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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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자신이 착하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신이 진심으로 착하지 않다고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반문해보면 위험한 사람은 생각보다 꽤 많은 것 같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부터 그런 내용이 나온다. 오랜 시간동안 인권에 대해 공부해온 저자가 '결정 장애'란 말을 가볍게 말하고 다닌 것에 대해 누군가 지적한 일화가 나오는데 당시 그 지적을 받았던 저자는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론 그게 왜 나쁘며 나쁘다면 어떤 이유에서 나쁜 것이냐며 다소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고 말한다.

 책에선 우리가 평소에 차별이라고도 여기지 않았던 지점이 등장한다. 코미디언이 흑인 분장으로 웃기는 걸 시작으로 예맨 난민을 수용하길 가장 반대한 사람이 여성이란 것까지 가볍게 접할 수 있던 주제부터 깊은 주제까지 저자는 일관된 논리로 다뤄냈다. 대다수의 페미니즘 도서가 그렇듯 이 책도 모든 말이 구구절절 옳게 들리진 않지만 기본적으로 전제하는 저자의 사고 방식이 좋았다.


 아까 언급한 프롤로그로 예를 들어보겠다. 난 '결정 장애'라는 표현의 논란엔 미묘하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장애'라는 단어가 단순히 장애 유무를 논하는 팩트를 넘어, 어떤 형태로든 욕설의 뉘앙스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정도로 모욕적인 표현이라면 '장애'라는 단어는 완전히 비속어/욕설로 분류됐을 것이다. 하지만 장애인은 장애인이고 장애인이 아닌 사람은 비장애인이라고 칭하자는 사회의 흐름을 생각하면 오히려 '장애'는 예전에 비해 욕설의 느낌이 순화된 듯하다고 여겨졌다.

 그렇다고 '결정 장애'가 아예 문제가 없는 표현이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애매하다. 그래서 내가 평소 말하듯 섣불리 트집이라고 단정을 짓지 못하는 이유다. 더 순화시키거나 대체할 수 있을 만한 표현이 있다면 고민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장애'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어쩔 수 없는 부정적 어감은 아무래도 부정하기 힘드니까.


 책에는 수많은 좋은 구절들과 몇 번을 읽어도 아리송한 구절들이 많았지만 결론적으로 이 한 가지 요소 때문에 책의 모든 내용이 좋게 와 닿았다. 어떤 논란을 마주했을 때, 혹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쓰는 말이나 생각하곤 했던 논리에 혹시 결함이 있을지 생각하는 자세의 중요성을 이 책의 저자는 책을 쓰는 내내 전제로 깔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전제가 뒤로 갈수록 설명이 부족했던 - '1부에서 그렇게 얘기했으니 이 다음부터 어련히 알아서 이해하겠지' 하고 쓰는 느낌을 받았다. - 2부와 3부의 아쉬움을 메꿔줬다. 물론 압도적인 흡입력의 1부의 공도 빼놓을 수 없겠다. 사실상 1부만 보면 근래 읽은 페미니즘 도서 중 가장 뛰어났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개인적으로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란 말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 게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이 말을 특권을 가진 당사자가 호의는 베풀 용의가 있어도 당연하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엔 심리적 저항감이 심하다고 분석했는데 이게 꽤 그럴싸했다. 똑같은 말을 입장만 바꿔서 살펴보면 뉘앙스가 완전히 달라지는 걸 확실하게 인식시켰다고 할 수 있겠는데, 여기서 이 '입장만 바꿔서'라는 말도 심층적으로 살펴봐야 하는 말이지 않나 싶다. 역지사지만 잘 실천하면 세상 모든 갈등은 대번에 사라질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저자는 그렇게 일차원적인 해석을 내놓지 않는다.


 서로 반대되는 한두 가지의 입장만 바꿔선 택도 없으리란 걸 저자는 예맨 난민 이슈를 통해 효과적으로 설명했다. 성별이 됐든 인종이 됐든 성소수자가 됐든, 사회적 약자는 다른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 공감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예맨 난민을 수용하지 말자고 반대하는 사람 중에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많았다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서 저자는 우리가 단지 하나의 정체성만 갖고 있는 게 아님을 역설하고 있다. 여성이라도 날 때부터 한국 국적인 사람은 난민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 성소수자여도 백인이라면 흑인보다 사회적 차별에 덜 시달릴 수 있다는 식으로. 이처럼 거의 완벽하게 사회적 강자에 속하는 사람이나 반대로 완벽하게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사람은 극히 적듯 우리 각자에겐 복합적인 요소가 얽히고 설켜 있어 그토록 타인의 문제에 공감대를 갖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항상 논란이 불거지고 사람들끼리 반목하는 것에 대해 나는 늘 한쪽만을 탓하며 얼른 이 갈등의 골이 사라지길 바라곤 했다. 그런데 요즘엔 꼭 이 책 덕분이라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 완벽이란 개념은 존재하기 쉽지 않다는 걸 체감하면서 페미니즘이 항상 논쟁거리인 게 지극히 당연하고 논쟁이 있다는 것 자체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상황이라고 인식하게 됐다. 만약 페미니스트가 하는 말은 모두 옳다고 신봉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면 또 그만큼 무의식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논쟁이 생기는 상황과 그 논쟁에 의해 충분한 토론과 사유를 거쳐 합의점을 찾아내는 것이 아닐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내가 어느 순간부터 페미니즘 책은 은근히 하는 말이 거기서 거기라고 여겼으면서도 계속 찾아 읽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나는 충분히 페미니스트라며 페미니즘 책을 그만 읽는다면 그 순간부터 그 어떤 논쟁도 날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그랬다간 타성에 젖길 기다리는 처지가 되고 말겠지.

우리는 아직 차별을 부정할 때가 아니라 더 발견해야 할 때다. - 3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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