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콜라 쇼콜라
김민서 지음 / 노블마인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9.7







 이 책을 처음 접했던 9년 전엔 이 책이 입시를 소홀히 하면 암울한 미래가 찾아오리라는 예언처럼 다가왔다면 지금은 예정대로 암울한 미래를 살고 있는 나에게 보다 따뜻한 작품으로 비쳐졌다. 최근 연달아 비참한 일을 겪는 상황에서 자존감이 한없이 낮은 아린과 맹목적으로 성공을 쫒느라 외톨이가 된 단희의 모습은 꽤나 위로가 됐다. 사실 나는 이 둘의 단점을 모두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터라 이들이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는 것만으로 한껏 비참한 기분에 휩싸여야 했지만... 그도 그럴 것이 단희처럼 남부럽지 않게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단희의 부러움을 사는 아린의 사교성이 내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나한테 있어 작중 인물들의 처지와 고민은 내가 고등학생 시절에 읽었을 때보다 더 피부에 와 닿으며 내 일처럼 느껴졌다. 딱 이들과 같은 나이대에 처한 만큼 이들에게 내 모습을 투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게 정신건강에 무척 해롭단 건 머리로는 알지만 사람인 이상 너무 뛰어난 존재가 곁에 있고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비교를 일삼으면 주눅들거나 자신의 인생에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다. 다행히 나는 형제도 없고 사촌 동생과도 터울이 커 그런 적이 거의 없었지만, 올초에 가시적인 성과가 미미한 날 두고 명문대를 재수해서 들어간 사촌 동생과 비교하는 부모님의 비난을 들은 기억이 나 - 그런 망발을 할 만한 원인을 내가 제공하긴 했지만 그래도 당신께선 그 말을 한 것을 꽤 후회했던 모양인지 나중에 사과하셨다. 이미 열차는 떠났음에도. - 작품 속 아린이 심정이 내가 그때 느낀 그 기분이었을까 싶었다. 나야 어쩌다 한 번이니까 속으로 삭히고 넘어갈 수 있지만 아린으로선 어렸을 때부터 지속적으로 시달렸을 테니 자신의 열등감을 주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린의 열등감의 원흉인 단희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희는 마냥 행복한 인생인가? 아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타인에게 열등감을 안겨주는 존재감은 아이러니하게도 단희 본인에게도 적잖은 열등감을 안겨준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쇼콜라 쇼콜라>는 칙릿 소설을 전문으로 쓰는 김민서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사전에 칙릿을 검색해보면 '젊은 여성들의 삶과 취향을 다룬 문예물'이라고 나오는데 비하의 의미는 아니지만 소재의 특성상 가볍고 사사로운 내용이리란 저평가를 받곤 하는 장르다. 개인적으로 칙릿 소설을 많이 접하진 않았지만 아니샤 라카니의 <화려한 수업>이나 김민서 작가의 작품들을 접한 내 입장에선 칙릿 소설들이 대체로 가벼울 순 있어도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특히 김민서 작가의 경우에는 대중이나 평단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작품을 쓸 수 있지만 일부러 칙릿 소설을 쓰지 않나 싶을 만큼 안정적이고 흥미로운 필력이 돋보여 장르에 대한 편견을 지우게 해준다. 간간이 고루하거나 무게감이 없는 묘사가 있는 편이지만 그마저도 칙릿 소설이란 구색을 갖추기 위해 집어넣는 요소란 생각이 들 정도로 주제의식이나 캐릭터 묘사가 일품인 작가다.

 작가의 대표작인 <나의 블랙 미니 드레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쇼콜라 쇼콜라>도 여성들의 이야기가 아닌 젊은 세대의 고민이 담긴 성장 소설로 읽혔는데 이 작품에는 두 가지 상반되는 종류의 고민을 하는 두 인물을 등장시킨다. 인생을 낭비했다는 자괴감과 마땅히 하고픈 일도 없는데 주위의 시선을 무시하지 못하는 아린과 남부러울 것 없이 목표를 향해 정진했지만 그 결과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모르는 반듯한 단희, 설정만 놓고 봤을 땐 단연 단희의 처지가 좋아 보이지만 작가는 두 인물의 고민을 거의 동일한 무게감으로 전달하는 것에 성공한다. 그 결과, 인생의 성공이란 가시적인 성과나 사회적으로 합의된 가치만으로 재단하기 어렵다는 것을 어필한다. 재밌는 건 이러한 어필을 무대책의 화신이랄 수 있을 아린의 남자친구인 우주의 입을 통해서 한다는 것이다. 그의 낙관주의는 어쩌면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나마 갖고 있는 것의 가치마저 격하시키는 낮은 자존감과 타인과의 관계를 버거워하는 자기파괴적 고민이 모두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얻은 불행이라니... 누가 그걸 모르겠냐만, 최근 KBS에서 런칭한 프로그램 <북유럽>에 출연한 김중혁 작가가 '책은 독자로 하여금 교훈을 어렴풋이 짐작하게끔 해준다는 점에서 부담이 적다'는 내용의 발언을 생각한다면 이 작품도 그 문법에 따라 교과서적인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한 셈이라 할 수 있다.


 상술했듯 아린과 단희의 단점을 모두 갖고 있는 내 입장에선 둘의 고민의 내용이 뼈아프게 다가왔는데 이 둘이 고민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내 모습도 함께 돌아보게 됐다. 단희는 비밀투성이인 남자친구의 가면을 벗기면서 그와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며 용기를 얻고 아린은 초반에 스쳐가듯 묘사된 주먹밥 싸는 일에 대한 애정을 인정하며 인기 주먹밥 가게의 2호점 점장이 되는 쾌거를 달성한다. 교사처럼 남들에게 부연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에 대한 미련과 스스로의 적성과의 괴리감을 인정한 다음부터 얻은 성과다.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한 아린에게 밝고 건전한 미래가 굴러 들어온다는 전개는 허무할 정도로 바람직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쉬운 길을 놔두고 그렇게나 방황한 아린의 모습에 나도 내가 잘하고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외면하고 내 능력 밖의 목표를 추구하는 건 아닐까 하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니 그렇게까지 헛걸음하는 중은 아니라는 결론은 나왔지만 내가 미련을 갖는 것과 현실적으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는 시선은 항상 견지해야겠구나 싶었다. 내가 초반에 아린의 모습을 보고 '임용고시보다 요식업 쪽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라고 느낀 것처럼 나 또한 누가 옆에서 봤을 때 비슷한 의문을 느끼지 않게끔 말이다.


 단희의 경우는 조금 미묘한데, 원리원칙을 중시하며 입바른 소리만 하는 그녀의 꽉 막힌 사고가 일련의 사건을 통해 딱히 유연해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은따를 당하고 사촌 언니에겐 엄친딸이란 이유로 쓴소릴 듣는 등 존재 자체만으로 남을 갑갑하게 만든다는 점은 당사자로서 큰 고민이 아닐 수 없는데, 흥미롭게도 이 소설은 단희의 사고가 사회적으로 환영받긴 힘들어도 그게 잘못이란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단희를 그렇게 키운 단희의 엄마나 그런 단희를 포용하지 않으려는 사회 분위기에 더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돌려서 비판한다.

 그렇게 단희는 위로를 받지만 중요한 건 단희 스스로도 자신의 성격에 대한 고찰, 어느 정도는 유연해질 필요성은 느끼지만 후반부에 이르러선 그녀의 남자친구인 마이클을 추적하는 전개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결론이 희미하게 내려진 게 마음에 걸린다. 단희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교우 관계가 좁고 사교성이 좋은 편이 아니라 그녀가 구체적으로 자신의 고민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내심 궁금했는데... 여자라면 한눈에 혹할 만한 외모의 남자친구가 있음이 밝혀지자 회사 직원들이 단희를 부러워한다는 식으로 마지막 장면이 연출돼 단희의 고민이 조금 성의없이 해소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적으로 개연성이 떨어지는 전개는 아니지만 '자신을 사랑해주는 몇 안 되는 존재만으로 인간은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다소 가볍게 그린 것 같아 어째 미묘한 감상이 남았다. 조금 나쁘게 말하면 인간의 외로움은 남들이 지나가다 돌아볼 정도로 뛰어난 외모의 애인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는데... 단희의 고민과 열등감이 여러모로 복합적이고 무게감이 남달랐던 만큼 나쁘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결말엔 재고의 여지가 있었다고 본다.


 여러모로 지금 내 현실과 맞닿은 부분이 많고 가끔씩 누워서 침을 뱉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속이 뜨끔한 내용들도 적잖았지만 그런 만큼 내 모습을 객관적이고 따뜻하게 되돌아볼 수 있어 이 작품과의 두 번째 만남은 기대 이상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약간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요새 작품 활동이 뜸한 김민서 작가의 전성기 시절의 필력을 오랜만에 감상한 게 반가웠고 거의 10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나와 비슷한 세대의 고민은 대개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것도 위로가 됐다. 참으로 적절한 시기에 내가 공감해 마지않을 수 있는 내용의 작품을 읽어 우울하기 짝이 없던 연말과 바로 다가올 연초를 희망차게 보낼 수 있을 듯하다.

너무 우울해 하지 마. 원래 자신이 원하는 직업군의 미래는 대개 암울한 법이야.

왜 그럴까요?

스스로 당당하게 발 뺄 구멍을 미리 만들어두는 거지. - 87p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순해. 네가 아깝게 버린 시간은 이미 어쩔 수 없어. 그리고 네가 최선을 다해 살지 않은 이유는 최선을 다하고 싶은 무언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뭐든 잘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부담스러우면 네 인생의 무언가를 찾게 될 거라고 꿈꾸면 되잖아. 그것도 어려워? -24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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