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7.6







 11년 전에 이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 이건 내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내용의 소설이라며 누구와도 이 소설에 대해 얘길 나누지 않았다. 이 소설이 부끄럽다기 보다 읽었다는 걸 그렇게 자랑거리로 삼을 만한 내용이 아니란 생각에 어디에도 이 소설을 완독했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 책의 내용은 얼추 이해가 됐지만 정서적으로 퍽 와 닿지 않았기 때문에 구태여 남들과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6년 뒤에 이 소설이 맨부커상 인터네셔널 부문에서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꽤나 의아스러웠다. 이토록 국제적으로 유명세를 얻을 만한 소설이었다는 감상을 처음 읽었을 때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의 문체도 수려한 편이고 특정 이미지를 발전시키는 역량도 출중하기에 감탄스런 장면도 많았지만 전체적으로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작품인 터라... 서양의 감성도 그와 다르지 않기에 각광을 받은 것인가 싶어 국위 선양의 소식을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들어야만 했다.


 <채식주의자>는 표제작 '채식주의자'와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몽고반점', 손목의 통증 때문에 아르바이트생을 섭외해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집필을 완성시킨 마지막 작품 '나무 불꽃'이 수록된 연작소설집이다. 세 번째 작품의 경우 가장 가독성이 떨어지고 내용도 지리멸렬한 편인데 그 내용을 알바생의 손으로 대신 집필해냈다니... 작가도 작가지만 그 알바생의 집중력도 대단하지 않은가 싶었다. 어쨌든 이 작품은 결과물을 떠나서 호불호가 무척 갈리는 내용인데, 그 말은 즉 호불호가 확실히 갈릴 만큼 색깔 있게 잘 썼다는 뜻이기도 하니 작가의 노고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 이 작품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는 사람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마음일 것이다. 소설의 만듦새보단 순수하게 소설의 감성이 기분이 나빴단 식으로 말이다. 이런 반응을 이끌어냈다는 게 어떤 의미에선 작가로서 이 연작을 집필한 보람이 느껴지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의도를 무의식적으로라도 갖고 있어야만 이런 글을 쓸 수 있을 테지...



 '채식주의자'


 이 책의 표제작이자 그나마 가장 정상적인 정서란 걸 접할 수 있던 작품. 화자가 썩 정감이 가는 인물은 아니지만 어쨌든 상식적인 인간의 시선을 대변해준다는 점에서 우리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그런데 누군들 영혜의 기행을 이해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그녀의 남편에게 비난의 화살을 쏟는 건 좀 부당한 일일 수 있겠다. 느닷없이 꿈을 꿨다는 이유로 채식주의를 실천하는 그녀를 도대체 누가 지지해줄 수 있단 말인가?

 이 작품에서 채식주의는 말 그대로 동물권을 위한 윤리적인 선택이라기보다 훨씬 근본적인, 이를 테면 살면서 두 번 다시 폭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다짐에 더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어렸을 때부터 크건 작건 폭력에 노출된 영혜가 꿈을 계기로 채식주의자로 돌변한 것에서 지금까지 폭력을 폭력이라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으니 지금부터라도 달리 살아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 결연한 의지, 좋다. 남들은 영혜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어쨌든 그녀가 그걸 원한다면 그 뜻을 존중 못할 것도 없다.


 문제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남들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고 예고도 없이 느닷없이 실천하는 독선적인 태도에 있다. 난 그 태도가 이기적이라 느껴진 나머지 영혜가 타인의 반발을 사는 게 아주 당연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극단적으로 실시하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의 특성상 분명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뜯어 말릴 거란 생각을 - 그렇다고 해서 영혜의 아버지가 자신의 딸의 입을 억지로 벌려 고길 넣으려 한 게 상식적인 일이라는 건 아니다. - 영혜는 정녕 하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그런 생각도 못할 만큼 절박했던 걸까. 그랬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남편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거나 설득하려는 최소한의 의지도 없이 단지 '꿈을 꿨어요' 라고 채식주의의 이유를 밝히는 건 너무나 지나치게 사회성이 결여된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치 자기가 지금 꿈 때문에 이러는 거니까 이 이상 묻지도 따지지 말라고 벽을 치는 듯했다. 10년 전엔 영혜 혼자 채식을 하겠다는 데 가족들이 지나치게 개입하는 거 아니냐며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 와서 읽으니까 오히려 타인의 이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영혜의 모습이 너무 이기적으로 느껴져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몽고반점'


 차라리 첫 번째 수록작은 귀엽다고 느껴질 정도로 2편은 더욱 정신이 아득해질 만한 전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과도한 채식주의와 자해로 정신병원을 드나든 처제(영혜)의 몸에 있는 몽고반점에 강렬한 영감을 받은 비디오 아티스트 화자가 영혜와 금단의 예술 작업을 갖는다는 형이상학적인 전개가 펼쳐지니 원. 읽다 보면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되면서 남편이나 가족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은 건 이 남자가 취한 행동에 비할 바가 못 되는구나 싶었다.

 물론 이 둘이 몸에 식물 그림을 그려 육체관계를 갖는 영상을 촬영한 건 나름 합의를 통해 이뤄진 전개이니 왈가왈부할 수 없는 측면도 있지만, 결국 이 남자의 예술혼이 어떻게 보면 영혜의 정신병을 더 부추긴 셈이 돼 이 작품 말미에 자신의 아내로부터, 또 이 책의 다음 수록작 '나무 불꽃'에서 두고두고 욕을 먹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남자가 영혜한테 영상 촬영을 제안하기까지의 갈등, 촬영하는 영상의 내용, 그 이후의 희열 등 내 정신 세계가 받아들이기 힘든 장면이 너무 많으므로 이 이상의 말은 생략하겠다.



 '나무 불꽃'


 유일하게 영혜를 포기하지 않던 그녀의 언니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 영혜를 감당하지 못해 이혼한 남편이나 영혜의 정신병을 부추기고 그녀와 몸을 섞기까지 한 남자와 달리 이 이야기의 화자는 영혜에게 끊임없이 눈물로 호소한다. 영혜가 기행을 일삼고 화자가 호소하는 반복적인 장면도 피곤하지만 그때마다 나오는 영혜의 정신 나간 대답은 매번 아찔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먹고 살다가는 죽는다는 말에 도리어 '왜 죽으면 안 돼?'라고 묻는데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이쯤 되면 정말 바라는 대로 해줘야 하지 않나 싶은데 사람의 마음이나 가족 관계가 또 그렇게 무 자르듯 쉽게 단절되지 않을 테니 영혜는 죽는 그 순간까지 지옥 속에서 살아가리라는 불길한 미래가 예상됐다. 결국 영혜는 그녀의 바람대로 누구에게도 고통을 주지 못할 시체가 되긴 될 텐데 그게 과연 해피엔딩이려나.

 나도 모르게 거친 표현이 많이 나온 것 같은데, 애당초 영혜의 채식주의나 이 소설의 전개에 대해 어떤 상식이나 논리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내 태도가 한참 잘못된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처음에 채식주의자가 됐다가 나중에 채식마저 거부하며 스스로 나무가 되겠다고 벌거벗은 채 물구나무를 서는 여자를 일개 독자인 내가 감당하려는 것부터가 자멸에 이르는 길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분명 처음엔 모든 종류의 폭력에 불응하겠음을 극단적으로 실천하는 여자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중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폭력에 불응하겠다며 자신과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폭력적인 결과를 낳는 전개가 펼쳐져 이 책 전체가 실로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초반에 채식주의는 육식을 하는 인간의 본성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다른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나왔는데, 이 말이 가장 핵심적인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육식이 곧 폭력이란 가정 하에 말하자면, 인간은 밖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식으로 생존해온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폭력을 멈추게 되면 도리어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꼴이라는 것, 그래서 자가당착에 빠진 채 어쩔 수 없이 죽고 말거나 아니면 죽기 싫어 마지못해 다시 폭력을 저지르는 존재가 바로 인간임을 작가는 강조하고 싶던 게 아니었을까.

 문학에서 인간의 폭력성이란 그리 참신한 주제는 아니지만 작가가 그에 걸맞는 무겁고 정신나간 작품 세계를 선보였으니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비꼬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굳이 이렇게까지 정신나간 작품 세계를 길게 써야 했을까 하는 의문은 들지만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식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재능이지만... 솔직히 말해 그렇게 자주 접하고 싶지 않다. 내가 이 작품을 완독했다는 게, 그것도 무려 두 번이나 완독한 내 스스로가 실로 장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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