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블랙 캣(Black Cat) 17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이기원 옮김 / 영림카디널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7.9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 우울해질 것 같은 에를렌뒤르 형사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 남다른 분위기의 아이슬란드 추리소설 시리즈는 세계적인 명성에 비해 국내에 출간된 책이 적다. 그래도 4권이나 출간된 걸 보면 나름대로 선방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 이 책을 읽음으로 인해 국내에 소개된 작가의 책을 모두 접한 나는 기분이 허탈해졌다. 내 느낌상 이 시리즈나 작가가 대단한 이슈화되지 않은 이상 에를렌뒤르 형사의 이야기는 이대로 묻히고 말 것 같아서 말이다. 당장 내가 이 책을 중고서점에서 구한 걸 생각하면 앞으로도 후속작이나 아직 출간되지 않은 시리즈의 다른 작품이 출간될 리가 만무하다.

 사뭇 비관적인 출간 전망과는 달리 시리즈의 작품 하나하나의 완성도와 매력은 출중한 편이다. 추리소설의 불모지라는 아이슬란드에서 이만한 추리소설을 집필하는 작가의 존재는 정말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하다. 비록 시리즈를 순서대로 읽지 않고 뒤죽박죽 접해서 -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도 처음에 이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이게 다 시리즈를 순서대로 출간하지 않는 출판사 탓이다. - 에를렌뒤르의 곡절이 많은 가정사나 정서에 적응하는 데 약간 시간이 걸렸지만 작품의 주요한 사건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기에 그런 부차적인 아쉬움엔 별로 눈길이 가지 않았다. 나중엔 재독할 때 시리즈 순서대로 읽어야겠다.


 다소 엽기적이고 민망한 상황에서 호텔의 도어맨을 살해한 범인을 찾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년 합창단원으로 추정되는 화자의 독백으로 이뤄진 어딘지 성스러운 프롤로그와 상반된 분위기의 이 도입부는 제법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산타 복장으로 이벤트에 참여하기로 한 호텔의 몇 십년지기 도어맨이 자신의 개인 공간에서 산타 복장 그대로 바지가 내려진 상태에서 성기에 콘돔이 씌워진 채로, 누가 봐도 성관계 중에 칼에 찔린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죽은 것만큼 입에 담기 꺼림칙한 상황도 없기 때문이다. 에를렌뒤르와 그의 동료들은 살해된 도어맨의 신분을 확인하고자 호텔 직원들을 상대로 탐문을 시작하는데, 씁쓸하게도 그 누구도 도어맨과 친하지 않았고 대신 대다수의 직원이 이 사건으로 인해 호텔의 평판이 떨어질까 그 걱정만 하고 있다.

 시리즈의 다른 작품에서 강조된 바 있는데, 아이슬란드에서 강력 범죄, 특히 살인은 매우 드문 종류의 범죄라고 한다. 이는 아이슬란드는 물론이거니와 노르웨이 등 다른 북유럽 국가에도 해당하므로 북유럽 추리소설엔 '어떻게 우리나라에서 이런 범죄가?!' 라는 정서를 강조하는 장면이 잊을 만하면 꼭 등장한다. 이런 장면에선 대개 자국의 치안과 사람들의 선한 의지에 대한 믿음이 배신당한 것에서 충격을 받거나 연쇄살인범의 등장이라는 부정적인 가능성을 부정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 작품 <목소리>에선 살인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반응 양상이 사뭇 달랐다. 아무리 고급 호텔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속물적으로 호텔의 평판을 걱정하고 도어맨의 명복에 무관심한 건 내가 봐도 좀 너무하다 싶었던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접한 인드리다손 작가의 <저체온증>에서 그랬듯 - 그 작품은 <목소리>의 다음다음다음 후속작이다. - 에를렌뒤르는 피해자의 신원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약간의 헤맴을 겪다가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사건을 허무하게 해결한다. 후반으로 갈수록 우울하고 몽롱한 분위기가 짙어지다가 모호한 형태로 결말이 나서 통상적으로 추리소설하면 떠오르는 명료한 결말에 익숙한 독자라면 찝찝함이 남을 것이다. 나는 <저체온증>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고 이 작품 <목소리>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사건의 규모나 후반으로 갈수록 대단한 전개나 반전이 나오지 않아서 아쉬움이 컸다. 유력한 용의자가 나오지 않았으니 범인의 정체가 놀라우리라는 기대는 애당초 하지도 않았지만, 살해된 도어맨의 정체나 그의 우울한 삶의 궤적이나 내적 고민이 충분하게 묘사되지 않았다는 게 제일 아쉬운 부분이었다.

 인드리다손의 추리소설은 사건 해결의 쾌감이 아닌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에 대한 비통함을 독자와 공유하는 것에서 그 매력이 십분 발휘된다고 보는데 이 작품 속 피해자의 이야기는 분량에 비해 생각보다 깊이 다뤄지지 않았고 소재 자체도 피상적으로 다룬 감이 있어 유독 결말이 허무하게 읽힌 것 같다. 이미 작가의 스타일에 대한 선행 학습이 된 터라 크게 실망하진 않았지만 기껏 초반에 몰입도를 끌어올렸던 것에 비해 후반부가 미흡해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또 일반적으로 접하기 힘든 보이 소프라노에 대한 작가의 사유도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등 전체적으로 독특한 배경과 분위기, 소재에 비해 평이한 작품이었다. 용두사미란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


 어쩌면 아이슬란드 추리소설이 평이하게 읽힌다는 것이 좀 특이하게 들릴는지 모르겠다. 내가 일본 추리소설 다음으로 북유럽 추리소설의 문법에 꽤 익숙해서 그런가 이제는 북유럽이 배경인 것만으로 독특하다며 감탄하지 않게 됐다. 그것도 그렇지만, 결국 아이슬란드도 다 사람 사는 곳이란 생각을 인드리다손의 작품을 통해 자주 해왔던 터라 더 이상 '아이슬란드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는 놀라움'이나 '아이슬란드식 살인'이 신선하지가 않다.

 초장에 말했듯 이 시리즈가 작품 외적으로 이슈화되지 않은 이상 이 시리즈의 다른 작품을 더 만나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국내 추리소설 독자에게 어필하기엔 화려함이 부족하기도 하고 결말도 늘 모호한 감이 있어 질색할 독자도 적잖을 듯하다. 아이슬란드를 비롯해 북유럽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에 관심이 있는 일부 독자를 제외하면 '아이슬란드 추리소설'이란 이유로 남에게 추천하기엔 주저된다. '에를렌뒤르 형사' 시리즈가 진지하고 훌륭한 사회파 추리소설이긴 하지만 우리나라 바로 옆나라에 사회파 추리소설로 명성이 자자한 작가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어 인드리다손에게 관심을 기울일 독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싶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국내에 이 작가의 작품이 더 출간되지 않을 것 같아 불안하고 아쉽기 그지없다. 아마 내가 국내에 소개된 4작품 모두를 재독하더라도 작가의 신간이 역간되지 않을 것 같은데 부디 나의 비관적인 전망이 틀리길 바란다. 하지만, 4권이나 출간된 게 기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 만큼 헛된 기대는 하지 말아야겠다. <목소리>를 비롯해 '에를렌뒤르 형사' 시리즈가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처럼 모든 작품이 압도적으로 재밌다면 또 모를까... 차라리 내가 영어로 번역된 소설을 읽는 게 더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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