접근한다면 남는 것은 없다는 걸 한결같이 비판한 작품이 바로 <우주소년 아톰>이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애들 보는 로봇 만화 정도로만 인식하던데 생각보다 무겁고 심오하고 서사나 장르에 관해서도 실로 역사에 남을 법한 시도가 많았던 작품이라 새삼 이 작품이 일본 만화를 넘어서 문화에서 점하고 있는 위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울러 왜 데즈카 오사무가 만화의 신이라 불리는지도 알 것 같았다. 이토록 시대를 앞서간 인류애가 담긴 만화를 그린 작가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졌다. <불새>와 <붓다> 등 아톰말고도 대표작이 참 많던데 뭐부터 읽을지... 어떤 작품이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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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로봇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 우리교육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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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은 윌 스미스 주연의 동명의 영화의 원작 소설이라고만 알고 넘기기엔 참 아까운 대작이다. 후대의 모든 로봇 창작물에 영감이자 원천을 제공한 '로봇 3원칙'이 처음 등장한 전설적인 작품이면서 다종다양한 오류를 내는 로봇들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존엄성과 인권 감수성을 길러볼 수 있는 철학적인 SF 소설이자 로봇 3원칙을 근거로 로봇들의 오류 원인을 추적하는 특수 설정 걸작 추리소설집이기도 하다. '로봇 3원칙'이야 워낙에 유명하고 이전 포스팅에도 썼으니 더 하고 싶은 말이 없고, 철학적인 SF 소설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어딘지 볼거리에 치중된 영화에 비해 훨씬 다양한 각도에서 로봇이란 존재의 불완전함 - 한편으론 로봇 자체는 완전무결하나 다루는 인간들이 불완전하기 이를 데 없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 에 주목하며 미래의 로봇은 진정 어떤 모습일는지 상상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개인적으로는 책의 수록작들 대부분이 마치 추리소설적인 구조를 띄고 있는 게 참으로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첫 번째 수록작이자 레트로 휴고상을 수상한 '로비'는 소녀와 로봇과의 감동적인 우정을 그린 전형적인 로봇 소설인 것에 비해 바로 다음 수록작부터 작가의 상상력과 유머 감각이 돋보여 다소 밋밋했던 첫인상은 눈 녹듯 사라졌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수록작의 제목에 부제가 붙으면서 이번 이야기에서 어떤 반전이 등장할지 유추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는데, 이 제목들이 원제가 아닌 우리나라로 번역 출간되면서 바뀐 걸 생각하면 다소 불필요한 친절을 베풀지 않았느냐고 혀를 차게 됐다. 출판사가 어린이 독자를 상정하고 편집을 해서 그런가... 작품의 내용의 반전들이 지금 읽어도 신선한 부분이 있어서 의도치 않게 스포일러로 재미를 반감시킨 출판사의 편집은 은근히 아쉬웠다. 반면 수록작마다 판이한 분위기를 전부 소화하는 실감나는 작화력을 보유한 오동 그림 작가의 삽화는 가히 신의 한 수로 여겨졌다. 

 '스피디'처럼 로봇 3원칙이 서로 충돌해 기이한 행동을 하는 경우부터 '큐티'처럼 인간의 말을 듣지 않는 로봇이 헛소리까지 남발하지만 일 하나는 기똥차게 잘해서 주인인 인간 입장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방관할 수밖에 없는 경우, '허비'에서 절대다수를 만족시키는 로봇의 존재는 모순에 불과함이 드러나는 경우, '네스터10호'처럼 인간에 대한 반발심과 로봇으로서의 우월감이 지나치면 어느 정도로 위험해질 수 있는지 경고하는 경우, '바이어리'에서는 인간 못지않은 로봇의 대두, '피할 수 있는 갈등'에서는 인간을 위해 심어둔 로봇의 원칙이 도리어 인간의 목을 조르거나 사육하는 결과에 이를 수도 있다는 비관적인 전망까지 이 책에선 온갖 종류의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로봇이 3원칙을 거스를 수 없게끔 만드는 기술적인 원리는 잘 모르겠으나 그 구멍이 숭숭 난 원칙에 의해 인간이라면 저지를 수 없는 실수를 속절 없이 반복하거나 인간에게 굴욕을 당해야 하는 로봇의 처지가 웃기면서 씁쓸하게 다가왔다. 종국에 로봇은 지나치게 발달해 인간을 위한 원칙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인간을 욕보이는 고차원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이걸 자업자득이라 해야 할 지 판도라의 상자를 연 대가를 치렀다고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할 정도로 작중 딜레마는 대부분 근본적인 책임을 인간에게 돌릴 수 있어 씁쓸함이 배가됐다. 우린 로봇의 주인인가 친구인가 아니면 종인가. 언뜻 타당해 보이는 로봇 3원칙은 실상 모든 로봇을 완벽히 통제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간이 그렇듯 로봇들 역시 결코 천편일률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언젠가 어디에서든 로봇이 사고를 일으키는 것은 아주 필연적이라 여겨졌다. 

 이야기의 구조나 반전의 내용들도 재밌었지만 로봇의 오류를 조사하는 파웰과 도노반, 수잔 켈빈과 보거트 콤비가 작품에 깨알 같은 재미를 선사했다. 유연한 사고로 사건의 진상에 접근하는 모습, 가끔은 대재앙을 방지하고자 목숨도 거는 몇몇 장면에서 호감을 가지지 않기가 힘들었다. 이들 모두 하는 일이 비슷함에도 로봇에 대한 가치관이 각자 달라 가끔 의견 대립하는 구도 역시 흥미로웠다. 개중에 수잔 켈빈 박사는 로봇이란 존재를 사뭇 긍정적으로 여기는 캐릭터다. 그 이유로 박사는 로봇의 악행은 로봇이 악의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대부분 인간의 실수나 로봇이라는 한계 때문에 벌어지는 우발적인 사고라는 것으로 예시를 들었다. 


 작년에 읽은 카렐 차페크의 <로봇>이 로봇 소재의 A to Z를 다뤘다고 생각했는데 <아이, 로봇>에서 로봇이란 소재가 완성되지 않았나 싶다. 로봇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더불어 위험성도 경고하는 자세에서 연작 소설의 미덕이 영리하게 발휘됐다고 본다. 이야기의 세부적인 주제가 계속 바뀌니까 여러 형태의 이야기가 나왔을 테고 아마 장편이었으면 이런 다양한 매력을 어필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그래서 영화가 고평가를 못 받았나? 저번에 처음 읽었을 때 영화도 다시 찾아보자고 생각했는데 4년 동안 결국 찾아보지 않았다... 언젠가 찾아보긴 해야 할 텐데 괜히 실망할까봐 두렵다. 원작을 최대한 의식하지 않고 기대 없이 보는 게 상책일 듯하다. 

하지만 선생이 알아야 할 건 로봇하고 아주 훌륭한 인간은 잘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 30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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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의 눈빛 나츠메 형사 시리즈
야쿠마루 가쿠 지음, 최재호 옮김 / 북플라자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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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형사의 눈빛>은 어딘지 가가 형사를 연상시키는 나츠메 형사가 등장하는 소설집이다. 야쿠마루 가쿠 작가의 작품 중에서 보기 드문 형사물로 후속작이 나올 가능성 및 드라마화될 잠재력이 충분한 작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일본에선 동명의 드라마가 나왔다고 한다. 아쉽게도 작품 자체는 기대에 비해 재밌진 않았으나 드라마로 보면 또 느낌이 다를 것이란 생각이 든다. 몇몇 납득이 안 가는 범인의 심리가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보면 개연성 있게 다가올 것 같기 때문이다. 

 책에는 총 7편의 중단편 소설이 수록됐으며 첫 번째 수록작인 '오므라이스'와 표제작인 '형사의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나머지 수록작은 내용이나 주제의식이 전반적으로 중복되는 감이 있어서 차라리 수록작을 줄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개중에는 반전을 위한 무리수도 있었고 그 무리수에 개연성을 부여하고자 지지부진하게 의미 부여를 하는 어설픈 경우까지 있어서... 작가의 <악당> 같은 완성도를 기대한 나로선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수록작 전체에 녹아든 농도 짙은 휴머니즘은 부담스러웠으나 주인공 나츠메는 아주 이성적이라 묘하게 작풍에 균형감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야쿠마루 가쿠의 소설들은 아주 감정적이고 물리적인 인과응보가 어떤 식으로든 묘사되기 마련이었는데 말이다. 작가는 '형사의 눈빛'에서 나츠메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죽어 마땅한 자를 죽여버리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그게 과연 자기 자식한테까지 당연하다는 듯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옳단 말인가. 진정한 인과응보란 그런 게 아니지 않을까. 그간 비슷한 질문을 반복해온 작가답게 이 작품에선 한층 성숙한 고민을 풀어냈다. 쉽진 않지만 가해자의 진실한 참회, 반성이야말로 진정한 인과응보이자 유족이 가장 바라는 바임을 강조해 다 읽고선 따뜻한 여운이 감돈 기억이 난다. 대미를 장식하기도 하고 또 분량이 가장 많아서 그런가, 표제작이 괜히 표제작이 아니었다. 

 첫 수록작 '오므라이스'는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 부문 후보에 오른 작품이라는데 상식을 뒤엎는 반전 때문에 그만한 평가를 받지 않았나 생각된다. 무슨 야동에서나 나올 법한 막장 전개가 나와 당혹스러웠으나 작가가 진정한 반성의 의미를 강조한 덕에 막장에서 그치지 않고 씁쓸함과 애절함까지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여러모로 첫 수록작에 어울리는 작품이 아닐 수 없었는데, 여담이지만 이번 단편집은 작가의 작품 중 불쾌하든 아니든 유독 섹슈얼적인 상황 설정이 많아 이질적으로 읽혔다. 대부분 어느 정도 필요한 수준의 설정이긴 했지만 범죄의 수위나 피해자의 죽어 마땅한 부분을 납득시키기 위한 자극적인 서술 같기도 해 눈살이 찌푸려졌다. 난 이 작가가 너무 자극적으로 글을 쓰지 않길 바라는데... 다른 작품에선 또 어떨지 확인해봐야겠다. 


 이 작품의 드라마는 총 11부작이라고 한다. 분량으로 봐선 원작보다 디테일한 내용일 것으로 기대된다. 주인공임에도 과거사를 제외하면 나츠메 개인에 대한 묘사가 적은 편이었던 소설을 드라마가 어떻게 재탄생시켰을지 궁금해 찾아보려고 한다. 그리고 <고독한 미식가>로 유명한 마츠시게 유타카가 출연한다니 더 보고 싶어졌다. 원래는 형사나 야쿠자 역할로 유명한 배우라 그 드라마에선 진지한 연기를 하지 않을까 싶다. 과연 언제 보게 될는지. 

피해자의 가족들이 범인에게 바라는 것은 범인이 감옥에 가거나 무거운 형벌을 받는 것만이 아니야. 범은 스스로 자신이 범한 죄의 의미를 평생 곱씹는 것, 그리고 그것을 죽을 때까지 반성하며 살아가는 것, 바로 그걸 원하는 거야. - 4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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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 아저씨 개조계획
가키야 미우 지음, 이연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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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7 














 처음에 제목을 봤을 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무슨 로봇도 아니고 개조라니, 너무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얼핏 했었다. 책을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조시켜주는 걸 감사히 여기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주인공이 꼰대라 오히려 순화된 표현이구나 하고 인상이 바뀌었다. 또 한편으로 개조란 단어가 참 적합한 단어란 생각도 들었다. 이를테면 구제라든가 갱생이라든가 쓰려면 훨씬 자극적인 표현이 있을 텐데 개조라니, 난 이 단어에서 로봇을 떠올렸다. 최근에 로봇과 관련된 소설을 읽어서 그런 걸까? 작품 중반에 주인공이 본격적으로 변화하게 되는 계기가 마치 로봇이 특이점을 맞는, 이른바 개조를 당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연상시켰다. 


 남자와 여자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여자에겐 모성이란 본능이 있기에 남자는 바깥에서 일하고 여자는 집에서 아이를 돌보면 된다고 진심으로 믿는 인간이 바로 주인공이다. 그리고 이런 캐릭터는 주인공 혼자만이 아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주인공 세대는 다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고 실제로 정년 퇴임을 할 정도의 연령대인 일본 아저씨들의 생각이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테고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씁쓸한 건 주인공과 같은 세대라 할지라도 아내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며 주인공의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하는 짓이 판박이란 것이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도 할 얘기가 대단히 많은 작품이지만 작중에선 적어도 성별을 근거로 꼰대의 원인을 분석하진 않는다. 




 주인공이 딸하고 설전을 벌일 때마다 '그럼 내가 구닥다리라는 거냐'고 물을 때마다 딸은 '구닥다리냐 아니냐의 문제라기 보다 그냥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 이라 선을 긋는다. 이 작품은 정년 퇴직한 아저씨들이 가정에서 외면을 당하는 사회 문제를 신랄하고 통찰력 있게 들여다본다. 단순히 그들이 남자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국가 차원에서 잘못된 교욱을 받아왔기 때문이라고 어느 정도 동정적으로 접근한다. 남자들을 육아 걱정 없이 회사에서 마음껏 굴릴 수 있도록 모성이란 신화를 만들어 여자를 집안에 가두고 자연스레 집안일이나 육아를 여자나 하는 하찮은 일 - 주인공은 아예 일도 아니라서 가정 주부는 부러운 삶이라 생각한다! - 로 생각하게끔 분위기를 조성해 사회 생활에 자발적으로 매달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후 맥락을 떼고 적으니 꼭 음모론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이른바 '정부의 농간'의 실체를 체감하고 자기 신념을 꺾는 것은 바로 자기를 자애롭게 길러주셨다고 믿어온 어머니가 실은 자애로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임을 오랜만에 만난 형제들의 입을 통해 듣고 난 다음부터다. 그 전까지는 아이는 엄마가 최소 3살까지 키워야 한다 -> 그래서 며느리가 일을 하는 건 무슨 가당찮은 일이냐고 생각했고 아이 돌보기는 모성을 가진 여자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 그래서 남자인 자신이 아들 부부가 맞벌이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손주들을 돌보는 게 당치도 않다고 어디에서건 불만을 호소했다. 하지만 자신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올바른 어른으로 자라났다는 기본 전제가 틀렸음을 들은 순간 주인공은 자신의 논리의 구멍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어쩌면 소설 분량에 맞추느라 주인공의 개조가 약간 급작스런 감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람이 로봇도 아닌데 기본 전제가 틀렸다는 걸 계기로 점차 바뀌어 나간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냐고 잠시 입을 삐죽거렸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의 첫인상은 딸에게 언제 결혼할 생각이냐며 모성을 운운하는 등 딸이 대꾸를 해주는 걸 감사히 여겨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답이 없는 작자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작가는 일단은 대화가 오갈 수 있다는 건 미약하나마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적잖은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고 빠른 시일 안에 가능하진 않을 테지만 학력이나 어느 회사 출신이냐를 떠나서 주인공이 가족과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아저씨라면, 말년에 그들에게 비참하게 외면당하지 않기 위해 당연히 방법을 찾으리라 결론을 내린 것일 터다. 그래,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말처럼 말이다. 


 중간에 아저씨의 꼰대 마인드는 정부의 농간으로 인한 가슴 아픈 결과라며 사뭇 그들을 동정했지만, 결국 그들에게 가족들로부터 돈 벌어다주는 기계 이상 이하로 취급되다가 버려지고 싶지 않다면 스스로의 노력이 절실하다는 경고를 이 소설에선 놓치지 않고 있다. 아울러 이 꼰대 마인드가 단지 중년 세대의 전유물이 아닌 유난히 그들의 아들들에게 찰떡같이 계승되고 있는 것 역시 놓치지 않았다. 주인공보다 조금 사정은 낫지만 미래에 아내로부터 버림받으리라 뻔히 예상되는 주인공의 아들의 모습을 보면 작가가 이 작품을 단지 여자들 통쾌하라고 집필한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비참함이 감도는 이야기지만 저자 가키야 미우의 필력 덕에 읽히기는 술술 읽힌다. 이 작가의 책을 접할 때마다 제2의 오쿠다 히데오란 생각이 늘 드는데 이번에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확실히 느낀 것이 있는데 난 예전부터 채만식의 <치숙>처럼 암 걸리게 만드는 언행을 보이는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다. 결국 그 주인공이 어떤 변화를 겪을지 궁금해서 잘 읽히기도 하고, 혹은 반대로 그 주인공이 끝까지 변화하지 않고 한심하게 살아가더라도 반면교사 삼으며 만족스럽게 책장을 덮는 것 같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일종의 공공의 적이 있으면 가독성은 자연스레 확보되는구나 싶었다. 욕하면서 보게 된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 


 물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전형적인 전자에 해당한다. 참으로 감동적이게도 이 이야기에서 실질적으로 개조 계획을 당하는 인물은 주인공이 아닌 주인공의 아들이다. 그 계획은 주인공이 자기 며느리와 상의한 끝에 실행된다. 주인공은 이미 아내로부터 버림받았고 딸도 지고 못 사는 성격이라 맞받아쳤을 뿐 근본적으로 자기 아버지인 주인공을 포기하고 있었다. 주인공은 어느 정도 자력으로 스스로를 개조한 것이다. 하지만 똑같이 맞벌이하면서 주말엔 자기만 쉬고 아내한테 집안일을 미루는 자기 아들의 꼬라지를 보고서 자기와 같은 전철을 밟을까 주인공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다짐을 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며느리에게 상의하는 장면은 다신 잊지 못할 것 같다. 




 <정년 아저씨 개조계획>은 세대 갈등, 남녀 갈등, 육아 문제 등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과장되지 않고 충분히 있음직한 상황과 인물들을 보여줌으로써 흡입력 있는 이야기를 선사한 수작 중의 수작이었다. 지금까지 접한 작가의 세 편의 작품 중 가장 가독성이 좋았고 완성도가 높았다. 읽으면서 나도 우리 가족의 모습이 떠올라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모든 사람들이 읽어줬으면 하는 작품이다. 가장 변화가 필요한 꼰대들이 과연 이 책을 읽는다고 미동조차 보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니, 애당초 꼰대들이 책을 손에 쥐어준다고 해서 펼칠 것 같지도 않지만... 다시 생각해도 이 책의 주인공은 꼰대로서 약과 중의 약과가 아닌가 싶었다. 






 p.s 이 책을 읽고서 '말을 해줬어야지, 똑바로 말해주지 않는데 어떻게 알아?' 만큼 상대를 열불나게 만드는 말이 없음을 새삼 깨달았다. 앞으로 무의식적으로 이 말을 하지 말아야지 싶다가도 싫어하는 상대에게 일부러라도 해야지 라는 음흉한 생각도 들었다. 

뭐, 아무튼 뭐가 됐건 간에 지금처럼 아빠가 나설 때는 위기 상황만으로 해 뒀으면 좋겠어.

위기 상황이란 건 평생토록 없어. - 3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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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중독 아름다운 청소년 17
김소연.임어진.정명섭 지음 / 별숲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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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로봇에 대한 책을 읽을 필요성을 느껴서 집어든 책. 3년 전에 읽었을 때완 달리 만족도가 덜하거나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이 달라지는 등 감상의 변화가 있었다. 전엔 표제작이 제일 좋았는데 이번엔 첫 번째 수록작 '특이점을 지나서'가 더 애정이 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로에 대한 고민을 깊게 했던 모양인지 로봇의 조언으로 자기 진로를 현명하게 바꾼 주인공의 모습에 쾌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역시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해야 한다. 

 개인의 적성보다 당대의 전망 있는 직업, 이를 테면 작중에선 로봇이 정복하기가 요원해 보이는 서비스업 쪽으로 학생들의 진로가 결정된다는 게 어떤 의미에선 디스토피아에 가깝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앞으로의 시대가 로봇과 경쟁하느냐 아니냐를 놓고 따질 때 무조건 후자의 노선을 취하는 게 현명한 처사라고 여겨지기에는 인간의 가능성과 잠재력은 참으로 무한하고 예측 불허하지 않은가?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발언일 수 있지만 말이다. 


 '특이점을 지나서'는 가스라이팅에서 해방되는 주인공, 로봇이라는 이질적인 존재와의 우정, 본래 인공지능 관련 용어인 특이점을 인간에게 대입해 보다 보편적인 개념으로 확장시키는 등 70페이지 가량의 짧은 분량에서 청소년 소설의 작풍에 맞게 여러 요소를 잘 다뤄낸 작품이었다. 로봇, 그러니까 인공지능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사람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특이점이란 개념을 사람이 자신의 꿈을 설정하고 나아가는 시점으로 해석한 게 퍽 인상적이었다. '특이점이 오다'라는 말이 어감에 비해 그렇게 특별하지도 않고 위험하지도 않으며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는 일임을 강조한 게 - 어쩌면 있어야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 이 작품 '특이점을 지나서'의 놓칠 수 없는 성과였다고 본다. 

 <로봇 중독>과 <거짓말 로봇>은 로봇이란 소재를 통해 생명 존중과 선의의 거짓말에 대해 얘기하는 흥미로운 작품들이었다. 전자는 로봇을 반려 동물로 치환시켜 묘사해 상당한 따스함과 감동을 선사하고 후자는 거짓말을 하는 로봇의 위험성 - 로봇은 절대 거짓말을 못한다고 여겨지기에 사소한 거짓말도 위험하기 짝이 없다! - 과 더불어 결국 거짓말이 나쁜 것인가, 아니면 거짓말을 하는 당사자의 의도가 나쁜 것인지 고민해보게 만든다. 중요한 건 이 책에 수록된 세 작품 모두 로봇과 공존하는 미래를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작중에서처럼 발전된 인공지능이 흔해진 미래가 마냥 긍정적이기엔 기술적인 완성도가 필수적이겠고 때문에 불안 요소도 많을 텐데... 인공지능 개발과 도래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시대의 변화라고 한다면 공존의 방향을 모색하는 게 현명하지 않느냐는 게 바로 이 엔솔로지의 취지였던 것 같다. 


 3년 전에 읽었을 때완 달리 이번엔 청소년 소설집 특유의 유치함 내지는 얕은 깊이가 드문드문 보여 '내가 왜 이 책을 다시 읽으려고 구매까지 했는가' 하는 당혹감과 마주해야 했다. 하지만 작풍이 유치하거나 깊이가 얕아 보인다고 해서 주제의식이나 작가들이 주목하는 이야기들까지 유치하거나 깊이가 얕게 느껴지지 않아 결과적으로 다시 읽는 보람을 얻을 수 있었다. 과연 정말로 우리가 로봇과 우정을 쌓을 수 있는 미래가 도래할는지 모르겠지만, 설령 그런 미래가 도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책에서처럼 일단 미래를 긍정적으로 상정하고 상상해보는 것은 결코 무가치한 일이 아닐 터다. 다시 말하지만 로봇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하면 사람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수록작들도 결국엔 로봇보다 청소년의 진로 설정, 생명 존중, 선의의 거짓말에 대해 얘기하고 있잖은가. 

 몇 년에 걸쳐 로봇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는 내 입장에서 이러한 로봇 소설의 공식은 변함없이 매력적이고 날 명심하게 만들기도 했다. 로봇에 대해 얘기하려고 하면 어느 수준까지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느냐 그게 항상 걱정이기 마련인데, 어쩌면 전문적인 지식보다 사람이란 존재에 대한 통찰이 로봇 소설을 배로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 같아 막막하던 차에 위로가 됐다. 로봇 이야기는 곧 사람에 대한 이야기... 꼭 명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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