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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은 일요일
슈노 마사유키 지음, 박춘상 옮김 / 스핑크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4
본작은 물론 같은 작가의 <가위남>에 대한 스포일러도 있음
이 작가의 작품은 <가위남> 이후 상당히 오랜만에 접했다. 아마 10년도 넘었을 것이다. 10년이 넘게 작가의 다른 작품이 출간되지 않아서, 이 작가도 흔히 말하듯 원 히트 원더인 걸까 하고 생각했는데 이번 작품을 읽으니 괜한 오해였구나 싶었다. 처음엔 난해하고 산만한 전개 때문에 가독성도 낮고 흥미도 갈수록 떨어졌는데 마지막 한 방이 강렬해서 인상이 확 바뀌었다. 반전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반전을 연출하는 방식이 무척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가위남>과 이 작품을 둘 다 읽은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반전의 내용이 판박이다. 그 작품에선 연쇄살인범이 여자고 이 작품에선 탐정이 여자다. 그런데 반전의 포인트는 각각 달랐다. 전자는 단순히 여자를 노린 연쇄살인범은 주로 남자일 거란 선입견을 건드렸을 뿐이라면 후자의 경우엔 명탐정 같이 지적인 인물은 당연히 남자일 것이라는, 좀 더 본질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만한 선입견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여성을 비롯해 명탐정과 같은 존재에 대한 뿌리 깊고 그릇된 선입견, 혹은 로망을 철저히 비꼬는데 이 방식이 굉장히 교묘해서 낚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대놓고 남자 이름을 써서 어쩔 수 없이 속았던 부분도 있었지만...
명탐정을 소재로 한 메타 소설은 마야 유타카의 소설을 통해 특히 많이 접한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마야 유타카보단 슈노 마사유키의 메타 소설이 훨씬 마음에 든다. 마야 유타카의 작품은 다 읽고 나면 괜히 읽었단 생각이 들 정도로 기분이 나쁜데 - <애꾸눈 소녀>, <귀족 탐정>, <메르카토르는 이렇게 말했다>... 많이도 읽었다. - 슈노 마사유키의 이 작품은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미즈키 유키가 멋있는 캐릭터인데 좋았고 그녀에게 자기 로망을 덧칠할 뿐인 아유이를 철저히 비꼬는 결말도 산뜻하게 읽혔다.
미즈키와 아유이의 관계를 탐정과 기록자의 관계에서 스타와 팬의 관계로, 아니면 작중의 불어와 불어를 너무 좋아하는 즈이몬 류시로의 관계로 치환해보면 작품의 주제의식은 더욱 선명해진다. 오히려 이 주제의식과 후반부의 반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일부러 '범패장 사건'을 난해하게 꾸민 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이야기 본편과 극중극 모두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 사뭇 날카로웠다. 당장 나만 해도 남자로서 은연중에 여자에게 기대하는 로망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겠고 노르웨이를 비롯한 북유럽 문화를 선망하는 것, 일본 추리소설에 대한 애정 등이 가끔 지나칠 때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 보니 내 모습도 작중에서 특정 분야에 열과 성을 다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에 제법 찔리기도 했다.
로망이 적당하면 괜찮아도 도가 지나치면 당하는 입장에선 부담스럽고 불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점을 '알고 보니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더라' 하는 기본적인 서술 트릭을 통해, 그리고 아유이라는 어딘지 밥맛 떨어지는 캐릭터를 통해 구체화시킨 게 인상적이었다. 똑같은 서술 트릭이라도 다루는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상을 줄 수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 정도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서술 트릭 작품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못지않았는데, 간만에 일본 추리소설에 입문할 때의 신선함을 느껴서 반갑기 그지없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가위남>의 반전이 정말 완벽할 정도로 치밀해서 비슷한 수준을 기대하고 이 작품을 읽으면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울 속의 일요일>의 서술 트릭은 공정성이 결여된 편이고 극중극 '범패장 사건'도 몰입도가 떨어져서 - 아무리 그래도 불어를 트릭으로 다룬 건 너무 황당하고 난해했다. 애당초 그런 난해한 컨셉의 소설이 목적이었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 이래저래 <가위남>보다 밀도가 낮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반전의 내용이 워낙 좋아 자꾸 머릿속에 아른거려서 한 번 더 읽고 싶고 다른 사람한테 속는 셈치고 읽어보라고 추천하고도 싶었다. 물론 둘 중 하나를 꼽으라면 <가위남>을 먼저 읽으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이 작품도 만만찮았다고 본다.
이 작품 뒤에 수록된 '밀/실'은 처음으로 서술 트릭이 없는 슈노 마사유키의 중편 소설이다. <거울 속은 일요일>과 엇비슷한 전개 방식을 갖고 있는데, 추리소설의 트릭을 현실에 적용시키는 범인이 등장하는 건 나름 흥미롭긴 했지만 그래봤자 외전에 가까운 내용이라 이전 수록작에 비할 만한 작품은 아니었다. 허당미 넘치는 이스루기 기사쿠의 모습이나 두 번째 범인의 정체가 묘하게 귀여운 건 재밌었지만...
그나저나 이쯤 되니 이스루기 기사쿠가 등장하는 다른 작품도 궁금해졌다. 그런데 그 작품들이 과연 국내에 소개될 수 있을지... 출판사의 규모가 작아서 그런지, 아니면 일본 추리소설 자체가 우리나라 출판계에서 레드오션이라 그런지 홍보가 잘 안 된 모양인데 - 당장 나도 지금 스포일러 한가득인 포스팅을 쓰니 홍보에 도움이 되지 못할 듯하다;; - 그래도 좋은 기회를 만나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몇 편 더 소개됐으면 좋겠다. 작가의 작품 세계가 무척 방대한 듯해 한두 편만 소개되기엔 너무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