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3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자신이 착하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신이 진심으로 착하지 않다고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반문해보면 위험한 사람은 생각보다 꽤 많은 것 같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부터 그런 내용이 나온다. 오랜 시간동안 인권에 대해 공부해온 저자가 '결정 장애'란 말을 가볍게 말하고 다닌 것에 대해 누군가 지적한 일화가 나오는데 당시 그 지적을 받았던 저자는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론 그게 왜 나쁘며 나쁘다면 어떤 이유에서 나쁜 것이냐며 다소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고 말한다.

 책에선 우리가 평소에 차별이라고도 여기지 않았던 지점이 등장한다. 코미디언이 흑인 분장으로 웃기는 걸 시작으로 예맨 난민을 수용하길 가장 반대한 사람이 여성이란 것까지 가볍게 접할 수 있던 주제부터 깊은 주제까지 저자는 일관된 논리로 다뤄냈다. 대다수의 페미니즘 도서가 그렇듯 이 책도 모든 말이 구구절절 옳게 들리진 않지만 기본적으로 전제하는 저자의 사고 방식이 좋았다.


 아까 언급한 프롤로그로 예를 들어보겠다. 난 '결정 장애'라는 표현의 논란엔 미묘하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장애'라는 단어가 단순히 장애 유무를 논하는 팩트를 넘어, 어떤 형태로든 욕설의 뉘앙스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정도로 모욕적인 표현이라면 '장애'라는 단어는 완전히 비속어/욕설로 분류됐을 것이다. 하지만 장애인은 장애인이고 장애인이 아닌 사람은 비장애인이라고 칭하자는 사회의 흐름을 생각하면 오히려 '장애'는 예전에 비해 욕설의 느낌이 순화된 듯하다고 여겨졌다.

 그렇다고 '결정 장애'가 아예 문제가 없는 표현이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애매하다. 그래서 내가 평소 말하듯 섣불리 트집이라고 단정을 짓지 못하는 이유다. 더 순화시키거나 대체할 수 있을 만한 표현이 있다면 고민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장애'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어쩔 수 없는 부정적 어감은 아무래도 부정하기 힘드니까.


 책에는 수많은 좋은 구절들과 몇 번을 읽어도 아리송한 구절들이 많았지만 결론적으로 이 한 가지 요소 때문에 책의 모든 내용이 좋게 와 닿았다. 어떤 논란을 마주했을 때, 혹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쓰는 말이나 생각하곤 했던 논리에 혹시 결함이 있을지 생각하는 자세의 중요성을 이 책의 저자는 책을 쓰는 내내 전제로 깔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전제가 뒤로 갈수록 설명이 부족했던 - '1부에서 그렇게 얘기했으니 이 다음부터 어련히 알아서 이해하겠지' 하고 쓰는 느낌을 받았다. - 2부와 3부의 아쉬움을 메꿔줬다. 물론 압도적인 흡입력의 1부의 공도 빼놓을 수 없겠다. 사실상 1부만 보면 근래 읽은 페미니즘 도서 중 가장 뛰어났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개인적으로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란 말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 게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이 말을 특권을 가진 당사자가 호의는 베풀 용의가 있어도 당연하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엔 심리적 저항감이 심하다고 분석했는데 이게 꽤 그럴싸했다. 똑같은 말을 입장만 바꿔서 살펴보면 뉘앙스가 완전히 달라지는 걸 확실하게 인식시켰다고 할 수 있겠는데, 여기서 이 '입장만 바꿔서'라는 말도 심층적으로 살펴봐야 하는 말이지 않나 싶다. 역지사지만 잘 실천하면 세상 모든 갈등은 대번에 사라질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저자는 그렇게 일차원적인 해석을 내놓지 않는다.


 서로 반대되는 한두 가지의 입장만 바꿔선 택도 없으리란 걸 저자는 예맨 난민 이슈를 통해 효과적으로 설명했다. 성별이 됐든 인종이 됐든 성소수자가 됐든, 사회적 약자는 다른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 공감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예맨 난민을 수용하지 말자고 반대하는 사람 중에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많았다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서 저자는 우리가 단지 하나의 정체성만 갖고 있는 게 아님을 역설하고 있다. 여성이라도 날 때부터 한국 국적인 사람은 난민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 성소수자여도 백인이라면 흑인보다 사회적 차별에 덜 시달릴 수 있다는 식으로. 이처럼 거의 완벽하게 사회적 강자에 속하는 사람이나 반대로 완벽하게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사람은 극히 적듯 우리 각자에겐 복합적인 요소가 얽히고 설켜 있어 그토록 타인의 문제에 공감대를 갖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항상 논란이 불거지고 사람들끼리 반목하는 것에 대해 나는 늘 한쪽만을 탓하며 얼른 이 갈등의 골이 사라지길 바라곤 했다. 그런데 요즘엔 꼭 이 책 덕분이라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 완벽이란 개념은 존재하기 쉽지 않다는 걸 체감하면서 페미니즘이 항상 논쟁거리인 게 지극히 당연하고 논쟁이 있다는 것 자체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상황이라고 인식하게 됐다. 만약 페미니스트가 하는 말은 모두 옳다고 신봉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면 또 그만큼 무의식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논쟁이 생기는 상황과 그 논쟁에 의해 충분한 토론과 사유를 거쳐 합의점을 찾아내는 것이 아닐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내가 어느 순간부터 페미니즘 책은 은근히 하는 말이 거기서 거기라고 여겼으면서도 계속 찾아 읽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나는 충분히 페미니스트라며 페미니즘 책을 그만 읽는다면 그 순간부터 그 어떤 논쟁도 날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그랬다간 타성에 젖길 기다리는 처지가 되고 말겠지.

우리는 아직 차별을 부정할 때가 아니라 더 발견해야 할 때다. - 38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렌지 6
타카노 이치고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3






 스포일러 있음


 최근에 시간 여행물을 접하면서 내가 시간 여행이란 설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정확히는 시간 여행자가 과거로 가면서 발생하는 모순, 타임 패러독스 때문인 것 같은데 이 작품은 아예 타임 패러독스를 배제한 평행 우주를 다뤄서 그나마 좀 괜찮게 읽은 것 같다. 고등학생 시절의 친구를 살리기 위해 과거의 자신한테 편지를 보낸다, 그런데 과거 시점에서 친구가 살아봤자 그건 평행 우주에서의 일이므로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현재에 과거의 친구가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다. 이런 모순된 상황에서 이 작품은 그럼에도 과거로 편지를 보낼 것인지 아니면 어차피 어떻게 과거가 바뀔지도 모르는데 편지 같은 건 보내지 않을 것인지 묻고 있다.

 이 작품은 평행 우주 속 친구라도 구해겠다고 대답한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친구를 구하기 위한 다른 친구들의 우정이 정말 눈물겨웠는데 순정 만화 특유의 감성으로 넘치는 듯 부족함이 없게 진심 어린 감정을 잘 전달해냈다. 개중에는 원래는 죽었어야 할 친구가 살게 되면서 자기 운명이 크게 바뀌게 될 - 아무리 그래도 슬하에 자식도 있는데 저렇게 헌신적이라니... 스와가 실로 성인으로 보였다. - 친구도 있어서 이들의 우정이 더욱 돋보였다. 과연 이렇게까지 타인을 살리고자 할 의지를 갖출 수 있을까? 작품에선 친구들의 편지가 어떻게 과거로 갔는지 그 과학적 매커니즘을 정확히 설명하지 않지만, 대신 친구들의 마음이 진심이었기에 그들의 의지가 결실을 맺었음을 암시하며 진실된 마음이란 무엇인지 어필하고 있다.


 처음엔 이 작품의 답답한 감정선이 싫었다. 주인공 나호는 너무 자신감이 없고 카케루는 어떻게 손대기 힘들 정도로 유리 멘탈이다. 스와를 비롯한 주변 친구들의 캐릭터가 개성적이고 매력적이라서 중화가 됐지, 나호와 카케루만으론 이 작품을 완독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결국엔 제3자에 불과해서 그렇게 느낀 건지 독자로선 둘의 마음이 엇갈리는 장면이나 자책하는 장면이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또 개인 취향이지만 순정 만화 특유의 오글거리는 묘사도 거슬릴 때가 많아 짧지만 이래저래 완독에 있어 난관이 끊이지 않았던 작품이다.

 그래도 다르게 생각하면 그토록 답답한 전개가 무척 현실적인 연출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미래의 자신으로부터 편지가 왔고 상황에 따른 조언이 적혔던들 그 말을 그대로 따르긴 쉽지 않은 일이다. 정말 미래의 나 자신한테 온 편지인지도 의심스럽지만 과연 이 편지대로 움직였다 해도 좋은 결과가 나타날지 확신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매우 답답하게도 왜 그 조언을 따라야 하는지 미래의 나호는 정확하게 기술하지 않아 과거의 나호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만드는데, 이거야 전개를 위한 시적 허용이라 하더라도 과거의 나호가 너무 행동력이 떨어져 답답한 마음이 가실 길이 없었다. 도대체 답답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는데;; 한편으론 아까도 말했듯 그렇게 답답한 게 현실적이었던 것 같아 지금에 와선 납득이 갔다. 솔직히 그래서 이야기가 더 재밌게 전개되기도 했고.


 대체로 시간 여행물에선 '내가 나로 존재하는 이상 운명은 거스를 수 없다'는 전제를 까는 것 같다. 그 말 그대로 작품에서 나호의 원래부터 소심했던 성격 때문에 기껏 미래의 자신이 보낸 편지를 수포로 만드는 선택이 질리지도 않고 반복된다. 이 장면 때문에 정말 내가 나로 존재하는 이상 미래를 바꾸기가 정말 힘들단 게 피부로 와 닿았다. 카케루도 마찬가지다. 얘는 아무리 주변에서 노력해도 어떻게든 자괴감에 빠진다. 어떻게 보면 자살 충동이 있는 사람들은 정말 대하기가 쉽지 않음을 한숨 나오도록 잘 그렸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보다 나는 타인이든 미래의 나 자신이든 간에 누군가의 도움 없이 문제를 극복하기가, 이 작품으로 말할 것 같으면 미래를 바꾸기가 어려움을 그린 것이라 봤다.

 난 원래 내 문제를 남에게 잘 말하지 않는 편이었다. 다른 사람도 자기만의 문제로 벅찬데 거기서 내가 내 문제를 들어달라고 하는 게 찡찡대는 것 같아서 가급적 입을 닫는 편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도움이 아니더라도 내 문제에 대해 누군가가 공감해주거나 몇 마디 해줬을 때의 효과를 깨닫고 나선 내가 그 전엔 정말 내 안에 갇혀 살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작품도 비슷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또 그와 반대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면서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너무나 진실된 마음으로 잘 전달하는 작품이라 느껴졌다.


 <오렌지>는 애니메이션, 소설, 실사 영화로도 제작됐는데 그만큼 인기를 얻은 데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 번째로 현재가 바뀌지 않더라도 과거라도 바꾸겠다는 친구들의 우정을 그린 것, 두 번째는 자살한 친구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서로 도움을 주며 도움을 받는 관계임을 잘 전달한 것이겠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고 더군다나 진실 되게 그리기가 난해한 것도 있는데 모두 성공적이고 효과적으로 전달한 작가가 대단했다. 원래 순정 만화에 호감이 있지 않았고 솔직히 이 작품을 읽는 동안에도, 심지어 지금도 호감이 있는 상태는 아니지만, 이렇게 순정 만화를 불호하는 나 같은 독자도 매료시킨 걸 보면 확실히 장르의 경계를 뛰어넘는 작품이라고 여겨졌다.

 작가의 다른 작품을 보고 그런 생각을 더욱 확신하게 됐다. 매권 말미에 다른 단편 만화도 수록됐는데 그 작품은 뭘 어떻게 말하기가 곤혹스러울 정도로 산만하고 정신없어서 그냥 <오렌지>가 엄청 뛰어난 작품이란 결론이 나오게 됐다. 그 작품만 수록되지 않았어도 다른 순전 만화도 찾아봤을 텐데... 일단은 그냥 <오렌지>를 완독한 것으로 만족하고 넘어가야 할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ll You Need is Kill 2 - 완결
오바타 타케시 지음, 사쿠라자카 히로시 원작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7






 스포일러 있음


 시간이 반복되는 타임 루프 소재로 한 작품 중 가장 독창적인 작품이다. 죽어도 전장에 출격하기 전날로 돌아가 영원히 전투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이 자기 운명을 뛰어넘고자 최강의 전사로 거듭난다. 그 과정에서 정신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지는데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한 사람을 만나면서 겨우 숨통이 트이나 했더니 결국 끝없이 반복되는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유일한 사람을 죽여야 한다... 쇼킹한 서두부터 아주 비정한 결말까지 군더더기라고는 없는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다. 넓게 보면 SF, 세부적으로 보면 복선과 반전의 미학이 돋보이는 추리물로도 볼 수 있는데 어떻게 보면 일본 라이트 노벨계 최강의 작품이라고도 생각한다.

 안 그래도 깔끔했던 원작의 내용은 만화로 옮겨지면서 더욱 깔끔한 형태로 탈바꿈했다. 소설을 읽은지 꽤 됐지만 그런 가물가물한 기억으로도 생략된 부분들이 얼핏 보이긴 했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생략된 요소들이 그렇게 중요한 요소들이 아니라서 읽을 때 하나도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오바타 타케시의 작화 덕에 눈이 즐거워 페이지 넘기기에 바빠 자잘한 건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오바타 타케시의 그림을 <고스트 바둑왕>, <데스노트>, <바쿠만>에서 접한 나는 그 작가가 정적인 그림만 잘 그리는 줄 알았는데 이 작품을 보니 장르에 맞춰 그림체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천재라는 생각밖엔 안 들었다. 아쉽게도 2권으로 끝나는 내용이라 그림이 화제가 덜 된 모양인데, 이 작품도 <원펀맨>처럼 장편이었다면 무라타 유스케의 그림처럼 엄청난 화제를 몰고 다니지 않았을까 싶다.


 화끈한 그림만큼이나 시원시원한 전개, 개성 있는 캐릭터들, 그리고 끝없이 반복되는 시간에 대한 철학적 통찰까지도 모든 요소가 부족함 없이 잘 맞물렸다. 일견 호불호가 갈릴 법한 비정한 결말도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는데, 연출의 덕택인지 무리수로 여겨지지 않았다. 기껏 자기 처지와 똑 닮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래봤자 마음을 나눈 건 고작 하루 - 그것도 리타 입장에선 초면이나 다름 없던 상태였다. - 뿐이었던 것, 그 사람을 죽여야 미래로 갈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고생이 물거품이 되고 마는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주인공의 고뇌와 선택이 개연성 있게 그려졌다. 아무리 같은 시간이 반복되면 익숙해진다지만 그만큼 정신도 붕괴되던 주인공의 모습, 루프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 묘사되지 않았다면 주인공이 리타를 전력으로 상대하기로 마음 먹는 선택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좋았던 부분은 정말 많지만 - 제목조차 마음에 쏙 든다. 정말 독특하지 않은가. - 그 중에 마냥 새드 엔딩으로 느껴지지 않는 결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두 캐릭터가 하루 동안 찰나의 교감을 나눈 장면도, 루프를 벗어난 주인공의 허무한 뒷모습도 마찬가지다. 꼭 그런 결말이어야만 했냐고 묻는 사람도 있던데, 이건 철저히 호불호 문제인 것 같아 꼭 이런 식으로 결말이 나야 할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하겠다. 실제로 이 작품을 원작으로 둔 할리우드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는 정반대 스타일의 결말이었지만 나쁘지 않았으니까. 아무래도 어떤 형태의 결말이든 개연성이나 그에 합당한 감정 묘사만 있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니면 그냥 취향 문제일 수도 있고.


 이 책을 읽고 영화도 다시 보고 싶어졌다. 내용에 차이가 없다면 시간 차를 두고 봤겠지만 소재만 같지 별개의 작품으로 봐도 무방한 터라 바로 이어서 봤다. 영화 이야기는 영화 포스팅에서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나더 몬스터 - 또 하나의 몬스터
우라사와 나오키 외 지음, 조미선 옮김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7.9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의 후일담을 그린 소설로 어렵사리 구했는데 - 다 알라딘 중고서점 덕분이다. - 나름의 값어치는 한 책이다. 그런데 후일담이라기엔 <몬스터>의 내용을 너무 복습하거나 혹은 작품 속에 나오지 않은 텐마의 과거를 비롯해 여러 캐릭터의 디테일한 에피소드를 마저 풀어낸다는 느낌이 강해서 약간 당혹스러웠다. 일부러 <몬스터>를 읽은 다음 시간 차를 둔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그 작품을 접하고 바로 이 책을 읽을 걸 그랬다. 작년에 읽은 작품임에도 기억이 가물가물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이 생각보다 덜 반가웠다. 뭐, 기억이 가물가물한 건 그만큼 원작의 내용이 워낙 방대하다는 반증이겠지만...

 제목대로 요한을 연상시키는 또 하나의 괴물을 쫓는 논픽션 형식의 소설로 특유의 사실감 넘치는 전개가 돋보였다. 실제 우리네 세상에서 벌어진 일인 것처럼 사진이나 신문 기사도 첨부하는 등 제법 공을 들여서 처음엔 진짜로 벌어진 사건인 줄 알았다. <몬스터>가 정말 현실 세계에서 일어날 법한 사건을 다뤘기에 이런 분위기를 연출하기가 유독 용이했던 것 같다. 하여튼 기자가 사람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전개가 거듭되다 보니 처음엔 흥미롭다가도 점점 질리게 됐는데, 실제 기자라면 이렇게 글을 쓰리란 건 인정하지만 소설로는 가독성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읽는 내내 떠올랐다. 처음엔 진짜 사건인 척 묘사하는 저자의 짓궂은 장난도 가면 갈수록 별 감흥이 없게 됐는데 이야기는 <몬스터>의 거의 대부분의 요소에 빚을 지고 있어서 집중력을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몬스터>의 내용, 특히 체코에서 벌어지는 2부의 내용이 특히 가물가물해서 그에 해당하는 소설의 내용도 쫓아가기 힘들었다. 정확히 어느 지점부터인지는 헷갈리지만 소설 본편의 사건, 기자가 요한 사건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그 사건과 <몬스터>의 사건과 겹치는 대목이 드러난 후부터 소설은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된다. 이미 집중력이 바닥이 난 시점에서 본편의 내용을 꺼내기엔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래도 그 뒤엔 결말이 금방 나와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결말은 뭐, 예상대로 흘러갔고 그 결말의 내용조차 <몬스터>의 내용을 답습하고 있어서 특별히 신선하다거나 충격적이거나 하진 않았다.

 전체적으로 <몬스터>를 의식하지 않고 읽기엔 지루한 구석이 많아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었다. 그래도 자체적인 만듦새는 그럴싸하고 또 오히려 <몬스터>를 의식하고도 소설적 이야기에 걸맞은 스타일을 연출해내서 나중에 한 번은 더 읽지 않을까 싶은데, 그때는 정말로 <몬스터>를 읽은 직후에 읽어야지 하고 생각 중이다. 그렇지 않았다간 그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을 테니...

적어도 사람을 죽이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인간을 총칭해서 ‘몬스터‘ 라고 부르는 동안은, 우리는 살인이라고 하는 행위를 없앨 수가 없소. 그들은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인정하는 것이오. 괴물로 부르지 말고 우리와 똑같이 이름을 가진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요한이 무엇으로 존재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요. - 149p




실제 눈앞에 악마가 나타난다면 영혼을 헐값에 팔아서라도 사라진 창작력을 사버릴 것이다. ...다만 그 후의 작품에 자신의 의사는 나타나지 않고 대신 악마의 의사만 나타나게 되겠지만. - 344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울 속은 일요일
슈노 마사유키 지음, 박춘상 옮김 / 스핑크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4







 본작은 물론 같은 작가의 <가위남>에 대한 스포일러도 있음



 이 작가의 작품은 <가위남> 이후 상당히 오랜만에 접했다. 아마 10년도 넘었을 것이다. 10년이 넘게 작가의 다른 작품이 출간되지 않아서, 이 작가도 흔히 말하듯 원 히트 원더인 걸까 하고 생각했는데 이번 작품을 읽으니 괜한 오해였구나 싶었다. 처음엔 난해하고 산만한 전개 때문에 가독성도 낮고 흥미도 갈수록 떨어졌는데 마지막 한 방이 강렬해서 인상이 확 바뀌었다. 반전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반전을 연출하는 방식이 무척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가위남>과 이 작품을 둘 다 읽은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반전의 내용이 판박이다. 그 작품에선 연쇄살인범이 여자고 이 작품에선 탐정이 여자다. 그런데 반전의 포인트는 각각 달랐다. 전자는 단순히 여자를 노린 연쇄살인범은 주로 남자일 거란 선입견을 건드렸을 뿐이라면 후자의 경우엔 명탐정 같이 지적인 인물은 당연히 남자일 것이라는, 좀 더 본질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만한 선입견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여성을 비롯해 명탐정과 같은 존재에 대한 뿌리 깊고 그릇된 선입견, 혹은 로망을 철저히 비꼬는데 이 방식이 굉장히 교묘해서 낚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대놓고 남자 이름을 써서 어쩔 수 없이 속았던 부분도 있었지만...


 명탐정을 소재로 한 메타 소설은 마야 유타카의 소설을 통해 특히 많이 접한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마야 유타카보단 슈노 마사유키의 메타 소설이 훨씬 마음에 든다. 마야 유타카의 작품은 다 읽고 나면 괜히 읽었단 생각이 들 정도로 기분이 나쁜데 - <애꾸눈 소녀>, <귀족 탐정>, <메르카토르는 이렇게 말했다>... 많이도 읽었다. - 슈노 마사유키의 이 작품은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미즈키 유키가 멋있는 캐릭터인데 좋았고 그녀에게 자기 로망을 덧칠할 뿐인 아유이를 철저히 비꼬는 결말도 산뜻하게 읽혔다.

 미즈키와 아유이의 관계를 탐정과 기록자의 관계에서 스타와 팬의 관계로, 아니면 작중의 불어와 불어를 너무 좋아하는 즈이몬 류시로의 관계로 치환해보면 작품의 주제의식은 더욱 선명해진다. 오히려 이 주제의식과 후반부의 반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일부러 '범패장 사건'을 난해하게 꾸민 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이야기 본편과 극중극 모두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 사뭇 날카로웠다. 당장 나만 해도 남자로서 은연중에 여자에게 기대하는 로망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겠고 노르웨이를 비롯한 북유럽 문화를 선망하는 것, 일본 추리소설에 대한 애정 등이 가끔 지나칠 때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 보니 내 모습도 작중에서 특정 분야에 열과 성을 다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에 제법 찔리기도 했다.


 로망이 적당하면 괜찮아도 도가 지나치면 당하는 입장에선 부담스럽고 불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점을 '알고 보니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더라' 하는 기본적인 서술 트릭을 통해, 그리고 아유이라는 어딘지 밥맛 떨어지는 캐릭터를 통해 구체화시킨 게 인상적이었다. 똑같은 서술 트릭이라도 다루는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상을 줄 수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 정도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서술 트릭 작품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못지않았는데, 간만에 일본 추리소설에 입문할 때의 신선함을 느껴서 반갑기 그지없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가위남>의 반전이 정말 완벽할 정도로 치밀해서 비슷한 수준을 기대하고 이 작품을 읽으면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울 속의 일요일>의 서술 트릭은 공정성이 결여된 편이고 극중극 '범패장 사건'도 몰입도가 떨어져서 - 아무리 그래도 불어를 트릭으로 다룬 건 너무 황당하고 난해했다. 애당초 그런 난해한 컨셉의 소설이 목적이었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 이래저래 <가위남>보다 밀도가 낮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반전의 내용이 워낙 좋아 자꾸 머릿속에 아른거려서 한 번 더 읽고 싶고 다른 사람한테 속는 셈치고 읽어보라고 추천하고도 싶었다. 물론 둘 중 하나를 꼽으라면 <가위남>을 먼저 읽으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이 작품도 만만찮았다고 본다.


 이 작품 뒤에 수록된 '밀/실'은 처음으로 서술 트릭이 없는 슈노 마사유키의 중편 소설이다. <거울 속은 일요일>과 엇비슷한 전개 방식을 갖고 있는데, 추리소설의 트릭을 현실에 적용시키는 범인이 등장하는 건 나름 흥미롭긴 했지만 그래봤자 외전에 가까운 내용이라 이전 수록작에 비할 만한 작품은 아니었다. 허당미 넘치는 이스루기 기사쿠의 모습이나 두 번째 범인의 정체가 묘하게 귀여운 건 재밌었지만...

 그나저나 이쯤 되니 이스루기 기사쿠가 등장하는 다른 작품도 궁금해졌다. 그런데 그 작품들이 과연 국내에 소개될 수 있을지... 출판사의 규모가 작아서 그런지, 아니면 일본 추리소설 자체가 우리나라 출판계에서 레드오션이라 그런지 홍보가 잘 안 된 모양인데 - 당장 나도 지금 스포일러 한가득인 포스팅을 쓰니 홍보에 도움이 되지 못할 듯하다;; - 그래도 좋은 기회를 만나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몇 편 더 소개됐으면 좋겠다. 작가의 작품 세계가 무척 방대한 듯해 한두 편만 소개되기엔 너무 아깝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