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6
타카노 이치고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8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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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스포일러 있음


 최근에 시간 여행물을 접하면서 내가 시간 여행이란 설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정확히는 시간 여행자가 과거로 가면서 발생하는 모순, 타임 패러독스 때문인 것 같은데 이 작품은 아예 타임 패러독스를 배제한 평행 우주를 다뤄서 그나마 좀 괜찮게 읽은 것 같다. 고등학생 시절의 친구를 살리기 위해 과거의 자신한테 편지를 보낸다, 그런데 과거 시점에서 친구가 살아봤자 그건 평행 우주에서의 일이므로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현재에 과거의 친구가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다. 이런 모순된 상황에서 이 작품은 그럼에도 과거로 편지를 보낼 것인지 아니면 어차피 어떻게 과거가 바뀔지도 모르는데 편지 같은 건 보내지 않을 것인지 묻고 있다.

 이 작품은 평행 우주 속 친구라도 구해겠다고 대답한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친구를 구하기 위한 다른 친구들의 우정이 정말 눈물겨웠는데 순정 만화 특유의 감성으로 넘치는 듯 부족함이 없게 진심 어린 감정을 잘 전달해냈다. 개중에는 원래는 죽었어야 할 친구가 살게 되면서 자기 운명이 크게 바뀌게 될 - 아무리 그래도 슬하에 자식도 있는데 저렇게 헌신적이라니... 스와가 실로 성인으로 보였다. - 친구도 있어서 이들의 우정이 더욱 돋보였다. 과연 이렇게까지 타인을 살리고자 할 의지를 갖출 수 있을까? 작품에선 친구들의 편지가 어떻게 과거로 갔는지 그 과학적 매커니즘을 정확히 설명하지 않지만, 대신 친구들의 마음이 진심이었기에 그들의 의지가 결실을 맺었음을 암시하며 진실된 마음이란 무엇인지 어필하고 있다.


 처음엔 이 작품의 답답한 감정선이 싫었다. 주인공 나호는 너무 자신감이 없고 카케루는 어떻게 손대기 힘들 정도로 유리 멘탈이다. 스와를 비롯한 주변 친구들의 캐릭터가 개성적이고 매력적이라서 중화가 됐지, 나호와 카케루만으론 이 작품을 완독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결국엔 제3자에 불과해서 그렇게 느낀 건지 독자로선 둘의 마음이 엇갈리는 장면이나 자책하는 장면이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또 개인 취향이지만 순정 만화 특유의 오글거리는 묘사도 거슬릴 때가 많아 짧지만 이래저래 완독에 있어 난관이 끊이지 않았던 작품이다.

 그래도 다르게 생각하면 그토록 답답한 전개가 무척 현실적인 연출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미래의 자신으로부터 편지가 왔고 상황에 따른 조언이 적혔던들 그 말을 그대로 따르긴 쉽지 않은 일이다. 정말 미래의 나 자신한테 온 편지인지도 의심스럽지만 과연 이 편지대로 움직였다 해도 좋은 결과가 나타날지 확신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매우 답답하게도 왜 그 조언을 따라야 하는지 미래의 나호는 정확하게 기술하지 않아 과거의 나호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만드는데, 이거야 전개를 위한 시적 허용이라 하더라도 과거의 나호가 너무 행동력이 떨어져 답답한 마음이 가실 길이 없었다. 도대체 답답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는데;; 한편으론 아까도 말했듯 그렇게 답답한 게 현실적이었던 것 같아 지금에 와선 납득이 갔다. 솔직히 그래서 이야기가 더 재밌게 전개되기도 했고.


 대체로 시간 여행물에선 '내가 나로 존재하는 이상 운명은 거스를 수 없다'는 전제를 까는 것 같다. 그 말 그대로 작품에서 나호의 원래부터 소심했던 성격 때문에 기껏 미래의 자신이 보낸 편지를 수포로 만드는 선택이 질리지도 않고 반복된다. 이 장면 때문에 정말 내가 나로 존재하는 이상 미래를 바꾸기가 정말 힘들단 게 피부로 와 닿았다. 카케루도 마찬가지다. 얘는 아무리 주변에서 노력해도 어떻게든 자괴감에 빠진다. 어떻게 보면 자살 충동이 있는 사람들은 정말 대하기가 쉽지 않음을 한숨 나오도록 잘 그렸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보다 나는 타인이든 미래의 나 자신이든 간에 누군가의 도움 없이 문제를 극복하기가, 이 작품으로 말할 것 같으면 미래를 바꾸기가 어려움을 그린 것이라 봤다.

 난 원래 내 문제를 남에게 잘 말하지 않는 편이었다. 다른 사람도 자기만의 문제로 벅찬데 거기서 내가 내 문제를 들어달라고 하는 게 찡찡대는 것 같아서 가급적 입을 닫는 편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도움이 아니더라도 내 문제에 대해 누군가가 공감해주거나 몇 마디 해줬을 때의 효과를 깨닫고 나선 내가 그 전엔 정말 내 안에 갇혀 살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작품도 비슷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또 그와 반대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면서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너무나 진실된 마음으로 잘 전달하는 작품이라 느껴졌다.


 <오렌지>는 애니메이션, 소설, 실사 영화로도 제작됐는데 그만큼 인기를 얻은 데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 번째로 현재가 바뀌지 않더라도 과거라도 바꾸겠다는 친구들의 우정을 그린 것, 두 번째는 자살한 친구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서로 도움을 주며 도움을 받는 관계임을 잘 전달한 것이겠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고 더군다나 진실 되게 그리기가 난해한 것도 있는데 모두 성공적이고 효과적으로 전달한 작가가 대단했다. 원래 순정 만화에 호감이 있지 않았고 솔직히 이 작품을 읽는 동안에도, 심지어 지금도 호감이 있는 상태는 아니지만, 이렇게 순정 만화를 불호하는 나 같은 독자도 매료시킨 걸 보면 확실히 장르의 경계를 뛰어넘는 작품이라고 여겨졌다.

 작가의 다른 작품을 보고 그런 생각을 더욱 확신하게 됐다. 매권 말미에 다른 단편 만화도 수록됐는데 그 작품은 뭘 어떻게 말하기가 곤혹스러울 정도로 산만하고 정신없어서 그냥 <오렌지>가 엄청 뛰어난 작품이란 결론이 나오게 됐다. 그 작품만 수록되지 않았어도 다른 순전 만화도 찾아봤을 텐데... 일단은 그냥 <오렌지>를 완독한 것으로 만족하고 넘어가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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