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나다 2 - 굿나잇 혹은 굿모닝 길에서 만나다 2
쥬드 프라이데이 글.그림 / 예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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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개인적으로 네이버 웹툰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었으나 단행본은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주연급 인물들의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조연들의 이야기는 거의 편집당했는데, 단행본으로 펴낼 때는 분량 제한이 있기라도 한 것인지 편집을 당해도 너무 당해 팬으로서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처음 단행본으로 접했을 때는 그래도 정확히 어떤 내용이 편집당했는지 기억이 나지만 지금 이렇게 시간이 흘러 다시 읽으니 이젠 그마저도 가물가물했다. 좋게 말해 과감하다고도 할 수 있는 분량 줄이기만 아니었다면 정말 무한한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책이었을 텐데. 

 앞서 말했듯 약간의 아쉬움을 제외한다면 이 작품은 여전히 사랑스런 작품이다. 이야기가 약간 편집된 탓에 희수가 비교적 굴곡 없이 꿈을 이룬 것처럼 비쳐졌는데 - 연재 때는 좀 더 우여곡절이 있던 걸로 기억한다. - 그럼에도 인물들의 위트 있는 대사나 아름다운 그림체는 제대로 살아있어 말 그대로 보는 맛이 있었다. 특히 그림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작가의 수채화는 혀를 내두를 만큼 정교하고 서정적이라 빠져들면서 읽게 됐다. 특정 일러스트도 물론이거니와 모든 장면이 정말 '그림'이 따로 없었는데 재밌게도 작가는 연재를 빠르게 하기 위해 수채화를 택했다고 한다. 수채화가 특별히 자신 있거나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수채화를 그리다 보면 잘못 그려도 수정을 하지 못하니까. 말인즉슨 연재 속도를 위해 택한 수채화가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다른 웹툰 작가와는 차별화된 매력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이 작가의 나름대로의 철학도 작품을 즐길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데, 자신이 편식을 하는 사람이기에 편식을 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한다거나 사소하고 일상적인 요소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아는 시선은 힐링을 안겨줬다. 이는 그림에서도 반영되는 부분으로, 평생을 서울에서 산 내가 간과했던 서울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는 이 작가의 시선을 보노라면 나 혼자 세상을 칙칙하게 사는 것 같아 왠지 초라해지기까지 했다. 위트 있는 대사를 쉴 틈 없이 치는 캐릭터를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도 같다. 

 주인공 희수의 나이가 지금의 나와 엇비슷한데 지금 그의 처지가, 데뷔 영화를 촬영하기 전의 그의 모습은 현재 내 처지와 닮은 데가 있어 씁쓸하게도 공감이 됐다. 이 작품을 처음 접한 20대 초반엔 남의 일이라 읽었는데... 다만 신기한 건 그때도 희수처럼 조금 반사회적이라고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려도 난 내 소신껏 살고 골목길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자고 막연히 그를 롤 모델로 삼았던 것 같은데 정말 희수와 비슷하다면 비슷한 길을 걷고 있어서 얼떨떨한 기분도 든다. 물론 난 희수처럼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이 생각은 든다. 내가 롤 모델을 잘못 삼진 않았구나. 


 희수가 걸었던 길을 내가 온전히 따라 걷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방향 설정이나 그의 가치관을 어느 정도 동의하고 참고하고자 했던 20대 초반의 내 모습이 작중에서 희수의 성공을 통해 위로 받은 것 같아서 오랜만에 읽은 보람이 있게 기분 좋게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난 희수처럼 인생에 광명이 오려면 더 걸릴 듯하지만 그래도 적잖이 위로가 됐다. 삶은 역시나 다양하고 아름답구나. 모든 길과 풍경이 다 다른 것처럼. 추상적인 말이지만 <길에서 만나다>를 읽다 보면 이 말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첫사랑을 이루지 못했다고 평생 사랑하지 않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첫 번째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평생 꿈꾸지 않고 살아가는 것 역시 바보 같은 짓이다. 지금은 누구도 사랑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더는 꿈꾸지 않겠다고, 다시 사랑은 없다고 마음을 닫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거나 복수가 되지 않는다. 마음속에 솜털만큼의 희망이 남아 있다면, 아주 어둡고 깊은 곳일지라도 0.1초의 사랑이 남아 있다면 두 번째 꿈을 꾸어도 좋다. - 2권 29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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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열쇠
A. J. 크로닌 지음, 이윤기 옮김 / 섬앤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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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거의 12년 전에 읽은 소설로 그 당시엔 독서를 거의 하지 않음에도 이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소설은 술술 읽어나갈 수 있었다. 워낙 가독성이 좋은 덕분도 있지만 작품의 주인공 치점 신부의 종교관이 내 종교관과 제법 일치하는 데가 많아 거부감 없이 읽었던 것 같다. 지난 12년 사이 내 종교관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기에 <천국의 열쇠>는 여전히 참된 종교 소설로 읽혔다. 

 최근 <침묵>을 읽던 중에 이 책이 떠올라 다시 읽게 됐는데, 여전히 700페이지는 무겁고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분량이지만, 또 그 분량이 전부 필요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침묵>을 읽은 다음에 읽으니 많은 부분에서 가슴이 벅찼던 작품이기도 했다. 모든 신부가 치점 신부처럼 유연한 사고를 갖고 있다면 성화 밟기에 따른 고뇌, 신의 침묵에 대한 딜레마 같은 건 고민거리 축에 들지도 못했을 테니까. 


작품의 제목인 '천국의 열쇠'는 치점의 말에 따르면 정해진 조건을 충족시켜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로 가도 서울만 가도 된다는 말처럼 다른 종교를 믿어도, 혹은 종교를 믿지 않더라도 저마다의 올곧은 가치관을 기준으로 선한 일을 행하기만 하면 쥐어지는 것이라 한다. 이는 반대로 몇 십 년이나 종교계에 몸을 담거나 그 조직 안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더라도, 가령 작중의 안셀름 밀리처럼 선행과는 다소 거리가 먼 인물이라면 천국의 열쇠 역시 얻을 수 없음을 역설한다. 

 역자인 이윤기 씨는 무신론자 의사 탈록이야말로 이 작품의 주제를 가장 잘 대변하는 인물이라며 작가는 이 인물의 임종을 지키는 치점 신부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안심시키는 장면을 통해 작품의 주제를 강조한 것이라 했다. 나는 이 장면도 명장면이지만 개인적으로 이 다음에 치점 신부와 베로니카 수녀의 대화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베로니카 수녀가 왜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 축복을 빌었느냐고 실로 꼴통스런 발언을 해대며 이전까지 시시콜콜한 이유들로 품어온 치점 신부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낸 그 장면 말이다. 그에 대해 치점 신부는 인간적이고 솔직하게 당신의 혐오감은 인정하는 바이지만 설령 탈록이 무신론자였을지언정 좋은 의사이자 사람이기에 신부인 자신으로선 그게 최선이라고 못을 박았다. 후에 베로니카는 반성 끝에 치점 신부에게 제대로 용서를 구하는 장면 역시 인상적이었다. 


 난 무신론자지만 주변에 독실한 기독교도 친구들은 많은데 그들의 얘길 들어보면 작금에 비해 현재의 기독교는 꽤 유연해졌다고 한다. 적어도 고전 소설에 나오는 종교적 논쟁은 무신론자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으로 기독교도들에게 철 지난 논쟁이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도 기독교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치가 떨리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믿은 자만 천국에 통과시켜주는 편가르기식 교리를 들 수 있는데, 치점 신부의 태도는 편을 가르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종교에 상당히 포용적인 태도를 보여 이래저래 호감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사람은 직업을 잘못 고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시종 기독교 교리와 그 교리를 신봉하는 꼴통 기독교도들과 충돌하는데, 이보다 가관인 것은 종교계도 엄연히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라 파벌도 있고 은연중에 차별도 있으며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도 있어 치점 신부의 운명은 나락으로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다가 이제 좀 사정이 나아지려고 하면 조직의 명령에 따라 격동의 소용돌이로 빠지고 만다는 게 읽는 입장에서 흥미로우면서도 참으로 씁쓸한 지점이었다. 종교는 신이 아닌 인간들이 만들었을 뿐이란 나의 냉소적인 의견이 마냥 헛소리가 아니란 걸 이런 식으로 확인하는 건 나조차도 달갑지 않은 일이다. 


 치점 신부가 중국으로 선교를 가는 것도 말이 좋아 선교지 사실상 완전히 유배나 다름없는데 적어도 표면적으론 치점 신부를 비롯한 중국에 있는 선교사들 대부분이 아무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 것도 좀 흥미로웠고 그 안에서 각기 다른 국적의 수녀들이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서로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대립하는 건 우스웠고 종래엔 치점 신부가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왔더니 다른 신부가 기껏 그에게 한다는 소리가 '중국에서 30년 넘게 모은 신자 수가 다른 신부가 5년 동안 모은 신자 수보다 적다'는 건 격분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내게 <천국의 열쇠>는 신부라는 운명을 받아들인 치점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로만 받아들이기엔 인간의 위선과 기독교도들의 허접한 민낯이 훨씬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지라 그 대척점에 있는 치점 신부는 그저 빛으로 여겨질 따름이었다. 물론 작가가 노린 부분이었겠지만 단언컨대 내겐 작가가 의도한 그 이상의 효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역자인 이윤기 씨가 미국 생활 중 유일하게 TV에서 틀기만 하면 끝까지 보게 되는 영화가 바로 <왕국의 열쇠>였다고 한다. 내 경우엔 TV에서 틀기만 하면 보게 되는 영화로 <다크 나이트>와 <바스터즈>를 들 수 있으려나? ...아무튼 <로마의 휴일>로 유명한 그레고리 펙이 치점 신부로 분했다는데 러닝타임이 130분이라고 한다. 700페이지 분량이 130분 안에 잘 다뤄졌을까 싶지만 얘길 들어보니 꽤 잘 만든 듯하다. 중국에 대한 묘사는 시대를 감안하면 많이 허접할 것 같지만 그래도 구할 수 있으면 무조건 볼 생각이다. 과연 그 영화를 보는 게 먼저일까, 아니면 크로닌의 다른 대표작 <성채>를 읽는 게 먼저일까? 어느 쪽이 됐든 기대되긴 마찬가지다. 

믿음이 돈독한 자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이 굳은 사람이 지옥에 가는 일은 결단코 없습니다. 불교도들, 회교도들, 도교의 신봉자들...... 심지어는 선교사를 잡아먹는 식인종들까지도...... 나름의 종교를 신실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참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것입니다. - 426~4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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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동사의 맛 - 이야기그림으로 배우고 익히는 우리말 움직씨
김영화 지음, 김정선 원작 / 유유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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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아서 비교할 순 없지만 그런대로, 마치 학습 만화를 대하는 기분으로 즐기면서 읽었다. 우리나라에 이토록 다양하고 비슷하면서도 미세하게 뜻이 다른 동사가 많은 줄은 모르진 않았지만 막상 이렇게 모아 놓으니까 장관이 따로 없었다. 처음엔 모든 동사의 의미를 다 구분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지만 회를 거듭하니 뭐가 뭔지 머리가 복잡했는데... 대놓고 학습 만화가 아닌 이야기의 흐름에 따른 주인공의 사유에 집중하고 그걸 또 쫓아가고 스스로 곱씹어 보는 맛이 있어 통상적인 학습 만화와는 결이 많이 달랐다. 원작 소설을 꼭 읽어보려고 한다. 

 배경이 되는 도서관은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종로도서관인데, 집 근처에 있어 종종 이용해 읽는 내내 반가웠다. 종로도서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서관으로 100년 이상 됐으며 - 몇 번 증축하긴 했다. - 그래서 그런가 장서량도 많다. 위치는 여느 도서관처럼 좀 구석진 곳에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후미지지 않아서 산과 고층 건물이 어우러진 서울다운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아주 적절한 도서관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종로도서관을 배경으로 삼았던 걸까? 주인공이 프라하로의 짧은 당일치기 여행을 꿈꾸는 장면이 나왔듯 - 무려 쿤데라의 <농담>과 함께 말이다! - 이 책은 말에 관한 책이자 곧 사유에 관한 책인 동시에 공간적인 여행의 묘미도 맛볼 수 있어서 이래저래 내 입꼬리를 들썩이게 했다. 그리고 이건 진짜 여담이지만, 어쩌면 높으신 분들의 사정으로 인해 종로도서관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뉴스를 봤기에 작중 그림 속 종로도서관의 풍경에 더욱 미소가 지어졌던 것도 같다. 


 약간 아쉬운 부분이라면 미세한 동사의 의미 차이를 그림으로 아주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고 사전에 실린 풀이 그대로 소개하고 넘어가는 연출이 많았다는 것이다. 시각적인 가독성이란 측면에서 만화만큼 우세한 장르가 없기에 원작 그대로 연출한 듯한 그림이 조금은 무성의하게 느껴졌다. 결국 원작을 읽어봐야 알 일이지만, 또 작품의 분위기가 취향에 맞아 그리 거슬리는 단점은 아니었지만, 학습 만화로서의 정체성이 어느 정도 뚜렷한 만큼 더 신경 쓰면 어땠을까 싶다. 작중 소개되는 동사들의 의미 차이가 미세하니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 아쉬움이었다. 뒤로 갈수록 난이도가 올라갔으니까 말이다. 

뒤쳐지지 않고 제대로 서야만 뒤처지지 않겠지.

하지만 어떨 땐 그냥 뒤쳐진 채로 배를 드러내 놓고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다. - 뒤처지다/뒤쳐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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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돌이 합본판
이토 준지 지음 / 시공사(만화)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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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이토 준지의 장편은 처음 접해봤다. 단편은 기괴한 게 다였는데 장편으로 접하니 아이디어도 기발하고 결말은 여운이 있어서 왜 사람들이 이토 준지에 열광하고 <소용돌이>를 대표작으로 꼽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작품이 제일 재밌으면 곤란한데 아무튼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다. 당장은 <인간 실격>이 제일 끌린다. 다자이 오사무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소용돌이를 컨셉으로 한 다양한 저주와 각각의 저주들의 끔찍하고 엽기적인 모습을 충분히 재현해낸 그림체가 가히 독보적인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달팽이 인간과 산부인과에서의 에피소드가 전부 인상적이었는데 뻔히 예상이 가는 전개임에도 - 결말은 제외 - 또 모든 장면이 역겨움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 중독적인 구석도 있었다. 난 호러라고 하면 무논리적인 데다가 자극에만 충실한 성향 때문에 폄하했는데, 이 작품이라고 내 편견을 깨뜨리지 않았지만 그 대신 내 편견을 과하게 자극하지 않아 덤덤하게 읽혔다. 이른바 무리수가 없는 공포랄까. 작가가 시각적인 잔인함으로만 점철된 공포가 아닌 분위기, 인간성의 타락 등 깊이가 있는 공포도 그려냈기에 마냥 불쾌하게 다가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결국 소용돌이의 저주의 정체는 완벽히 밝혀지지 않았고 또 완전히 묻지마 범죄 수준의 재앙들도 답답하기 그지없었지만 광기와 이성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볼 만해 그 리액션만으로도 충분히 읽는 맛이 있던 작품이었다. 소용돌이처럼 돌아버릴 것 같은 상황이 끊임 없이 휘몰아침에도 제정신을 유지하는 주인공 - 표지의 여자 - 의 멘탈은 실로 불가사의할 정도였는데 거의 코난과 김전일에 견줄 만해 이 캐릭터만은 끝내 생존할 수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믿으며 읽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건 근거 없는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반전이란 주인공의 기대가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을 가리킨다고 하던가. 이 작품의 경우엔 주인공이 아닌 독자인 나의 기대가 무너진다는 점에서 반전이 성립할 듯하다. 이런 결말은 여운이 있으면서 한편으론 안타까웠는데, 이 결말을 피할 기회가 작중 초반부엔 분명 있었기에 모든 기회를 놓친 주인공이 답답했다. 한편으론 이토 준지는 공포란 극복이 불가능한 재앙으로 여긴 듯한데 이토록 긴 시간 동안 생존한 주인공과 일행에게 똑같은 논리를 적용시키는 게 참 비정하면서도 공평하단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이 살아남으면 호러가 아니다. 생각해보니 작가의 다른 단편 대부분도 주인공은 생존과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로도 2차 창작됐다는데 그 작품들은 필요 이상으로 자극에 충실할 듯해 보지 않을 생각이다. 만화만의 적절한 공포만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포일 듯하다. 처음에 말했듯 작가의 다른 작품들, 가급적 장편 위주로 읽어볼 생각이다. <인간 실격>, <토미에> 같은 작품들. 또 어떤 기괴함을 안겨줄지 상당히 기대된다. 일단은 <인간 실격>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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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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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예전엔 특유의 암울한 문체에 질려 읽다 포기한 책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전보다 견문이 넓어진 덕분인지, 아니면 이 작품의 주인공 요조와 공감대가 생긴 것인지 삼십대를 목전에 둔 이 시점에 읽으니 전에 없이 술술 읽혔다.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인 이야기이자 실제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의 정신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라 언젠기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결국 성공하게 돼 뿌듯하기 그지없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민음사가 만든 다자이 오사무 영상을 봤는데 그 영상에서 '<호밀 밭의 파수꾼>, <데미안>과 함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서 판매량 top 5 안에 드는 작품'이라고 해 아무래도 관심이 갔다. 그리고 우연히 그날 독립 서점에 들렀는데, 그 서점에 이 작품이 놓인 걸 보고 충동적으로 구매에 이르렀다. 난 책을 가나다 순에 맞춰 매우 계획적으로 구매하는 만큼 이와 같은 충동적인 구매는 내게 매우 낯선 일이었다. 책을 다 읽으니 낯선 일도 해보고 볼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종종 충동적으로 책을 구매해봐야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TJtXyhcbpBE&list=PL65eoJV7XP3dn-u3A61z7oj8NTSE6VUdi&index=27

 
 이 영상이다. 관심이 있는 분은 보시길. 



 호불호가 꽤 갈릴 내용의 작품이지만 출간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읽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영상에선 인간의 나약함을 토대로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라 해석하던데 나도 그 해석에 공감한다. 언젠가 방송에서 김영하 작가가 문학은 '나 혼자만 이상한 게 아니구나' 하고 위로를 해줄 때 위력을 발휘한다며 문학의 역할과 매력을 역설한 바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봤을 때 <인간 실격>은 제목이나 소재가 파격적이라 그렇지 진실로 '위로'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말도 마찬가지로 영상에서도 나오는 말이지만, 다른 걸 떠나서 이 책의 판매량은 곧 주인공 요조의 고민과 좌절이 결코 요조처럼 소수의 몇몇 나약한 심성의 소유자만의 문제가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자살은 당사자가 연약한 인간이란 반증이라고 경멸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인간 실격>은 그 경멸을 오히려 경멸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은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녹아들 수 없고 겉돌다 도태되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요조의 방황, 그리고 요조가 어쩌다 스스로에게 '인간 실격'이라 선고를 내리는지 그 과정을 쫓는 이 작품은 굳이 패전 직후의 일본 사회라는 배경을 연상하지 않아도 퍽 인상적으로 읽혔다. 개인적으로 공감했던 부분은 친구인 호리키에 대한 요조의 이중적인 감정과 호리키가 자신에게 꼰대적인 발언을 할 때 반발하면서도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속으로만 삭히는 모습이었다. 특히 후자는 요조가 얼마나 유약한지 엿볼 수 있는 묘사임과 동시에 독자에게 '나만 저러는 게 아니구나' 라며 짙은 공감대를 선사하므로.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이자 지인들에게 가장 호평을 들었던 구절은 바로 '그건 세상이 용납지 않아.' 라고 한 호리키의 말에 요조가 속으로 '세상이 아니라 네가 용납지 않는 거겠지.' 라고 답한 부분이다. 세상이란 잣대 뒤에 숨어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일은 내가 당하거나 반대로 내가 남들에게 하는 경우가 너무 비일비재한 나머지 그 행위의 졸렬함이 잊히는 것 같다. 속으로 말하긴 했어도 정말 촌철살인의 지적이 아닐 수 없는데, 덕분에 요조의 지나치다고도 싶은 방황의 나날, 여성 편력 등이 완벽하게 와 닿지 않음에도 어딘지 믿을 수 있는 화자로 여겨져 요조의 섬세하고 복잡한 심리를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문장은 책의 92페이지에, 결말까지 40페이지 남짓 남은 지점에서 나오기에 내가 이 문장을 두고 <인간 실격>의 암울한 문체를 견딜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발언일지도 모르겠다. <인간 실격>의 암울한 문체는 첫 장에서부터, 정확히는 첫 번째 수기의 첫 문장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서부터 작렬하기에 내가 위에서 한 말은 마치 '90페이지에 도달하고 나서야 비로소 보답을 받았다'는 고도의 비아냥 같다는 느낌도 든다. 말을 정정하자면, 내가 인상 깊었다는 저 구절은 하나의 예시일 뿐, 한없이 암울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저 정도 촌철살인의 발언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개인적인 호불호를 초월한 채 믿음직한 작품으로 내 안에 스며들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겠다. 여담이지만 음울한 작품이란 악명에 비해 가독성이 꽤 좋은 편인데 다자이 오사무가 비교적 행복했던 시절에 집필한 다른 작품들은 어떨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작품의 진짜 암울한 장면은 후반부에 요조가 인간 실격이란 진단을 스스로 내리고 마는 장면일 텐데, 타인이 내리는 진단은 반발만 살 뿐이지만 직접적으로 '실격'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스스로를 놓아버리는 것은 꽤 지독한 구석이 있었다. 사뭇 가벼운 어조로 '나 같은 놈은 죽어야 돼.' 하고 소리 내어 자책할 순 있어도 실격이라 말하는 것은 분명 도가 지나쳤다. 게다가 세상은 혀를 차긴 해도 정작 별 말 않는데 본인이 앞장 서서 완전히 모든 걸 포기하는 태도도 기이했다. 제아무리 본인이 자초한 비극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굴며 자책할 필요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극단적이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제대로 반면교사용 소설로 읽혔다는 뜻은 아니다. 자책의 정도와 스스로 실격을 선고하는 결론이 거부감이 드는 것이지 요조의 자책 요인 중엔 내 지금의 고민과 닮은 지점이 많아 도저히 책의 내용이 남의 일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이 나에게 실격을 선고하고자 서서히 벽을 좁히고 있는 듯한 답답함과 그걸 감지하면서도 크게 발버둥치지도 않은 지난날과 앞으로도 발버둥칠 여력이 좀처럼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이, 그리고 눈앞의 행복이나 쾌락에 취하려는 현재 모습에 대한 자괴감... 내가 어찌 요조에게 공감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반대로 요조가 내면은 비록 망가졌을지언정 표면상으론 어느 정도 주체성을 갖고 살아간 적도 있어서 본받아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때문에 그가 답은 이미 정해졌다는 듯 자신은 역시 인간 실격이었다고 하는 게 불만이란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그가 자신을 인간 실격이라 선고한 것이야말로 진짜 인간 실격이란 증거라는데 난 그 말이 잔인하긴 해도 일리 있는 말로 들렸다. 인간이냐 아니냐 합격인지 실격인지 여부를 세상이 내렸고 그 상황에 절망했다면 또 모를까,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이 자신은 인간 실격이라 주장하다가 진짜로 그 주장을 실천해버리는 것 같은 느낌도 들어 요조에 대한 공감이나 연민과는 별개로 최후의 순간엔 그와 거리가 생겼다. 

 어제 본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조조의 명언이 소개됐다. '내가 세상을 저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저버리게 두진 않겠다.'는 말인데 이 말은 삶을 대하는 조조의 주체성을 엿볼 수 있는 말로 해석된다. 반면 요조는 결과적으로 주체적인 삶과는 매우 거리가 멀면서도 그 주체적이지 못한 삶을 주체적으로 정하는 골때리는 행보를 보인다. 요조로 말할 것 같으면 '세상이 나를 저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세상을 저버린다.' 였으니. 그런 점에서 비참함과 비겁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내 인생은 조금씩 비참해지고 있는 건 자각이 되는데 거기에 더해 비겁해지고 있는 중인 건 아닐까? 나 역시 주체적으로 비참해지려는 비겁한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반문해보게 됐다. 


 그렇다 보니 내게 과연 요조에게 공감이니 거리감이 생겼다느니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게 됐다. 어쩌면 동족 혐오일는지도. 



 p.s 진짜 여담이지만 표지의 그림이 왠지 모르겠는데 작품의 내용이랑 너무 잘 어울린다. 에곤 쉴레의 자화상이라니... 정작 에곤 쉴레는 자기애가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는데 말이다. 

즉 저에게는 ‘인간이 목숨을 부지한다.‘‘라는 말의 의미가 그때껏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 불안 때문에 저는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 16p



인간의 삶에는 서로 속이면서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 26p



그건 세상이 용납하지 않아.

세상이 아니야. 네가 용납하지 않는 거겠지. - 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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