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다면 재미있게 - 빠져드는 이야기를 위한 15가지 작법
벤저민 퍼시 지음, 이재경 옮김 / 홍시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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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대학에서 문예 창작을 전공하고 진로도 그쪽으로 정한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야기 창작엔 정답은 딱히 없지만 오답은 무수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 창작과 관련된 작법서를 읽지 않았다. 작법서 특유의 단정하듯 말하는 어투도 싫고 모두 알 만한 그저 그런 내용으로 페이지를 채우는 꼴도 보고 싶지 않다. 전자는 자신의 방식만 옳다 여기는 게 꼰대 같아서, 후자는 그걸 누가 몰라서 작법서를 펼치겠느냐는 반발심이 들어서다. 

 <쓴다면 재미있게>는 그런 내가 읽기에도 작가가 나름대로 치우치지 않은 위치에서 빠져드는 이야기의 공식이라 부를 만한 요소들을 일목요연하게 잘 짚어냈다고 여겨지는 작법서였다. 작가가 미국인이라 그런가 예시로 드는 소설이나 작품들이 주로 미국 중심이고 또 내가 그 작품들을 다 접해보지 못한 터라 예시를 든 정확한 목적이 확연히 와 닿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글 자체는 술술 읽혔다. 적당히 꼰대스럽고 적당히 자신감에 차있고 적당히 겸손하고 솔직한 작가의 태도가 무엇보다 신뢰할 만했는데, 특히 어렸을 때는 용과 흡혈귀가 나오는 소설만 탐독하다가 이후에 다른 종류의 소설에 독서 편력을 확장하게 됐더라는 내용의 도입부가 눈길을 끌었다. 가벼운 소설, 문장에 치우쳐진 소설 어느 한 쪽의 편만 들었다면 난 이 책을 더 읽지 않았을 테지만 작가는 상반된 형태의 두 소설의 장점에 모두 주목하자는 식으로 사고가 전개된 건 독자 입장에서 퍽 안도하며 읽을 수 있는 요소였다. 작가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독서는 위험하지만 분명 편하긴 하다. 난 그 편함을 제공한 작가의 필력에 일단 경의를 표하겠다. 


 어쩌면 가장 아쉬운 부분은 정작 벤저민 퍼시라는 작가가 이런 작법서를 쓸 수 있을 만한 작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를 안겨준 소설들을 접해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야 이 작가가 이론만 빠삭한 입만 산 작가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는데... 아이러니하다면 아이러니할 말이겠지만 사실 책의 내용 중 특기할 만한 구절은 딱히 - 굳이 얘기할 만한 게 있다면 독자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작가의 소제목 짓는 센스다. - 없었다. 반박하려면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겠지만 대체로 설득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어쨌든 작가가 궁극적으로 말하는 바는 서두에 명확히 밝혔고 뒤의 내용은 그 내용에다가 살을 더하는 것들이다. 우리가 이야기를 읽는 이유, 그런 이야기를 쓰기 들여야 할 노력과 빠지지 말아야 할 함정을 철저한 분석과 본인의 경험을 통해 디테일하게 풀어냈다. 

 예전에 학교에서 강의를 들을 때 가끔 교수들이 본인이 쓴 글로 강의 내용을 채운 적도 있었는데, 이 작가가 자신의 책에서 그 우를 범하지 않은 건 굉장히 칭찬할 만한 부분이었다. 자기 작품에 대한 얘기를 해봤자 그 작품을 집필할 때 들인 노력 정도지 자기 글의 완성도에 자화자찬하는 내용은 내 기억에 없었다. 대신 익히 알려진 명작이나 그렇지 않은 숨은 작품을 제목을 언급하며 예시로 든 건 좋았다. 좋은 작품을 추천 받았고 또 가끔 명작이 왜 명작 대우를 받는지 이유를 실감했던 적도 있었다. 이건 여담이지만, 예전엔 누군가 내게 명작이 위대하다면서 추천하면 꼰대인 것 같았고 굉장히 독서량이 적은 사람이라고도 여겼는데 요새는 또 생각이 달라졌다. 이 작가처럼 명작이 왜 명작인지 명확히 설명하는 사람을 몇 명 만나니까 편협한 세상 속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 책에 대해 얘기하는 내 말투에서 일말이라도 부정적인 뉘앙스가 풍겨졌다면, 내가 아직 편협한 세상 속에 있어서 이 책의 몇몇 내용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탓일 것이다. 상술했던 '이야기 창작엔 정답은 딱히 없지만 오답은 무수하다'라는 말은 일종의 핑계일 수 있다. 내가 아직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문단에 편입하지 못해 튕겨져 나오는 것에 대한 두터운 방어 기제라고 보여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저 입만 산 소설가 지망생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더디 걸리더라도 결국엔 내 작품 세계를 펼치게 될 소설가로 남은 것인가. 이는 굉장히 민감하면서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질문이다. 당연히 후자를 원하지만 그게 마냥 내 뜻대로 될 리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그런 희망은 이제 완전히 접었다. 그래서 평소에 외면했던 이런 작법서를 읽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괜찮은 변심이었던 것 같다.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 적어도 책 말미에 나온 이 작가의 고생담을 접하니 내가 갖고 있는 질문들이 나만 유별나게 모자라서 하게 되는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위안이 됐다. 물론 너무 위안 삼으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잠시 동안, 잠시 동안 숨은 좀 돌리려고 한다. 

호러는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작가로서 여러분의 사명은, 아무리 불편해도 가끔씩 그러나 책임감을 가지고, 인간 실존의 어두운 구석들에 피로 밝힌 램프를 들이대는 것이다. - 109p



인간은 모두 기본 설계가 같다. 여기 대퇴골이 있고 저기 간이 붙어 있는 건 똑같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모두 각양각색이다. 다 다르게 멍청하고 다 다르게 미련하다. - 1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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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4 (무선) 해리 포터 시리즈
조앤 K. 롤링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수첩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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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8 





 스포일러 있음 


 시리즈 대망의 마지막 이야기는 두 번째로 읽어도 극적으로 읽혔다. 매번 호그와트에 돌아가서 수업을 받는 반복적인 전개가 아닌 것도 신선했고 위기가 끊이지 않는 완급 조절도 절륜했다. 흔히 '죽음의 성물'에 대해 얘기할 때 스네이프의 정체와 볼드모트의 죽음을 주로 언급하지만 내가 봤을 땐 후반부 이전의 흥미진진한 모험담도 자주 언급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학교가 아닌 장소를 본격적으로 조명하는 롤링의 세계관 확장도 흥미로웠고 캐릭터를 퇴장시키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단호함엔 혀를 내두르게 됐다. 중간 중간 궁금증을 자아냈던 덤블도어의 과거나 죽음의 성물도 이야기에 인상적인 역할을 해냈다. 끝까지 찌질한 모습을 보인 론이 성장하는 모습이나 네빌을 주축으로 모인 불사조 기사단이 호그와트에서 볼드모트와 치른 전쟁 등 이전 작품들과 통일감이 있던 것도 좋았다. 법적으론 미성년자에서 벗어났다지만 해리와 친구들은 아직 성장의 여지가 남았다는 것, 그리고 이야기의 대미는 역시 호그와트에서 장식돼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도 '죽음의 성물'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으로 스네이프의 정체와 볼드모트의 죽음을 들고 싶다. 볼드모트의 죽음에 대해 먼저 말하자면, 나는 개인적으로 볼드모트와의 결투가 마무리되는 방식이 제법 신선했다. 무력의 크기로 결판이 나는 것이 아니라 전편의 결말에서 이어져 온 무수한 떡밥을 회수해 심플하고 쾌감 넘치는 결말이 취향에 맞았다. 약간 초라하고 맥이 빠지는 결말일 법했으나 모든 면에서 덤블도어보다 몇 수 아래였던 볼드모트에게, 죽음을 두려워해 무려 7개로 영혼을 쪼갠 볼드모트에게 애당초 승산 따윈 없었음이 단적으로 드러난 대목이 아닌가 싶었다. 물론 볼드모트는 꽤 사악하고 위협적이었지만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의 떡밥으로 등장한 그린델왈드와 소싯적의 덤블도어에 비하면 하수에 지나지 않음을 7권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막판에 이르러선 해리에게 실컷 조롱이나 당하는 꼴이라니...ㅋ 하긴, 결과적으로 살았지만 죽음을 각오했고 실제로 살인 주문에 정면으로 마주하기까지 한 해리의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 이처럼 사람의 강함은 온전히 무력의 크기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듯한 작가의 주장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롤링이 지금이야 설명충이니 뭐니 하면서 갖은 비판을 면치 못하는 실정이지만, 확실히 이 작가가 펼친 세계관은 정말 방대하고 매력적인 건 부정할 수 없다. 시리즈의 본편만으로 다 묘사가 되지 않아서 영화까지 나온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 영화 때문에 오히려 망한 것 같지만 그래도 이 본편만은 정말 전설이라 생각한다. 특히 내가 가장 고평가하는 부분은 반전을 연출하는 작가의 솜씨인데, 내용이나 복선도 뛰어나지만 이 작품 '죽음의 성물'에선 그 반전에 담긴 주제의식도 좋아서 유달리 놀랍고 감동적으로 와 닿았다. 적어도 이 작품의 반전에 한해서 롤링은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스네이프는 이 시리즈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복합적인 캐릭터기도 하다. 첫 만남부터 최악의 인상이 남은 탓인지 해리는 줄곧 스네이프를 적대적으로 바라봤다. 그렇기에 해리의 시선을 너무 맹신해선 안 될 테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스네이프는 마법 실력은 제대로지만 호인은 결코 아니고 교사로서도 적합한 인물은 아니었다. 반전을 알기 전이나 알고 난 뒤나. 그가 용기 있는 이중 스파이고 또 릴리를 향한 절절한 사랑 때문에 많은 부분이 미화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시리즈 내내 해리가 속한 그리핀도르와 자신이 맡은 슬리데린을 대놓고 차별 대우하는 것이 대표적인데, 이중 스파이를 위한 연기라고 하기엔 분명 지나친 구석도 - 그에 대해 뉘우치거나 스파이 행세에 멘탈 붕괴를 겪는 장면이 부족한 탓인 듯하다. - 없잖았다. 다시 말하지만 덤블도어의 말마따나 사랑을 경시하는 볼드모트에 대적하기 위해 스네이프 같은 로맨티스트의 역할은 작품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꽤나 중요했지만, 한편으론 결국 그 사랑이 없었다면 스네이프는 반전 같은 건 일어나지 않고 전형적인 죽음을 먹는 자로 남았을 것이란 얘기다. 


 내게 큰 감명을 준 부분은 스네이프가 스파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스네이프에게 건넨 덤블도어의 말이었다. 우리(호크와트)가 학생들을 너무 빨리 분류하는 것 같다고...... 

 덤블도어의 말대로 확실히 호그와트는 입학한 학생들을 너무 일찍부터 편가르기 하는 것 같다. 머글보다 전근대적인 마법사 세계에서 이를 캐치한 사람이 무척 적은 것 같은데, 인간의 성정은 타고나는 동시에 자라면서 체득하는 것이기도 하다. 호그와트의 네 기숙사 중 노력으로 뒤집을 없는 요소는 슬리데린의 순수 혈통 여부다. 나머지 기숙사가 내세우는 용기, 지성, 정의는 교육자가 학생에게 어떻게 개입하느냐에 따라 발현 여부가 완전히 달라지는 항목들이다. 그런데 호그와트는 이 네 기준을 토대로 학생들을 편가르기 한다. 그렇게 편이 갈라진 학생들은 자연스레 서로 적대하게 된다. 경우에 따라선 증오하게 되고 이 증오는 대물림되기까지 한다. 

 사람에겐 소속감이나 대항 정신을 갖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이 기숙사 제도의 문제점은 기숙사에 들어가는 기준이 대체로 인간 성정에 밀접하다는 것이다. 가령 용기 있는 사람은 용기 있게 태어났으므로 언제까지고 용기 있을 테니 그리핀도르 기숙사에서 끼리끼리 어울리라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그리고 소속 기숙사 학생은 자신이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도취돼 다른 기숙사 학생을 자신도 모르게 깔보기 십상이다. 다른 기숙사도 다를 바 없고 슬리데린은 제일 심각하다. 순수 혈통끼리만 모이는 것도 문제지만 다른 기숙사로부터 적대를 당하는 것은 더욱 심각하게 여겨야 할 문제다. 학생들보고 두루 두루 어울리라고 권하긴커녕 가치관의 대립을 어린 시절부터 조장하는 것은 호그와트 기숙사 제도의 폐해가 아닐 수 없다. 이 지점이 작중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난 게 볼드모트를 비롯한 순수 혈통 우월주의자인 죽음을 먹는 자들의 등장, 그리고 스네이프가 어린 시절부터 릴리와 머로더즈 4인방과 친해지려야 친해질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미 혼혈인 스네이프가 슬리데린에 들어간 것이나, 그런 스네이프가 '예정된 수순'대로 죽음의 먹는 자가 되어 재능 덕분에 볼드모트의 신임을 얻는 것, 하지만 릴리를 향한 사랑으로 처음엔 탐탁찮던 이중 스파이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그 진실의 내막을 해리를 포함하여 덤블도어의 지인들 그 누구도 짐작할 생각조차 안 한 것 등 기숙사로 촉발된 마법사들의 편 가르기, 그리고 마법사 모자의 기숙사 선택을 맹신하는 마법사들의 믿음은 자못 심각하다. 기숙사는 그저 배경일 뿐인데, 그리고 태어날 땐 어땠는지 상관없이 사람은 누구나 변하는 법인데 마법사들은 모자가 정해줬으니 서로 대적할 운명이란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이런 비극은 마법사 개개인의 탓이라기보단 오래도록 이어져 온 구조적인 문제라 봐야 하겠지만...... 

 작중에서 마법사와 머글이라 분류하긴 하지만 결국 마법사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 이 점이 이 작품의 현실적인 부분에 큰 기여를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설정과 통찰력의 현실성은 '해리포터' 시리즈가 여타 판타지 문학과 차별화되는 강점이라 생각하는데 마법사도 인간이라는 통찰은 곧 순수 혈통의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마법사가 귀하다는 작품의 표면적인 주제의식과도 일맥상통하게 읽혔다. 마법사도 결국 인간이므로 머글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편을 갈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게 씁쓸한 대목이지만 한편으론 가상의 세계관 속의 캐릭터들이 어느 정도 평화를 이룩하는 걸 보노라니 꽤나 힐링이 됐다. 엄밀히 말해 '해리포터'가 동화는 아니므로 전후에 모든 일이 척척 잘 풀리진 않았겠지만 이 정도면 매우 희망적이지 않은가. 


 원래 이 책을 다 읽고 이제 <반지의 제왕>에 도전해볼까 생각했는데, 찾아보니까 이미 완결이 난 이 시리즈의 후속편이 있다기에 그 작품까지 읽어봐야 할 듯하다. 특이하게 그 작품은 희곡이라는데 희곡이든 뭐든 단일 작품으로 완결이 났다니까 기대가 된다. 한 편 한 편이 단일 작품다운 완성도가 부족했던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에 비하면 희곡은 기대해봐도 되겠지. 아무튼 작가가 만든 세계관이 워낙 방대해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접할 용의는 있다. 설정 오류만 없다면 후속작은 얼마든지 환영이다. 

 <해리 포터와 저주받은 아이>. 과연 볼드모트 사후에 마법 세계의 혼란은 잘 처리됐을지 아니면 또 개판이 됐을지 확인해봐야겠다. 그 다음에 이 시리즈의 전체적인 감상을 풀어낼 예정이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사실 우리가 학생들을 너무 일찍 분류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네...... - 4권 183p



죽은 자들을 불쌍히 여기지 마라, 해리. 산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라. 그중에서도 사랑 없이 사는 사람들을 가장 불쌍하게 여기렴. - 4권 25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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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시간이 머무는 곳 (특별 리커버 에디션) - 스페인, 포르투갈 문화&아트 투어 전문가 최경화의 포르투갈 완전 탐구
최경화 지음 / 모요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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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해외 여행이 그림의 떡인 상황에서 이런 책을 읽는 게 정신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러시아나 터키, 멕시코, 대만, 영국, 스페인 등 여러 나라에 대한 엄청난 '뽕'에 취하곤 한다. 내 경우엔 이런 책이 꽤나 도움이 된다. 읽는 동안엔 마치 마음만 먹으면 바로 해외에 떠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말 그대로 덧없는 착각이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땐 꽤나 유익하리라 믿는다. 정말로 언젠간 떠날 수 있는 날을 고대하면서 오늘을 더 열심히 살아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사설이 길었는데, 최근에 포르투갈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져서 이 책을 읽어보게 됐다. 읽은 사람들 평을 접해보니 포르투갈 입문용으로 제격인 책이라고 한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포르투갈에 대한 사전 정보가 아예 없다시피 한 내가 읽어도 이해가 쏙쏙 가고 그 나라의 매력이 잘 전해졌다. 전문적인 여행 서적은 아니지만 작가가 스페인어와 미술사학을 전공한 덕에 일반적인 여행 서적보다 언어와 문화, 미술에 조예 깊은 내용이 많았다. 물론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엄연히 다른 나라이므로 - 그 점을 독자에게 정확히 알리는 게 이 책을 집필한 이유라고 저자가 서두에서 밝히기도 했다. - 스페인 문화에 조예가 깊은 작가가 얼마나 전문적으로 집필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겠지만, 읽고 나니 오히려 스페인 문화에 빠삭하기에 스페인 문화와 뚜렷이 구분되는, 상대적으로 생소한 포르투갈의 문화에 대해 더 예리하게 짚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 작가의 남편이 포르투갈 사람이고 현재 포르투갈에서 같이 살고 있다고 한다. 배우자가 외국인이라고 그 나라에 빠삭해지는 건 아니지만 이만하면 작가의 전문성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봐도 무방한 듯하다. 


 포르투갈의 미적 감각이 대표적으로 발현된 아줄레주 타일을 비롯해 여러 건축 양식, 에그타르트와 포트 와인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식문화, 리스보아와 포르투 - 리스보아는 리스본의 포르투갈 원어 발음 - 의 관광 명소 및 로컬 명소, 그 외에 다른 도시들까지 다룬 이 책은 작가가 집필을 위해 제법 노력했다는 흔적이 전해졌다. 포르투갈의 역사나 예술 어느 한쪽에 대해 얘기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저자는 가급적 많은 것을 담아내려 애썼고 포르투갈의 그늘진 부분, 살라자르 독재 시절이나 그로 인한 경제 침체 등도 짧지만 가감 없이 담아냈다. 개인적으로 예술 파트에 비해 역사 부분의 분량이 상대적으로 적게 할애됐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특히 관심 있던 살라자르 독재와 카네이션 혁명 등으로 유명한 포르투갈 근대사가 중세 시대에 비해 간략히 다뤄진 감이 있어 그 부분이 좀 아쉬웠다. 명색이 출간 5주년을 기념한 리커버 에디션인 만큼 내용이 더 증강됐으리라 기대하고 일부러 리커버 에디션으로 구매했는데, 아무래도 내 기대가 너무 컸던 것 같다. 

 한때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한 포르투갈이 어쩌다 이토록 존재감 없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지 궁금한 독자라면 이 책을 읽는 것은 그리 적절한 선택은 아닐 것 같다. 이 책이 무슨 포르투갈 문화를 무조건 찬양하고 보는 감상적인 책은 결코 아니지만 포르투갈의 미적 감각을 엿보기엔 적절할지언정 포르투갈의 역사를 완전히 익히기에 좋은 선택이라는 말은 하지 못하겠다. 다만 책에 수록된 사진이나 소개되는 미술 양식들에 대한 서술이 출중하고, 또 책의 만듦새가 워낙 예뻐 소장 가치는 충분하다는 건 강조하겠다. 


 어디까지나 입문용 도서라는 본분에 충실했을 뿐, 이 책을 정말로 포르투갈 여행 때 들고 갈 정도로 희소성 있는 내용은 크게 없었다. 하지만 나처럼 포르투갈에 무지한 독자를 위한 입문용 도서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그 본분에 충실했던 저자의 노력을 이 이상 폄훼하고 싶진 않다. 이건 비꼬는 말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입문자를 위한 책이 없으면 누가 포르투갈에 입문할 수 있단 말인가. 내 경우엔 이제 입문이 끝났으니 다른 전문적인 책을 찾아 읽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니 아쉬움은 아쉬움 대로 언급하되 구태여 이 책의 단점이라고까지 강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렇게 한사코 부정하는 게 더욱 미심쩍게 들릴 걸 알지만 아무튼 난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미술에 대한 작가의 지식이 예사롭지 않아 작가가 집필한 다른 책도 궁금해졌다. 찾아보니 <스페인 미술관 산책>이란 책을 집필했던데, 스페인 미술관에 대한 로망이 적잖은 내게 있어 놓칠 수 없는 책일 것 같다. 그 책은 꼭 읽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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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카 에프 그래픽 컬렉션
닉 아바지스 지음, 원지인 옮김 / F(에프)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9.7 







 지구 최초의 우주 여행자로 알려진 라이카는 사실 러시아어로 짖는 개를 뜻한다. 라이카의 본명은 쿠드랴프카이며 이 이름은 사람 대신 우주 탐사 훈련을 견뎌야 했던 개들에게 소련 과학자들이 붙여준 애정 어린 이름 중 하나다. 곱슬머리. 뜻도 짖는 개에 비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세간에는 라이카라는 이름이 발음하기 쉬워서 그런지 더 많이 알려졌지만 나는 쿠드랴프카라 기억해야 하는 게 훨씬 옳지 않나 싶다. 그래서 이 글에서나마 나는 쿠드랴프카를 쿠드랴프카로 부르겠다. 

 쿠드랴프카를 통한 실험은 어느 뭐로 보나 인간의 욕심을 위한 희생, 개죽음에 불과했다. 소련이 자신들의 사회주의가 미국보다 우월하다는 걸 선전하기 위해 일부러 무리하게 스케줄을 잡아 쿠드랴프카가 우주에서 지구로 귀환할 수 있는 계획을 짤 시간이 부족했다. 우주로 떠난 쿠드랴프카는 실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사망했지만 당시엔 우주를 일주일 정도 돌아다니다 안락사 캡슐을 먹고 인도적으로 죽었다고 알려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삶이었던 것이다. 


 이 만화를 읽기 전 내가 쿠드랴프카의 일화에서 가장 소름 끼치게 여기던 대목은 쿠드랴프카가 우주에서 일주일 가까이 좁은 우주선에서 있다가 안락사했다는 것이었다. 사람도 무엇도 아무것도 없는 좁은 우주선에서 우주가 뭔지도 모르는 쿠드랴프카로선 인간이 시킨 대로 생존하고 주어진 캡슐을 먹고 마지막에 안락사당했다는 게 너무 가여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이 퍼뜨린 광고는 도리어 그들이 우주선 실험을 위해 개의 생명이나 고귀함 같은 건 우습게 여긴다는 것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 셈이다. 

 사실이 어떻든 간에 쿠드랴프카가 소련에게 남긴 데이터는 제법 요긴했다지만, 나중에 쿠드랴프카를 비롯한 우주견들을 돌본 박사 중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우린 개 한 마리의 죽음을 정당화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낱 개의 생명이 우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인류의 대의 앞에서 뭐 그리 중요할까 생각할 사람이 있겠지만, 개는 인류가 자신보다 약하디 약한 존재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대표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순종적이고 대가 없는 충성을 보인다 해서 인간 대신 실험 대상으로 삼아 미지의 세계인 우주에 다짜고짜 보내는 게 과연 윤리적으로 아무 문제 없는 걸까? 차라리 우주에서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죽었다는 게 나은 건지 모르겠다. 쿠드랴프카로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지만, 자신이 우주의 외톨이가 됐다는 배신감과 적막함과 마주하지 않았다는 게 종이 한 장만큼 다행으로 여겨졌다. 


 이 작품은 쿠드랴프카의 실화를 바탕으로 몇 가지 만화적 상상력을 동원해 이야기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연출하고 있다. 고증은 철저히 했지만 가령 쿠드랴프카가 어떻게 잡혀서 우주기지로 왔는지, 그 특유의 얌전함과 영리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소련 우주기지 사람들이 생각보다 잔인하지 않았으며 쿠드랴프카를 비롯한 개들에게 정을 품었지만 소련 특유의 냉혹하고 고압적인 분위기 탓에 차마 개들이 희생되는 실험에 거역할 수 없는 것에 자괴감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등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한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 과장된 장면은 없었고 다소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쿠드랴프카의 시점도 무언가 웅장하게 다가왔다. 이 시점은 보는 이의 부채감을 더욱 부추기는데 이런 요소가 너무 눈물겨워서 개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선뜻 권하지 못하겠다. 

 <라이카>는 우주 배경으로 한 작품 중 가장 독특하고 남다른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두긴 했지만 그로 하여금 이만한 메시지와 이야기를 풀어내는 인간의 상상력과 감수성은 확실히 특별한 구석이 있다. 하나의 현상을 두고 끊임없이 재평가를 내리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모르긴 몰라도 이 작품의 저자처럼 과거의 사건을 추적하고 재해석하는 사람들 덕분에 인간은 조금씩 성장하는 존재가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고 쿠드랴프카의 희생이 정당화될 순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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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9.3







 박노자란 이름은 종종 들어봤지만 저서는 처음 접해본다. 노서아(러시아)의 사람(자)이란 의미로 지은 한국 이름 박노자. 한국인의 도움 없이 그의 자력으로 이 책을 썼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너무나 고급 어휘를 구사해 당연히 한국인이 썼거나 한국인의 도움을 받은 줄 알았다. <비정상회담>의 타일러보다 뛰어난, 오히려 그 이상의 한국어와 언변을 갖춘 사람이라 생각됐다.

 저자가 서두에서 밝히듯 이 책은 한국과 노르웨이를 비교해 무조건 그 나라를 배워야 한다고 찬양하는 책이 아니다. 노르웨이가 어떻게 부국이 됐고 천국과도 같은 복지 정책을 유지하고 그를 국민들이 누리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고 한국 사회와는 어떤 점에서 다르고 지금 두 나라의 처지가 다른 것은 어느 정도 타의적인 결과임을 강조한다. 한마디로 둘 다 똑같이 주변 국가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식민지 생활을 겪었지만 비교적 유럽 선진국들 사이에서 대접받으며 간접적으로나마 식민주의의 덕도 볼 수 있던 노르웨이와 달리 한국 사회는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6.25와 독재자들의 등장 같은 악재를 연이어 겪어 애당초 단순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노르웨이나 여타 유럽 나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는 있어도 그들 문화를 동경하다 못해 열등감을 느끼는 건 과하다고 저자는 계속 설파한다.


 다른 나라도 아닌 노르웨이라고 하니까 아무래도 꽤 관심 있게 읽혔다. 저자는 노르웨이에서 배울 점은 분명 많으나 - 시민들의 놀라울 정도로 능동적인 정치 의식, 사치를 죄악시하는 듯한 검소한 소비 습관, 그리고 체통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듯한 평등한 시민 의식 등 - 그 밝은 모습의 이면엔 분명 그늘이 존재하고 또 그만한 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벌인 노력 내지는 몇몇 부끄러운 행보를 언급하길 소홀히 하지 않는다. 결국 노르웨이도 백인 우월주의가 알게 모르게 있는 서방 국가라 무조건 찬양했다간 실망하기 십상이란 것이다. 애초에 시작점이 월등히 유리했기에 천국에 가까운 사회를 이룩하기가 비교적 용이했다고 이해하면 편하다.

 이 책이 집필된 건 지금으로부터 거의 20년 전인 2002년이다. 책에선 김대중 전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주로 언급하는데 - 나머지 노벨상과 달리 노벨 평화상은 노르웨이에서 수여한다. - 그 수상 소식에 우리나라 사람이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한 것을 두고 노르웨이인을 비롯한 유럽인들이 우리나라의 열등의식 표출로 본다는 건 좀 진지하게 생각해볼 일인 것 같다. 작년에 <기생충>도 그렇고 한강의 <채식주의자>도 그렇고 우리나라는 국위선양에 지나치게 기뻐하는 것 같다. 수상 소식이 자랑스럽긴 하지만 국제적으로 유명해졌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성공의 절대적인 지표는 아닐 텐데. <기생충>이나 <채식주의자>나 결국엔 이전보다 더 좋은 작품이 된 것이 아닌 그저 더 유명한 작품이 됐을 뿐이니까. 그런데 우린 너무나 기뻐한다. 말로는 우리 것이 최고라면서 외국, 정확히는 서구 문화에 대한 동경이나 편입에 대한 일종의 열망을 엿볼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지적은 꽤 뼈아프면서도 정확했다.


 한국을 너무나 좋아하고 또 이방인이기에 말할 수 있는 작가의 시선은 전반적으로 예리하고 유익했으며 우리나라 사람이 읽기에 퍽 애정 어린 구석이 있었다. 덕분에 그간 품어왔던 노르웨이에 대한 무조건적인 로망은 조금은 수그러들게 됐다. 생각해보면 이 책이 출간한지 9년 뒤에 노르웨이에선 엄청난 테러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 테러범 한 명으로 노르웨이를 나쁘게 봐선 안 될 일이지만, 분명 그 사건으로 하여금 우리는 노르웨이는 천국이 아니라 역시 사람 사는 곳이고 허점 역시 분명 존재하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일에 대해 작가가 뭐라 생각했는지 궁금하네. 저자의 최근 저서에 그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한 번 찾아봐야겠군.

 서두에서부터 마지막 파트까지 꽤 흥미롭게 읽어나가다가 막판에 글의 방향이 틀어져 좀 당혹스러웠다. 어딘지 자연스러웠지만 근본적으로 이 글의 끝을 진보, 좌익에 대한 설명, 그리고 군대에 대한 비판과 양심적 병영 거부자 오태양 씨와의 대화로 마무리한 건 너무 생뚱맞았다. 읽는 동안엔 나도 모르게 인류애가 끓어오르는 대목이 많았지만 뒤돌아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국 대안 없는 비판인 것 같아 지금도 황당하기 그지없다. 찾아보니까 박노자 씨는 특유의 과한 폭력 반대 때문에 비판을 많이 받는 모양인데 나도 그 비판의 논지를 알 것 같다. 이렇게 폭력으로 물들어가는 사회 분위기를 비판하는 사람은 필요하지만 실질적인 대안 없이 공감과 윤리만 강조하니 좀 덧없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 군대는 특히 몇 십 년, 혹은 백 년이 넘게 이어지는 상황이 낳은 시스템이기에 보다 치밀한 접근이 필요했는데...... 아니, 다 떠나서 이 글의 마무리로는 너무 느닷없는 주제라 초반에 느낀 좋은 인상이 많이 깨졌다.


 저자의 다른 책도 이런 내용이려나? 차라리 처음부터 이런 내용이라면 나도 준비하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흘려들을 건 흘려들을 텐데 이렇게 요상하게 글을 마무리 짓는 건 좀 아니다 싶었다. 아무래도 박노자 씨의 다른 저서도 읽어봐야겠다.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필력의 소유자지만 그때는 좀 긴장이란 걸 하면서 읽어야겠다. 긴장의 끈을 놓으면 작가한테 완전히 홀릴 수도 있으니.

문제는 비서구 지역의 비민주성을 그토록 비웃는 서구 사람에게는 민주주의가 신념이기보다는 단지 사회의 관습일 뿐이라는 것이다. 안 지켜도 되고 또 안 지킬 수 있는 지역에서 그들은 민주주의와 도덕을 너무 쉽게 용도 폐기한다. - 104p




그리고 결코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많은 유럽인이 이번 수상을 둘러싼 한국의 ‘국가적 잔치 분위기‘를 유럽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등의식 표출로 보고 있다. 오히려 이를 자제할 수 있어야만 남의 찬탄과 비방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기 길로 나아가는 옛 선비의 정신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 1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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