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7.6







 11년 전에 이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 이건 내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내용의 소설이라며 누구와도 이 소설에 대해 얘길 나누지 않았다. 이 소설이 부끄럽다기 보다 읽었다는 걸 그렇게 자랑거리로 삼을 만한 내용이 아니란 생각에 어디에도 이 소설을 완독했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 책의 내용은 얼추 이해가 됐지만 정서적으로 퍽 와 닿지 않았기 때문에 구태여 남들과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6년 뒤에 이 소설이 맨부커상 인터네셔널 부문에서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꽤나 의아스러웠다. 이토록 국제적으로 유명세를 얻을 만한 소설이었다는 감상을 처음 읽었을 때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의 문체도 수려한 편이고 특정 이미지를 발전시키는 역량도 출중하기에 감탄스런 장면도 많았지만 전체적으로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작품인 터라... 서양의 감성도 그와 다르지 않기에 각광을 받은 것인가 싶어 국위 선양의 소식을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들어야만 했다.


 <채식주의자>는 표제작 '채식주의자'와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몽고반점', 손목의 통증 때문에 아르바이트생을 섭외해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집필을 완성시킨 마지막 작품 '나무 불꽃'이 수록된 연작소설집이다. 세 번째 작품의 경우 가장 가독성이 떨어지고 내용도 지리멸렬한 편인데 그 내용을 알바생의 손으로 대신 집필해냈다니... 작가도 작가지만 그 알바생의 집중력도 대단하지 않은가 싶었다. 어쨌든 이 작품은 결과물을 떠나서 호불호가 무척 갈리는 내용인데, 그 말은 즉 호불호가 확실히 갈릴 만큼 색깔 있게 잘 썼다는 뜻이기도 하니 작가의 노고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 이 작품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는 사람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마음일 것이다. 소설의 만듦새보단 순수하게 소설의 감성이 기분이 나빴단 식으로 말이다. 이런 반응을 이끌어냈다는 게 어떤 의미에선 작가로서 이 연작을 집필한 보람이 느껴지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의도를 무의식적으로라도 갖고 있어야만 이런 글을 쓸 수 있을 테지...



 '채식주의자'


 이 책의 표제작이자 그나마 가장 정상적인 정서란 걸 접할 수 있던 작품. 화자가 썩 정감이 가는 인물은 아니지만 어쨌든 상식적인 인간의 시선을 대변해준다는 점에서 우리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그런데 누군들 영혜의 기행을 이해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그녀의 남편에게 비난의 화살을 쏟는 건 좀 부당한 일일 수 있겠다. 느닷없이 꿈을 꿨다는 이유로 채식주의를 실천하는 그녀를 도대체 누가 지지해줄 수 있단 말인가?

 이 작품에서 채식주의는 말 그대로 동물권을 위한 윤리적인 선택이라기보다 훨씬 근본적인, 이를 테면 살면서 두 번 다시 폭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다짐에 더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어렸을 때부터 크건 작건 폭력에 노출된 영혜가 꿈을 계기로 채식주의자로 돌변한 것에서 지금까지 폭력을 폭력이라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으니 지금부터라도 달리 살아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 결연한 의지, 좋다. 남들은 영혜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어쨌든 그녀가 그걸 원한다면 그 뜻을 존중 못할 것도 없다.


 문제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남들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고 예고도 없이 느닷없이 실천하는 독선적인 태도에 있다. 난 그 태도가 이기적이라 느껴진 나머지 영혜가 타인의 반발을 사는 게 아주 당연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극단적으로 실시하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의 특성상 분명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뜯어 말릴 거란 생각을 - 그렇다고 해서 영혜의 아버지가 자신의 딸의 입을 억지로 벌려 고길 넣으려 한 게 상식적인 일이라는 건 아니다. - 영혜는 정녕 하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그런 생각도 못할 만큼 절박했던 걸까. 그랬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남편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거나 설득하려는 최소한의 의지도 없이 단지 '꿈을 꿨어요' 라고 채식주의의 이유를 밝히는 건 너무나 지나치게 사회성이 결여된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치 자기가 지금 꿈 때문에 이러는 거니까 이 이상 묻지도 따지지 말라고 벽을 치는 듯했다. 10년 전엔 영혜 혼자 채식을 하겠다는 데 가족들이 지나치게 개입하는 거 아니냐며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 와서 읽으니까 오히려 타인의 이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영혜의 모습이 너무 이기적으로 느껴져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몽고반점'


 차라리 첫 번째 수록작은 귀엽다고 느껴질 정도로 2편은 더욱 정신이 아득해질 만한 전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과도한 채식주의와 자해로 정신병원을 드나든 처제(영혜)의 몸에 있는 몽고반점에 강렬한 영감을 받은 비디오 아티스트 화자가 영혜와 금단의 예술 작업을 갖는다는 형이상학적인 전개가 펼쳐지니 원. 읽다 보면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되면서 남편이나 가족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은 건 이 남자가 취한 행동에 비할 바가 못 되는구나 싶었다.

 물론 이 둘이 몸에 식물 그림을 그려 육체관계를 갖는 영상을 촬영한 건 나름 합의를 통해 이뤄진 전개이니 왈가왈부할 수 없는 측면도 있지만, 결국 이 남자의 예술혼이 어떻게 보면 영혜의 정신병을 더 부추긴 셈이 돼 이 작품 말미에 자신의 아내로부터, 또 이 책의 다음 수록작 '나무 불꽃'에서 두고두고 욕을 먹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남자가 영혜한테 영상 촬영을 제안하기까지의 갈등, 촬영하는 영상의 내용, 그 이후의 희열 등 내 정신 세계가 받아들이기 힘든 장면이 너무 많으므로 이 이상의 말은 생략하겠다.



 '나무 불꽃'


 유일하게 영혜를 포기하지 않던 그녀의 언니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 영혜를 감당하지 못해 이혼한 남편이나 영혜의 정신병을 부추기고 그녀와 몸을 섞기까지 한 남자와 달리 이 이야기의 화자는 영혜에게 끊임없이 눈물로 호소한다. 영혜가 기행을 일삼고 화자가 호소하는 반복적인 장면도 피곤하지만 그때마다 나오는 영혜의 정신 나간 대답은 매번 아찔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먹고 살다가는 죽는다는 말에 도리어 '왜 죽으면 안 돼?'라고 묻는데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이쯤 되면 정말 바라는 대로 해줘야 하지 않나 싶은데 사람의 마음이나 가족 관계가 또 그렇게 무 자르듯 쉽게 단절되지 않을 테니 영혜는 죽는 그 순간까지 지옥 속에서 살아가리라는 불길한 미래가 예상됐다. 결국 영혜는 그녀의 바람대로 누구에게도 고통을 주지 못할 시체가 되긴 될 텐데 그게 과연 해피엔딩이려나.

 나도 모르게 거친 표현이 많이 나온 것 같은데, 애당초 영혜의 채식주의나 이 소설의 전개에 대해 어떤 상식이나 논리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내 태도가 한참 잘못된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처음에 채식주의자가 됐다가 나중에 채식마저 거부하며 스스로 나무가 되겠다고 벌거벗은 채 물구나무를 서는 여자를 일개 독자인 내가 감당하려는 것부터가 자멸에 이르는 길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분명 처음엔 모든 종류의 폭력에 불응하겠음을 극단적으로 실천하는 여자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중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폭력에 불응하겠다며 자신과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폭력적인 결과를 낳는 전개가 펼쳐져 이 책 전체가 실로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초반에 채식주의는 육식을 하는 인간의 본성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다른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나왔는데, 이 말이 가장 핵심적인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육식이 곧 폭력이란 가정 하에 말하자면, 인간은 밖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식으로 생존해온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폭력을 멈추게 되면 도리어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꼴이라는 것, 그래서 자가당착에 빠진 채 어쩔 수 없이 죽고 말거나 아니면 죽기 싫어 마지못해 다시 폭력을 저지르는 존재가 바로 인간임을 작가는 강조하고 싶던 게 아니었을까.

 문학에서 인간의 폭력성이란 그리 참신한 주제는 아니지만 작가가 그에 걸맞는 무겁고 정신나간 작품 세계를 선보였으니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비꼬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굳이 이렇게까지 정신나간 작품 세계를 길게 써야 했을까 하는 의문은 들지만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식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재능이지만... 솔직히 말해 그렇게 자주 접하고 싶지 않다. 내가 이 작품을 완독했다는 게, 그것도 무려 두 번이나 완독한 내 스스로가 실로 장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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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트라비아타의 초상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 2
도진기 지음 / 들녘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9.1







'어둠의 변호사'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지만 정작 법정에서 등장한 적은 정말 드문 변호사 고진을 주인공으로 한 본격 추리소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첫 번째 작품인 <어둠의 변호사>는 '붉은집 살인사건'이란 부제처럼 심플하지만 대담한 저택 트릭, 3대에 걸쳐 핏빛 사건이 끊이지 않은 가정사를 다루고 있었던 반면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은 철벽의 알리바이 트릭과 도를 넘은 인간의 애정욕을 다루고 있다. 사건의 규모를 보면 전편이 훨씬 방대하며 고진이 개입하는 개연성도 전편이 자연스러웠는데 - 이 작품의 탐정역은 굳이 고진이 아니어도 됐다고 본다. - 작품의 가독성, 반전의 의외성 자체는 이번 작품이 우세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전개를 뒤엎는 반전이 나와 사람에 따라선 느닷없다고 여길 것도 같지만 그 반전을 유도하는 추리 방식이 논리적이었고 여하튼 그렇게 당도한 결과가 엄청 의외라서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간혹 알리바이 트릭을 다룬 작품을 보면 탐정이 내놓는 추리나 실제 사건의 진상들이 밀실 살인 못지않게 작위적이라 느꼈는데 이 작품은 그런 점에서 굉장히 신선하고 완성도도 상당했다. 고진이 내놓는 추리들의 내용이 모두 제각각임에도 그럴싸했던 것과 그 추리들이 논파당하는 전개도 몰입도가 높았고 긴장감도 제법이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썼기에 범행이 가능했던 것인가 싶어 마치 내가 겪은 일처럼 몰입하게 됐다.


 내가 알리바이 트릭을 작위적이라 느낀 데에는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더라도 이미 결말은 정해졌고 결국 트릭은 사건의 과정을 설명할 뿐이기에 그 과정에서 무리수가 섞이지 않은가 하는 선입견이 가장 크게 작용한 것 같다.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의 트릭은 그러한 내 선입견을 완전히 깨부수는 신개념 전개를 선보인다. 나는 반전의 내용보다도 오히려 이런 발상의 전환이 더 인상적이었다. 모든 가능성을 검토한 다음 깔끔하게 방향을 선회하는 유연한 사고가 신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떻게 보면 탐정이 너무 똥고집을 부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 사건 해결하는데 자기 자존심 우선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다 부질없는 짓이지...

 이 작품은 꼭 스포일러 없이 그냥 한 번 읽어보길 추천한다. 분량도 짧고 가독성도 좋으니 진입장벽도 높지 않으리라 믿는다. 저번에 포스팅한 <모방범>은 좋은 작품이지만 분량이 1,500페이지가 넘어 추천하면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읽을까 내 스스로도 반신반의했지만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은 그 걱정이 안 들어서 좋다. 마음 같아선 제목이 왜 저렇게 지어졌는지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싶지만 그럼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말을 아끼려고 한다. 작가나 출판사가 굳이 제목의 의미를 강조하지 않은 데엔 다 이유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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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 2 - 개정판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5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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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 거의 없음


 10년 만에 다시 읽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거의 모든 내용이 생생하게 기억 났던 작품. 언젠가 다시 읽으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그때가 되니 너무 길고 고통스러울 내용에 다시금 주저하게 된 작품. 그러나, 10년 전에도 그랬듯 15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이 술술 넘어가 읽는 입장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취감이 느껴졌던 작품이다. 장기 연재물답게 가끔 이야기를 질질 끄는 느낌도 받았지만 전체적으로 극강의 몰입도롤 선사하는 대작이다. 단연 미야베 미유키 최고의 작품이라 부르겠다.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만큼 쇼킹한 내용이라 함부로 추천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긴 하다. 작가가 작정하고 써내려간 수위 높은 묘사도 상상력을 자극해 오싹했고 구역질을 유발하는 캐릭터도 적잖아 읽는 내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가, 르포 소설의 대가답게 미야베 미유키는 현대 사회의 병폐라 부를 수 있을 만한 면면들을 성실히 추적한다. 그런 점에서 쇼킹한 범죄에만 주목하는 작품들과 결이 다르고, 격이 다른 작품이다. 만약 이 추적의 과정을 즐길 수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모방범>은 전개가 느릿느릿하고 급결말인 작품으로 다가올 것이다.


 내 경우엔, 10년 전에 읽을 때는 전개 속도는 괜찮지만 결말이 급작스러운 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난 10년 간 '급결말이 아쉬운 만큼 분량이 더 길었으면 좋았을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읽으니 그 결말이 최고의 결말이었구나 하고 인상이 바뀌었다. 왜 이 작품의 제목이 '모방범'인지 밝혀지는 대목이야말로 작가가 가장 강조하고픈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 점을 숙지하니 이 작품이 한층 대단하고 쾌감 있게 다가왔다.

 <모방범>은 총 3부로 구성된 장대한 소설이다. 1부는 발단부터 결말까지 의외성이 끊이지 않는, 그래서 남은 분량이 저렇게 많은데 이렇게 끝내도 되는지 괜한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 2부에서는 범인이 왜 이런 짓을 시작했고 어쩌다 1부에서의 결말을 맞이했는지 과거사를 촘촘히 살펴본다. 과거를 다룬다고 하니 쉬어가는 코너라 생각될 테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쇼킹하고 그래서 경계가 필요한 구간이다. 3부는 이야기의 본격적인 제2막으로 과연 사필귀정이 가능하긴 한 것인지 그 귀추가 주목돼 실로 조마조마하게 읽혔다. 중간중간 지루하게 읽히긴 하지만 상술했던 마지막 장면이 쾌감 한 보따리를 던져줘 스트레스가 끊이지 않던 작품의 분위기를 잠깐이나마 환기시켜준다. <모방범>이 특정 인물이 범죄를 모방하는 내용의 작품이라 여기고 접근한 독자라면 이 장면에서 빵 터질 것이다. 저렇게나 치밀한 범인이 고작 저 정도 일로 몰락하다니, 어떤 의미에선 섬뜩하기도 한 장면이다.


 개인적으로 2부가 유달리 흥미롭게 읽혔다. 누가 봐도 동정의 여지가 없는 쓰레기일 터인 범인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작가로서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다. 너무 과도하게 동정심을 유발하려 했다간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범인의 사정이 딱한 부분도 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복수해야 할 대상을 잘못 찾아 훗날 무고한 여성들을 납치해서 잔인하게 갖고 놀다 죽인 점은 도무지 정상 참작할 수 없잖은가. 그렇다 보니 2부를 읽는 내내 인물들의 감정선에 몰입하는 한편으로 적절히 거리를 두느라 애먹었다. 범인을 어떤 식으로든 미화를 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서다 보니, 눈물겨웠던 우정은 피해자들을 배려하지 못한 이기심으로, 수년에 걸쳐 당한 아동 학대는 결국 잘 지어진 변명거리로 비쳐졌다. 이건 정말이지 소설이니까 가능했던 접근이었다. 만약 현실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거나 이렇게 범인을 동정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정말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래서 3부도 2부에서처럼 마냥 범인을 동정할까 걱정이 됐는데,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오히려 2부는 2부대로 놔두고 3부에서는 범인을 향한 미야베 미유키 나름대로의 처절한 조롱과 단죄가 기다리고 있었다. 2부에서 그토록 길게 범인의 과거를 들여다보고 3부에서도 그 작업을 소홀히 하지 않은 덕분에 그 단죄의 효과가 더욱 컸다. 처음부터 범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이 정도 단죄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미야베 미유키처럼 범인을 이해하고 또 이해하려 노력한 사람만이 할 수 있을, 급소를 찌르는 일격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욕을 하고 뭇매를 해도 자신이 누구도 흉내내지 못한 방식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고 미소를 지을 범인에게 어떻게 한 방을 먹일 수 있을까? 난 작가가 크게 한 방 먹이는 것에 성공했다고 본다.


 그 누구보다 범인을 동정적으로 바라본 작가였기에 그를 두고 이렇게 일갈하는 듯한 작가의 태도는 정말 속이 다 시원했다.

 '그래, 이해하려면 이해할 순 있겠지. 하지만 아무리 외면해봤자 너는 이 정도 비난에 흔들릴 정도로 유리멘탈의 소유자이며 자아도취에 빠져있던 관종이자 도무지 구제할 길 없는 쓰레기야. 딱 그뿐이라고.'

 도대체 이런 짓을 벌이는 범인의 심리는 뭘까? 단순히 미쳤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재미로,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기념비적인 무언가를 자랑하고 싶을 뿐이란 것이 범인의 동기의 전부임을 작가는 성실하고 예리하게 살펴봤다. 이야기를 길게 펼친 것에 비해 참 심플한 동기였지만, 그 동기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인간으로서 납득하기 버거운 것인 만큼 이런 긴 분량에 걸쳐 이해 가능하게끔 살펴본 작가의 끈기가 정말 대단하게 여겨졌다. 범죄와 악을 바라보는 각기 다른 입장의 사람들의 활약이나 이야기 전반에 녹아든 스릴과 오싹함도 발군이지만 이런 작가의 끈기야말로 이 작품에서 가장 손꼽을 만한 요소가 아닌가 싶다.


 지금도 신간이 활발하게 출간되고 있지만 미야베 미유키의 기세가 예전만 못한 것 같다. 한때 국내에 소개된 일본 추리소설 작가 중 히가시노 게이고와 함께 투탑이었는데 지금은 서열 정리라도 된 양 그 존재감이 묘하게 흐릿하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으니 역시 미야베 미유키는 미야베 미유키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다시 읽으니 존경심이 절로 생긴다.

 <모방범>은 <화차>와 더불어 미야베 미유키의 대표작이자 내 개인적으로는 죽기 전에 한 번쯤 읽어봐야 될 역작이라 생각한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어마어마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가독성이나 몰입도 등 외적인 요소도 강렬하기에 많은 독자들에게 있어 이 책을 완독하는 것은 여러모로 인상적이고 뿌듯한 경험으로 남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만큼 시대를 타지 않는 공감대와 흡입력이 있는 내용인 지라 - 가끔 90년대다운 옛스럽고 고리타분한 묘사와 장면도 있지만;; - 진입장벽이 높다는 걸 앎에도 추천하지 않고는 못 베기겠다. 이 포스팅을 스포일러 없이 쓰는 이유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가급적 많은 사람이 도전해줬음 싶어서... 내 의도가 과연 얼마나 적중할지 궁금하다.

 

 

 인상 깊은 구절

 

진정한 악이란 이런 거야. 이유 따위는 없어. 그러므로 피해자는 자기가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는지 모르는 거야. 원한, 애증, 돈, 그런 이유가 있다면 피해자도 납득을 할 수 있겠지. 자신을 위로하거나 범인을 미워하거나 사회를 원망할 때는 그 근거가 필요한 거야. 범인이 그 근거를 제시해주면 대처할 방법이라도 있지. 그러나 애당초 근거 같은 건 없었어. 그거야말로 완벽한 '악'이야. - 2권 190~191p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밀고 내가 곁에 있으니 괜찮다고 말을 거는 순간에, 그는 다른 사람이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처음부터 듬직한 인간은 없다. 처음부터 힘있는 인간은 없다. 누구든 상대를 받아들일 결심을 하는 순간에 그런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2권 343p


우리는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기도 하고 함께 개척하기도 하면서, 서로에게 서로의 시민이 됨으로써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이 나약하다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이라고 다케가미는 생각하고 있었다. - 2권 426p


살인이 잔혹한 것은, 살인이 피해자를 죽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가족의 생활과 마음까지 서서히 죽여가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가족을 죽이는 것은 살인자 본인이 아니라 그 가족들 자신의 마음이야. 정말 웃기는 이야기지만, 사실이 그래. - 3권 263p


진실이란 건 말이지, 네놈이 아무리 멀리까지 가서 버리고 오더라도 반드시 너한테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어. - 480~48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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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블랙 캣(Black Cat) 17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이기원 옮김 / 영림카디널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7.9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 우울해질 것 같은 에를렌뒤르 형사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 남다른 분위기의 아이슬란드 추리소설 시리즈는 세계적인 명성에 비해 국내에 출간된 책이 적다. 그래도 4권이나 출간된 걸 보면 나름대로 선방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 이 책을 읽음으로 인해 국내에 소개된 작가의 책을 모두 접한 나는 기분이 허탈해졌다. 내 느낌상 이 시리즈나 작가가 대단한 이슈화되지 않은 이상 에를렌뒤르 형사의 이야기는 이대로 묻히고 말 것 같아서 말이다. 당장 내가 이 책을 중고서점에서 구한 걸 생각하면 앞으로도 후속작이나 아직 출간되지 않은 시리즈의 다른 작품이 출간될 리가 만무하다.

 사뭇 비관적인 출간 전망과는 달리 시리즈의 작품 하나하나의 완성도와 매력은 출중한 편이다. 추리소설의 불모지라는 아이슬란드에서 이만한 추리소설을 집필하는 작가의 존재는 정말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하다. 비록 시리즈를 순서대로 읽지 않고 뒤죽박죽 접해서 -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도 처음에 이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이게 다 시리즈를 순서대로 출간하지 않는 출판사 탓이다. - 에를렌뒤르의 곡절이 많은 가정사나 정서에 적응하는 데 약간 시간이 걸렸지만 작품의 주요한 사건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기에 그런 부차적인 아쉬움엔 별로 눈길이 가지 않았다. 나중엔 재독할 때 시리즈 순서대로 읽어야겠다.


 다소 엽기적이고 민망한 상황에서 호텔의 도어맨을 살해한 범인을 찾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년 합창단원으로 추정되는 화자의 독백으로 이뤄진 어딘지 성스러운 프롤로그와 상반된 분위기의 이 도입부는 제법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산타 복장으로 이벤트에 참여하기로 한 호텔의 몇 십년지기 도어맨이 자신의 개인 공간에서 산타 복장 그대로 바지가 내려진 상태에서 성기에 콘돔이 씌워진 채로, 누가 봐도 성관계 중에 칼에 찔린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죽은 것만큼 입에 담기 꺼림칙한 상황도 없기 때문이다. 에를렌뒤르와 그의 동료들은 살해된 도어맨의 신분을 확인하고자 호텔 직원들을 상대로 탐문을 시작하는데, 씁쓸하게도 그 누구도 도어맨과 친하지 않았고 대신 대다수의 직원이 이 사건으로 인해 호텔의 평판이 떨어질까 그 걱정만 하고 있다.

 시리즈의 다른 작품에서 강조된 바 있는데, 아이슬란드에서 강력 범죄, 특히 살인은 매우 드문 종류의 범죄라고 한다. 이는 아이슬란드는 물론이거니와 노르웨이 등 다른 북유럽 국가에도 해당하므로 북유럽 추리소설엔 '어떻게 우리나라에서 이런 범죄가?!' 라는 정서를 강조하는 장면이 잊을 만하면 꼭 등장한다. 이런 장면에선 대개 자국의 치안과 사람들의 선한 의지에 대한 믿음이 배신당한 것에서 충격을 받거나 연쇄살인범의 등장이라는 부정적인 가능성을 부정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 작품 <목소리>에선 살인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반응 양상이 사뭇 달랐다. 아무리 고급 호텔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속물적으로 호텔의 평판을 걱정하고 도어맨의 명복에 무관심한 건 내가 봐도 좀 너무하다 싶었던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접한 인드리다손 작가의 <저체온증>에서 그랬듯 - 그 작품은 <목소리>의 다음다음다음 후속작이다. - 에를렌뒤르는 피해자의 신원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약간의 헤맴을 겪다가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사건을 허무하게 해결한다. 후반으로 갈수록 우울하고 몽롱한 분위기가 짙어지다가 모호한 형태로 결말이 나서 통상적으로 추리소설하면 떠오르는 명료한 결말에 익숙한 독자라면 찝찝함이 남을 것이다. 나는 <저체온증>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고 이 작품 <목소리>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사건의 규모나 후반으로 갈수록 대단한 전개나 반전이 나오지 않아서 아쉬움이 컸다. 유력한 용의자가 나오지 않았으니 범인의 정체가 놀라우리라는 기대는 애당초 하지도 않았지만, 살해된 도어맨의 정체나 그의 우울한 삶의 궤적이나 내적 고민이 충분하게 묘사되지 않았다는 게 제일 아쉬운 부분이었다.

 인드리다손의 추리소설은 사건 해결의 쾌감이 아닌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에 대한 비통함을 독자와 공유하는 것에서 그 매력이 십분 발휘된다고 보는데 이 작품 속 피해자의 이야기는 분량에 비해 생각보다 깊이 다뤄지지 않았고 소재 자체도 피상적으로 다룬 감이 있어 유독 결말이 허무하게 읽힌 것 같다. 이미 작가의 스타일에 대한 선행 학습이 된 터라 크게 실망하진 않았지만 기껏 초반에 몰입도를 끌어올렸던 것에 비해 후반부가 미흡해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또 일반적으로 접하기 힘든 보이 소프라노에 대한 작가의 사유도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등 전체적으로 독특한 배경과 분위기, 소재에 비해 평이한 작품이었다. 용두사미란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


 어쩌면 아이슬란드 추리소설이 평이하게 읽힌다는 것이 좀 특이하게 들릴는지 모르겠다. 내가 일본 추리소설 다음으로 북유럽 추리소설의 문법에 꽤 익숙해서 그런가 이제는 북유럽이 배경인 것만으로 독특하다며 감탄하지 않게 됐다. 그것도 그렇지만, 결국 아이슬란드도 다 사람 사는 곳이란 생각을 인드리다손의 작품을 통해 자주 해왔던 터라 더 이상 '아이슬란드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는 놀라움'이나 '아이슬란드식 살인'이 신선하지가 않다.

 초장에 말했듯 이 시리즈가 작품 외적으로 이슈화되지 않은 이상 이 시리즈의 다른 작품을 더 만나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국내 추리소설 독자에게 어필하기엔 화려함이 부족하기도 하고 결말도 늘 모호한 감이 있어 질색할 독자도 적잖을 듯하다. 아이슬란드를 비롯해 북유럽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에 관심이 있는 일부 독자를 제외하면 '아이슬란드 추리소설'이란 이유로 남에게 추천하기엔 주저된다. '에를렌뒤르 형사' 시리즈가 진지하고 훌륭한 사회파 추리소설이긴 하지만 우리나라 바로 옆나라에 사회파 추리소설로 명성이 자자한 작가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어 인드리다손에게 관심을 기울일 독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싶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국내에 이 작가의 작품이 더 출간되지 않을 것 같아 불안하고 아쉽기 그지없다. 아마 내가 국내에 소개된 4작품 모두를 재독하더라도 작가의 신간이 역간되지 않을 것 같은데 부디 나의 비관적인 전망이 틀리길 바란다. 하지만, 4권이나 출간된 게 기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 만큼 헛된 기대는 하지 말아야겠다. <목소리>를 비롯해 '에를렌뒤르 형사' 시리즈가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처럼 모든 작품이 압도적으로 재밌다면 또 모를까... 차라리 내가 영어로 번역된 소설을 읽는 게 더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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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콜라 쇼콜라
김민서 지음 / 노블마인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9.7







 이 책을 처음 접했던 9년 전엔 이 책이 입시를 소홀히 하면 암울한 미래가 찾아오리라는 예언처럼 다가왔다면 지금은 예정대로 암울한 미래를 살고 있는 나에게 보다 따뜻한 작품으로 비쳐졌다. 최근 연달아 비참한 일을 겪는 상황에서 자존감이 한없이 낮은 아린과 맹목적으로 성공을 쫒느라 외톨이가 된 단희의 모습은 꽤나 위로가 됐다. 사실 나는 이 둘의 단점을 모두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터라 이들이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는 것만으로 한껏 비참한 기분에 휩싸여야 했지만... 그도 그럴 것이 단희처럼 남부럽지 않게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단희의 부러움을 사는 아린의 사교성이 내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나한테 있어 작중 인물들의 처지와 고민은 내가 고등학생 시절에 읽었을 때보다 더 피부에 와 닿으며 내 일처럼 느껴졌다. 딱 이들과 같은 나이대에 처한 만큼 이들에게 내 모습을 투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게 정신건강에 무척 해롭단 건 머리로는 알지만 사람인 이상 너무 뛰어난 존재가 곁에 있고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비교를 일삼으면 주눅들거나 자신의 인생에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다. 다행히 나는 형제도 없고 사촌 동생과도 터울이 커 그런 적이 거의 없었지만, 올초에 가시적인 성과가 미미한 날 두고 명문대를 재수해서 들어간 사촌 동생과 비교하는 부모님의 비난을 들은 기억이 나 - 그런 망발을 할 만한 원인을 내가 제공하긴 했지만 그래도 당신께선 그 말을 한 것을 꽤 후회했던 모양인지 나중에 사과하셨다. 이미 열차는 떠났음에도. - 작품 속 아린이 심정이 내가 그때 느낀 그 기분이었을까 싶었다. 나야 어쩌다 한 번이니까 속으로 삭히고 넘어갈 수 있지만 아린으로선 어렸을 때부터 지속적으로 시달렸을 테니 자신의 열등감을 주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린의 열등감의 원흉인 단희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희는 마냥 행복한 인생인가? 아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타인에게 열등감을 안겨주는 존재감은 아이러니하게도 단희 본인에게도 적잖은 열등감을 안겨준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쇼콜라 쇼콜라>는 칙릿 소설을 전문으로 쓰는 김민서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사전에 칙릿을 검색해보면 '젊은 여성들의 삶과 취향을 다룬 문예물'이라고 나오는데 비하의 의미는 아니지만 소재의 특성상 가볍고 사사로운 내용이리란 저평가를 받곤 하는 장르다. 개인적으로 칙릿 소설을 많이 접하진 않았지만 아니샤 라카니의 <화려한 수업>이나 김민서 작가의 작품들을 접한 내 입장에선 칙릿 소설들이 대체로 가벼울 순 있어도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특히 김민서 작가의 경우에는 대중이나 평단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작품을 쓸 수 있지만 일부러 칙릿 소설을 쓰지 않나 싶을 만큼 안정적이고 흥미로운 필력이 돋보여 장르에 대한 편견을 지우게 해준다. 간간이 고루하거나 무게감이 없는 묘사가 있는 편이지만 그마저도 칙릿 소설이란 구색을 갖추기 위해 집어넣는 요소란 생각이 들 정도로 주제의식이나 캐릭터 묘사가 일품인 작가다.

 작가의 대표작인 <나의 블랙 미니 드레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쇼콜라 쇼콜라>도 여성들의 이야기가 아닌 젊은 세대의 고민이 담긴 성장 소설로 읽혔는데 이 작품에는 두 가지 상반되는 종류의 고민을 하는 두 인물을 등장시킨다. 인생을 낭비했다는 자괴감과 마땅히 하고픈 일도 없는데 주위의 시선을 무시하지 못하는 아린과 남부러울 것 없이 목표를 향해 정진했지만 그 결과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모르는 반듯한 단희, 설정만 놓고 봤을 땐 단연 단희의 처지가 좋아 보이지만 작가는 두 인물의 고민을 거의 동일한 무게감으로 전달하는 것에 성공한다. 그 결과, 인생의 성공이란 가시적인 성과나 사회적으로 합의된 가치만으로 재단하기 어렵다는 것을 어필한다. 재밌는 건 이러한 어필을 무대책의 화신이랄 수 있을 아린의 남자친구인 우주의 입을 통해서 한다는 것이다. 그의 낙관주의는 어쩌면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나마 갖고 있는 것의 가치마저 격하시키는 낮은 자존감과 타인과의 관계를 버거워하는 자기파괴적 고민이 모두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얻은 불행이라니... 누가 그걸 모르겠냐만, 최근 KBS에서 런칭한 프로그램 <북유럽>에 출연한 김중혁 작가가 '책은 독자로 하여금 교훈을 어렴풋이 짐작하게끔 해준다는 점에서 부담이 적다'는 내용의 발언을 생각한다면 이 작품도 그 문법에 따라 교과서적인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한 셈이라 할 수 있다.


 상술했듯 아린과 단희의 단점을 모두 갖고 있는 내 입장에선 둘의 고민의 내용이 뼈아프게 다가왔는데 이 둘이 고민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내 모습도 함께 돌아보게 됐다. 단희는 비밀투성이인 남자친구의 가면을 벗기면서 그와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며 용기를 얻고 아린은 초반에 스쳐가듯 묘사된 주먹밥 싸는 일에 대한 애정을 인정하며 인기 주먹밥 가게의 2호점 점장이 되는 쾌거를 달성한다. 교사처럼 남들에게 부연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에 대한 미련과 스스로의 적성과의 괴리감을 인정한 다음부터 얻은 성과다.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한 아린에게 밝고 건전한 미래가 굴러 들어온다는 전개는 허무할 정도로 바람직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쉬운 길을 놔두고 그렇게나 방황한 아린의 모습에 나도 내가 잘하고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외면하고 내 능력 밖의 목표를 추구하는 건 아닐까 하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니 그렇게까지 헛걸음하는 중은 아니라는 결론은 나왔지만 내가 미련을 갖는 것과 현실적으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는 시선은 항상 견지해야겠구나 싶었다. 내가 초반에 아린의 모습을 보고 '임용고시보다 요식업 쪽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라고 느낀 것처럼 나 또한 누가 옆에서 봤을 때 비슷한 의문을 느끼지 않게끔 말이다.


 단희의 경우는 조금 미묘한데, 원리원칙을 중시하며 입바른 소리만 하는 그녀의 꽉 막힌 사고가 일련의 사건을 통해 딱히 유연해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은따를 당하고 사촌 언니에겐 엄친딸이란 이유로 쓴소릴 듣는 등 존재 자체만으로 남을 갑갑하게 만든다는 점은 당사자로서 큰 고민이 아닐 수 없는데, 흥미롭게도 이 소설은 단희의 사고가 사회적으로 환영받긴 힘들어도 그게 잘못이란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단희를 그렇게 키운 단희의 엄마나 그런 단희를 포용하지 않으려는 사회 분위기에 더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돌려서 비판한다.

 그렇게 단희는 위로를 받지만 중요한 건 단희 스스로도 자신의 성격에 대한 고찰, 어느 정도는 유연해질 필요성은 느끼지만 후반부에 이르러선 그녀의 남자친구인 마이클을 추적하는 전개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결론이 희미하게 내려진 게 마음에 걸린다. 단희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교우 관계가 좁고 사교성이 좋은 편이 아니라 그녀가 구체적으로 자신의 고민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내심 궁금했는데... 여자라면 한눈에 혹할 만한 외모의 남자친구가 있음이 밝혀지자 회사 직원들이 단희를 부러워한다는 식으로 마지막 장면이 연출돼 단희의 고민이 조금 성의없이 해소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적으로 개연성이 떨어지는 전개는 아니지만 '자신을 사랑해주는 몇 안 되는 존재만으로 인간은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다소 가볍게 그린 것 같아 어째 미묘한 감상이 남았다. 조금 나쁘게 말하면 인간의 외로움은 남들이 지나가다 돌아볼 정도로 뛰어난 외모의 애인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는데... 단희의 고민과 열등감이 여러모로 복합적이고 무게감이 남달랐던 만큼 나쁘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결말엔 재고의 여지가 있었다고 본다.


 여러모로 지금 내 현실과 맞닿은 부분이 많고 가끔씩 누워서 침을 뱉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속이 뜨끔한 내용들도 적잖았지만 그런 만큼 내 모습을 객관적이고 따뜻하게 되돌아볼 수 있어 이 작품과의 두 번째 만남은 기대 이상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약간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요새 작품 활동이 뜸한 김민서 작가의 전성기 시절의 필력을 오랜만에 감상한 게 반가웠고 거의 10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나와 비슷한 세대의 고민은 대개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것도 위로가 됐다. 참으로 적절한 시기에 내가 공감해 마지않을 수 있는 내용의 작품을 읽어 우울하기 짝이 없던 연말과 바로 다가올 연초를 희망차게 보낼 수 있을 듯하다.

너무 우울해 하지 마. 원래 자신이 원하는 직업군의 미래는 대개 암울한 법이야.

왜 그럴까요?

스스로 당당하게 발 뺄 구멍을 미리 만들어두는 거지. - 87p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순해. 네가 아깝게 버린 시간은 이미 어쩔 수 없어. 그리고 네가 최선을 다해 살지 않은 이유는 최선을 다하고 싶은 무언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뭐든 잘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부담스러우면 네 인생의 무언가를 찾게 될 거라고 꿈꾸면 되잖아. 그것도 어려워? -24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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